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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 보문각대제학 성석용선생의 생애와 榮辱의 후손들
“충효는 인간의 기본윤리이고 최고의 덕목이다. 邦國(방국)과 家庭(가정)을 막론하고 忠孝(충효)가 확립되면 國基(국기)가 견고하고 家門(가문)이 번창한다. 오늘날 과학문명이 風靡(풍미)해도 이는 불변의 원리이다. 고려.조선조 忠孝(충효)의 典範(전범)이 된 氏族이 있으니 우리 창녕성씨이고 生死六臣(생사육신)이 一門(일문)에서 배출되어 六百年 綱常(육백년강상)을 지켜온 家門 이 있으니 바로 文肅公 檜谷一派(문숙공 회곡일파)이다.”(朝鮮國資憲大夫寶文閣大提學諡文肅檜谷昌寧成公神道碑銘幷書)
“아 애통해라 그러나 세상에서 칭하는 生六臣과 死六臣이 모두 公의 증손에서 나와 뛰어난 충절이 우주를 떠받들만 하며 먼 후손에 이르러는 도학 문장과 훈업이 찬란하게 서로 이어졌으니 그 근원을 미루어 구명해 보면 모두 公의 음덕과 유택이 후세에 전함이 있기 때문이다.”(文肅檜谷成公石瑢祀壇碑文에서~ )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이다. 역사인물은 역사발전을 추진하는 과정 중 중대한 영향을 주어 후세인들에게 귀감과 본보기가 된 인물을 지칭한다. 따라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마땅히 그 인물이 살았던 역사적 시대상을 이해해야 함은 자명한 일이다. 조선조에서 중요 역사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매죽헌 성삼문의 증조부, 회곡 성석용 선생을 탐방한다. (편집자 註)
#[회곡 성석용(成石瑢)은 누구인가?]
성석용(1352~1403)의 자(字)는 자옥(自玉), 호(號)는 회곡(檜谷)이며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다. 1352年 공민왕 원년 임진생이며 1376年 우왕 2년 병진(丙辰)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부인은 정부인 광산김씨 사온승 성리(司醞丞 成利)의 따님, 집현전 대제학 장영공 진(大提學 章榮公 稹)의 손(孫)이다.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5대손이며, 고조부 성송국(成松國)은 출천지효(出天之孝)로 시조가 개경(開京)에서 별세하자 천리부시(千里負屍,천리 길을 시체를 업고 간다는 뜻), 여러 날 걸려 창녕 가까운 현풍 땅에 이르렀을 때 눈이 많이 내려 갈 길을 재촉하여 맥산(麥山)에 안장하였는데 그후 자손이 번창하였다. 성송국은 고려조에 문하시중으로 물계서원에 주향(主享)되었다.
증조부 성공필(成公弼)은 판서(判書)이고 조부 성군미(成君美)는 총랑(摠郞이다. 부친 성여완(成汝完)의 호(號)는 이헌(怡軒)이다. 성석용은 공양왕 즉위초에 대언(代言,承旨)으로 있으면서 서경(書經)의 무일편(無逸篇)을 써서 올렸으며 다음해 경연(經筵)을 설치하고 경명행수(經明行修)한 명현을 뽑아 시강(侍講)을 맡게 하였는데 公도 경연참찬관으로 포은 정몽주, 삼봉 정도전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동년 12월 밀직사의 지신사(知申事:都承旨)로 승진하였고 다음해 6월 성균관 儒生 朴礎(유생 박초) 등이 격렬한 척불소(斥佛疏,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려 왕이 대노하였는데 이때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유백순이 공에게 이 상소문을 올리지 말 것을 간청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았다. 12월 밀직부사동지경연사로 승진하였고 사명을 받들고 명 나라에 다녀왔다. 공양왕 4년(1392) 7월 밀직제학으로 재직중 고려가 멸망하였다. 성석용의 졸기에서 보면 “석용은 순실(淳實)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으며 마음을 다하여 봉직하였다. 또 글씨를 잘 썼다. 대표관직은 대사헌, 개성유후, 보문각대제학이다.
