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만춘 장군 ] 고구려 보장왕 때의 명장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安市城)의 성주였다. 안시성의 성주는 누구인지 삼국사기를 비롯한 정사(正史)에는 전하지 않지만 야사(野史)인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楊萬春)이라 전해지고 있다. [ 안시성의 위치 ] 안시성은 현재 중국의 요녕성(遼寧省, 구,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쪽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위치하여 요동성(遼東城: 遼陽)과 더불어 고구려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당시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던 고구려 영지로, 고구려가 요하(遼河)유역에 설치하였던 방어성들 가운데 전략적으로 요동성(遼東城)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소재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여 《금사》 지리지에 따라 만주 개평(蓋平) 동북의 탕지보(湯池堡)라 하기도 하고, 《이계집(耳溪集)》 또는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따라 만주의 봉황성(鳳凰城)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 여녕성(遼寧省) 장대철도(長大鐵道)의 해성(海城)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본래 이름은 안촌홀(安寸忽)이다. 안시성은 자연적으로 험준한 요새였으며 주변에 병기의 주원료인 철광석 산지와 곡창지대가 있었다. 신성(新城:지금의 요녕성 무순(撫順) 부근)과 건안성(建安城:지금의 요녕성 가이핑[蓋平]) 중간에 자리잡고 있어 안시성의 방어는 요동지역의 여러 성들을 방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압록강 북쪽의 오골성(烏骨城)·국내성(國內城)을 비롯하여 전국의 성을 수호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였다. [ 안시성 전투 ] 연개소문(淵蓋蘇文)은 혁명에 의해 영류왕과 간신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지만 양만춘 안시성주만이 유일하게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자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그에게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이는 그가 용기와 소신있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당태종의 침입 때 힘을 합쳐 당태종에게 치욕을 주기도 했다. 보장왕 4년, 당 태종은 친히 수륙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와 당차·포차 등의 신무기를 이용하여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며, 이어 안시성(지금의 해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645년(보장왕 4년) 645년 3월 15만의 병력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선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을 받은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撫順부근)과 비사성(卑沙城: 大連灣 北岸)이 항전 끝에 함락되었다. 645년(보장왕4) 당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여 고구려에 쳐들어와 요하 일대의 개모성(蓋牟城)·비사성(卑沙城)·요동성(遼東城: 遼陽)·백암성(白巖城, 연주성<燕州城> 성주 손대음장군 항복)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당태종은 이제 그에게 치욕을 안겨줄지는 까마득하게 모른채 역사적 결단을 내리게 된다. 당태종은 안시성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오직 안시성만이 연개소문에게 대항을 했고 연개소문 역시 안시성만은 굴복시키지 못했던 내막을 알고 있기에 안시성을 우회하여 건안성, 오골성을 쳐서 평양성으로 내려가자는 생각이었다. 다음 공격목표를 놓고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이세적이나 장손무기는 안시성을 그냥 두고 건안성을 공격하다가는 안시성의 급습을 받게 되고 그래서 보급이 끊기는 날이면 모두가 몰살될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결국 이세적(李世勣)의 건의가 채택되어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사실 고구려 성의 특징은 하나의 성이라도 제대로 함락시키지 못하면 다음 성을 공격하지 못하게 전략적으로 성을 쌓았으며, 설사 안시성을 포기하고 진군한다면 보급로가 끊기게 되는 전략을 당대 최고의 군사전문가로 불렸던 당태종이 간파를 못했지만 뛰어난 장수(?)를 수하로 두어 공격을 결정했지만 안시성은 당나라 군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견고한 고구려의 자랑스런 성이었다. 이 때는 이미 양만춘 장군이 당군의 침입을 미리 예상하고 군비를 갖추고 군사를 정예군사로 조련시켜 놓은 상태였으며, 연개소문은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가 이끄는 15만의 고구려·말갈 연합 구원군을 출병시켰으나 이 구원군은 안시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당태종의 유인 작전에 넘어가 안시성 근처 8리지점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당태종은 항복한 장수인 고연수고혜진에게 벼슬을 하사하여 후히 대접하고 포로중 3,000명만 내지로 압송하고 나머지는 모두 방면해 주었다. 그러나 포로로 잡힌 말갈병 3,300명은 산채로 모조리 구덩이에 파묻혀 죽였다. 이것은 고구려 병사에게는 당에게 항복하도록 하고 말갈족에게는 고구려를 도와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이제 그 누구의 원조도 없이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안시성은 그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성주 양만춘(楊萬春/梁萬春)과 군사와 주민들은 보여준다. 