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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마힐의 시자
文殊師利言(문수사리언)하대 居士(거사)여 此室(차실)에
何以空無侍者(하이공무시자)니이까 維摩詰(유마힐)이
言諸佛國土(언제불국토)도 亦復皆空(역부개공)이니다
又問以何爲空(우문이하위공)니이까
答曰以空(답왈이공)으로 空(공)이니다
又問空何用空(우문공하용공)이니까
答曰以無分別空故(답왈이무분별공고)로 空(공)이니다
又問空可分別耶(우문공가분별야)닛까
答曰分別(답왈분별)도 亦空(역공)이니다
又問空當於何求(우문공당어하구)닛까
答曰當於六十二見中(답왈당어육십이견중)에 求(구)니다
又問六十二見(우문육십이견)은 當於何求(당어하구)닛까
答曰當於諸佛解脫中求(답왈당어제불해탈중구)니다
又問諸佛解脫(우문제불해탈)은 當於何求(당어하구)니이까
答曰當於一切衆生心行中求(답왈당어일체중생심행중구)니다
又仁(우인)의 所問何無侍者(소문하무시자)오하니
一切衆魔(일체중마)와 及諸外道(급제외도)가
皆吾侍也(개오시야)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衆魔者(중마자)는 樂生死(낙생사)어늘 菩薩(보살)은
於生死(어생사)에 而不捨(이불사)하며
外道者(외도자)는 樂諸見(낙제견)이어든
菩薩(보살)은 於諸見(어제견)에 而不動(이부동)이니다
文殊師利言(문수사리언)하대 居士(거사)여, 문수사리가 말하기를 거사시여
此室(차실)에 何以空無侍者(하이공무시자)니이까?
이 방에는 어찌해서 이렇게 텅 비어가지고 시자도 없습니까? 물었습니다
여기서 “어찌하여 텅 비어서” 하는 이 空은
아주 의미심장한 그런 속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維摩詰이 言(유마힐언), 유마힐이 말하되
諸佛國土(제불국토)도 亦復皆空(역부개공)이니다.
그렇 습니다. 제불 국토도 또한 다시 다 비었다.
五蘊皆空 이 우리의 숙제인데, 그것이 참 쉽게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텅 비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꿰뚫어 본다면
度一切苦厄 이라. 인간사 모든 문제ㆍ모든 고통은 다 해결이다.
그렇 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지요.
보살행도 사실은 결국은 모든 존재의 실상은
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 그런 뜻 입니다.
여기서 諸佛國土 도ㆍ모든 부처님의 세계도 또한 공하다.
나의 정신세계만 공한 것이 아니고, 방을 빗대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국토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만, 방이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요,
국토라고 하는 것은 그 부처님의 삶의 모습 입니다.
우리들 보통 사람들의 그 모습도 그 사람 방에 가보면
그 사람을 대강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거의 알 수 있습니다.
오래, 최소한도 1년 이상 그 방에 그 사람이 살았다면,
그 방만 보고도 사실은 충분히 그 사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마거사도 있던 시자도 일부러 보내 버리고,
방 안에 이런 저런 가재도구도 다 비워 버렸다고 하는 것을
저 앞에서 보았는데요. 바로 그것은 당신의 정신세계를 보여주 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나뿐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깨달은 사람의 근본정신은
똑 같이 텅 비어 있는 것 입니다.
得道空門裡(득도공문리)이어늘, 우리가 그러지요. 모든 깨달은 사람들이
모두 空門 속에서 텅 빈 존재의 실상. 존재의 실상은 텅 비었다고 하는 그 이치.
그 사실에서 도를 얻었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초발심자경문에서 배웠습니다.
그렇 습니다. 불교에서 이 공의, 존재의 공성에 대한 이치는
이것은 불교를 논 할 때에 정말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존재의 공성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인데, 여기서 꼭 이야기해야 할 점이 그렇 습니다.
이것은 당신만 공하다고 하는 이야기에서 諸佛國土 도 공하다.
