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원철 시인의 영미시 이야기
우리시와 영미시의 소통 – 예이츠와 엘리엇의 한국적 수용
1. 서론
국문학과 영문학은 우리의 문학 연구가 시작되었던 때는 오히려 함께 갔었지만 사회가 복잡해지고 커지면서 따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각 대학에서 영문과와 국문과가 발전해 나가면서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커져 버린 것이다. 해방 후 70년을 넘긴 이 시기에 두 영역의 소통을 생각한다는 것은 나름 의미있는 일이다.
1920년대와 30년대의 20년은 우리 시에 있어서도 영시에 있어서도 참으로 소중한 시기였다. 우리나라를 말하자면 일본의 문화 통치가 시행되었던 시기, 1920년 이후 1940년 전시체제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20년은 그야말로 문화의 시기였다. 일본을 통하여 앞선 것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는데 문학에서는 서구의 몇백 년간 발전해 오던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으니 당시 조선의 선각자들이 얼마나 놀라고 경탄하고 있었을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서구에서도 이 시기에 최고의 문학작품들이 생산되고 있었다. 1922년에 엘리엇의 『황무지』가 발표되었고 이어지는 20년대와 30년대는 우리가 기억하는 영미권 시인들이 최고의 작품들을 써내고 있었다. 서구에서의 이 시기는 양차 대전 사이의 불안기였다. 무서운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아직 더 무서운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 그리고 슬슬 드러나는 징조들, 대공황, 파시즘, 러시아혁명에 의해 사람들은 허무와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시기 한국의 문학에 중요한 역할을 한 분들이 일본으로 유학한 영문학 연구자들이었다. 정지용, 윤동주, 백석 등의 시인들은 물론이고 20년대의 시단을 지배했던 김억, 30년대를 지배했던 김기림 등이 모두 일본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분들이다. 20년대는 김억의 주도하에 예이츠의 시가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30년대는 김기림의 주도하에 엘리엇의 시가 소개되고 있었다. 예이츠의 시는 사실 감성적인 면이 있어서 우리의 정서에 어필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엇의 시는 낯설고 어려워서 당시에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그 예이츠와 엘리엇을 우리나라 시인들 중 한 분과 각각 비교하면서 영향 관계나 문화적 차이를 음미해보고자 한다.
2. 예이츠와 박목월
예이츠는 여러 정황상 우리와 정서가 유사하다. 아일랜드라는 나라의 피침의 역사나 서정적 신비적 정서는 아주 우리의 공감을 일으킨다. 우리 세대의 고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던 「이니스프리 호수섬」은 얼마나 신비롭게 와 닿았는지 모른다. 이 시에서 보이는 작은 욕심의 세계, 자연 속에 도피하는 소박한 감성은 우리의 전래적 정서와 딱 맞았기 때문이다. 이것 말고 우리가 관심을 둘만한 것은 예이츠의 별난 연애사이다. 이미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는 모드 곤이라는 한 여성을 거의 평생 연모하다가 실패했고 나중에는 그의 딸에게까지 청혼했다가 거절당한다. 이것은 우리의 윤리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웃기는 일이지만 서양에서는 관대한 시선을 받는다.
예이츠의 시적 토양은 그의 고향 슬라이고이다. 어릴 때부터 혼자 몽상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슬라이고 인근의 바다, 계곡, 폭포 등을 헤매고 돌아다니며 아일랜드 특유의 풍요로운 전설, 요정 이야기 등을 되새겼다. 그 흔적은 그의 초기 시 곳곳에서 보이는데 유명한 「이니스프리 호수섬」이 그 대표적 결과이다. 이 섬은 슬라이고 곁에 있는 길호라는 큰 호수에 있는 작은 섬이다. 시의 총 3연 중 두 개 연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 이제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진흙과 나뭇가지로 만든 작은 오두막 짓고;
아홉 콩 이랑 거기서 갈리, 꿀벌을 치기 위한 벌통도 하나,
그리고 혼자서 살리 벌소리 잉잉대는 공터에서.
그리고 거기서 나는 어떤 평화를 가지리, 평화란 천천히 떨어지는 것,
아침의 베일에서 귀뚜라미 우는 곳까지 떨어지는 것;
거기의 한밤은 온통 희부연 빛, 그리고 정오는 자줏빛 불길,
그리고 저녁엔 홍방울새 날개 소리로 가득하리.