#[파평재(坡平齋) 가는 길]
파평재는 지도상에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 335-2 ‘창녕성씨제각’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경의.중앙선 시발점인 문산역에서 나와 문산읍 1번 도로 통일고가교 분기점에서 우측으로 국도37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화석정 입구를 지나 두포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청송로로 진입하면 파평재(창녕성씨祭閣)가 나온다.
<白鶴의 붉은 벼슬, 중두치관(衆豆雉冠) 형상의 파평산>
이곳 파평재는 매년 음력 10월3일에 회곡공 성석용, 양혜혜공 성달생, 수헌공 성개, 참찬공 성증, 인재공 성희, 판관공 성삼석, 문두공 성담수 등 7분의 제향을 지내는 곳이다.
오늘날 한반도 평화수도라고 불리는 경기도 파주시는 한양에서 개성과 북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예로부터 관로가 잘 발달된 고장이다.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와 덕천리에 위치한 파평산은 해발 496m, 풍수상으로는 파주지역 진산(鎭山)으로서 한북정맥을 타고온 백학(두루미)의 붉은 벼슬, 중두치관(衆豆雉冠) 형상이다. 임진강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파주시의 대표적인 산 가운데 하나이다.
파주사람들은 감악山을 아버지 山이라고 하고 파평산을 어머니山이라고들 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듯이 파주의 모든 산은 파평산에서 뻗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파평은 언덕과 평지로 이루어진 지형이라는 뜻으로 파주라는 이름이 파평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파평산 정상은 동봉과 서봉이 마주하고 있으며, 서봉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접근이 불가능하다. 동봉은 개방되어 있으며, 동봉의 남쪽은 바위 절벽으로 되어 있다.
파평재(坡平齋)는 파평산을 진산(鎭山)으로 하여 서쪽에 위치한다. 풍수적으로는 묘좌유향 (卯坐酉向,동쪽에서 서쪽을 향하고 앉은 터의 판국을 이른다.)이다. 이곳 파평재는 매년 음력 10월3일에 회곡공 성석용, 수헌공 성달생, 인재공 성희, 문두공 성담수 등 4분의 제향을 지내는 곳이다.
#[坡平齋 重建]
2000年(庚辰) 8月부터 2001年(辛巳)까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두포2리에 중요無形文化財 大木匠人 崔基永 선생 공사로 중건을 완료하고 2001년 6월 3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신도비竪碑 - 檜谷公派宗中에서는 2007年 3月 29日 文肅公 신도비 竪立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民族文化推進會附設國譯硏修院 교수 成百曉가 撰하여 坡平齋 좌측에
神道碑를 竪碑하고 2007年 6月 15日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조선국자헌대부보문각대제학시문숙회곡창녕성공신도비명병서(朝鮮國資憲大夫寶文閣大提學諡文肅檜谷昌寧成公神道碑銘幷書)
파평재를 나와서 4분의 묘가 있는 산(두포리 산 21번지)으로 향했다. 출입은 다소 불편했다. 전방 xx사단 관활 지역 軍부대에 신분증 맡기고 확인을 거친후에 차량으로 통과하여 목적지에 당도했다. 전방이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文肅檜谷成公祀壇碑>전.후면
<睡軒公 成槪 仁齋公 成熺 墓>
#[조상의 영광은 자손의 등불, 창녕成씨 조선의 명문으로 떠 오르다]
[조선중기의 학자 성현(成俔)은 자신의 저술인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지금 문벌이 성하기로는 광주이씨가 으뜸이고 그 다음이 우리 창녕성씨(昌寧成氏)”라고 하였다. 창녕성씨는 조선 전기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로 성삼문, 성담수, 성현, 성수침, 성혼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창녕성씨는 고려 때 향리직인 호장 중윤을 지낸 성인보(成仁輔)를 시조로 하여 세계(世系)가 이어져 내려왔다.