그러니까 모든 부처님 의 정신세계도 역시 존재의 공성을 다 터득하고 있다.
그랬으면서 그 다음에 공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공에 대해서 우리가 한 가지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교리 상으로 말씀 드리면,
대개 분석공 이라고 하는 것이 있고,
분석 해보면 공 하다. 다시 말해서 마이크를 하나ㆍ하나 분석 해보면
마이크라는 것이 없 다하 는 것 입니다.
그래서 대개 분석 공을 가장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分析空(분석공)은
聲聞(성문)이 이해 할 수 있는 단계 입니다.
緣覺(연각)이
이해 할 수 있는 공은 緣起空(연기공)입니다.
모든 것이 연기로 因緣所執(인연소집)이라.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서 결합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空 하다. 라고 이해 하는 것은 이것은 緣覺의 수준입니다.
그래 分析空하고 緣起空하고 다른 것이지요. 그 다음
보살 이 이해하 는 空은 뭐냐?
色卽是空 空卽是色 입니다. 卽空 입니다.
그대로 보고 바로 空이라고 하는 것이지 그것을 분석한다든지,
예를 들어서 ‘아, 우리는 空 하다.’ 우리가 보통 깊은 교리를
모르면 두리뭉실로 나름대로 설명하는데 보면
분석 공을 이야기 했다가, 연기 공 을 이야기 했다가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늘 즉 공을 이야기 합니다. 사실은 외우기는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라고 즉 공을 이야기 하면서, 외우기는
즉 공을 외우 면서 설명하기는 분석공을 이야기하거나
연기공 을 이야기 합니다. 차원이 전혀 달라요.
분석공은 성문의 차원이고,
연기공은 연각 의 차원입니다.
반야심경만 하더라도 보살 의 차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色卽是空 空卽是色 입니다.
사물 그대로 空 하다 고 보는 것이지
분석을 해서, 이야기 해서 공 을 인식 시킨다든지,
아니면 그것을 이렇게ㆍ이렇게 인연의 결합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그 인연이 흩어지면 결국은 공이 아니냐?
예를 들어서 우리 육신은 사대로 이루어졌다. 사대가 흩어지면 공이 아니냐?
이런 식으로 그 어떤 인연과 결합시켜서 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야심경 차원만 하더라도 즉 공 입니다. 즉 공의 차원이라고요.
교리를 공부하시는 분들은 이점에 대해서 분병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여기서는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우리가 공을 이야기한 차제이고,
또 불교 이야기에서는 공을 빠뜨리고 말 할 수는 없는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分析空ㆍ
緣起空 ㆍ
卽空.
우리가 色卽是空 하는 것은 卽空 입니다.
그대로 空 하다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空 하다는 것이지,
그것을 인연의 이치 때문에, 아니면 분석을 해 보면...
그런 설명은 아니라 는 것 입니다. 초보자들에게,
불교를 잘 모른 사람에게는 분석을 해서 보니까 공하더라.
아니면 인연으로 모인 바이기 때문에 인연이 흩어지면
결국 공이 아니냐? 이렇게 이해시킬 수도 있습니다.
又問以何爲空(우문이하위공)고? 어째서 공이냐?
答曰以空(답왈이공)으로써 空(공)이니다.
공을 쓰기 때문에 공이야. 그대로 공이라 는 것 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空 입니다. 이것은 色卽是空도 아닙니다.
以空으로 空이니다. 그랬어요.
이럴 때 써 以자는 사용한다. 공을 활용 한다. 이런 뜻입니다.
以空으로 空이다. 공을 활용하니까 공일뿐 이지요.
제로(0)는 수 억 만개가 나열이 되어도,
또 곱하기 수 억 만개의 제로를 해도 역시 제로일 뿐 입니다.
이것이 그런 뜻이잖아요. 以空으로 공이다.
영은 아무리 곱하고 더하고 빼봐야 계속 영은 능히 제로일 뿐이라고요.