(Collected Poems 39)
이것은 젊은 예이츠가 미국의 초절주의자 소로우 H. D. (1817- 62)의 월든에서 힌트를 얻어 쓴 시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기질에 가장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어릴 때부터 애늙은이였던 예이츠는 이 시에서처럼 도피적 이상향을 꿈꾸고 있었다. 이 시가 가진 영시 특유의 아름다움은 밀어 두고 의미만을 보자면 완전히 동양적 은자의 이상향이다. 아홉 이랑 작은 콩밭을 일구며 벌통 하나 가지고 숲속에서 아무런 욕심 없이 살고자 하는 그의 욕망은 속세를 떠난 것이다. 2연은 그 섬에서의 하루를 말하고 있는데 밑줄 친 부분이 특히 감각적 묘사에서 뛰어나다.
이와 유사한 모습을 우리 시인들 중 박목월의 초기시에서 보게 된다. 목월의 이상향은 그가 자랐던 경주 토함산과 그 당시 거의 폐허였던 불국사였다. 그의 유・소년기를 지배했던 것은 그 폐허가 유발하는 상상과 자유였다. 대릉과 고찰과 안압지, 포석정 등을 배회하며 꿈속에 잠겨 있던 소년이 그때의 박목월이었다. 그것은 그의 초기 시 「청노루」와 「산도화」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구비. (박목월10)
산은/ 구강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같은/ 물. (21)
이 두 편의 시는 젊은 박목월의 이상향을 잘 보여 주는 것들이며 여기에 묘사된 공간은 실재하는 곳이 아니라 꿈속의 세계이다. 그가 생각하던 이상적 공간은 청운사, 자하산이라는 환상으로 드러난다. 두 편 다 눈이 녹아 흐르는 이른 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색조를 이렇게 넣은 것은 목월의 환상적 기질이 묻어난 것이다. 그리고 당시 목월이 배회하곤 했었다는 불국사도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흰달빛/ 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 큰보살//
바람소리/ 솔소리.(26)
“동사를 일체 배제한 채 간명하고 인상적인 명사만 가지고(신경림 308)” 이처럼 아름답게 그려 놓은 달빛에 잠긴 불국사는 이 시인의 환상의 세계이기도 하다. 즉 그는 이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젊은 당시에 꿈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신경림도 “초기 목월의 자연은 너무 아름다워, 우리가 꿈꾸는 자연일 뿐이지 실재하는 자연은 아니라는 느낌(311)”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하나 이 시인에게서 보이는 것은 젊은 외로움이다. 그는 세상에 휩쓸리기보다 꿈속에 살고 있었다.
이 두 시인의 시는 연애와 사랑에 있어서도 비교해 봄직 하다. 예이츠의 모드 곤에 대한 사랑은 그의 평생을 좌우하며 시창작의 원동력이 되었다. 모드 곤은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여성이었고 예이츠는 소극적이고 수줍은 성격이었다. 당연히 그의 사랑은 이루어지기 힘들었고 그것은 끝없는 괴로움으로 그를 이끌었다. 처음 모드 곤을 보았을 때를 예이츠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날은 고전적인 봄의 화신처럼, “그녀는 여신처럼 걷네.”라는 베르길리우스의 찬사가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꽃잎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사과꽃처럼 빛났고, 가득 핀 꽃 덤불 옆에 그녀가 서 있는 것을 창을 통해 본, 그 처음 만난 날이 기억난다. (자서전 163)
예이츠의 시에서 모드 곤은 여러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초기 시 중에서 다음의 시는 위의 말을 실감나게 한다. 여신과 같은 그녀의 발아래 꿈과 같은 부드러운 천을 깔고 싶은 것이다.
금빛과 은빛으로 어우러진 수놓은 천상의 천
밤과 낮과 여명의 푸르고 희미하고 어두운 그런 천을
내가 가졌다면
내 그대 발아래 그 천을 펼치겠지만
나는 가난하여 그저 꿈만 가지고 있을 뿐이니
내 꿈을 그대 발아래 펼쳐 놓았소,
그대는 내 꿈을 밟는 것이니 부드럽게 걸으시구려.
(Collected Poems 73)
사실 이 시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영감을 주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을 하고 있을 정도로 “밟는다”라는 아이디어에서 유사한 점이 있다. 요점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시적 화자가 아름다운 천국의 천을 생각하고 그것으로 사랑하는 여자의 발아래 깔고 싶다는 욕망이다. 하늘의 천은 분명히 부드러울 것이다. 그것으로 여린 여자의 발바닥을 보호하고 싶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드 곤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그 사랑의 대상이 그녀임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전투적이고 활달한 그녀의 성격에 소심하고 나약한 예이츠의 기질은 성에 차지 않았다. “예이츠와 모드곤의 관계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과 민족주의자로서의 그 단호함에 대한 예이츠의 존경심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녀를 여신처럼 신비한 존재로 미화시키고 있었다. 모드 곤에 대한 예이츠의 사랑은 거의 집착에 가까워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낳게 한다.