안시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일 뿐 아니라 그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 또한 백전불굴의 용사들이었다. 또한 안시성 지역은 고구려의 중요한 철산지로써 이곳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따라 국력이 좌우되었던 지역이다. 당태종은 총력을 다해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안시성의 군사들은 요지부동으로 굳건히 버티었다. 당태종의 지휘아래 당나라 대군은 계속 공격을 하지만 안시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당나라군대는 공격목표를 그 보다 훨씬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만주 鳳凰 남쪽의 高麗山城)으로 변경할 것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후 당태종은 휘하 장수 도종(道宗)을 책임자로 하여 16일 동안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하여 안시성 남쪽에 토산(土山)을 쌓아올려 점점 성높이와 같게 하여 당군은 하루에 6∼7차례 충거(衝車 :큰 나무로 성에 충격을 주는 攻城器) ·포거(抛車:돌을 날리는 공성기) 등을 동원, 성을 파괴하면 성 안에서는 곧 목책을 세워 이를 보완하였다. 고구려 병사들도 성 위에 흙을 쌓아 성의 높이를 높였는데 결국은 당나라의 토산이 안시성을 아래로 내려보게 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태종은 도종을 토성수비대장으로 삼고, 도종은 다시 부하인 부복애(傅伏愛)를 책임자로 임명하여 그 토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지키게 했다. 그런데 태종이 이렇게 공을 들여 쌓은 토산 한모퉁이가 갑자기 무너져 버렸다. 흙더미가 안시성 성벽을 덮치자 성벽 또한 무너져 내렸다. 이때 마침 부복애가 자리를 뜨고 없었는데 그 때를 틈타 안시성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토산을 탈취해 버렸다. 당태종은 부복애를 처형하고 토산의 탈환전을 위해 3일 동안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 끝내 토산을 탈환하지 못한다. 날마다 6∼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하여 총공세로 나왔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구려군의 용맹성에는 당태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마침 9월에 접어들어 요동의 기후가 추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병마(兵馬)의 양식도 서서히 바닥나기 시작하여 당군의 사기도 땅에 떨어지게 된다. 이때 고구려의 영웅 연개소문은 고구려 수군을 이끌고 당군의 보급로 였던 현재 대련 주위(장산군도)의 해상을 장악하여 당나라군의 보급로는 물론 퇴각로까지 차단한다. 이것은 당태종에게는 청천벽력같은 급보였다. 그동안 돌궐 정복과 서역으로의 진출 등 중화민족을 중흥을 진두지휘했던 영웅 당태종과 한족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급보였으며 그와 당나라 군대가 몰살 할 수 있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한다. 자신의 무덤은 고사하고 타국에서 개죽음을 당할 처지에 허겁지겁 포위를 풀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태종은 성안에서 쏜 화살을 눈에 맞아 상처가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퇴각을 결정한다. 10만 대군이 몰살될 걸 아는지 모르는지 북쪽으로 돌아서 후퇴를 못하고 황급히 오로지 하나의 퇴각로인 서쪽으로 직진하여 무덤의 늪 요택으로 밖에 퇴각할 수 밖에 없는 장수의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결국 태종은 포기하고 물러나가면서 안시성의 성주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대단히 잘 싸웠다고 하면서 비단 100필을 하사하고 갔다고 한다. 안시성 성주 역시 성 위에 올라 송별의 예(禮)를 표하자 당태종은 적(敵)일지라도성주의 영웅적인 지휘력에 감동하여 비단(絲繪) 100필을 보내 고구려 국왕에 대한 그의 충성을 기렸다고 전하지만 실은 안시성주를 안심시키고 퇴각시 시간을 벌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나름대로의 어설픈 전략이었다.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 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 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한 것으로 적고 있다. 안시성 전투 이후 당은 산발적으로 고구려 국경을 침범해 왔지만 다 물리쳤고 당태종은 죽으면서 고구려를 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잠언에 `경영(經營)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니 모략(謀略)을 가지고 전쟁하라'고 한 것처럼 당 태종은 나름대로의 전략을 가지고 고구려 공략에 임했다. 즉 수나라의 패전을 교훈 삼아 장마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였고, 안시성을 우회하여 평양을 직접 공격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안시성 전투가 이토록 길어지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요동지역의 혹한을 전혀 염두에 두지 못하는 해서는 안 될 실수를 범한다. 이는 물론 양만춘이라는 고구려의 명장이 안시성을 끝까지 지켜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구려 본기는 철군을 일찍 결정하는 덕분에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하게 되지만 11성(城)은 당나라에 반대하여 끝까지 항전하게 되며 검모잠(劒牟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부흥운동의 요동지역 중심지가 되었으나 671년 7월 당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는 것이 안시성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안시성주 양만춘 장군에 대한 생존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알려 준다. 