창녕성씨는 성여완(成汝完, 1309~1397)이 1336년(충숙왕 복위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 검열이 되고, 군부 정랑과 양광도 안렴사를 거쳐, 상서우승.지형부사.어사중승.전법판사 등을 역임했다. ~ 중략~ 성여완은 1378년(우왕 4) 10월 정당문학 상의(政堂文學商議 : 종2품)에 임명되고, 1389년(공양왕 원년)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에 올라 창녕성씨 가문은 더욱 번성한다. 맏아들 성석린(1338~1423)은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가 문경(文景)이며, 둘째 아들 성석용(1352~1403)은 보문각대제학을 지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셋째 아들 성석인(?? ~ 1414 )은 예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넷째 아들 성석번은 낭장(郎將)이다.
조선 전기 창녕성씨를 대표하는 인물은 이들 세 사람의 가계에서 배출되었다.특히 성석용의 가계는 그의 증손인 성삼문과 성담수를 대표로 꼽을수 있는데 이들은 각각 생육신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고 세조의 찬탈을 비판해 충절의 표상이 되었다.] (출처: 권오영외 9인지음,‘명문가, 그 깊은 역사’제2장 은군자와 도학자를 배출한 조선의 명가)
#[성석용의 관직생활]
-1389年 공양왕 원년(元年) 기사(己巳)에 대언(代言)으로 있을 때 왕명에 의하여 서경무일편(書經無逸篇)을 써서 올렸다.
-1390年 공양왕 2년 경오(庚午)에 왕이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고 명유(名儒)들을 많이 뽑았는데 공도 참찬관(參贊官)으로 경연(經筵)에 참여하였다. 동년12월 밀직사 지신사에 임명되었다.
-1391年 공양왕 3년 신미(辛未)에 밀직부사에 임명되었고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갔었다.1392年 공양왕 4년 7월 밀직제학에 있을 때 조선조(朝鮮朝)가 개국되었다.
-1392年 태조 원년 임신(壬申) 7月 28日 백형(伯兄) 문경공 석린(文景公 石璘)과 함께 목은 이색(牧隱 李穡), 양호당 우현보(養浩堂 禹玄寶) 등의 당(黨)에 연좌되어 귀양살이를 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책록되었다. 1396年 태조 5년(太祖 5年) 병자(丙子)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가 되었으며 경기도 관찰사, 개성 유후로 옮겨갔다.
-1398年 태조 7년 무인(戊寅)에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同年 5月 21日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동년 8월 전하께 “절제사(節制使) 이하 대소원장(大小員將)들이 스스로 진도(陳圖)를 강습하지 아니하고 그 직책을 게을리 하오니 그 양부(兩府)의 파직(罷職)된 전함(前銜)은 직첩(職牒)을 관품(官品)에 따라 수취(收取)하되 1등을 체강(遞降)시킬 것이며 5품 이하의 관원은 태형(笞刑)을 집행하여 뒷사람을 감계(鑑戒) 하게 하소서”하고 상언(上言)하여 왕명을 받아 시행함으로써 공(公)의 위성(威聲)을 떨쳤다. 1400년 정종 2년 경진(庚辰) 자헌대부 보문각대제학(資憲大夫 寶文閣 大提學)에 승진되었다.
#[멸문지화된 후손들의 수난]
公(성석용)은 자녀 3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성달생(成達生)은 공조판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시호는 양혜(襄惠)이고, 둘째아들 성개(成槪)는 경기관찰사. 병조참판이며, 셋째 아들 성허(成栩)는 예조참의를 지냈다. 그러나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일어난 병자사화(丙子士禍) 때에 사육신 사건으로 인하여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1) 성달생 - 묘소가 파헤쳐지다.
파주시 법원읍 금곡리 관모봉 아래(성부터, 성깃터) 묻혀있는 성달생은 조선 최초 로 이루어진 무과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세종조에 육진개척등에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랬음에도 아들(성승)과 손자(성삼문)가 병자사화에 연루되어 역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로 고신(告身)을 추탈당하고, 묘소마저 파헤쳐 평토하여 묘수호도 못 한채 수백년을 실전되어 내려오게 된다.
그러다가 300여년이 지나서야 신원되어 비석과 석물들을 찾아내어 오늘날과 같은 모양을 찾게 되었다. 오랜 세월의 풍파에 문적이 끊기어 묘소마저 실전(失傳)되었으므로, 광복 후 양혜공 달생 묘 아래에 우참찬 증(塍)과 한성판관 삼석(三 錫) 부자의 단(壇)을 만들어 모셨다.