그대 늙어 머리가 하얗게 되고 잠이 많아져
난롯가에서 꼬박거릴 때, 이 책을 꺼내
천천히 읽으면서 당신의 눈이 한때 지녔던
부드러운 표정과 깊은 그림자를 생각해 보시라,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당신의 우아했던 순간을 사랑했고
거짓 혹은 진실된 사랑으로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던가,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이 당신 속의 방황하는 영혼을 사랑했고
늙어 가는 얼굴의 슬픔마저 사랑했느니,
달아오르는 난로 창살 가에 허리를 숙이며
좀 슬프게 중얼거리시라, 어떻게 사랑의 신이
달아나 저 머리 위의 산등성이를 거닐다가
별무리 틈에 그 얼굴을 감추어 버렸는지를.
(Collected Poems 41)
예이츠의 시에서 모드 곤은 흔히 그리스의 미인 헬렌에 비유된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도 세월이 흘러 늙으면 이빨 빠지고 백발이 되고 주름살투성이의 노파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예이츠는 앞으로 늙어서 초라하게 될 모드 곤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늙어서 난로 곁에 앉아 꼬박거리고 있는 늙은 모드 곤의 모습은 독자들로 하여금 웃음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때 그는 늙은 모드 곤에게 자신의 시집을 꺼내어 읽어 보라고 권한다. 수많은 남자들이 당신의 젊은 육체를 사랑했지만 진정 당신의 영혼까지 사랑한 남자는 나 예이츠밖에 없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늦어 당신은 자조하게 될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얼마나 빨리 달아나 버리는지.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달아난 사랑이 별무리 속에 얼굴을 감춘다는 표현이다. 이 시가 동양적인 연시와 좀 분위기가 다르다면 희화와 심술에 있다. 예이츠는 아직 모드 곤이 젊고 아름다울 때 이 시를 썼는데 거기서 그는 앞으로 늙어 버릴 여자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난로 곁에서 꼬박거리며 졸고 있는 초라한 노파의 모습을 아직 싱싱한 모드 곤의 이면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예이츠는 모드 곤이 다른 남자와 결혼한 다음에도 결혼하지 않고 그 주변을 맴돌았다. 남편인 맥브라이드 소령은 그리 좋은 남편이 아니었으며, 1916년 부활절 봉기에 참여했다가 처형되고 모드 곤은 과부가 되었다. 예이츠는 홀로 된 그녀에게 다시 청혼했지만 거절당하고 마침내 그녀의 딸인 이졸트Iseult 에게까지 청혼했다가 거절당한다.
목월의 연애 사건은 한국전쟁이 끝난 50년대 초반에 있었고 그것은 노래로도 시로도 남아 있다. 그 사연은 우리 사회의 분위기상 직접 드러내지 못하고 목월도 수상록에서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그는 제주도로 사랑의 도피를 했는데 이때 쓴 「배경」이라는 시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수평선에 비유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의 등 뒤에는/ 수평선이/ 한결같이 따라온다./ 아아 이 숙명을, 숙명 같은 꿈을/ 마리아의 눈동자를/ 눈물 어린 신앙을…… (42)
도피처인 제주도에서 어디를 가나 등에 걸리는 수평선을 운명에 치환한 것이다. 수평선처럼 따라붙는 사랑의 운명을 도저히 떨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리아”나 “신앙”은 이 여성이 기독교인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미 그에게는 처자가 있었으니 도피하고 있는 가장의 마음이 편했을 리가 없다. 끊임없이 번민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여인의 앞에서는 운명을 되뇌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장 구체적인 그녀의 모습은 「눈물의 훼어리」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훼어리는 요정fairy을 말한다.
흐릿한 봄밤을/ 문득 맺은 인연의 달무리를/ 타고, 먼 나라에서 나들이 온/ 눈물의 훼어리
……
긴 목에 울음을 머금고 웃는/ 눈매, 그 이름/ 눈물의 훼어리
……
지금도 눈물 어린/ 눈이 바람에 휩쓸린다./ 연한 잎새가 펴나는 그 편으로 일어오는/ 그 이름 눈물의 훼어리 (43-44)
이 시의 주된 정조는 여인에 대한 연민이다. 시에 묘사된 그녀는 먼 별에서 나들이 온 요정과 같은 여자이다. 긴 목과 눈물을 머금고 웃는 눈매는 연민을 자아낸다. 여자의 모습은 이 시의 첫 연에서 괄호처리 되어 “손아귀에 쏙 드는 하얗고 가벼운 손”이라고 강조되어 있기도 하다. 눈물을 글썽이는 요정과 같은 여성은 이렇게 목월과 제주도에서 동거했으나 결국 부인이 찾아오고 여자의 부친도 찾아오면서 이별로 끝을 맺게 된다. 「폐원」이라는 시에서는 환상적인 면모가 보인다.
