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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성령을 거절하는 기막힌 방법들
Driving Awen the Spirit
앞장에서 언급한 각각의 조건에 대한 반대의 조건들은 우리의 삶에 성령님이 내주하시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절대적인 '신뢰'가 성령 충만의 조건이기 때문에, 그 반대인 '불신'은 분명하게 방해 요인이 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불평을 토로한다.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시78:4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사 63:10 하였다고 선지자는 덧붙인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인도하셨음이 분명한데도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이백만 명이 광야에서 엎드려졌다.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1 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범죄나 신성 모독,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는 것은 용서를 받는데, 왜 성령님을 대적하는 죄는 그렇지 못한가? 성경에서 '신성 모독'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요 10:33; 막 2:7 우리가 성령님의 부드러운 속삭임을 더 이상 듣지 않으려 할 때 우리는 신성 모독을 행하게 된다. 사실상 우리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첫째 계명을 범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편에서 끊임없이 역사하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것과 지금 이루고 계시는 것은 실제로 성령님에 의해 이행된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님의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 딤후 3:16 하심을 부인할 때, 성령님의 강권하는 힘은 약해져서 사라지고 만다.
우리가 아직 젊은 시절 캘리포니아에서 테네시로 이사하였을 때 잠시 동안 대학 가까운 곳에 임시로 숙소를 얻은 적이 있다. 새벽 5시 15분이면 지척에서 밤의 정적을 뚫고 울려 퍼지는 열차의 기적 소리는 매우 요란했다. 나는 잠귀가 예민하고 야심한 밤의 소란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매번 그 일이 있을 때마다 잠에서 깼다. 이러다가는 새집에서 숙면을 취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독자도 눈치 챘겠지만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열차의 기적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기차는 늘 평소처럼 지나다녔지만, 내 귀는 더 이상 그 소리를 듣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 상황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와 유사하다. 이 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더 이상 듣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들, 곧 반드시 바꾸거나 포기해야 할 것들이 생각나는가? 미루지 말라.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꼭 그렇게 하라. 그렇게 해야지 생각만 하다가는 너무 늦을 수 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의욕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예언의 신에서 뿐 아니라 성경도 우리의 삶에서 성령님이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여러 사안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평소에 고려하지 않았던 몇 가지를 지적해 보려고 한다. 다음의 사항들을 신중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듯 읽어 주기를 바란다.
부차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지라
..."잃어버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불일치를 제거하게 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라.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된 축복을 구하라. 그러면 그 약속들이 이뤄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약속을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 예상되는 결과는 영적 기근, 영적 암흑, 영적 일탈과 죽음과 같은 것뿐이다. 대수롭지 않은 문제들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교회의 성장과 부요함을 위해 필수적인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다른 모든 축복을 교회로 가져오게 될 그 거룩한 능력이 그 무한하신 충만으로 제공됨에도 불구하고 결핍되어 있다." 8 증언, 21
“대수롭지 않은 문제들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우리는 효과적인 것을 따지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차적인 것들에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인터넷이나 카톡을 확인하고 문자를 보내는 일에 있어서 기술은 우리를 길들이는 가장 강력한 귀신이 되었다. 불과 소수의 사람들만 독서를 한다. 무엇인가 읽는다는 사람들도 대부분 무엇인가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대다수는 텔레비전이나 노트북 아니면 휴대용 기기로 무언가 들여다보고 있다.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반드시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은 오늘의 세대를 향한 가장 최신의,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결코 새로운 영적 성장의 단계로 올라가지 못한다.