공의 이치는 그런 것 입니다.
이것은 아주 참, 유마경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요. 以空으로 空이다.
又問空何用空(우문공하용공)이니까?
또 묻기를, 공인데 어째서 공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여기는 아예 用 자를 썼지요. 答曰以無分別空故(답왈이무분별공고)로 空(공)이니다.
무분별 공이다. 뭐 이런저런 분별하지 말라 는 말 입니다.
무슨 공을 써서 왜? 무엇을 사용해서 공이냐? 어째서 공을 사용해서 공이냐?
以空으로 空 이냐? 이 말 입니다. 그런 분별하지 말라 이 겁니다.
그런 無分別 을 벌써 떠나 있기 때문에,
분별과 무분별을 다 여기는 떠나 있기 때문에 그래서 공이다.
又問空可分別耶(우문공가분별야)닛까?
공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答曰分別(답왈분별)도 亦空(역공)이니다.
아무리 분별해 봐야 그것 역시 공이다. 제로에다가 아무리 곱해봐야ㆍ
더해봐야ㆍ나눠봐야 역시 남는 것은 제로일 뿐 입니다.
又問空當於何求(우문공당어하구)닛까?공을 어디서 구할 수가 있습니까?
答曰當於六十二見中(답왈당어육십이견중)에 求(구)다. 그랬어요.
아~ 이것은 참 기상천외한 대답 입니다. 공인데, 그 공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
그랬어요. 사실 이 질문은 좀 愚問(우문)이지요? 愚問인데 愚問에 명답이 나왔 습니다.
명답은 六十二見 과 空은 정반대입니다. 공을 어디서 찾아야 되느냐?
六十二見. 온갖 삿되고ㆍ잡된ㆍ개개인의 아집에 의한ㆍ좁은 편견에 의한 그런 소견들.
이렇게 62견을 말할 수가 있는데, 그런 좁은 편견들은 전부 空이 아닙니다.
空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그런 소견에서 空을 구해라.
거기에 가야 진짜 공을 만날 수 있다. 이런 뜻이 돼버렸어요.
又問六十二見(우문육십이견)은, 또 묻기를
當於何求(당어하구)닛까? 62견을 마땅히 어디서 찾아야합니까?
외도들이 육십이견 아닙니까? 불교와 정반대로 가는 잘못된 소견이 六十二見 입니다.
그것을 어디서 구해야 됩니까? 또 기상천외한 답이 나옵 니다.
우리가 보기엔 기상천외하지요.
答曰當於諸佛解脫中求(답왈당어제불해탈중구)니다.
모든 부처님의 해탈 속에서 62견을 구해야 된다.
정말 갈수록 보통 중생들의 사고로써는 오리무중 입니다.
空을 어디서 구하느냐? 라고 하는 그 참 이상한 질문에서,
空에 대해서 우리의 상식으로는
“어디서 구하느냐?” 라고 하는 그런 질문은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질문을 문수보살이 했어요.
그런데 유마거사는 엉뚱하게도 세상에 수많은 그런 잘못된 소견들.
空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거기에 서 구해야 된다.
그럼 그것은 또 어디서 구하느냐?
모든 부처님의 해탈 속에서 구해야 된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62견은 말할 것도 없고,
공도 초월한 자리인데, 그 62견을 부처님의 해탈이라고
하는 경지에서 구한다. 고 이렇게 표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친김에 문수보살이 아주 참 대단한 분이지요?
又問諸佛解脫(우문제불해탈)은 當於何求(당어하구)니이까?
제불해탈은 마땅히 어디서 구합니까?
答曰當於一切衆生心行中求(답왈당어일체중생심행중구)니다.
답하기를 마땅히 一切衆生心行中에서 求한다.
모든 사람의 심리 속에서,
일체 중생들의 각자 나름대로 이런 생각ㆍ
저런 생각하는 그 마음 작용 속에서 구한다.
