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號는 退耕. 聞慶市 山北面 石鳳里 出生. 아버지는 贊泳이다. 7歲부터 書堂에서 10년간 漢學을 배웠으며, 1896년 聞慶 金龍寺에서 瑞眞을 恩師로 僧侶가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金龍寺 佛敎專門講院에서 佛敎學을 硏究하여 四集科·四敎科·大敎科를 履修하였으며, 1903년 金龍寺에서 禪師 永安의 認可를 받고 講席을 열었다.
1906년 金龍寺 慶興學校와 聖義學校 講師를 歷任하였다. 1909년 圓宗의 宗務 編輯部長으로 活動하였고, 1911년 聞慶 大乘寺의 住持로 있었다.
1912년 朝鮮佛敎月報社 社長으로 就任하여 ≪佛敎月報≫를 6년 동안 發行하다가, 1918년부터 1922년까지 金龍寺 地方學林(金龍初等學校 前身)과 尙州 普光學校의 講師를 歷任하였다. 1923년부터 1931년까지 佛敎社 社長으로 就任하여 ≪佛敎≫誌를 發刊하였으며, 1931년부터 1944년까지 東國大學校의 前身인 中央佛敎專門學校 敎授로 在職하면서 後學들을 養成하였다.
1944년부터 1946년까지 佛敎總本山인 太古寺의 敎學編修委員을 歷任하였고, 1946년 4월 東國大學校 敎授로, 같은 해 6월 學長으로 就任하였다. 1953년 2월 東國大學이 綜合大學으로 昇格되자 初代 總長職을 맡았으며, 그 해 7월 停年退任과 同時에 名譽敎授가 되었다. 1962년 東國大學校에서 名譽哲學博士 學位를 받았고, 같은 해 大韓民國 文化勳章을 받았다. 一生을 韓國 佛敎學의 定立과 佛敎思想 發掘 宣揚에 專念하면서 敎育界·言論界 등 여러 分野에 至大한 業績을 남겼다. 歷任했던 名譽職으로는 韓國博士學位論文 審査委員, 國語審議會 委員, 國史編纂委員會 委員, 佛敎布敎師試驗 檢正委員, 佛敎法戒考試委員會 委員長, 佛敎法規 委員, 佛敎聖殿 編纂委員, 文敎部 國定敎科書 校査委員, 大韓古書刊行會 國譯委員, 大韓宗敎信徒聯盟 顧問, 新羅伽倻文化硏究所 委員, 우리말 八萬大藏經編修委員會 委員長, 中央佛敎硏究院 院長, 東國譯經院 譯經委員, 佛敎曹溪宗元老會 院長, 現代佛敎社 社長, 佛敎思想社 社長 等이다.
1879(高宗 16)∼1965. 僧侶·佛敎學者.
代表的인 著述로는 ≪朝鮮佛敎略史≫와 ≪朝鮮佛敎史≫·≪三國遺事譯講≫이 있으며, 史料를 集大成하여 編纂한 ≪高麗史佛敎鈔存≫·≪李朝實錄佛敎鈔存≫·≪韓國佛敎史料≫·≪韓國寺刹全書≫·≪韓國地名沿革考≫ 等이 있다. 代表的인 論文으로는 <능엄요초 楞嚴要抄>·<八關會參考>·<자학관규 字學管窺> 등 總 18편이 있다. 入寂한 뒤 曺溪宗에서는 大宗師의 法戒를 주었다.
退耕堂 權相老 大宗師 事蹟碑-金龍寺 一株門 뒤에 있다.
雲達山 金龍寺는 예로부터 많은 高僧大德이 난 伽藍이다. 여기가 敎宗의 講伯이자 學壇의 銳學이셨던 退耕堂 權相老 先生이 出家하여 부처의 거룩을 깨치셨으니 이는 그 敦厚한 姓名과 더불어 길이 빛날 事緣이다. 先生은 佛紀 2423년(公元 1879) 2월 28일 산좋고 물 맑은 聞慶 山北面 石峯里에서 權賞泳씨의 맏이로 태어나 佛記 2509년(1965) 4월 19일 享年 87歲로 世緣을 다하시니 법랍(法臘)은 67이셨다.