그는/ 앉아서/ 그의 그림자가 앉아서//
내가/ 피리를 부는데/ 실은 그의/ 흐느끼는 비오롱 솔로//
눈이/ 오는데/ 옛날의 나직한 종이 우는데
……
옛날에/ 하고/ 그가 웃는데/ 서늘한 눈매가 이우는데//
눈 위에/ 발자국이 곱게 남는다/ 망각의 먼/ 지평선이 저문다. (48)
여자는 이제 더 이상 곁에 없고 시인은 혼자 상상에 잠긴 것이다. 이 시에 대해서 이숭원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와 파괴된 거리와 폐허가 된 이화여고 교정을 보면서 자신의 쓸쓸하고 서글픈 심정을 노래한 작품(259)”이라고 말하며 이 시의 정서를 “눈빛처럼 깨끗하다. 하나의 군더더기도 없이 깔끔하게 정제된 시어와 감상에 흐르지 않는 균형 잡힌 정서(261)”라고도 말하고 있다. 목월은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다. 이후 홍익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지만 이런 전기적인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 나타난 여인의 실체가 그일 것이라는 것이다. 퇴락한 정원에서 그 여자의 실체 대신 그림자가 앉고 시인은 피리를 불지만 곧 그것은 여인의 바이올린 소리와 대체된다. 여자는 “서늘한 눈매”로 대표된다. 이 시에 등장하는 종소리, 피리소리, 바이올린소리 등은 모두 환청이다. 눈이 오는 겨울이다. 거기에 발자국이 남는다는 것은 추억을 암시한다. 이별했지만 시인의 뇌리 속에 여자는 그대로 남아 있고 일종의 정한과도 같다.
3. 엘리엇과 김기림
1930년대 조선 문단에 강한 영향을 끼쳤던 김기림은 당시 세계 시단을 지배하고 있던 엘리엇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엘리엇의 작품 중에서도 『황무지』(The Waste Land)가 김기림을 매료시켰다. 해방 후 한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작품에 매료당하고는 했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당시로서는 상식을 뛰어넘은 상상력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에 들어있는, 서양의 고대부터 산스크리트까지 망라하는, 엄청난 지식과 예시들이 당시 조선의 최고 지식인 김기림의 눈에는 경이였다. 당시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빨아들이던 조선 사회에서 “시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지식인이자 기자로서 시대와 역사, 현실의 흐름과 그 방향에 대해 예민했던 김기림”은 매우 탐구적이고 문학뿐 아니라 수학 등 이과에도 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국내외의 정세와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우리 민족의 당면 과제 및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인물”(14)이었다.
『황무지』에는 수많은 고대의 일화들이 편집되어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일화들이 당시 세계대전 직후 황폐했던 서구의 정신세계를 절묘하게 대변하고 있다. 즉 엘리엇은 그가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들을 기술적으로 편집하여 당시의 황폐상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황무지』에서 그 테마를 끌고 나가는 가장 중요한 상징은 죽음과 갈증이다. 황무지에는 죽음만이 만연하여 타는 갈증과 뜨거운 햇살로 표현되고 있다.
이 얽힌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난단 말이냐? 사람의 아들,/ 그대는 알기는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그대 아는 건/ 오직 부서진 형상의 퇴적, 거기엔 해가 쬐어대고/ 죽은 나무에는 그늘도 없고, 귀뚜리의 위안도,/ 메마른 돌 틈엔 물소리도 없다.
- 『황무지』 19-24행
여기 묘사된 장소는 아무런 생명이 없는 사막 같은 곳이다. 그래도 나무의 뿌리는 악착같이 메마른 돌을 움켜쥐고 있으나 그것은 생명력을 말하기보다 처절함을 더해줄 뿐이다. 죽은 나무는 더 이상 그늘을 지우지 못하며 벌레조차 울지 않고 메마른 자갈밭에서는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황무지의 상황이다.
그리고 황무지의 주민들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인물인 카드점을 치는 천리안 소소스트리스 부인을 비롯하여 모두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의 동작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람들이 열을 지어 빙빙 도는 동작이다(“나는 사람들의 무리가 원을 이루며 걷고 있는 것을 본다”『황무지』 55행). 원을 그리며 돈다는 것은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라는 의미이다. 아무런 결실 없고 목적도 없는 동작의 반복일 뿐이다. 아무런 모험도 성취도 없는 그저 앞만 보고 따라서 돌뿐인 그러한 상황, 그것이 엘리엇이 바라본 당시였다. 그리고 1곡의 마지막에는 마치 단테의 『신곡』을 연상하게 하는 유명한 대목이 보인다.
