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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치형 일본棋행 ] | ||||
일본의 신문바둑, 그 초창기의 모습 | ||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명치32년(1899년) 8월 31일, 요미우리신문 바둑란에 수순이 다한 수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기보가 실린다. 내일부터 동경의 이와사키 켄조우(巖崎健造) 7단과 오사카의 이즈미 슈세츠(泉秀節) 5단이 일본 최초로 전보를 통해 대국을 하니, 독자는 매일 수순 중계를 들으며 스스로 기보를 작성해 보라는 뜻이었다. 최초의 전보바둑, 거기에 9월 1일부터 12월 8일까지 총99일에 걸친 대국. 지금 들어도 획기적인 이 기획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심지어 내일 전해질 ‘다음의 한 수’에 사람들이 돈을 걸어 내기를 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더불어 당시 동경 긴자(銀座)에 있던 요미우리신문사 건물의 외벽에는 다다미 2조 크기의 대형 바둑판이 게시되었다. 전보가 전해질 때마다 수순이 표시되는 이 바둑판 앞에 매일 긴자의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 들었음은 물론이다. 거의 모든 일간지가 바둑란을 가지고 있고, 인터넷에서 ‘바둑’을 검색하면 다 읽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정보가 나오고, TV를 틀어도 바둑이 나오는 시대에 사는 우리에겐 해설도 없이 수순만 진행되는 바둑판을 보겠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요즘은 지방의 바둑행사만 가더라도 유명 프로기사들이 커다란 자석 바둑판 앞에서 자신이 둔 바둑을 직접 해설해주고, 운이 좋다면 직접 한 수 배울 수도 있다. 하지만 20세기를 1년 남겨둔 시기를 살았던 평범한 일본인들에게 대고수의 바둑을 실시간으로 접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시로부터 불과 35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쇼군(將軍)이 보는 앞에서 오시로고(御城碁)를 두던 기사들이었던 것이다. 오시로고란 일본 바둑계의 4대 가문, 혼인보, 이노우에, 야스이, 하야시의 아토메(후계자)와 대표 선수들이 매년 에도(지금의 동경)에 있는 쇼군의 성에서 쇼군이 관람하는 가운데 대국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현재 남아 있는 오시로고의 기보집을 보면 寬永3년(1627년) 9월 17일의 나카무라 도세키와 야스이 산테츠의 대국을 제1보로 기록하고 있다. 그로부터 마지막 어성기 대국이 두어졌던 1862년까지 약240년 간 이어진 어성기는 바둑이 특권 계층의 전유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과 같은 행사였다. 각 가문의 이에모토(家元)들은 어성기의 대가로 각각 쇼군으로부터 녹봉을 받았고, 기사들은 어성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바둑 기술을 연마했으며, 그렇게 연마한 기술은 다른 가문에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자 상황은 급격히 변화한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정치, 경제, 산업, 문화 등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나 에도 시대의 250여 년 간 그 생존을 막부의 강력한 지원에 의존하여 일반인과는 전혀 교류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경제권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 받았던 바둑계는 그렇지 않은 분야보다 훨씬 더 많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메이지정부는 1869년 메이진코도코로(名人碁所) 의 제도를 없앤다. 신정부의 요인들 중에도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신정부의 기본방침이 막부가 만든 기구와 제도를 모두 해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4대 가문 중 가장 강력한 가문이었던 혼인보가마저도 지금까지 살던 집을 팔아 그 대금으로 간신히 생활해야 했을 정도도 생활이 막막해진다. 에도 시대를 통해 오랜 세월 쌓아 올린 바둑의 강력한 이미지도 유신 직후의 사회에서는 한 동안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전문 기사의 상당수가 동경에서는 생계를 이어가기 곤란하여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생활을 했다. 하지만 조만간 이들에게 재도약의 기회가 찾아 온다. 