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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예배자로 서 있는 저와 여러분 삶과 가정 가운데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도 앞뒤 자고 계신 분들과 우리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누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를 지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설명을 드렸듯이 이 길은 가파르고 매우 험한 길이었다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 어디로 가시느냐 바로 감람산 근처 배바게와 베다니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우리 말씀의 배경이 되는 지역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4장의 사진을 보여드릴 건데요. 첫 번째 사진을 한번 보실까요?
첫 번째 사진을 보시면 갈릴리를 중심으로 요단강이 흐르고 그 밑에 사회가 있죠. 그 서편에 보시면 예루살렘 감람산 대박의 베다니라는 지역이 표시돼 있습니다. 요단 서편에 있는 그러한 곳이죠. 두 번째 사진은 여러분 산을 중심으로 보시면 되는데 예루살렘에 중요한 세 산이 있어요. 이 세 가지 산을 여러분 좀 기억하시면 좋겠는데 중앙에 있는 산 솔로몬의 성전이죠. 성전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곳은 창세기에 보시면 아브라함에게 너 아들 이삭 바쳐라. 어디로 보내십니까?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으로 보내죠. 그 산이 바로 이 산이라고 보시면 되겠어요.
여러분 보실 때 성전산 왼편으로 보시면 시온산이 있습니다. 시온산 여기는 헤롯 동전이 있던 산이죠. 또한 성전산 오른편에 보시면 오늘의 주 무대가 될 감람산이 보이실 것입니다. 이 세 산이 있고요. 조금 이제 우측으로 옮기셔서 세 번째 사진을 한번 보실 텐데 세 번째 사진을 보시면 감남산하고 올리브산이라고 돼 있죠. 저기가 바로 오늘 현장입니다. 거기에서 왼편으로 보시면 예루살렘이 보이실 거고요. 베바개가 올리브산 근처에 있고 4시 방향으로 대단이 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저 감람산이 예루살렘보다 지형이 높아 보이죠. 저 감람산에서 이렇게 내려다보면 예루살렘이 잘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바로 이 지역을 통과하셨다. 마지막 사진인데 마지막 사진은 예루살렘 입성하신 길입니다. 저 초록색으로 돼 있는데 베다니에서 대박의 세네마의 그 위쪽으로 지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명에 대해서 간단하게 좀 설명을 드리면 배바개와 배다위가 있죠. 벳이라는 것은 베이트라는 것인데 집입니다. 집하고 합상화가 된 건데 바에는 아람어로 파괴라는 뜻이 있어요. 이것은 덜 익은 무화과라는 것인데 여러분 꼭 기억해야 될 건 뭐냐 하면 무화과 나무는 첫 열매가 있어요. 첫 열매가 나야 그 뒤에 다음 열매가 나는 첫 열매가 나지 않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아요. 그 첫 열매가 바로 저 바게라는 것이죠. 그래서 덜 익은 유화가라는 그러한 의미가 있어요.
베다니라는 것은 똑같이 레이트 집이라는 것과 테나 이건 두 번째 열매예요. 두 번째 열매 앞서서 첫 열매가 나야. 두 번째 열매가 나는 것처럼 두 번째를 표현할 때 테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야람어로는 그렇게 돼 있고 히브리어로는 슬픔이라는 뜻이 있어요. 슬픔의 집이라고 이야기하죠. 여기서 여러분 또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뭐가 되셨어요? 첫 열매가 되셨죠? 예수님의 첫 열매가 없으면 구원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열매 맺고 사는 것은 예수님께서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첫 열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 화면 안 나오시죠? 그래서 여러분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좀 말씀을 봐야 되는데 이 베다니라는 지역은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있었던 삼남매가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곳 마을을 지나셔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거리로 보면 한 약 3kg 정도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배경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함께했는지 그리고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이 되었는지 함께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주변 예수님이 아닌 오늘은 조연급인 주변 사람들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임무를 부여받은 두 제자가 있죠. 예수님은 두 제자를 선택하셔서 중요한 임무를 주셨습니다. 어떤 임무였는지 우리 2절을 통해서 함께 살펴봅시다. 2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어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예수님께서 두 제자들에게 맞은편으로 가라 그렇게 명령을 하시죠. 거기에 가면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어 있을 것인데 그것을 풀어가지고 와라. 그리고 한마디 더 붙이셔요. 누군가가 왜 그러냐고 물으면 주님이 쓰시겠다 라 그렇게만 말씀하신 것이죠.
여러분 만약에 저와 여러분 중에 이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다른 말 안 하시고 야 건너편에 가서 나기 새끼가 묶여져 있는데 그거 풀어갖고 와라.
제가 곰곰히 생각해 봤어요. 뭐라고 해야 되나 그냥 순종할 수도 있지만 혹시 댓글을 하려면 뭐라고 해야 되나 생각을 해봤습니다. 예수님 12명이 있는데 12명 중에 왜 접니까? 저 말고 다른 제자 시키면 안 됩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요. 예수님 돈을 주고 가서 사오라는 것도 아니고 묶여져 있는 걸 그냥 풀어갖고 오라니요. 십계명에 위배되는 거 아닙니까라고 물을 수도 있죠.