그러면 결국은 이것이아주 중요한 말인데
諸佛解脫 은 어디서 구하느냐?
이것만 딱 잘라놓고 생각해도 아주 좋습니다.
우리가 해탈이 어떤 의미에서는 수행의 목표이기도 하니까요.
그 해탈을 어디서 구해야 되느냐?
바로 우리들 마음속에서 구한다.
보통 사람들,
사량 분별과 번뇌 망상 속에서 구한다.
衆生心行 이라는 것이 뭡니까?
그저 번뇌 망상이 부글부글 끓는 번뇌 망상 속에서 구한다.
해탈이 광명이라면, 衆生心行 이라고 하는 것은 어두움 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빛을 구한다는 겁니다. 빛이 곧 어두움이고,
어두움이 곧 빛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제가 송광사 문수 전에서 관음전 부전을 봤었어요.
그 때 한 70년대는 송광사에 전기도 하나도 들어오지 않을 때인데,
문수 전에서 정진하는 사람들이 법당을 맡아서 부전도 보고...
그 때만 해도 수좌들이 법당 맡아서 부전 보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손끝도 까딱 아니 하지요.그리고 3년 결사하는 사람이 수선사에서 살고요.
저는 자유롭게 정진한다고 3년 결사에 안 들어가고 문수 전에 있었습니다.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서 더듬더듬 세수를 하고,
장삼을 입고 문수 전에서 관음전으로 가는데 거기서 거리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늘 하던 일이라서 몸 방향만 딱 몇 각도로 틀면, 그것도 의식적으로 하면 안 되고,
무의식적으로 그냥 습관에 의해서 몸 방향 각도를 딱 틀면, 문을 나가서 어느 방향으로
몇 걸음 걸어가면 관음전이 있다고 하는 것을 그냥 눈 감고도 느낄 정도로
그렇 게 익숙한 일이었습니다.
그렇 게 갔어요. 차라리 눈감는 것이 오히려 더 시원할 정도로
그렇 게 캄캄한 새벽이었습니다. 구름도 많이 끼었던 것 같아요.
법당에 가면 더 캄캄히지요? 법당모서리 문을 열고 신발을 벗고 딱 들어가면,
모서리 문에서 탁자 있는데 까지 가려면 또 몇 각도로 틀면,
평소에는 보고 들어왔지만, 워낙 캄캄하니까 그저 습관대로 몸을 몇 각도로,
몇 각도 잴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틀어서 그냥 몇 걸음쯤 걸어서 손을 딱 뻗어서
한 두 번만 왔다 갔다 하면 성냥 통이 손에 딱 잡힙니다.
그런 정도로 아주 익숙한 그런 일이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늘 하는 일이니까요. 성냥 통을 딱 잡고는 성냥을 그었습니다.
그렇 게 캄캄하던 법당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정말 눈을 감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정도로 그렇 게 캄캄한 밤이었어요. 그래 성냥 하나 그었는데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제가 들어올 때 분명히 문을 닫고 들어왔어요.
그 순식간에, 성냥을 하나 긋는 그 시간에 그 많고 많은 어둠이ㆍ
그 무거운 어둠이 빠져나갈 문을 열어놓은 놓은 적도 없고,
문틈이 생긴 적도 없습니다. 어느 틈도 하나 없었어요.
이것이 어둠이 존재하는, 실질적으로 어둠이 있는 것이라면 순서대로,
줄서 나가도 아마 한참 걸릴 겁니다.
나갈 문도 없고, 틈도 없어요. 그런데 순식간에 어둠은 사라지더라고요.
어둠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구나! 번뇌 망상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저는 거기서 그것을 알고 확연히 깨닫고는
‘아~ 참, 우리가 중생이 곧 부처다.
라고 하는 말도 중생 그대로가 부처임을 아는 그 순간이 중요한 것이지
달리 다른 부처가 있는 것은 아니구나! 어두움 외에
달리 다른 밝음의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구나.