물론 과거와 같이 한번 명인기소가 되면 죽을 때까지 그 지위와 영예를 누리는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지만 실력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유명해 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 준 주역이 바로 신문의 바둑란이다. 일본에서 신문이 처음 생겨난 것은 메이지 초기의 일이다. 일본 최초의 신문은 요코하마마이니치신문으로 1871년에 창간되었다. 神奈川県 정부로부터 운영자금을 지원 받고 일정 부수를 현에서 사주는 대신 현 정부의 시책을 일반에 전달하는 일종의 기관지 역할이었다. 대부분 초기 일본 신문은 이런 기관지적인 성격을 가지고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락 중심적인 신문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러한 신문들을 중심으로 부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주요 일간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 마이니치의 전신)과 우편호치신문이 1872년에 창간 되었고, 요미우리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875년, 그리고 아사히가 1879년에 창간되었다. 일본의 신문바둑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신문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시사신보이다. 시사패퇴기(時事敗退碁)와 그 이후 명칭을 바꾸어 계속된 시사신수합(時事新手合)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최초로 신문에 바둑을 게재한 것은 우편호치신문으로 명치 11년 (1878년) 4월 1일의 일이다. 제1국의 대국자는 나카가와 가메사부로(中川亀三郞) 6단과 타카하시 키네사부로(高橋杵三郞) 5단으로 두 기사 모두 호엔샤와 관련이 깊은 기사이다. 이후 호치신문은 관심을 끌만한 중요한 대국이 있을 때마다 바둑을 게재하여 명치19년(1886년) 야노 후미오(矢野文雄)사장의 취임 후 한동안 바둑 게재를 중단하게 될 때까지 총 100국 정도를 싣는다. 비록 지금의 신문 관전기들과는 달리 대국일자, 대국장소, 대국자, 승패, 그리고 지면이 허락하는 경우에는 간략하게나마 기사들의 코멘트를 싣는 정도였지만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꾸준히 바둑을 게재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 하지만 호치신문이 바둑계에 가장 중요한 공적은 역시 “다음의 한 수”이다. 일본 신문 바둑 역사를 통틀어 최초이자 가장 이벤트성이 강한 기획 중 하나인 이 기획은 야노 사장이 퇴임한 1890년에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선택된 기보는 호엔샤(方圓社)의 코바야시 테츠지로(小林鉄次郞)와 하야시 센지(林千治 – 후일의 제2대 中川亀三郞)와의 대국으로, 이 대국의 제54번째 수를 맞추는 것이 그 첫 번째 문제였다. 1월 중 4일 간 이전의 수순과 문제도가 게재되고 2월에 정답자를 발표하였는데 워낙 응모자가 많아 도중에 응모기간을 줄이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실전에 두어진 수를 맞힌 1등에게는 호치신문 1년 정기구독권이, 그 외의 좋은 수를 맞힌 2등에게는 6개월 정기구독권이 주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전문기사들도 현상에 참가하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점이다. 제1회 당선자 중에는 이와사키 켄조(巖崎健造) 8단의 이름이, 2등 중에는 야스이 산에이(安井算英) 7단의 이름이 올라와 있고 제3회째에는 후일의 혼인보 슈사이인 타무라 야스히사(田村保寿)도 정답자에 이름을 올렸다. 물론 기획은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많은 신문에서 “다음의 한 수”를 모방한 기획들을 내 놓는다. 한편, 호치신문이 바둑란을 폐지한 명치 19년보다 1년 앞선 시기부터 요미우리신문도 바둑을 게재하기 시작한다. 우선 1885년 3월 5일 기사에는 “위기유행(囲棋流行)”이라는 제목으로 교토의 게이샤들이 손님들을 상대하기 위해 앞다투어 바둑을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이 실린다. 가십(gossip)같은 기사이긴 하지만 당시 일반에 바둑이 어느 정도 침투해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곧이어 같은 해 3월 10일에는 첫 기보가 게재된다. 조금 갑작스럽게 혼인보 슈에이(秀英)와 슈호(秀甫)의 10번기 대국 중 제4보를 싣기 시작한데다 역시나 별다른 해설이나 강평 없이 ‘몇 번째의 수가 좋았다’ 정도의 간단한 코멘트가 실렸으나 독자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고 한다. 또한 같은 해 5월에는 “바둑을 좋아하는 한 도적이 역시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 집에 들어갔다가 바둑에 정신이 팔려 잡히고 말았다”는 믿기 힘든 사건 보도가 실려 이 또한 당시의 바둑이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호치와 요미우리에 비해 시작은 좀 늦었지만 명치시대에 일본에서 바둑을 가장 크게 다룬 신문은 시사신보(時事新報)였고 그 만큼 바둑계에 남긴 인상도 컸다. 