훈계는 기술과 오락에는 통하지 않는다. 오직 삶의 가치와 우선순위들에 적용될 뿐이다. 친구들과 함께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우리의 생각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자유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만약 어떻게 시간을 사용하는지 객관적인 분석을 해 본다면 많은 그리스도인은 대수롭지 않은 일에 시간을 낭비하며 살거나 혹은 걱정으로 가득한 삶을 산다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세대를 통틀어서 오늘 낭비하지 않았어야 하는 잠재력을 너무도 많이 오용하고 있다. 사탄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전 인류를 놀림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영적 시력을 눈멀게 하여 뛰어넘을 수 있는 장애물이 얼마나 높은지는 커녕, 아예 존재하는지조차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 내 자신의 실수를 먼저 고백한다. 하지 않았어도 될 일, 아니 아예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일에 내 인생의 수년을 허비한 적이 있다. 만약 독자가 젊거나 어리다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그러나 당신이 아직 젊다면, 그런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용서하시지만, 지나가 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다.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시간을 활용해야 할 매우 엄숙한 의무 아래 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가운데 우리의 시간보다 더 엄격한 평가를 요구하시는 것은 없다." 실물, 342
우리가 사용한 시간을 평가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위의 인용문은 하찮게 시간을 보내는 우리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이다.
교만하라, 자기를 의지하라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 32:3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1
다윗 왕은 밧세바와 동침한 것이 매우 나쁜 죄라는 어떤 느낌 때문에 괴로워했다. 당대에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왕이었던 그는 이미 많은 부인과 첩을 두었다. 그런데 후궁의 숫자에 한 사람이 더 늘어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하지만 다윗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고 있었다. 간음은 문화적 관습이라 변명할 수 없다는 것을,더군다나 살인은 용인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삼하 11장 그러나 간음과 살인은 더 큰 죄, 곧 교만과 자기 의존의 결과일 뿐이다. 교만을 포기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노력을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 하늘로부터는 도움이 거의 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다. 그 결과, 오류와 흑암 속에서 죽어 가고 있는 다른 영혼들에게 전해 줄 빛이 그들에게는 거의 없다. 교회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축복을 조금 받고도 만족해 왔다. 그들은 무한한 값을 치르고 그들을 위해 사신 고귀한 특권들을 얻으려는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사역에 부적격자로 드러났다. 그들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들, 곧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영혼들이 죄를 깨닫고 회심하게 될 그 진리들을 제시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의 요청과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진리의 거룩한 씨앗을 뿌리는 이들은 기쁨의 추수단을 거두게 될 것이다." 목사, 175...
분명히 교만과 고백하지 않은 죄 그리고 효과적인 영혼 구원 사역에는 역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우리가 우리 죄를 붙잡고 있을수록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능력은 더욱 적어진다. 다윗 자신이 그 교훈을 배웠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 때문에 성령님을 그에게서 거두지 말도록 간구한 후에 이렇게 기록했다."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 51:12~13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삶에 여전히 고백하지 않은 죄가 많기 때문에 가정에서만 보더라도 사명의 목표를 향하여 더딘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윗을 기억하라. 거의 일 년 동안, 그가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은 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기 때문에 그는 쇠약해졌다. 모든 것, 곧 그가 품고 있었던 죄까지도 하나님께 맡긴 후에야그는 마침내 놓임을 받고 자유함을 얻었으며 효과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보복과 비판의 정신을 드높이라
"내주하시는 구주는 말씀으로 드러내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의 생각과 계획에 동의하지 않을 때, 성질을 부리는 사람의 심령 가운데는 성령이 거하지 않으신다. 그러한 사람의 입술에서 해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것이며, 그러한 태도가 발현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적인 것이다." 리뷰, 1901년 4월 9일
"설명할 수 없는 시련이 닥칠 때에도 우리는 평안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부당한 취급을 받을지라도 걱정이 고개를 들지 않도록 하라. 보복의 정신이 제멋대로 활개 치게 함으로 자신을 해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고, 성령을 근심시키게 된다." 실물, 171~172
첫 번째 인용문은 교회의 사업과 지도력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나 태도에 대해 비판하는 덫에 쉽게 걸린다. 엘렌 화잇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억제하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악한 천사들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될 것이며 그들이 와서 지배하도록 초청하게 된다." 5증언, 310 우리 중에 악한 천사의 영향과 지배 아래 자신을 두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가 불평하고 비판할 때 정확히 누구의 지배 아래 들어갔는지 알게 된다.