-2)성 승(成 勝) - 사형 당하다.
? ~ 1456 (세조 2), 호(號)는 적곡(赤谷), 시호는 충숙(忠肅), 성달생의 큰 아들이며 사육신 성삼문의 아버지이다. 무과(武科)에 급제, 1440년(세종 22) 경상도 병마절제사, 1446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가 되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50년(문종 즉위)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또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1451년(문종 1) 판의주목사, 1455년(단종 3) 중추원사가 되고, 1455년(세조 1) 동지중추원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취임하지 않았다.
1456년 왕의 고명(誥命)을 가져온 명나라 사신의 송별연이 창덕궁(昌德宮)에서 개최될 때 도총관(都摠管)으로 유응부와 함께 운검(雲儉)을 쥐게 되는 기회에 세조를 칼로 베고 상왕 단종의 복위를 계획, 아들 삼문 등과 거사를 도모했다. 그러나 갑자기 자리가 비좁다고 운검을 그만두라는 세조의 명이 내림으로써 거사가 어렵게 되자 성삼문․박팽년 등의 주장을 따라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그러나 김질(金礩)의 밀고로 복위 음모가 발각되어 사형되었다. 1784年(正祖8年) 좌찬성(贈左贊成)에 추증, 홍주(洪州)의 노은서원별묘(魯恩書院別廟),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3)성희(成 熺) - 한양300리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
성승의 4촌이며 성삼문의 당숙인 성희(熺-1456년)는 성삼문 등 사육신이 상왕(上王)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형당할 때, 성삼문의 친척이라 하여 10여차의 극심한 국문을 받았으나 끝내 함구하여 김해에 안치되었다가 3년 만에 풀려 나와 공주(公州)에서 별세했다.
<유배지에서 성희의 詩 한수>
“태평시에 추출을 당하고 이제 늙었으니 어이하리
사년동안 고생에 백발도 많아졌네
한성의 나그네가 분성(김해의 옛 이름)의 나그네가 되었으니
銀海의 물결은 김해의 물결 더 했구나
초택에서 읊조리던 굴원이 되려고 하니
長沙로 귀양간 가의를 그 누가 동정해 주랴
성은이 이미 전원으로 돌아가게 허락하였으니
공산(公州의 별칭)에 가서 주마(酒魔)나 되련다”...(성희의 詩, 東文選 )
창녕의 물계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성희(熺)는 안치에서 풀려나 부모의 고향근처인 두포리로 돌아와 부모의 묘소 를 돌보며 살고 싶었으나 ‘서울 3백리 안에는 들어올 수 없다’하여, 현 연기군 달전서 살다가 15년이 지난 성종2년 9월에 복관(復官)되었으며, 죽어서야 파주 파평산 부친 개(槪)의 묘하에 안장하였다. 회곡의 직계 손들은 모두 병자사화에 화(禍)를 당하는 멸문지화의 수난을 겪었으나, 신원(伸寃)이 된 후에는 후손들 중에 많은 인재들이 나온다.
성희(成熺)의 동생 성조(照), 성연(然)은 병자피화(丙子被禍)로 삭탈관직(削奪官職) 되고 고신첩(告身帖) 안치원방(安置遠方) 되었다.
-4) 성삼문 – 사육신, 능지처참 당하다.
단종복위 운동에 실패하자 아버지 성승(成勝)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三聘)ㆍ 삼고(三顧)ㆍ 삼성(三省)의 세 동생과, 맹첨(孟詹) ㆍ맹평(孟平)ㆍ 맹종(孟終) 헌(憲), 택(澤)과 갓난아기 등 여섯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1418 (태종 18) ~ 1456 (세조 2)--자(字)는 근보(謹甫)ㆍ눌옹(訥翁), 호(號)는 매죽헌(梅竹軒), 시호(諡號)는 충문(忠文), 도총관 성승의 아들. 1438년(세종 20)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하위지와 함께 급제, 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했다. 집현전 학사에 서 집현전 수찬(修撰)ㆍ 직집현전(直集賢殿)을 거쳐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였다.