허무한 도시,/ 겨울 새벽의 누런 안개 속을/ 수많은 군중들이 런던교 위로 흘러갔다,/ 나는 죽음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망쳤다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이따금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사람마다 발치만 보면서 갔다./ 언덕 길을 올라서 킹윌리엄 가로 내려서면/ 성 메리 울노스 사원의 때를 알리는 종소리가/ 아홉 점 마지막 자지러지는 소리를 쳤다.
- 『황무지』 60-68행
이 구절은 바로 안개로 유명한 런던의 아침 출근 모습이다. 때는 겨울 새벽이다. 런던교 위로 수많은 군중들이 걸어서 출근하는 것이다. 그것을 시인은 “죽음이 이렇게 많은 이들을 망쳐 놓은 줄”이라고 표현한다. 이 구절의 시민들은 살아 있으되 살아 있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 있다. 그들의 소진된 생명력은 “짧고 간헐적인 호흡”이라는 말에 드러나 있다. 그렇게 가쁜 숨을 쉬며 사람들은 안개가 잔뜩 내린 런던교 위를 흘러가는 것이다. 이것은 단테의 신곡에서 묘사하고 있는 지옥도를 걸어가는 망령들의 모습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각자의 발 앞에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맥없는 걸음은 킹 윌리엄 가를 따라 오르내리며 마침내 세인트 메리 교회가 9시 종을 치고 있는 곳까지 이른다. 그 종소리는 마치 자지러지는 아이처럼 호들갑스러운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런 풍경들에서 우리는 전혀 평화로운 런던 거리는 볼 수 없다. 그들은 죽을 힘만 겨우 남은 사람들처럼 흐느적거리는 것이다.
김기림 역시 『기상도』에서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그가 여행하거나 독서를 통해서 알게 된 세계 각 곳의 풍경을 모두 집어넣음으로써 『황무지』와 같은 효과를 내고자 시도했다. 그래서 전봉관도 이 시가 “다양한 이미지들의 병치, 반복, 대립을 통해 현대문명을 진단하고 전망”(52)했다고 평한다. 물론 엘리엇에 비하면 그의 시도는 약간 어설프고 시적으로도 성숙되지 못하지만 신문학 개발기의 조선으로서는 주목할 만한 시도인 것이다. 김유중도 “근대 문명의 위기와 타락상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문제점들을 풍자적으로 다룬 시인의 태도“(11)를 높이 사고 있다.
『황무지』가 죽음에서 재생으로 흘러간다면 『기상도』는 폭풍의 시작과 파괴, 그 폭풍의 물러감과 새로운 태양의 떠오름으로 흘러간다. 『기상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동양을 폭풍처럼 내습하는 서구에 대한 비판이다. 『기상도』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은 강력한 태풍이다. 그리고 그 태풍은 동양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상해를 강타하고 있다. 당시의 유럽 사회는 혼탁했다. 무서운 세계대전이 끝났으나 그 뒷수습은 미봉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안겼으나 마침내 나치즘의 대두를 부른다. 이탈리아도 그들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자마자 제국주의적 확장을 시도하다가 마침내 파시즘으로 빠져들었다. 러시아는 혁명의 끝에 볼셰비키가 집권하며 폭력의 광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 당시는 세계 대공황의 시기이기도 했다. 어디를 가나 실업자와 굶주림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고 있었다. 김기림은 바로 그러한 국제정세를 비바람을 동반한 난기류에 비유하였다(김용직 266). 그리고 3곡 <태풍의 기침시간>에서 그동안 잔잔하던 세상에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태풍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푸른 바다의 침상(寢床)에서/ 흰 물결의 이불을 차 던지고/ 내리쏘는 태양(太陽)의 금(金)빛 화살에 얼골을 어더맞으며/ 남해(南海)의 늦잠재기 적도(赤道)의 심술쟁이/ 태풍(颱風)이 눈을 떴다./ 악어(鰐魚)의 싸흠동무./ 돌아올 줄 몰르는 장거리선수(長距離選手)./ 화란선장(和蘭船長)의 붉은 수염이 아무래도 싫다는/ 따곱쟁이./ 휘둘리는 검은 모락에/ 찢기어 흐터지는 구름빨./ 거츠른 숨소리에 소름치는/ 어족(魚族)들./ 해만(海灣)을 찾어 숨어드는 물결의 떼./ 황망히 바다의 장판을 구르며 달른/ 빗발의 굵은 다리.