번뇌 망상 그 외에 달리 다른 어떤 지혜의 광명이 있는 것은
아니’ 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번뇌 망상을 아주 아끼고 소중 하게 생각 하고,
어두움도 아주 소중 하게 생각 합니다. 중생이라고 하는 사실이
이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다고 하는 것, 이보다 달리 어떤
다른 곳에서 값진 부처를 찾는 길은 없다고 하는 사실을 확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회가 되면 그런 이야기를
가끔 합니다. 여기도 그렇 습니다. 衆生心行 이라는 것이 뭡니까?
부글부글 끓는 탐 진 치 삼독과 팔만사천 번뇌가 衆生心行 이라고요.
거기서 해탈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해탈과 중생의 번뇌 망상은
둘이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 이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고,
새삼스러운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결코 다른데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바로 내 이 못난 모습에서 눈을 뜨는
사실이지 달리 다른데서 어떤 부처와 해탈의 경지를 구해 온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 사실을 우리가 확실하게 이해를 하고
ㆍ정진을 하고ㆍ공부를 해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이해가 얼마나 깊어지느냐? 그리고 이해가 깊어지면 느끼게 되고요.
느낌이 깊어지면 깨닫게 되 는 것 입니다. 처음에는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이론적으로라도 이해를 해야 돼요. 그리고 그 이해가 깊어지면 느껴요.
그것을 느낀다고요. ‘아~ 참 그렇다ㆍ그렇다.’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한 순간에 확철대오 하는 도리도 물론 있습니다만, 一切衆生心行中 에서 해탈을 구한다.
又仁(우인)의 所問何無侍者(소문하무시자)오하니,
또 그대의 묻는 바에 何無侍者오하니, 왜 시자가 없느냐?
라고 그런 질문을 문수보살이 했는데, 내 시자는 이런 이들이다.
一切衆魔(일체중마)와 及諸外道(급제외도)가 皆吾侍也(개오시야)니다.
一切衆魔 와 일체 온갖 마군이와 그리고 여러 가지 외도들이 모두 내 시자다.
나는 시자를 통해서 옷도 입고ㆍ목욕도 하고ㆍ밥도 먹고ㆍ청소도 다 해주고ㆍ
내가 이렇게 공부할 수 있게 시자가 만들어 주고ㆍ모든 것을, 나를 나 되게끔,
시자가 내가 내 되게끔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것이 시자의 뜻이 잖아요.
시자라고 하는 의미가 그것 입니다. 저도 여러분의 시자가 이 자리에
올 수 있도록 모두 도와줘 가지고 여기에 왔습니다.
유마거사는 그런 분들이
가장 나를 잘 돕고ㆍ
나를 나 되게 하고ㆍ
나를 깨닫게 하고ㆍ
나를 해탈의 길로 이끈 사람들은
일체 마군과 그리고 모든 외도들이었다.
이런 말 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외도와 선지식을, 또 마군과 선지식을 둘로 볼 것이냐?
외도와 선지식을, 마군과 선지식을 둘로 못 보는 겁니다.
마군이 야말로 진짜 선지식 입니다.
외도 야말로 나에게 진짜 참다운 선지식 입니다.
<법화경> 제바달다품에서도 저 제바달다, 만인의 원수.
우리는 정말 종이에 부처 佛자 하나만 써도
그 종이 함부로 버리지 못 합니다.
잘 태워야지 휴지통에 함부로 못 버려요.
또 어쩌다가 땅에다가 예를 들어서 부처 佛자를 썼어도
그것을 발로 못 지웁니다. 부처 佛자인데 어떻게 발로 지웁니까?
손으로 곱게 정성스럽게 지웁니다.
이것이 불자의 신심이고, 불자의 마음 입니다.
그런 부처님을 감히 여러 번 살해하 기 위해서
시도를 실질적으로 했던 사람이 제바달다 아닙니까?
죽이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실은 영원한 원수입니다.그래 제일 아주 큰 욕이 불교에서
“제바달다 같은 놈” “조달이 같은 놈” 이라는 이런 욕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막 볼 때나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지요.