우리를 실패로 이끄는 데 있어서 마귀는 영리하고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마귀는 무엇이 효과적인지 알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마귀가 당신을 어떻게 요리할지 알고 있다는 점이다. 마귀는 우선, 우리의 눈을 예수님에게서 떨어지게 함으로 우리를 죄로 이끈다. 그런 후에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한다. 다음으로 죄에 파묻히게 한다. 우리가 죄를 짓고 그것을 깨달은 후에 죄책감이 몰려들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죄를 바라보는 한 죄의 권세는 우리를 사로잡는다. 자신의 죄가 되었든지 다른 사람의 죄가 되었든지 죄를 바라보지 말라. 죄는 우리의 시선을 아래로, 문제로 향하게 하며 유일한 해결책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나의 좋은 친구 잭 블랑코는 우리의 죄는 가능한 짧게 훑어보고, 예수님은 오래, 오래, 오래 이런 정도로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교인들과의 대화에서 혹은 교회 직원회에서 교회의 업무를 계획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당신의 발상은 정말로 머저리 같다고, 엉뚱하다고, 해가 될 것이라고, 심지어 좌절감을 느낄 정도로 '순진하다고 말했다고 치자. 당신은 선택할 수 있다. 그 행위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반응할 수 있다. 당연히 부정적인 행동에서 그와 동일하게 부정적인 반응이나 생각이나 말이 튀어나올 것이다. 아니면 당신은 거기로부터 눈길을 돌릴 수 있다. 당신이 옳았고 당신의 제안이 다른 사람들 것보다 더 훌륭하더라도 만약 다른 사람의 잘못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면 당신도 그 동일한 죄악의 수준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성령님을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에 조용히 성령님을 간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얽히고설킨 문제가 아닌 저 위를 응시하라. 그리고 당신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 일을 바라보라. 그렇게 하면, 비평을 쏟아붓고 싶었던 그 일이 변하여 덤으로 유익까지 가져오게 될 것이고 죄인들마저도 하나님이 개입하셨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성령님이 살아 계신 곳이 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짜릿한 오락에 빠지라
"많은 사람이 인간이 고안해 낸 것들을 따르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저버리고 신앙생활은 손실을 입는다. 오락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성령의 역사에 대항하고 있으며 주님은 슬퍼하고 계신다" 부모, 281
오늘날 성령님을 방해하는 것들이 위의 글이 처음 기록되었을 당시보다 두려울 정도로 활약하고 있다. 영적 생활을 단념하게 만드는 "인간이 고안해 낸 것과 그 어떤 것보다 더 성령의 역사에 대항하는 "오락"에 관해 생각해 보라! 화잇 여사는 이것을 1913년에 썼다. 그때는 오락과 인간이 고안한 것들이라는 것이 고작 극장 구경을 하는 것이나 카드놀이 또는 체스 게임을 하는 정도였다. 화잇 여사 당시의 가볍고 무해한 오락물들과 오늘날의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 성인 등급의 비디오, 아무 의미 없고 성으로 가득한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그리고 인터넷의 잘못된 사용 등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세속적인 사회조차도 무의미한 오락에 빠진 타락한 사회의 거센 소용돌이를 인식하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해 고전이 되어 버린 닐 포스트만 Neil Postman 의 책 <죽도록 즐기기>는 25년 전, PC가 드물게 사용되던 시절, DVD는 아예 없던 시절, 인터넷은 여전히 우리와 상관없던 그 시절에 출간되었다.