貫鄕은 安東이고 退耕은 雅號이자 堂號이며 法階는 大宗師셨다. 타고남이 슬겹고 다사하신데다 공부가 워낙 뛰어나서 진작부터 大成할 조짐이 넘났다고 한다. 일찍이 이웃 마을 私塾에서 科業을 위한 經史와 詩賦를 專心타가 東學民亂을 둘러싼 內外政勢를 탓하여 發心한 나머지 佛記 2440년(1896) 4월 사무친 願을 세워 金龍寺 瑞眞 스님을 恩師로 歸依得度하여 一代時敎를 마치고 佛紀 2447년(1903) 5월 永安 스님 밑에서 入室建幢하셨다. 이어서 金龍寺 附設인 慶興과 聖儀講院의 講師를 歷任하고 佛記 2450년(1906) 上京하여 東國大學校의 搖籃으로 新學問의 發想인 明進學校를 나오셨다. 다시 四佛山 大乘寺 住持를 거쳐 佛記 2456(1912)에는 中央宗務院 編輯局長에 選任되어 朝鮮佛敎月報와 佛敎誌를 主管하시며 衆論을 통한 宗風振作에 이바지한 功이 크셨다.
한편 金龍寺中央學校와 尙州普光學校의 講師를 歷任한 뒤 宗立學府인 中央佛敎傳門學敎 敎授로 就任하여 校舍新築과 아울러 改名한 惠化專門學敎 敎授 在任중에 日帝의 덧없는 特別措置令으로 抑壓한 뒤 차마 廢校되자 佛敎總本山 敎學硏修委員長에 專任돼 總務院에서 執務 佛紀 2489년(1945) 8.15 光復으로 復校되어 改名한 東國大學校 敎授로 輔任되어 새로 자리잡은 南山 기슭 東岳을 오르내리시며 敎學에 몸바치셨다. 그 뒤 佛記 2494년(1950) 6.25動亂으로 釜山에 南下하여 學長職을 맡아 敎勢를 擴充하여 佛記 2497(1953) 2월 綜合大學校로 昇格시켜 初代總長에 就任하셨다. 그 해 停年退任과 함께 名譽敎授로 추대되고 佛記 2506년 (1962) 4월에는 東國大學校 大學院에서 名譽哲學博士 學位를 받고 8월에는 文化大勳章을 타셨다.
退耕堂 權相老 大宗師 篇額과 墨畵 2점
大乘寺 一株門의 '四佛山大乘寺'
喜方寺 寮舍채 側壁의 '喜方寺'
1925년 부모은듕경(父母恩重經)에 실린 權相老 지음 ‘讚佛歌’가 최고<最古>
‘讚佛歌’ 用語, 中 의정의 ‘南海기귀내법전’에 첫 登場
조학유는 1926∼27년 ‘佛敎’지에 創作·編作曲 發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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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권상로가 펴낸 ‘부모은듕경’에 실린 현존 최고의 불교음악 ‘찬불가’. |
引渡에서 發生한 佛敎音樂은 佛敎가 傳來된 國家와 地域마다 그 特性에 맞게 獨特하면서도 多樣하게 變遷해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佛敎音樂은 中國으로 流入된 印度音樂이 傳來된 것이 아니라, 中國의 佛敎音樂이 그대로 流入된 것이다. 이같은 事實은 眞鑑國師가 棠나라로부터 梵唄를 傳受 받아 新羅에 流布시켰다는 記錄에서 確因할 수 있다. 佛敎音樂은 已後 여러 類型으로 發展했고, 現代的 意味의 찬불가(讚佛歌)가 利用되기 始作한 것은 1920년대 들어서부터다. 오늘날의 讚佛歌는 口碑傳乘으로 傳來된 佛敎音樂과 달리 西洋音樂技法에 의해 만들어진 曲들이 主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讚佛歌가 만들어지기 始作한 初期에는 “왜 다른 宗敎의 用語를 借用해서 쓰느냐”는 抗議가 빗발치기도 했고 “法堂에서 오르간 소리가 웬말이냐”고 호통을 치는 등의 웃지 못할 해프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讚佛歌는 다른 宗敎에서 使用하는 讚頌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中國 唐나라의 僧侶 의정이 印度 遊學 중에 닦은 僧侶의 規範을 40개 項目으로 나누어 記錄한 <大唐南海寄歸內法傳>에 ‘讚佛’과 함께 ‘讚頌’이란 用語가 실려 있어, 오래 전부터 佛敎에서 이 用語를 使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佛敎가 다른 宗敎의 用語를 借用한 것이 아니라, 佛敎音樂用語를 他宗敎에서 活用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現代的 意味의 ‘讚佛歌’ 用語는 1925년 權相老가 出版한 <父母은듕경>의 樂譜集에서 처음 司勇됐고, 이 책에 실린 樂譜集 가운데 첫 번째로 실린 曲의 이름이 ‘讚佛歌’이기도 하다.