고구려 보장왕 때의 명장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安市城)의 성주였다. 안시성의 성주는 누구인지 삼국사기를 비롯한 정사(正史)에는 전하지 않지만 야사(野史)인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楊萬春)이라 전해지고 있다. [ 안시성의 위치 ] 안시성은 현재 중국의 요녕성(遼寧省, 구,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쪽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위치하여 요동성(遼東城: 遼陽)과 더불어 고구려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당시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던 고구려 영지로, 고구려가 요하(遼河)유역에 설치하였던 방어성들 가운데 전략적으로 요동성(遼東城)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소재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여 《금사》 지리지에 따라 만주 개평(蓋平) 동북의 탕지보(湯池堡)라 하기도 하고, 《이계집(耳溪集)》 또는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따라 만주의 봉황성(鳳凰城)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 여녕성(遼寧省) 장대철도(長大鐵道)의 해성(海城)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본래 이름은 안촌홀(安寸忽)이다. 안시성은 자연적으로 험준한 요새였으며 주변에 병기의 주원료인 철광석 산지와 곡창지대가 있었다. 신성(新城:지금의 요녕성 무순(撫順) 부근)과 건안성(建安城:지금의 요녕성 가이핑[蓋平]) 중간에 자리잡고 있어 안시성의 방어는 요동지역의 여러 성들을 방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압록강 북쪽의 오골성(烏骨城)·국내성(國內城)을 비롯하여 전국의 성을 수호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였다. [ 안시성 전투 ] 연개소문(淵蓋蘇文)은 혁명에 의해 영류왕과 간신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지만 양만춘 안시성주만이 유일하게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자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그에게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이는 그가 용기와 소신있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당태종의 침입 때 힘을 합쳐 당태종에게 치욕을 주기도 했다. 보장왕 4년, 당 태종은 친히 수륙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와 당차·포차 등의 신무기를 이용하여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며, 이어 안시성(지금의 해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645년(보장왕 4년) 645년 3월 15만의 병력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선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을 받은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撫順부근)과 비사성(卑沙城: 大連灣 北岸)이 항전 끝에 함락되었다. 645년(보장왕4) 당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하여 고구려에 쳐들어와 요하 일대의 개모성(蓋牟城)·비사성(卑沙城)·요동성(遼東城: 遼陽)·백암성(白巖城, 연주성<燕州城> 성주 손대음장군 항복)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당태종은 이제 그에게 치욕을 안겨줄지는 까마득하게 모른채 역사적 결단을 내리게 된다. 당태종은 안시성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오직 안시성만이 연개소문에게 대항을 했고 연개소문 역시 안시성만은 굴복시키지 못했던 내막을 알고 있기에 안시성을 우회하여 건안성, 오골성을 쳐서 평양성으로 내려가자는 생각이었다. 다음 공격목표를 놓고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이세적이나 장손무기는 안시성을 그냥 두고 건안성을 공격하다가는 안시성의 급습을 받게 되고 그래서 보급이 끊기는 날이면 모두가 몰살될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결국 이세적(李世勣)의 건의가 채택되어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사실 고구려 성의 특징은 하나의 성이라도 제대로 함락시키지 못하면 다음 성을 공격하지 못하게 전략적으로 성을 쌓았으며, 설사 안시성을 포기하고 진군한다면 보급로가 끊기게 되는 전략을 당대 최고의 군사전문가로 불렸던 당태종이 간파를 못했지만 뛰어난 장수(?)를 수하로 두어 공격을 결정했지만 안시성은 당나라 군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견고한 고구려의 자랑스런 성이었다. 이 때는 이미 양만춘 장군이 당군의 침입을 미리 예상하고 군비를 갖추고 군사를 정예군사로 조련시켜 놓은 상태였으며, 연개소문은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가 이끄는 15만의 고구려·말갈 연합 구원군을 출병시켰으나 이 구원군은 안시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당태종의 유인 작전에 넘어가 안시성 근처 8리지점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당태종은 항복한 장수인 고연수고혜진에게 벼슬을 하사하여 후히 대접하고 포로중 3,000명만 내지로 압송하고 나머지는 모두 방면해 주었다. 그러나 포로로 잡힌 말갈병 3,300명은 산채로 모조리 구덩이에 파묻혀 죽였다. 이것은 고구려 병사에게는 당에게 항복하도록 하고 말갈족에게는 고구려를 도와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이제 그 누구의 원조도 없이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안시성은 그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성주 양만춘(楊萬春/梁萬春)과 군사와 주민들은 보여준다. 