또 아니 주인이 버젓이 있는데 그냥 끌고 가려는 그것도 문제지만 끌고 가는데 왜 가져가냐고 물을 때에 주가 쓰시겠다 합니다. 그 한마디로 누가 풀어줍니까? 제가 주인이어도 안 풀어줄 것 같습니다. 등등의 여러 가지 토를 달면서 불편한 표현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는요. 한마디의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토를 달거나 원망하지도 않고요. 회피하지도 않았다라는 거예요. 그냥 말씀하신 대로 순종했다. 어떻게 반응했는가 우리 4절에서 6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제자들이 가서 본 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불어 무엇하려느냐 함에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데 이에 허락하는지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을 그냥 따르는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죠. 적어도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따르는 제자들이었다라는 거예요. 물론 이 제자들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마음을 아직도 헤아리지 못해요. 3년이라는 시간을 같이 보냈지만 예수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서 지금 걸어가는지 그것조차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었던 것을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광의 자리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죠.
주님은 분명히 고난의 자리를 가야 한다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제자들은 그거 무슨 소용입니까? 영광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는 좌편에 우편에 앉혀주십시오. 그 이야기를 한 제자들에게 나머지 제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런 자들이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들이 3년 예수님과 동거동락하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겠어요? 3년을 이렇게 쭉 들어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희한하게 모든 것이 되어지는 것을 본 것이죠. 예수님께서 물을 떠다 갖다 주어라 하니까 포도주로 변해버린 거예요. 예수님께서 소경인 바디메오를 뜨라 하니 눈이 떠지는 거예요. 그렇게 몰아치던 바람으로 인해서 풍랑이 일던 그 바다가 우리 주님께서 잔잔하라 말씀하시니 잔잔해 지더라는 거예요.
더 놀라운 것은 이미 죽어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나사로에게 나와라 하니 그 나사로가 나오더라는 것이죠.
여러분 이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되더라. 이렇게 말씀하셔도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셔도 저렇게 되는 그러한 삶의 현장을 3년 동안 보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된다는 그 확신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안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믿음이 생겼다는 거예요. 따라서 이 제자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다는 그 확신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순종이라는 것은 믿음에서 시작이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 단어들을 가져다 댈 수 있지만 저는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이었어요? 순종이었어요. 그래서 명령하셨잖아요. 아담아 동산에 있는 수많은 나무 열매 너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거 열매는 절대 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죽을 거야.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죠. 반드시 죽는다는 그 사실을 아담이 믿음으로 받고 순종했다면 죄는 없었을 거예요.
사단이 와서 죽지 않아. 걱정하지 마.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거야라는 그 말 앞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믿음으로 있었다면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연약함이죠. 따라서 순종이라는 것은 전적인 신뢰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있어서 순종은 매우 고귀한 것이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었죠.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누굽니까?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알잖아요. 그 아브라함을 순종의 사람이 순종이 없이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가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죠. 만나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또한 두 번째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기 때문에 순종했다라는 거예요.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가 살고 있던 화려한 도시 거기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약속의 말씀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익숙한 곳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실제로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 있어야겠죠. 이곳으로 오라 할 때 여러분 스카우트 할 때 그렇잖아요. 거기보다 더 좋은 걸 요구해야 움직이는 거예요. 어떤 분명한 매력이 있어야 내가 살고 있던 도시를 떠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떤 매력을 가지고 떠나갔을까요?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만나주셨어요. 그리고 가라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 될지 방향과 목적지를 듣지 못했어요. 그냥 가라 하신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받은 것은 니가 가는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유업으로 줄 땅이다라는 것을 그가 들었던 거 그리고 그걸 붙잡았던 거예요. 어디가 될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그곳은 너의 자녀들이 그 자녀들에게 유업으로 이어질 땅이 그 말씀을 믿고 간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8절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세.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이처럼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 되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서 주님을 만나 주시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저 약속의 말씀 붙잡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거룩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두 번째는요. 나귀 새끼를 내어들인 사람들이 있잖아요. 갑자기 두 사람이 와서 묻지도 않고 매어 있는 나귀를 푸는 거예요. 물어야 되잖아요. 묻지 않고 푸는 걸 보니 주변에 있던 사람이 도리어 묻습니다. 나귀 새끼 풀어서 뭐 하려고 그러냐 그러자 제자들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주가 쓰신다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요. 더 묻지 않고 풀어서 내어드렸다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이 사람들이 마귀 새끼를 그냥 내어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뭐라고 생각하세요? 단서는 하나밖에 없잖아요. 주가 쓰시겠다 하라. 주가 쓰신다 합니다. 이 한마디에 내어드렸다라는 것이죠.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이 진정한 만물의 주인이시다. 그것을 이들이 인정했기 때문에 내어드린 거예요. 나귀의 주인은 나일지 모르겠지만 나의 주님은 주인이시다. 나의 주님이 나의 주인. 그러기에 나의 것을 드릴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주님이 이 땅에 살아계신 왕으로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주가 쓰시겠다라는 표현이라는 거. 물론 이들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거예요. 바디메오가 앉아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던 것처럼 이들도 어느 순간 3년이라는 세월 동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아니요. 어쩌면 이들도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몰라요.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럴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귓가에 들렸던 말은 무엇입니까? 주가 쓰시겠다는 이 표현이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들은 주가 쓰시겠다는 그 말씀에 주를 위해서 기꺼이 내어드리는 헌신을 하게 된 것이죠.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가 쓰시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마음을 내어드릴 수 있는 귀한 헌신의 마음이 있으신가요? 여러분 헌신이라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죠. 자원하는 마음으로 되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자원하는 마음은 사랑을 기초로 하게 돼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다면 보여주기 헌신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진정한 헌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예수님께 순전한 나드 한옥합을 드렸던 여인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여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행하기에 앞서서 많은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자기의 전재산과 같은 30대 1년 치 흠싹스 한 번에 향유로 예수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게 아닙니다.