(김기림 29-30)
열대의 바다에서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태풍의 강대한 힘을 의인화시키고 있다. 총 16행의 태풍에 대한 묘사는 매우 상세하다. 푸른 바다의 침상이나 하얀 파도의 이불을 걷어차며 벌떡 일어나는 태풍은 해신 포세이돈의 모습이다. 그의 성격은 늦잠쟁이, 심술쟁이, 싸흠동무, 장거리선수, 따곱쟁이 등으로 묘사되고 있다. 포악하고 심술스러운 태풍의 앞에서 천지는 검게 휘둘리고 구름은 찢겨 흩날리고 어족들은 놀라 소스라치고 있다. 물결은 거세게 육지의 만으로 스며들고 빗발은 굵게 떨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야흐로 아시아의 연안을 향하여 북진하고 있다. 태풍이 몰아치며 유리창이 덜컹거린다. 태풍은 중화 문명의 잔재를 철저히 파괴한다.
산빨이 소름 친다./ 바다가 몸부림 친다./ 휘청거리는 삘딩의 긴 허리./ 비틀거리는 전주(電柱)의 미끈한 다리./ 여객기(旅客機)는 태풍(颱風)의 깃을 피하야/ 성층권(成層圈)으로 소스라쳐 올라갔다. (34)
태풍이 덮치는 모습은 “산빨이 소름 치고 바다가 몸부림 치는” 형태로 나타난다. 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으며 산악은 더 등을 곧추세우고 바다는 파도를 일으키며 용트림하는 것이다. 거센 바람의 힘 앞에 빌딩도 허리를 휘청거리고 전신주도 미끈거리며 젖어든다. 소위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태풍의 원시적 힘 앞에서는 무력하다. 힘없는 아시아의 머리 위에서 전파가 난무하고 있다
이것은 노도처럼 몰아치는 서양의 문명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며 “서구 자본주의의 혼돈상황이 태풍처럼 동아시아로 북상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석하는 평자도 있다. 아시아는 서양의 문물에 도취되어 더 이상 전래의 가치관을 중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붕을 베끼운 골목에서/ 쫓겨난 공자(孔子)님이 잉잉 울고 섰”(36)고 “태풍(颱風)은 휘파람을 높이 불며/ 황하강변(黃河江邊)으로 비꼬며 간다”(38)는 것이다. 동양의 문화적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고 그 맹주였던 중국은 비웃음거리로 전락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의 해변이나 육지는 처참하고 지저분하다. 태풍의 주력은 저 앞에서 달려가고 남은 바람이 설렁설렁 불다가 산자락에 걸리기도 하고 우우 탄식을 토하기도 한다. 성벽 위에는 소나무가 부러져 있고 무엇보다 해변에서의 활발한 생명체 물새는 바위틈에 엎디어 물결을 베고 죽어있다. 찰랑거리던 물결도 바나나 껍질이나 버려진 구두 한 짝을 밀고 다니는 하수구처럼 되어 버렸다. 태풍의 뒤는 지저분하다. 태풍은 세상을 쓸어버릴 듯 노도를 몰고 오지만 그 뒤에는 파괴의 잔해만 남는다.
이 부분은 『황무지』의 3곡을 연상하게 한다. 퇴락한 문명을 말하는 이 시에서 해변이 아니라 도시의 가운데를 흐르는 템즈 강은 대단히 피폐하다. 사람들이 쓰다 버린 강의 텐트는 부서져 있고 나뭇잎은 둑을 붙잡으려고 애를 쓰지만 축축한 밑바닥으로 빠져들고 있다. 바람은 갈색 죽음의 땅에서 불어오나 요정들은 다 떠나버렸다. 15세기 에드먼드 스펜서가 노래했던 아름다운 템즈는 이제 쓰레기 더미에 덮였다. 빈 병, 샌드위치 껍데기, 담배꽁초와 같은 문명의 찌꺼기들이 강둑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 요정들도 다 떠나버렸다. 그리고 죽어가는 더러운 쥐가 느릿하게 등장한다(“쥐가 한 마리 강둑 풀밭을/ 눅진한 배때기를 끌고 슬며시 지나갔다”(『황무지』 187-88행)). 이 쥐는 더러운 문명을 최고도로 드러내고 있다.
