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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헌千世憲(1881~1945)은 미주지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881년 5월 15일 산양면山陽面 부암리富岩里에서 아버지 천병우千秉祐와 어머니 영월엄씨寧越嚴氏사이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문경시 산양면 부암리 397번지이다.
옛 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다른 주택이 자리하고 있다.
성장하면서 그는 10세 무렵까지 경북 선산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22세 때인 1902년에는 서울로 올라가 외국어학교 일어과에 입학하였다.
그 이듬해인 1903년 23세의 나이로 미국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이 시작된 것은 1902년 말이다. 이 때 인천항을 출발한 배가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은 1903년 1월 3일이다. 그로부터 한인의 이민은 계속되었고, 하와이의 여러 섬에 정착하여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살아갔다. 경북지역에서 하와이로 이민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흔하지 않은 사람 가운데 문경 출신 천세헌이 있다.
천세헌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약 3년간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그 뒤 1907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조국의 독립과 동포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에 가입하는 한편, 정인탁‧류화식 등과 대한국민회 조직을 시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지속적으로 후원하였다. 또 뉴욕 로체스터 지역 신문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신한민보》에 글을 기고하여, 이를 통해 한인동포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불어 넣어 주기도 하였다.
1912년 그는 뉴욕 로체스터에서 레스토랑을 개업하고, 1914년에는 식품점으로 업종을 바꿔 3개의 식품 체인점을 운영하였다. 하와이 이민 10년 만에 거둔 성과였다. 이와 더불어 독립운동에도 더울 열을 쏟았다. 1914년 그는 한인동포 사회의 최고 통일연합기관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에 가입하고, 1916년에는 안창호安昌浩‧송종익宋鍾翊 등 8명이 민족의 인재 양성을 위해 창립한 흥사단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 천세헌은 결혼을 하였다. 한국에서 8년 전에 헤어졌던 박기연朴紀淵과 1916년 10월 6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교회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박기연은 천세헌을 만나기 위해 온갖 역경을 이겨내야 했다. 그녀는 중국 상해에서 차이나호륜선을 타고 9월 3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천세헌은 1919년 3월 17일에 설립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회장을 맡아 한인동포의 권익옹호와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힘썼다. 이어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미주의 한인들도 이를 지원하고 나섰다. 이를 위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가졌다. 천세헌도 여기에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와 후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요구 등을 결의하였다. 또 1921년 미국에서 워싱턴군축회의(일명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천세헌은 서재필 등과 함께 뉴욕대한인공동회를 열고, 이원익과 함께 동포들로부터 특연금을 모집하여 외교선전 경비에 충당하기도 했다.
1921년 9월 29일에 이르러 천세헌은 대한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 상해로 파견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1922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국민대표회 추진운동을 지원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안창호 등과 함께 7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각 단체들의 의견을 조정하는 논의에 참가하였다.
천세헌은 1년 뒤인 1922년 9월 13일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샌프란시스코청년회 주최로 환영식이 열렸다. 그 뒤 천세헌은 미주 중서부 지역인 시카고로 옮겨갔다. 그는 이곳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며, 동포들의 생활과 자치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933년에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일본인 마쓰에[松江] 처단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이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있자 미주 한인들은 중국의 난민과 재중한국인을 구제하기 위해 중국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1939년 조선의용대를 후원할 목적으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로 개편되었는데,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이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직한 것이다. 그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40년 천세헌은 시카고에서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1942년 9월 한국인의 대동단결과 미국 군사정보부와 접촉하여 미주 한인의 대일전 참전문제를 협의하기 바란다는 서재필의 서신을 받고, 그는 미국 측과 미주 한인들의 대일참전對日參戰 문제를 협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해방된 조국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광복을 두 달 앞둔 1945년 6월 14일 서거하였다.
[관련근거] 문경의 순국선열 ·호국영령 열전(문경시,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