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언어를 내려놓는 일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언어라는 도구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가되 궁극에는 언어를 버려야 한다
시는 언어를 딛고 언어를 넘어간다. 시는 없다. 시를 지향하는 마음 그 자체가 있을뿐이다.
시와 명상은 다 함께 초언어(超言語)를 지향하지만 시는 방법적 도구로 언어를 쓴다. 언어는 물(物)을 지시하는 기호다. 언어는 물이 아니다. 언어는 관념이다. 언어는 나와 물 사이에 있다. 언어는 나와 세계, 존재와 부재 사이에 걸쳐진 다리다.
시는 언어가 만들어내는 의미론적 연관의 장(場)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를 만나는 것은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들에 메아리치고 있는 비언어적인 울림 속에서다.
시는 언어가 아니다. 시는 언어와 언어 사이 그 여백에서 아직 형태소(形態素)를 얻지 못한 생성하는 언어, 발효하는 언어다.
시는 의미가 아니다. 의미 이전이다. 이를테면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혹은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김기택, 「얼룩」)와 같은 구절들은 시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미의 잠재태(潛在態)임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