죽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승리를 확정할 수 있다. 그래서 순교는 가장 찬란한 삶의 절정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결과의 고정이요 번복할 수 없는 결정의 확정이다. 스데반이, 야고보와 바울이 그리고 베드로와 제자들이 죽음으로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확정했다. 그들의 순교는 세상의 그 어떤 시련과 핍박이라도 그들의 안에 있는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은 빼앗을 수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인간의 확고부동함에 대한 이러한 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 곧 영원한 임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한다.
믿음은 아무리 고난과 시련의 바람이 혹독하여도 하나님을 믿고 흔들림 없이 폭풍우를 뚫고 앞으로 나아간다. 믿음은 평안과 안락을 기대하지 않는다. 믿음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을 바란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한 번도 이 세상의 부와 영광을 얻고 시련이 없는 생애를 살라는 희망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분은 오히려 충실한 삶에 고난을 약속했고 핍박과 비난이 그들의 몫이라고 약속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는 말씀은 실로 사실이다. 우리에게 삶의 시련이 없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세상에서 축복받고 평안하고 안락한 것이, 실로 이상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픔이 없고 고난의 바람이 전혀 없어 보일 때 자랑하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 두려워하고 근심하라. 이것은 정말 위험하고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박해의 성격과 내용은 시대와 함께 변할 수 있지만 그 정신은 아벨의 순교를 가져왔던 그때부터 변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시기하고 질투함으로 범죄를 일으킨 장본인인 루시퍼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이 지구에서 선과 악은 타협할 수 없으며 평안하게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는 일은 없다.
박해를 통하여 사단은 사단의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또한 그분의 일을 한다. 시련과 박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개발하는 도구들이다. 생애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삶을 순결하게 정화시키는 것은 시련과 고난이라는 용광로다. 저들은 쓰라린 투쟁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법을 배우고 세상의 부귀영화와 쾌락을 버리게 된다. 이는 또한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모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각 시대를 통하여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였다. 사단은 그들을 고문하고 사형에 처하였으나 그들은 죽음으로 승리자가 되었다. 그들은 사단보다 더 강하신 분의 능력의 증거였다. 악인들이 육체는 고문하고 죽일지 모르나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인 생명은 건드릴 수 없다. 그들은 남녀들을 감옥에 감금할 수 있으나 정신은 결박할 수 없다.”(행적, 576)
죽음은 사람의 운명이 고정되는 시간이다. 눈을 감는 순간 그의 영원한 운명도 고정된다. 사단과 원수들은 피로써 자신의 믿음을 확정한 순교자들의 생명을 영원히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원수들은 가능하면 순교자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시대가 끝을 향하여 달려갈수록 다시 박해와 시련의 바람은 일어날 것이다. 이 시련의 바람과 폭풍우 가운데서 얻게 될 경험은 참으로 가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풍성한 삶의 결실이 될 것이다. 이것으로 추수할 곡식이 무르익는 것처럼, 영혼의 열매도 완전히 익고 하나님의 인도 쳐질 것이다. 그러므로 박해여 오려면 오라 시련의 바람이여 불려면 불어라! 나는 그 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즐거움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뒤따릅니다. 고난과 시련의 용광로에서 저희를 단련하시고 원수들이 영원히 빼앗을 수 없는 생명 싸개로 저희를 감추어 주소서. 안락함과 편안함을 사모하지 말게 하시고 기꺼이 고난의 풀무 가운데로 들어가는 용기를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