그와 같은 우리 불교계의 철천지 원수인데,
우리 불자의 원한관계와 부처님과 의,
특히 부처님과 의 원한관계를 제바달다품에서
어떻게 해소를 했습니까?
제바달다품에서 “저 제바달다가 나의 스승이다.
나의 선지식이다. 그리고 제바달다는 앞으로 성불할 것이다.
천왕여래라고 하는 이름으로 성불할 것이다.” 라고 그렇 게까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부처님이 부처가 된 그 공덕도
제바달다일 수도 있습니다. 세속에서부터도 항상 서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모든 분야에 다 경쟁하면서 어릴 때부터도 성장해왔 잖아요. 어릴 때부터도
늘 서로 경쟁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어쩌면 제바달다 때문에 부처님이 그렇게
능력 있는 분으로 자랐을 겁니다. 얼마든지 실질적으로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또 사실은 우리는 번뇌가 있 기 때문에 지혜 광명을 얻을 수가 있는 겁니다.
탐 진 치 삼독이 그것이 보물 입니다. 탐 진 치 삼독 때문에,
그 탐 진 치 삼독을 벗어난 그러한 세계를 우리는 또 경험 할 수도 있습니다.
그 탐 진 치 삼독이 보물 입니다.
그러니까 貪慾이 卽是道(탐욕즉시도). 嗔恚도 亦復然(진에역부연)이라.
이와 같은 三法가운데 具一切佛法(구일체불법)이라.
일체불법이 다 갖춰져 있다. 그것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수행하게하고ㆍ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ㆍ
우리로 하여금 人天의 사표가 되게 하는 겁니다.
탐 진 치 삼독이 없으면 그렇 게 못 합니다.
아시는 대로 늪이 더 아주 시궁창이고,
더 아주 혼탁한 진흙일수록 연꽃은 더 아름답게 피지 않 습니까?
여기서 참 유마거사답게
一切衆魔와 그리고 모든 外道와 나의시자다.
참 명언 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수용할 줄 아는 그런 마음 자세가 돼야 되지요.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一切衆魔. 거기서부터 줄을 그어야지요?
그 다음에 衆魔者(중마자)는, 더 중요한 말, 옛날 조사스님들이 많이 인용한 글.
衆魔者는 樂生死(낙생사)어늘 菩薩(보살)은 於生死(어생사)에
而不捨(이불사)하며 外道者(외도자)는 樂諸見(낙제견)이어든 菩薩(보살)은
於諸見(어제견)에 而不動(이부동)이니라.
그렇 습니다. 아~! 참 건사한 명언이 너무 많아요 이 유마경에는요.
온갖 마군이라고 하는 것은 생사를 좋아해요.죽고 살고 온갖 시시비비를
좋아해요. 그런데 보살은 그 시시비비와 온갖 갈등과 생사 속에서
그 생사를 버리지 아니해요.즐기는 것 하고, 버리지 않는 것 하고 얼른
생각하면 비슷해 보이지요.아닙니다. 전혀 다릅니다.
즐기는 것은 거기에 그냥 묻혀서 취생몽사하는 삶이고,
보살은 그 생사를 이용해서 중생을 제도 하 는 것 입니다.
일부러 태어나서 우리들과 함께 살면서 우리들과 같이 열반에 들고,
그러한 삶 속에서 온갖 보살행을 하면서 중생들을 건지는 겁니다.
생사를 안 버려요.
생사를 피하는 사람은 외도 입니다.
생사를 피하는 사람은 소승 입니다.
생사를 떠나서 저 멀리 생사 없는
세계에 살려고 하는 사람은 외도 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승 중에 상 소승 입니다.