<올배미의 주문>에서도 “어둡고 헝클어진 거리를 스쳐가는 밤바람과 우두커니 서 있는 전선주, 파연장의 깨어진 잔과 지꾸어진 방명록 등 모두가 태풍이 휩쓸고 간 뒤의 도시풍경이며 시적 화자는 탈출구를 찾아 나서지만 어둠만이 둘러싸여 있을 뿐”인 상황이다. 태풍이 휩쓸고 간 해협과 도시는 황폐하고 죽음처럼 암울하고 표백된 풍경처럼 전혀 생동감이 없는 병든 풍경이 되고 있다. 태풍에 의해 세상은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거리와 공원과 시장은 먼지와 휴지로 뒤덮였다. 헝클어진 밤거리를 뒤지며 바람은 돌아다니고 전신주만 우두커니 서 있고 물결만이 모래펄에서 가끔 머리채를 추어 들 뿐이다.
헝크러진 거리를 이 구석 저 구석/ 혓바닥으로 뒤지며 다니는 밤바람./ 어둠에게 벌거벗은 등을 씻기우면서/ 말없이 우두커니 서있는 전선주(電線柱)./ 엎드린 모래벌의 허리에서는/ 물결이 가끔 흰 머리채를 추어든다.(43)
이 부분은 엘리엇의 「서곡」(“Preludes”)에 묘사된 퇴락한 도시의 뒷골목을 연상시킨다. 「서곡」은 바로 황무지의 서곡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 작은 노래에 등장하는 풍경은 스산한 대도시의 뒷골목 공터이며 거기에는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고 말이 일없이 발만 구르며 하얀 콧김을 내뿜고 있다. 공터에는 신문지 조각들이 비에 젖은 채 바람에 몰려다니고 거기에서 가장 뛰어난 이미지인 땔감을 찾아 공터를 빙빙 도는 노파가 있다.
『기상도』의 태풍은 세상의 고난이기도 하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질문을 보낸다. 이 난세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이다. 거기에 바람과 올빼미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귀먹은 어둠의 철문(鐵門) 저 편에서/ 바람이 터덜터덜 웃나보다./어느 헝크러진 수풀에서/ 부엉이가 목쉰 소리로 껄껄 웃나보다.(45)
바람은 사람들을 비웃고 있다. 어둠의 철문과 헝클어진 숲에서 털털 웃고 있다. 이 웃음이 기분 나쁜 것이다. 이 기분 나쁜 웃음은 『황무지』의 중요 이미지 중의 하나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황무지』의 3곡에서 죽은 강을 바라보고 있는 시적 화자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는 뼈의 덜걱임을 섞고 있다(“그러나 내 등 뒤엔 차가운 바람에/ 뼈가 덜걱이고 낄낄대는 소리가 귀에서 귀로 번져갔다.”(『황무지』 185-6행)). 또한 상류계층 여성의 히스테리를 묘사한 2곡에서도 그녀의 신경증은 “‘지금 저 소리는 무엇이에요?’/ 도어의 바람 소리./ ‘지금 저 소리는 무엇이에요? 바람이 무엇을 한다는 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황무지』 117-120행)라고 이어지고 있다.
『기상도』가 태풍의 내습과 거기에 이어지는 사람들의 혼란과 피폐상을 서구의 문화침략을 상징하는 장치로 쓰고 있다면 『황무지』는 처음에 언급했듯이 메마름과 갈증을 현대문명의 피폐상과 연결 짓고 있다. 메마른 천둥소리만 들리고 사람들은 너무 갈증이 심해 입을 벌리고 침도 뱉지 못하고 있다. 붉고 화낸 얼굴들이 아귀처럼 서로를 비웃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이 고통과 갈증이 끝나려면 비가 내려야 한다. 이 시의 마지막은 수탉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비가 시작되는 것으로 맺어지고 있다.
갠지스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맥없는 나뭇잎이/ 비를 기다리는데 이제 먼 히말라야 산 너머로/ 먹장구름이 모여들고/ 밀림은 말없이 쭈그리며 도사리고 있었다./ 그때 우레가 말했다./ 다/ 다타(주어라),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주었는가?
- 『황무지』 396-402행
갠지스강으로 배경이 바뀌어 강은 건기를 지나오며 물이 줄어들고 잎사귀는 축 처져있다. 우레가 ‘주어라, 뭐든 베풀어라. 세상의 문제는 탐욕과 이기심에서 생기는 것이니 다 놓고 주어버려라’ 하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 다야드밤(동정하라), 열쇠 소리를 나는 들었노라”로 이어지며 “다? 담야타(절제하라), 배는 즐거이/ 따른다”(352)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정하라는 말은 자비를 베풀라는 말이다. 절제하라는 말은 또 금욕이다. 열쇠 소리와 요동하는 배는 그 해답에 대한 반응이다. 황무지의 지독한 목마름과 죽음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세상 만유에 대한 사랑의 회복과 절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여 김기림의 『기상도』는 태풍이 짓밟고 간 대지 위에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희망으로 제시하고 있다.
