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성경 전체를 일관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단일한 신학적 화두가 있다면 무엇일까? 과거에는 “언약”, “구속사”, “하나님 나라”와 같은 개념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근자에 많은 신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화두는 바로 “성전” 개념이다. 우주적 성전으로서의 창조와 그것의 재창조를 위한 회복의 과정이야말로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을 관통하는 가장 선명한 주제다. 그런데 종래에는 성전이라는 신학적 주제의 실마리를 창세기 2장을 출발점 삼아 풀어내는 것이 전부였을 뿐, 이 문제를 창세기 1장까지 소급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고대 근동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독보적인 저술활동을 해온 존 월튼에 의해 마침내 이 문제를 창세기 1장까지 거슬러 올라가 파고들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유명 신학자 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고대 근동 문헌에 정통한 월튼의 지식과 능력 덕분에, 새롭고 예기치 못한 빛이 비치어 창세기 1장의 심오한 의미가 드러나게 되었다.”
월튼은 아카드, 수메르, 이집트, 우가리트, 히타이트 등 고대 근동 문헌을 세심히 읽고 그 안에 담긴 우주론과 세계관을 추출한 뒤 이를 창세기 1장과 정밀하게 비교한다. 그 결과 창세기 1장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시간적인 계시의 산물이 아니라, 고대 근동의 인지 환경과 상당히 많은 내용을 공유하는 역사적 산물임을 증명한다. 창세기 1장과 고대 근동 문헌은 최소 두 가지 측면에서 세계관을 공유한다. 첫째, 고대 근동의 창조 이야기에서는 물질의 기원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그 기능과 질서에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 1장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이 세상을 언제 어떻게 만드셨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세상을 무슨 목적으로 만드셨느냐가 된다. 곧 창세기 1장 이야기는 하나님이 자기가 만드신 우주와 세계에 기능과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둘째, 고대 근동 문헌에서는 신들이 엿새에 걸쳐 신전을 세운 뒤 일곱째 날에 신전에서 안식하는 행위가 반복된다. 여기서 신들의 안식은 완성된 신전에서 신전을 통치하는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엿새 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은 우주를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 곧 성전으로 창조하신 후 완성된 성전에서 신적인 통치를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이렇게 창세기 1장과 고대 근동의 인지 환경은 정확히 대응한다.
하지만 양자 간에 차이점도 있다. 첫째, 고대 근동 문헌에 등장하는 신들은 우주의 일부로서, 우주 안에 내재한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우주 밖에서, 우주를 창조한 초월자로 등장한다. 둘째, 고대 근동 문헌에서 신들이 인간을 창조하는 목적은 신들의 노역을 대신 담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까닭은 그분의 형상으로서 우주 성전을 관리하고 통치하는 역할을 위임하기 위함이다.
유명한 구약신학자 브루스 월키는 월튼의 작업을 이렇게 평했다. “창세기 1장을 우주적 성전의 개시로 읽는 월튼의 관점은, 복잡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이 성경 본문의 해석사에서 기념비적 사례로 우뚝 서 있다.” 종래의 젊은 지구론, 오랜 지구론, 유신 진화론 등이 창세기 1장의 해석을 물질의 시작에 초점을 맞춘 작업이라면, 월튼의 우주 성전론은 신학적으로 전혀 새로운 견해일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과 과학적 해석의 관계에서도 진일보한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창세기 1장의 격조 높은 해석에 대해 알기 원하는 독자 및 성경 전체를 “성전” 키워드로 읽어내길 원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