성삼문의 숙부 성증(成塍)은 병자피화(丙子被禍)로 폐칩불사(廢蟄不仕)하고 사촌 성삼석(成三錫)은 병자피화(丙子被禍)로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다가 789年(正祖 13년) 복관(復官)되었다.
(1)당세의 난신, 후세의 충신
조선 제일의 충의(忠義)를 지킨 인물, 성삼문은 당대의 석학이요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촉망받던 관료였지만 일신의 영화를 뒤로하고 의리와 충절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만고의 충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성삼문 가족들은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고 가산은 몰수되었으니 의리를 지킨 대가치고는 그 희생이 너무도 컸다. 당시 그도 수양대군에게 협력을 했더라면 부귀영화가 보장되고 자신의 인생도 순탄대로의 행복을 누렸을 것이다.
성삼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조는 성삼문 등을 죽이면서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의 자질을 엿볼 수 있다. 세조에게 목숨바쳐 항거했던 사육신은 죽은 지 230여 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고 관직을 되찾았다. 세조의 예언 "후세의 충신"이 그대로 현실화 된 것이다.
(2)음운학자로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
성삼문은 당시 언어학(음운학) 분야의 탁월한 학자였으며 ‘직해동자습’의 교정과 ‘동국정운’ 편찬에 크게 기여했다. 또 훈민정음창제의 기초적인 연구를 위해 요동을 13번이나 왕래하며 음운연구에 심혈을 바쳤던 것은 그가 남긴 큰 발자취라 하겠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3)한국인의 혼 – 선비정신의 표상
“선비정신은 뜻을 세워 경건한 마음으로 학문과 덕을 쌓아 올바른 길로 지조를 지키고 대의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불굴의 정신을 말한다.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뒤에 우리는 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義’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차라리 셰익스피어를 못 읽고 괴테를 몰라도 이것(사육신)은 알아야 한다.
“조선이 낳은 위대한 정신, 성삼문 마져 죽일 정도로 조선의 정신은 타락해 버렸다. 우리민족에게 뜻이 있음을 알려준 당대 최고의 정신을 통째로 죽인 것이다.” 정신이 없는 민족은 민족이 아니다. ‘성삼문의 정신’‘우국충정’, 이 민족은 흔들리지 않는다. 성삼문의 사육신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정신은 남아 있어 오늘에 까지 이어지고 있다.”
#[벼슬사양, 은둔, 과거시험 불응시한 후손들]
-1)성담수 - 벼슬 단념
자(字)는 미수(眉叟), 호(號)는 문두(文斗), 시호(諡號)는 정숙(靖肅), 승문원 교리 희(熺)의 아들, 성삼문과는 재종간(再從間). 1450년(세종 32) 진사가 되었다. 부(父) 성희(成熺)가 단종복위 사건에 성삼문 등이 처형되자 친족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고 김해(金海)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나서 공주(公州)에 돌아왔으나 이 일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선영(先塋)이 있는 파주(坡州)의 문두리(文斗里)에 은거하여 일생을 독서와 낚시로 소일하였다.
단종 복위와 관련된 죄인의 자제에게는 전례에 따라 참봉 벼슬 제수하여 그들의 거취를 살폈는데,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직역(職役)에 복무하였으나, 그만은 끝내 벼슬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면서 단종을 추모하였다.
죽은 뒤 세상에서 단종 복위사건 때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그를 비롯한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원호(元昊), 조려(趙旅), 남효온(南孝溫) 등 여섯 사람을 생육신이라 불리었다.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창녕의 물계서원에 제향(祭享) 되고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2)성담명- 과거시험 불응시
조선 전기의 유학. 단종(端宗) 때의 충신 성희(成熺)의 아들. 아버지, 형 성담수(成聃壽)와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좌절되자 평생 출사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으며, 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됨. 字는 極五이고 號는 退川齋로 佔畢齋 金宗直 先生의 門人으로 生員이었는데 이조판서에 贈職되었다.