以後 讚佛歌가 普及되기 始作하면서 ‘둥글고 또한 밝은 빛은(…)’으로 始作하는 노래의 題目을 ‘讚揚합니다’로 바꾸고 모든 佛敎노래를 統稱해 ‘讚佛歌’로 부르게 됐다. 이처럼 讚佛歌가 本格的으로 전해지기 始作한 것은 1920年代 조학유를 비롯해 백용성, 權相老, 김대운, 김정묵 등이 讚佛歌를 製作하면서부터다.
江華 普門寺 觀世音菩薩의 靈驗 – 權相老 스님
江華 普門寺는 襄陽 洛山寺, 南海 菩提庵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觀音祈禱 도량이다.
日帝 때의 일이다, 近代 우리나라 佛敎界의 碩學 중에 有名한 權相老 博士가 있다. 이분은 元來 스님으로서 훗날 東國大學校 總長까지 지냈던 분인데 이분의 親戚으로서 慶北 善山郡 海平에서 面長까지 지낸 禹龍擇이라는 분이 이었다. 이 분이 어느 해 가을, 친구 몇 사람과 더불어 江華島 구경을 가게 되었다. 그들은 江華島의 名所인 馬耳山과 傳燈寺 등을 구경한 뒤 마지막으로 觀音祈禱 도량으로서 有名한 江華 普門寺를 구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삼산 나루터에서 木船을 타고 普門寺에 倒着하여 "窟法堂 磨崖觀音" 등을 구경한 뒤 다시 배를 타고 仁川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仁川으로 가 던 중에 멀쩡하던 하늘에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이 뭉치더니 빗줄기가 쏟아지면서 돌풍이 일기 시작하였다. 배는 거센 風浪에 흔들리면서 기우뚱 기우뚱했다. 갑작스러운 狀況에 배를 탄 사람들은 모두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게다가 산더미 같은 파도가 계속 배를 때리자 배는 곧 부서질 듯 '우지직 우지직,하였으며 갑판위로 바닷물이 사정없이 넘쳐 들어 왔다.
우용택의 일행을 비롯하여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잃었다. 그 중에는 살아 보려고 배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 마냥 정신없이 '엉엉'우는 사람 등 갖가지였다.
그런데 이처럼 急迫한 상항이 展開되고 있을 때 "觀世音菩薩" "觀世音菩薩"하고 懇切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乘客 중 한 사람이 거의 無我之境에 이른 狀態로 오로지 "觀世音菩薩"만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것 이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 風浪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모두들 한마음으로 '나무 觀世音菩薩‘을 부르십시오. 그리고는 또다시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이 곳 江華에는 낙가산 普門寺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험 있는 觀世音菩薩님이 계시니 우리가 精誠을 다하여 모두 함께 觀世音菩薩님을 부른다면 반드시 그 묘지력에 의하여 살아 돌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 끝나자 佛敎를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佛敎를 믿지 않는 사람도 모두 同時에 觀世音菩薩을 부르기 시작 하였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이것저것 가릴 사항이 아니었다.
