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훤당 김굉필을 만나러 떠난다.
그는 조선 제일의 성리학자로 존경받은
인물이다. 그는 배운 그대로 실천한 도학자였다.
퇴계 이황은 김굉필(金宏弼)을 일러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으로 칭송했다.
그의 신도비 역시 그를 최고의 찬사로 기리고 있다.
“진유(眞儒)가 동방에서 나와 도학(道學)이
여기에 전해지게 되니, 선생이 바로 그분이다.“
현풍을 지나 대구의 명산 대니산(戴尼山)을
넘어야 한훤당 김굉필을 만날 수 있다.
2년 전 대니산을 관통하는 터널이 뚫렸다.
가파르고 좁은 옛길로 고개에 올랐다.
해발 250m의 다람재다.
이 고갯길이 다람쥐 닮았다고 해서
예로부터 다람재라고 부르고 있다.
이 고개에서 한훤당 김굉필을 만난다.
그의 한시 노방송(路傍松)을 새긴 자연석 비가 객(客)을 맞이하고 있다
노방송(路傍松)
먼지 이는 길가 푸른 노송 하나 서 있네
오가는 길손들 분주히 맞고 보내네
찬 겨울에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느냐
(一老蒼髥任路塵 勞勞迎送往來賓
歲寒與汝同心事 經過人中見幾人)
이 시는 김굉필의 학문적 자세 일단을 보여준다.
그는 지조를 지키고자 하는 실천의지와 노력을 길가의
소나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먼지 이는 길가’나 ‘오가는 길손’은 세상 풍파와 지조 없는 이들을
상징하는 말이다. ‘분주히 맞고 보내는’ 것이나 ‘푸른 노송’은
이런 풍파와 사람들을 대하는 힘든 모습과 그런 가운데서도
지조를 잃지 않고 유지하는 실천력을 보여주는 말이다.
예로부터 동양에서 소나무는 인간의 윤리 의식을 대변하는 나무 이상의 존재다.
그는 단지 머리로 학문을 이해하거나 가슴으로만 학문을 공감하지는 않았다.
그저 말로만, 글로만 그럴 듯하게 꾸며대는 ‘죽은 학문’을 결코 하지 않은 김굉필이다.
진리(眞理)를 배우고 알았으면 그는 바로 ‘있는 그대로’(as it is)의진리를 주저하지 않고
실천했다.
그는 몸소 실천한 도학자였다.
노방송 시비 옆에 육각정이 있다.
팔각정에 오르면 낙동강이 한 눈에 든다.
옆으로는 대니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도동서원(道東書院)이 어울러져 절경을 이룬다.
그 육각정 옆에는 다람재 사연을 전하는 비석이 있다.
그 비문을 옮겼다.
여기 느티골과 정수골을 사이한 산등성이가
마치 다람쥐를 닮아 옛부터 ‘다람재’라 불러 왔다.
원래 강변 벼랑쪽으로 치우친 오솔길을 버리고
산허리를 끼고 도는 새길을 훤하게 닦고 나니 재 넘어
마을들이 이웃이 되면서 훈훈한 인정과 복지의 짐 바리가
거침없이 넘나들게 되었다.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칠백리 푸른 물길에
상고선 줄을 잇고 나루 흥청 거리던 번영을
되찾아 향토의 끝없는 영광을 노래하자.
1986년 12월 26일
군수 신 영식 짓고
취헌 곽 동주 쓰다.
김굉필(金宏弼)의 호는 환훤당(寒暄堂)이다.
‘한훤(寒暄)’은 ‘추울 한(寒), 따뜻할 훤(暄)’,
한마디로 ‘추위와 더위’를 뜻하고 있다.
계절의 순환과 같은 자연의 변화와 조화를 상징하는
성리학적 우주관을 담고 있는 ‘한훤(寒暄)이다.
김굉필이 19세가 되던 1472년 처가인 경남 합천에 서재 ‘한훤당’을
지으면서 그의 호를 한훤당으로 했다고 한다.
김굉필은 합천 처가의 서재 ‘한훤당’에서 계절이 바뀌고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를 보며 자기를 수양하고 학문을 연마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처사(處士)의 삶을 살고자 하였던 것이
아마 그의 꿈이 아니었을까한다.
김굉필도 벼슬길에 나선다.
성종 25년(1494),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해다.
경상도관찰사 이극균의 천거로 종9품 남부참봉에 제수된다.
이어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에는 군자감 주부에 제수됐다.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정6품)에 오른다.
출세가도는 조정 막료들이 그의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신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굉필의 관직생활은 길지 않았다.
무오사화(연산군 4년·1498년)가 일어나며 한순간에 역적으로 몰린다.
그는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된다. 2년 뒤에는 또 한 번 순천으로 이배됐다.
그리고 극형에 처해진다.
평생 강학(講學)에 몰두하며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그렇게 자기 뜻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인가 보다.
김굉필은 유배지에서 조광조를 만났다.
그는 17세의 조광조에게 ‘선비의 행동’을 가르친다.
그가 인용한 공자의 ‘선비사상’, ‘선비의 길’의 그 일부를 옮긴다.
“선비는 재물을 탐하는 태도를 버리고 즐기고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며
이익을 위하여 의로움을 손상시키지 않고 여럿이서 위협하고 무기로써
협박을 하여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의 지조를 바꾸지 않습니다.“
‘소학동자‘ 한훤당 김굉필의 세계로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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