名賢錄에 보면 公은 숨어 德을 닦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仁川으로 물러가 隱居하였다. 公은 楷書를 잘 썼다. 한번은 科場에 들어가 試券을 올리자 考試官은 公의 筆法을 감탄하고 장댓 끝에 매어달아 科場안에 誇示하였다. 위에 뜻을 기르고 몸을 닦아 科擧에 응시하지 않고 끝내 은거하였다.
-3)성담중 – 벼슬 사양
자는 이수요 호는 회재이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부친이 왕실을 돕다가 귀양갔으며 급기야 별세하니 항상 仁義를 으뜸으로 품고 형들과 함께 파평산 先考墓下에서 숨어 살며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조정에서 남양교관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명을 거절 不仕隱居하였다. 이후 조정에서 연좌를 풀고 벼슬길을 열었지만 그 아들 성몽기 역시 아버지의 뜻과 같이 하여 낯선 임천 당에서 은거했다. 이름이 逸士錄과 名賢錄에 올랐다.
-4)성몽기- 벼슬사양, 촌옹야노(村翁野老)
성담중이 아들이 있어 이름은 성몽기(成夢箕)요 자(字)는 자협(子協)인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아버지를 여읜 뒤에는 파주(坡州)가 서울과 너무 가깝다 하여 가족을 이끌고 임천(林川)의 귀산(龜山) 아래로 와서 옴팡집에 흙 자리로 비바람도 못 가렸으나 태연하게 지내고 날마다 촌옹(村翁) 야로(野老)와 농사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원근에서 옷을 걷어붙이고 배우러 온 사람이 매우 많았고 진신(搢紳) 대부(大夫)로서 강호(江湖)에 왕래하는 사람은 빠짐없이 그 집을 찾아 경의를 표하였는데, 용재(容齋) 이공(李公, 이행(李荇)) 같은 분은 가장 측은하게 여겨 가난을 위해서라도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공은 줄줄 눈물만 흘리고 응하지 않으니, 이공이 의롭게 여겨 얼굴을 고치고 탄식하고 돌아가곤 하였다.
문인들이 당호(堂號)를 청하자 공은 머리를 흔들고 이르기를, “귀산 성생(龜山成生)이면 족하다.”하였는데, 후인들이 인하여 호로 삼았다. 아! 국조(國朝)는 관대하여 금령(禁令)이 바로 풀리고 시대가 바뀌인 뒤에는 나아갈 길이 더욱 넓혀졌으나 공의 부자는 그 마음이 철석같이 확고하여 움직일 수 없었는데, 이는 자고로 드믈게 보는 바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자아내게 한다.
-5)성구연 -고신첩(告身帖) 환수
벼슬은 내금위사정 司直가선대부 호조참의 평안감사를 지냈다. 병자사화가 일어나자 세조 2년 6월27일 고신첩(告身帖)을 환수하고 먼 변읍(邊邑)에 관노예(官奴隷)로 옮기라는 전지가 있었고 그후 세조5년 6월28일 官奴에 영속된 남해에서 원에 따라 外方으로 옮기게 하고 성종 9년 2월3일 고신첩을 다시 돌려주었다.(조선왕조실록)
#[52세를 일기로 별세]
1403年 태종 3년(太宗 3年) 계미(癸未) 4月 26日 별세하셨다 향년 52세이다. 성석용의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왕은 부음을 듣고 중관(中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부의(賻儀)를 보냄에 있어 관례보다 더하였다. 증시(贈諡)는 문숙(文肅)이다. 공(公)은 여지승람(與地勝覽)과 필원(筆苑) 및 여러 명현록(名賢錄)등에 실려 있다. 公의 묘소는 파주 파평산이란 기록도 있고 충남 연산이란 說(매죽헌유허비문)도 있으나 실전되어 현재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 산 21번지에 설단(設壇) 하여 음(陰) 10月 3日 시향(時享)으로 모시고 있다.
“아 애통해라 그러나 세상에서 칭하는 생육신과 사육신이 모두 공의 증손에서 나와 뛰어난 충절이 우주를 떠받들만 하며 먼 후손에 이르러는 도학 문장과 훈업이 찬란하게 서로 이어졌으니 그 근원을 미루어 구명해 보면 모두 공의 음덕과 유택이 후세에 전함이 있기 때문이다. 선인들께서 일찍이 부군을 제사하지 못하는 것을 한하면서도 미쳐하지 못했었는데 불초가 공자의 묘를 바라보고 단을 만든 교훈을 의거하여 여러 종인들에게 상의한 다음 마침내 파주 파평산 전의한 곳에 터를 잡아 단을 모았다.