시사신보는 유명한 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해 창간되었는데, 그는 영국의 타임즈가 체스칼럼을 싣는 것에 자극을 받아 바둑란을 설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시사신보가 처음으로 바둑을 게재한 것은 1896년(명치29년) 8월 7일로, 주목할 만한 것은 대체적인 형식이 지금의 신문 바둑란과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다. 제1회에는 야스이 산에이(安井算英) 6단과 타무라 야스히사(田村保寿) 5단의 대국을, 제2회는 사활문제를 게재하였다. 이후 1900년(명치33년) 12월 30일까지 총228회를 게재한 후 “시사패퇴고(時事敗退碁)”로 이름을 바꾸어 계속된다. ![]() 1899년(명치32년)은 서두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요미우리가 사상 최초로 “동경대판위기전신대수합(東京大阪囲碁電信大手合)”이라는 대대적인 기획을 실행시킨 해이다. 요미우리는 8월 중순부터 이 기획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데, 바둑이 이처럼 연일 크게 실린 것 자체가 신문 바둑 역사상 전무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8월 31일에 전설적인 백지 기보용지가 신문에 실린다. 요미우리의 사옥 외벽에 대형바둑판이 게시되고 종이로 만든 흑과 백돌을 붙여 전보가 올 때마다 그 진행을 표시한 것 역시,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요미우리 독자의 란(하가키集)에 이와 관련한 많은 량의 투고가 들어왔던 것도 당시의 인기를 가늠하게 해 주는 척도다. 장장 99일 동안 진행된 바둑은 무승부로 끝났고 그 이후에는 호엔샤의 기보 해설이 15회 동안 연재되었다. 흥행에 성공한 요미우리는 곧바로 동일한 대국자 간의 제2회 전신바둑을 개최, 이번에는 이와사키 7단이 2집을 이긴다. 이 기획은 "Tokyo-Osaka Go Telegraph Game" - over 100 days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일본의 경제가 계속적으로 성장하면서 신문의 종류 자체가 많아진 것은 물론 바둑을 싣는 신문의 수도 늘어났다. 당시에 이미 바둑란을 가진 신문이 10여 종이나 되었고 바둑잡지도 10여 개에 달했다. 신문사들의 형편도 전보다 좋아져 바둑도 이전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 지금은 없어져 버린 신문이지만 청일전쟁 이후 동경 제1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만조보(万潮報)또한 <기전(碁戰)>이라는 바둑기획으로 유명했다. <기전>이 처음으로 열린 것은 1905년(명치38년) 11월 25일. 당대에 인기가 가장 좋았던 호엔샤와 혼인보 가문의 대결이 자주 기획되었다. 조금 시일이 흐른 후의 일이지만 명치 43년 1월 8일에는 고대하던 두 세력의 대표 5인 간의 대결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기전”은 시사신보의 “시사패퇴고”와 함께 당시 바둑팬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아 시사신보와 만조보를 함께 구독해야만 진정한 바둑팬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생계마저도 위협 받던 일본 바둑계는 이처럼 신문의 바둑란에 힘입어 조금씩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다. 혼인보 가문이 다시 진용을 갖추기 시작한 것도, 갓 태어난 호엔샤가 기존의 권위와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신문이라는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기사들의 생활은 여러 가지 비정기적인 수입들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기사들의 신분이나 단위, 대국 등도 과거의 방식에 의해 규정되는 과도기였지만, 일본의 바둑계는 신문의 힘을 통해 점차 현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 ◇ 남치형 바둑학과 교수 ![]() 저서로는 Jungsuk in Our Time(2000, 한국기원), Contemporary Go Terms(2004, 오로미디어), Baduk Made Fun & Easy 1(2006, 은행나무), Baduk Made Fun & Easy 2(2007, 은행나무) 등 다수의 영어 바둑책을 펴냈으며, “Malory의 The Tale of the sankgreal연구”(2004, 석사학위논문) 외 다수의 바둑학 논문이 있다. [글 : 남치형] ○●월간바둑 정기구독(클릭) |
첫댓글 한때 우리도 신문에 나는 바둑을 스크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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