안시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일 뿐 아니라 그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 또한 백전불굴의 용사들이었다. 또한 안시성 지역은 고구려의 중요한 철산지로써 이곳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따라 국력이 좌우되었던 지역이다. 당태종은 총력을 다해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안시성의 군사들은 요지부동으로 굳건히 버티었다. 당태종의 지휘아래 당나라 대군은 계속 공격을 하지만 안시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당나라군대는 공격목표를 그 보다 훨씬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만주 鳳凰 남쪽의 高麗山城)으로 변경할 것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후 당태종은 휘하 장수 도종(道宗)을 책임자로 하여 16일 동안 연인원 50만명을 동원하여 안시성 남쪽에 토산(土山)을 쌓아올려 점점 성높이와 같게 하여 당군은 하루에 6∼7차례 충거(衝車 :큰 나무로 성에 충격을 주는 攻城器) ·포거(抛車:돌을 날리는 공성기) 등을 동원, 성을 파괴하면 성 안에서는 곧 목책을 세워 이를 보완하였다. 고구려 병사들도 성 위에 흙을 쌓아 성의 높이를 높였는데 결국은 당나라의 토산이 안시성을 아래로 내려보게 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태종은 도종을 토성수비대장으로 삼고, 도종은 다시 부하인 부복애(傅伏愛)를 책임자로 임명하여 그 토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지키게 했다. 그런데 태종이 이렇게 공을 들여 쌓은 토산 한모퉁이가 갑자기 무너져 버렸다. 흙더미가 안시성 성벽을 덮치자 성벽 또한 무너져 내렸다. 이때 마침 부복애가 자리를 뜨고 없었는데 그 때를 틈타 안시성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토산을 탈취해 버렸다. 당태종은 부복애를 처형하고 토산의 탈환전을 위해 3일 동안 밤낮으로 공격하였으나 끝내 토산을 탈환하지 못한다. 날마다 6∼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하여 총공세로 나왔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구려군의 용맹성에는 당태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마침 9월에 접어들어 요동의 기후가 추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병마(兵馬)의 양식도 서서히 바닥나기 시작하여 당군의 사기도 땅에 떨어지게 된다. 이때 고구려의 영웅 연개소문은 고구려 수군을 이끌고 당군의 보급로 였던 현재 대련 주위(장산군도)의 해상을 장악하여 당나라군의 보급로는 물론 퇴각로까지 차단한다. 이것은 당태종에게는 청천벽력같은 급보였다. 그동안 돌궐 정복과 서역으로의 진출 등 중화민족을 중흥을 진두지휘했던 영웅 당태종과 한족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급보였으며 그와 당나라 군대가 몰살 할 수 있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한다. 자신의 무덤은 고사하고 타국에서 개죽음을 당할 처지에 허겁지겁 포위를 풀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태종은 성안에서 쏜 화살을 눈에 맞아 상처가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퇴각을 결정한다. 10만 대군이 몰살될 걸 아는지 모르는지 북쪽으로 돌아서 후퇴를 못하고 황급히 오로지 하나의 퇴각로인 서쪽으로 직진하여 무덤의 늪 요택으로 밖에 퇴각할 수 밖에 없는 장수의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결국 태종은 포기하고 물러나가면서 안시성의 성주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대단히 잘 싸웠다고 하면서 비단 100필을 하사하고 갔다고 한다. 안시성 성주 역시 성 위에 올라 송별의 예(禮)를 표하자 당태종은 적(敵)일지라도성주의 영웅적인 지휘력에 감동하여 비단(絲繪) 100필을 보내 고구려 국왕에 대한 그의 충성을 기렸다고 전하지만 실은 안시성주를 안심시키고 퇴각시 시간을 벌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나름대로의 어설픈 전략이었다.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 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 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한 것으로 적고 있다. 안시성 전투 이후 당은 산발적으로 고구려 국경을 침범해 왔지만 다 물리쳤고 당태종은 죽으면서 고구려를 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잠언에 `경영(經營)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니 모략(謀略)을 가지고 전쟁하라'고 한 것처럼 당 태종은 나름대로의 전략을 가지고 고구려 공략에 임했다. 즉 수나라의 패전을 교훈 삼아 장마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였고, 안시성을 우회하여 평양을 직접 공격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안시성 전투가 이토록 길어지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요동지역의 혹한을 전혀 염두에 두지 못하는 해서는 안 될 실수를 범한다. 이는 물론 양만춘이라는 고구려의 명장이 안시성을 끝까지 지켜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구려 본기는 철군을 일찍 결정하는 덕분에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하게 되지만 11성(城)은 당나라에 반대하여 끝까지 항전하게 되며 검모잠(劒牟岑)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부흥운동의 요동지역 중심지가 되었으나 671년 7월 당나라 군대에 함락되었다는 것이 안시성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안시성주 양만춘 장군에 대한 생존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알려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