이山은 일찍이 공의 묘소란 말을 인해서 양혜공 달생, 수헌공 개, 인재공 희 등 세 부군이 종장한 곳이다. 여기에 단을 만들고 비를 세우니 선조의 영혼이 계신 듯 하고 자손이 좌우에 모시고 있는 듯하다. 이제야 수백년 동안 제사해 오지 못한 통한이 거의 펴게 되었으니 옛날을 생각하매 감회가 새로워지며 사모하는 마음이 망극하다.”(文肅檜谷成公石瑢祀壇碑文)
2001년 9월 8일 파평산 문숙공 사단(祀壇)을 단묘(壇墓)로 조성하고 장명등 구대 석담대 등 석물(石物)을 세웠다. 배위는 정부인 광산김씨 사온승 성리(司醞丞 成利)의 따님이며, 집현전 대제학 장영공 진(章榮公 稹)의 손(孫)이다.
성석용의 부음을 듣고 양촌 권근(權近)은 곡성대사헌 석용(哭成大司憲 石瑢)을 조곡하다.
[아름다운 본바탕을 겸하고도 더욱 학문 힘쓰나니
재능명성 일찍부터 지체높은 사람 중에 뛰어나며
교화로서 선정베푼 당림조정 끼친 혜택 남아있고
사간원의 위엄있는 말소리는 예바람을 떨쳤으나
애달프고 애닮도다 자식으로 직분도리 다못하고
황망케도 한스러워 진실로서 하나님도 슬퍼하네
살았을때 동갑이라 동갑계에 함께하고 맺었건만
이날이야 상심하고 슬픈마음 어찌한이 없겠는가]
-양촌 권근의 ‘양촌집’에 나오는 “옥은 다듬어야 한다”(출전: <한번은 읽어야 할 우리고전 명수필> 김영석 편역)
“나와 동갑인 성석용은 자는 자옥(自玉)이다. 이미 삼봉 정씨(정도전을 이름)가 그자의 뜻에 대하여 자세히 말한바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 더해서 무슨 군소리를 붙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옛말에 ‘다른 산에서 나온 돌은 옥을 다듬는데 쓰일 수 있다.’고 하였으니, 비록 나의 말이 변변치는 못할지라도 그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내 어찌 그것을 마다만 할 수 있겠는가?
천하에 보배는 금과 옥보다 더 귀중한 것이 없다고 한다. 대아(‘시경’의 편명으로 큰 정치를 시로 읊었음)를 보면 문왕(周나라 왕조의 기초를 닦은 명군)을 노래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으로 금과 옥과 같은 바탕이로다.”이 말처럼 천하의 귀한 보배를 가지고 성인의 높고 지극한 덕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금은 변할 수 있지만 옥은 절대로 변하지 않기 때문에 군자는 옥을 더욱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홀(고대의 왕들이 손에 들고 있던 긴 막대기 모양의 옥)을 잡고 패옥을 차되 특별한 연유가 없는 한 그것을 절대로 몸에서 떼어 놓지 않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바로 옥으로 그 옥을 지닌 사람의 덕을 비유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옥의 온화하면서도 굳건하고 건실한 모양을 밖으로 드러난 용모로 삼고, 옥이 지닌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슴 속의 뜻으로 삼는다면, 군자가 자기 소신을 그 옥과 같이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점차 자신을 닦고 다듬으며 발전해 나가면 성인의 지극한 덕 또한 이루지 못한다고 어찌 말 할 수 있겠는가? 오직 닦고 연마할 뿐이다.
그러므로 예기(禮記)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을 만들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가 없다.” 부탁하노니 자옥은 부디 힘쓰고 힘쓸지어다.” 成自玉設後(성자옥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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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성범모(전 문경대학교 교수, 경제칼럼니스트)
-감수:성낙일(사육신현창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