배 안은 갑자기 "觀世音菩薩"을 부르는 合掌 소리로 가득 하였다.
사실, 우용택과 그 일행은 儒生 이었다.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觀世音菩薩"을 부르자니 선뜻 입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머뭇거리고 있는데, 觀世音菩薩을 부르라고 하던 그 사람이 우용택을 향하여 말 하였다.
"노형, 觀世音菩薩을 생각하고 부르십시오.그러면 필히 觀世音菩薩님의 加被가 있을 것이니 어서 속히 부르십시오."
워낙 危機一髮의 狀況인지라 우용택 역시 '觀世音菩薩‘을 부르기 시작 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風浪은 심하게 몰아쳤다. 배는 곧 가라앉을 듯 더욱더 기우뚱기우뚱 하였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아~악’하고 絶叫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도 精神이 들면 모두들 그 乘客을 따라 더욱더 소리 높여 ‘觀世音菩薩’을 불렀다.
이 때 奇蹟 같은 現像이 일어났다. 높은 곳에 앉아서 "觀世音菩薩"을 先唱하고 있던 그 乘客이 벌떡 일어나더니 우용택을 향해 하늘을 가리켰다.
'저것 보시오!' 우용택이 그의 손짓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니 五色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비치면서 그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觀世音菩薩님의 모습이 鮮明하게 現身한 것이었다.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은'이젠 살았구나.'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瞬間에 또다시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배를 때려 돛대를 부러 뜨렸다. 모두들 또 한 번 '아~악'하고 絶叫의 소리를 질렀다.
'아!'이젠 정말 죽었구나. 觀世音菩薩의 神通力도 별수 없구나.' 우용택도 이렇게 생각 하면서 너도 나도 살 窮理를 하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돛대가 부러진 뒤로는 그렇게 거세던 風浪도 점점 약해지고 빗줄기도 가늘어지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해가 나고 바다는 거의 平素처럼 正常이 되었다.
배는 暴風을 만나 몇 군데 부서진 곳이 있었으나 運行에는 큰 지장이 없었고 여러 사람들이 물을 퍼내고 힘을 합하여 無事히 仁川港에 倒着 하였다. 그야말로 몇 時間 사이에 生死의 갈림길을 往來 하다가 간신히 죽음에서 살아 난 것이었다.
그 後 觀世音菩薩님의 靈驗에 感歎한 우용택은 故鄕으로 돌아가 善山 桃李寺의 信徒가 되었으며, 自身은 물론 家族들도 모두 觀世音菩薩님을 열심히 믿게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當時 普門寺에 와서 자주 觀音祈禱를 올렸으며, 우용택과 親戚間 이었던 權相老 博士가 김대은 스님께 이야기하여 觀音信仰에 受祿하였던 것을 다시 整理 한 것이다.
"만약 큰 물결에 떠내려간다고 할지라도 한마음으로 觀世音菩薩의 名號를 부르면 곧 얕은 곳으로 이르게 되는니라."
□ 江華島 석모도에 있는 普門寺
첫댓글 퇴경 권상로대종사님의 종손자인 권득용님(전 대전문인회 회장)이 김용사 입구에 문경문학관을 세우고 대전의 환경사업체에서 근무하고 주말에는 문경문학관에 와서 문예활동에 도움을 주는 일에 정진하며, 주변에 펜션을 3동 세워 그 수익금으로 문학관 운영에 필요한 관리자의 급료와 운영비로 활용한다고 들었습니다. 문학관 일층에는 문경시 문인협회의 활동상과 자료를 비취하고, 이층에 권상로대종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 비치하고,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활용하고 있는 지역출신의 권득용님의 활동에 기대가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