허나/ 이윽고/ 태풍(颱風)이 짓밟고 간 깨여진 「메트로폴리스」에/ 어린 태양(太陽)이 병아리처럼/ 홰를 치며 일어날게다./ 하루밤 그 꿈을 건너다니던/ 수없는 놀램과 소름을 떨어버리고/ 이슬에 젖은 날개를 하늘로 펼게다./ 탄탄한 대로(大路)가 희망(希望)처럼/ 저 머언 지평선(地平線)에 뻗히면/ 우리도 사륜마차(四輪馬車)에 내일(來日)을 싣고/ 유량한 말밥굽 소리를 울리면서/ 처음 맞는 새길을 떠나갈게다.(48)
이것은 『황무지』와 대조적이다. 목마름과 갈증과 죽음에서 비내림으로 생명을 찾는 황무지와는 달리 『기상도』에서는 태양의 힘찬 떠오름으로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김기림의 계산된 대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야심적인 『기상도』도 “얼마간의 풍자와 역설로 현대 자본주의 문화를 비틀어 놓았을 뿐 그 극복이 너무 쉽게 이루어진다”라고 김용직은 평하면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장시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이야기 줄거리 같은 것이 없다”(269)고 말하고 있다. 그냥 상황들을 제시만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인데 이는 사실 『황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황무지』도 사실은 무수한 사례를 공격적으로 제시하여 몇 번을 읽지 않으면 그 스토리를 짐작하기 어렵다. 『기상도』와 『황무지』는 각각 7개와 5개의 곡을 모아 교향악과 같은 형식을 하고 있다. 이것은 김기림이 『황무지』를 읽고 같은 형식으로 써보고자 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단지 『황무지』가 고도로 세련된 시 형식과 표현을 보인다면 『기상도』는 아직 미숙한 점이 보인다는 것이다. 『황무지』는 총 5개의 노래에서 죽은 현대문명과 그 황폐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 이전의 어떤 시도 이러한 시도를 하지 못했다. 완전히 새로운 시, 무수한 일화와 예시들을 망라한 지성의 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기상도』에서도 유사한 시도가 보인다.
『황무지』가 극심한 갈증의 상황에서 비를 통하여 재생에 이르렀듯이 『기상도』는 온 천지를 강타하는 태풍의 파괴가 태양의 열기로 재생에 이른다. 원래 엘리엇도 『황무지』를 에즈라 파운드에게 맡겨 많은 양을 칼질했다. 만약 『기상도』의 경우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면 훨씬 훌륭한 작품이 되었을지 모른다. 당시 서구의 시를 처음 도입하면서 이런 시쓰기를 시도했던 용기와 도전정신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4. 결론
예이츠와 박목월, 김기림과 엘리엇을 비교하면서 느끼는 것은 문학이 국경을 넘어 얼마나 쉽게 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이다. 일제하의 조선 시인들은 아마 프랑스의 상징시나 영미의 시를 읽고 황홀경에 빠졌을지 모른다. 오로지 한시의 세계만 알던 우리 선각자들은 서양의 새로운 시들을 읽으며 신천지를 탐사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 짧은 20년 동안 우리나라의 시단에 여러 사조가 피어났던 것은 서양에서 200년을 발전해 온 문예사조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야 『황무지』는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그만큼 이 작품이 어려워서 완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말도 되는데 해방 직후 당시 고려대 영문과 이인수 교수의 지도로 당시 학생이었던 김종길 선생이 번역했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 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처음 이 시를 읽고 너무나 흥분하여 그날 밤 누군가를 불러내어 술에 대취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시는 쇼킹한 작품이었다. 예이츠의 경우, 김억에 의해서 소개되었던 작품들은 초기시 중의 비교적 쉬운 것들이었을 것이다. 안도현의 시 중에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구절은 사실 백석의 시에서 차용한 것이고 그것 역시 예이츠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다. 예이츠의 시도 후기의 난해한 것들은 당시로서는 접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의 영시학계에는 예이츠학회와 엘리엇학회가 아직 독립학회로 존속하고 있다. 이 두 학회는 1980년대에 만들어졌는데 그 회원들은 두 시인의 시에 광적으로 몰입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연구자들이 각기 흠모하는 시인들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김기림은 엘리엇에 몰입한 사람인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박목월은 예이츠의 시에 대해서 얼마나 알았을지 미지수다. 그러나 그의 시는 기묘하게도 예이츠 시의 발전 궤적과 닮아있다. 초기의 몽환적인 시에서 중기의 생활시, 그리고 말기의 철학적인 종교시까지 그 발전의 모습이 매우 유사하여 만일 그가 좀 더 살아서 계속 시를 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