정말 생사 속에서 온갖 시비 갈등 속에서
함께 더불어 치다꺼리를 하면서 거기에서
중생들을 건지고 돕는 그것이 보살의 일 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菩薩은 於生死에서 而不捨라.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
外道者는 樂諸見이어든, 외도라고 하는 이들은 여러 가지 소견들,
온갖 잘못된 견해들 입니다. 온갖 소견들을 즐겨요. 그것을 좋아해요. 그런데
菩薩은 於諸見에 而不動이니라.
어떤 소견이 나에게 뭐라고 주장을 펴더라도 나는 거기에 대해서 꼼짝하지 않는다.
소견이라는 것은 뭡니까?앞에서 六十二見과 空 이라고 그랬 습니다.
空을 어디에서 구하느냐? 62견 가운데서 구한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근본이 공하다. 62견이 아니라,
6만 2천견이라 하더라도 그 소견은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공에서 괜히 한 생각 일으켜가지고 이 주장하고 저 주장하고,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한 가지 안건을 가지고 논의를 하더라도
사람 따라서 견해가 다르니까 별별 주장이 나오지 않습니까?
인도라고 하는 사회는 아주 더운 곳 입니다. 그래서 낮에는 꼼짝도 못해요.
그저 과일이나 따 먹고는 그늘 밑에서 가만히 명상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도인이 많아요. 인도에는 지금도 도인이 그렇 게 많아요.
왜냐? 더운 지방이 되니까 의식주가 다 해결이 돼 있습니다.
옷이 필요 없고 머물 곳이 필요 없어요. 그저 그늘 밑에서 쉬고 자면 돼요.
보통 서민들 집이라는 것은 그저 지붕만 있지 벽도 없어요.
그런데서 해만 가리고 비만 가리면 벽이 없어도 거기서 생활 할 수 있어요.
일 년 내내 거기서 생활 할 수 있어요. 그런 곳 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 같으면 그저 그늘 밑에서 과일이나
따 먹고는 나무 밑에서 명상만 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명상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종교가 얼마나 숫자가 많은지 말도 못해요.
그들이 만들어서 그들이 믿는 신이 만 명도 넘어요. 만 명도...
인도에는 그들이 만들어가지고 그들이 믿는 신이 만 명이 훨씬 넘어요.
그러니까 62견, 이것은 그 많은 견해들 중에서 추리고 추려서 정리한 것이
62견이지,62견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많은 소견들이 나오게 됩니다.
배운 바도 없이, 혼자 앉아서 명상 하니까 사람의 심리라고 하는 것은
한 가지 생각에 골똘하면 그것이 차츰차츰 자기 자리를 잡아요.
그것을 심리학에서는 水路(수로)현상이라 해서 편편한 땅에 비가 오면
물이 모이고 모여서 어디로 흘러가게 돼 있어요. 한 방울씩의 물이
뭉쳐가지고 한 쪽으로 흘러가면 그 다음부터는 계속 그 쪽으로 흐르는 겁니다.
그래 골이 파집니다.
꼭 그 쪽으로 흐르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 쪽으로 흐르다 보니까
그것이 골이 파지고ㆍ골이 파지고 그래서 자꾸 그것이 깊어지는 겁니다.
우리 심리도 똑 같다고 그랬 습니다. 물길 현상이라고 그렇 게 표현 하는데,
그런 식으로 그만 그것이 굳어집니다. 자기 생각이 굳어져서 그래서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얼토당토 않는 생각인데도 그렇 게 주장하게 되어있는
것이 사람들의 사고ㆍ습관이지요. 그래서 온갖 주장들이 있을 수가 있다 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집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보살은 어떻 습니까?
모든 것을, 일체가 공으로 본다.
텅 빈 데서부터 건립된 하나의 가설에 불과 하 기 때문에
거기에 動할 필요가 없지요. 어떤 소견이ㆍ어떤 주의 주장이
오더라도 거기에 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菩薩은 諸見에 而不動이라. 그랬 습니다.
動 하지 않는다. 그 근본을 아는데요 뭐... 동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시자 문제를 하나 가지고 이렇게 아주 상승 법문ㆍ최 상승법문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