하나님의 기자는 이것들로 인해 "신앙생활이 손실을 입는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집안 깊숙이 들어왔다. 어렸을 적에 난 영화에 빠져들었었다. 부모님은 내가 나이를 먹도록 텔레비전을 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웃집에 있는 흑백 텔레비전을 보려고 그 집의 닫힌 창가에 걸터앉을 때가 많았다.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처롭기 그지없는 그런 습관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오늘날 휴대용 기기를 통해 즉시로 접근할 수 있는 영화나 다른 오락물로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텔레비전이나 영화가 다가 아니다. 아마도 가장 비극적인 발전 가운데 하나는 포르노의 보편화일 것이다. 이는 인터넷의 세 가지 A, 즉 접근용이성 accessibility 획득용이성 affordability 익명성 anonymity 으로 인해 확산되고 있다." 연구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도 비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포르노 문제를 많이 겪고 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기독교의 목사들도 그리 차이가 심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시청할 수 있는 것들이 과거 인기 드라마 <비버는 해결사> Leave it to Beaver 처럼 순수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런 것들이 당신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는가? 나는 한때 목사로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습관을 합리화했던 일을 기억한다. 저녁에 지쳐서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은 이미 잠이 들어 있었고, 집사람은 하품을 하며 침실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제 '긴장을 풀 시간이야'라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나는 11시 뉴스가 방영될 때까지 TV를 시청하곤 하였다. 친한 친구 마이크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매일 열리는 마귀의 퍼레이드에 지나지 않았다. 11시 뉴스가 끝난 뒤에도 코믹 토크쇼와 그와 유사한 프로그램이 계속 이어졌다. 텔레비전을 두어 시간 보았다고 해서 긴장이 풀렸던가? 나는 실제로 이전보다 더 피곤해졌다. 나의 머리 안에 세속적인 이미지들이 들어찼고 구주와 함께 이른 아침에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심리학자들이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사람이 한 번이라도 보고 듣고 느낀 것은 하나도 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엄격히 과학적인 진술 그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한 그 어떤 일이라도 지워지는 법이 없다" 윌리엄 제임스, <심리학의 원리들>, 83 롤랑 헤그스타트 <심리 조정자들〉, 13
욥은 "처녀"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기로 자신의 눈과 약속하였다. 욥 31:1 바울은 그것을 죽음의 덫으로 묘사하면서 “음행을 피하라" 고전 6:18 고 외친다. 음행처럼 중독적인 것은 없다. 마음이 음행에 끌리게 되면 더욱더 자극을 원하게 된다. 결국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처럼 멈출 수 없게 된다. 만약 이것이 당신에게 문제가 되고 있다면, 즉시로 그만두어야 한다. 그런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유혹의 장소에서 떠나야 한다. 아마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도움이 되었든지 눈을 돌려 예수님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진정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히 12:2 '바라보다'라는 말은 '고정하라는 말이다. 못을 박듯 눈을 주님께 고정시키라 주님의 말씀에서 그분을 찾으라. 매일 매 순간 그분을 향해 얼굴을 돌리라. 이렇게 하면 할수록, 당신을 끌어당기던 세상의 정욕은 점차 약해질 것이다. 사실상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해결책이다. 오직 그분밖에 없다.
혹시 독자는 내가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이러한 유형의 강력한 오락물이 우리의 영혼을 집어삼킬 수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가볍고 무해한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것들과 접촉하는 동안 나의 형편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전혀! 오히려 점점 더 위험 가운데로 빠져들고 있었다. 루이스는 사탄이 그의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해 유혹할 때 교묘하고 교활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했다.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그것이 쌓여 인간을 '빛'으로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조금씩 조금씩 끌어들이면 그만이야. 만약 도박으로 그런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살인을 유도하는 것보다 못할 것이 없어. 사실 가장 안전한 지옥행은 한 걸음 한 걸음 가게 되어 있단다. 그것은 경사도 완만하고 걷기도 쉬운 데다가, 갈림길도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는 길이지." C. 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61~62
시편 기자의 맹세를 기억하라.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시 1013 그렇게 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
♣ 적용과 소그룹 연구를 위한 질문들
1. 당신의 삶에서 성령님을 거역함으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도록 이끄는 것이 있었는가?
2. 왜 성경에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혹은 “슬프게 한다는 표현이 사용되었을까?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3. 당신의 삶에서 예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소하거나 부차적인 것들은 무엇인가?
4. 교만과 자아의존 혹은 고백하지 않은 죄로 인하여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것이 힘들었던 적이 있었는가?
5. 회개와 죄 용서를 구하는 데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6. 왜 비판은 그토록 위험한가?
7. 부정적인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면 좋을까?
8. 당신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데 방해가 되는 오락적인 요소에 빠져있는가?
9. 오늘날 포르노가 보편화된 3가지 A는 무엇인가? 이것이 오늘날 교회안에서 문제가 된다고 보는가?
10. 예수님이 바라시는 그런 삶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행동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단계들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