또한 그 자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앉아서 식탁을 나누는 자리, 남자들끼리만 식탁기를 나눴었거든요. 그때 분위기가 여자들이 쉽게 가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무례함을 무릅쓰고 가서 샤유를 드리고 보십시오. 그러한 상황은 이 여인으로부터 망설임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심하고 힘을 다해서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감사하는 마음 또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죠.
여러분 헌신이라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강요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의 은혜에 대한 사랑과 감사가 경험되어질 때 그것이 전제되어질 때에 우리의 삶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특별히 내적 감사가 용기 있는 외적 표현으로 연결되어질 때에 진정한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의 순수한 헌신이 부지 중에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감당하는 그러한 은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앞서서 말씀드렸죠.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신다. 더불어서 하나님은요. 헌신하는 사람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 주가 쓰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그것이 들려진다면 나의 주인 되신 주님께 마음껏 내어드릴 수 있는 귀한 헌신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는요. 경배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8절에서 10절을 한번 보실까요? 같이 읽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밴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느니요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님께서 나귀에 올라타시자 주변의 사람들은요. 자기의 겉옷을 내어서 깔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뭇가지를 베어서 가시는 길에 깔기도 하지요. 당시 군중들이 겉옷을 펴는 행위. 그것은요. 고대 근동에서 귀인이나 왕을 영접하는 데 매우 익숙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스러웠던 것이죠.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아 저분은 좀 귀인이다 아니다라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의 입술의 고백이었다는 거예요.
그들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호산나 호산나 이들이 시편 118편 25절 26절로 너무나 잘 알던 말씀을 인용해서 고백하는 거예요. 우리 한번 같이 보실까요? 시편 118편 25절 26절 읽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옵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으이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주님을 보면서 따르는 무리들이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구원자이십니다. 당신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찬송으로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군중들은 주님을 지극히 높으신 그 곳을 놓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라며 환호하고 있었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분이셨지만, 우리의 죄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이죠. 저와 여러분도 그러한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 주님을 향해서 날마다 흐사나 감사 찬송 올려드리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현장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누가 더 있나 제가 세 부류를 이야기했는데 또 누가 더 있나 한번 생각해 이쪽 한켠에 보니까 예수님을 죽이려고 생각하던 종교 지도자들이 좀 보이십니까? 지나가는 사람들 보니까 행인 1 행인이 행인 3 무관심한 자들, 그들도 있었다는 예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고 경배하는 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시기하고 질투하고 죽이려 하는 자, 관심 없는 자들도 있었다는 거예요
이제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모습으로 지금까지 함께하셨나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것은 접어들고 그러면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이 됩니다. 여러분 한 주간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함께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던 제자들처럼 고난의 자리에 동참하는 순종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가 쓰시겠다 말씀하실 때 즐거이 헌신했던 사람들처럼 시간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정성을 들이는 헌신의 시간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나의 왕이십니다. 입술로 고백했던 그 무리들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찬양하며 경배하는 그리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드리는 귀한 한 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 신흥교회 특세는 40일 특세를 하지 않아요 감사하죠. 저 풍겨지는 40일씩 하고 40일 동안 어떻게 도장을 받아서 나갈까 열심히들 하더라고요. 우리는 5일 합니다. 5일 이 5일 동안 저와 여러분들이 좀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러분 담당 주관을 만들어드린 거는 그 외에 오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모의를 참석하시되 그때는 더 열심히 헌신하라는 이야기죠. 취지와 의도를 잘 알아야 되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들이 더 헌신할 수 있는 그러한 담당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고, 이 오일을 주님 앞에 순종하고 애쓰고 노력하고 힘쓰는 그 가운데 분명히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크고 놀라운 은혜로 찾아와 주시고 만나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성금 일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 주님을 기억하는 바, 여러분 어떤 일과도 바꾸지 않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가 나도 동참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부활절의 새벽을 깨우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벽에 잠으로 대신하시겠어요. 우리 주님이 나를 살리고자 죽으시고 영광의 자리에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부활의 현장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있는데 여러분 그 시간을 우리가 기쁨으로 맞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구경꾼이나 행인으로 지내지 마시고 순종으로 헌신으로 경배로 나아가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주님과 동행하는 여정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