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 핀 소나무의 고고한 자태, 대청호 대추나무길
1. 일자: 2022. 12. 27 (토)
2. 장소: 대청호 오백리길 6구간 대추나무길
3. 행로와 시간
[와정삼거리(09:45) ~ (꽃봉갈림 / 성황당고개) ~ 개치고개(10:57) ~ (토방대 / 안골 ~ / 산적 소굴) ~ 묘지(11:50~12:05) ~ 대추나무단지(12:25) ~ 도로(12:56) ~ (연꽃단지 / 어부동) ~ 마름골 갈림(13:23) ~ (사음리) ~ 회남대교(13:40~50) – 달빛호수펜션(14:19) ~ (남대문교) ~ 소공원(15:00) /18.38km]
< 대청호 오백리길 트레킹을 준비하며 >
1구간 두메산골길을 2020년 6월에 걸었으니 2년 6개월만에 대청호 오백리길에 선다. 첫 추억이 너무 좋고 강렬해 늘 마음 속에 그리던 길을 다시 걷게 된다는 사실 만으로도 마음이 들뜬다. 게다가 이번에는 눈 쌓인 한겨울이다.
길 정보를 탐색한다. ‘대추나무길이라는 정겨운 이름의 6구간은 방아실에서 시작된다. 하얀 나무 담장이 쳐진 집 모퉁이를 돌아 산으로 올라간다. 편안 길을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대청호의 푸른 물을 만난다. 완만한 능선을 타고 걷다 성황당이 있던 돌무지 고개를 가로질러 개치고개로 넘어간다. 이어 도로를 가로질러 주촌동 마을로 들어서고, 토방 마을을 지나 호수를 옆에 두고 언덕을 넘으면 오동마을이 나온다. 부근에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분위기 좋은 차와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다. 묘지와 과수원 을 돌아 법수리, 산수리, 어부동을 지나 대추나무단지에 이른다. 난다. 마지막 길은 회남대교와 남대문교를 건너 호반을 걸어 소공원에서 마친다.’ 길의 대강을 그려본다. 16km 6시간에 이르는 등로를 이루는 공간에 이벤트가 너무 많아 길의 대강이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다. 현장을 걷는 게 답이다.
< 희망사항 >
지도를 살핀다. 길은 충북 옥천에서 보은으로 이어진다. 대청호하면 ‘대전’이라는 통념이 깨진다. 들/날머리 기준으로 거리를 검색하니 걸어서는 12km, 차로는 21km 거리다. 호수를 따라 등로가 이어지니 16km가 되나보다. 시간과 거리에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겨울 호수의 정취에 젖고 싶다. 시간당 3km로 걷고, 기회가 되면 현지 식당에서 밥 먹고 차 마시며 여유롭게 걷다 보면 6시간 후쯤 남문대교 앞에 서 있을 것이다.
갈 길 어디든 대청호가 중심에 있다. 주변에 약해봉, 국사봉, 묘막산이 보인다. 산 어깨와 허리길을 넘나들며 바라보는 물길의 풍경이 그만일 것 같다. 겨울 호수의 서정이 기대된다.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많이 달랐다.)
< 옥천 가는 길에 >
모처럼 평일에 산악회 버스를 탄다. 덕분에 사당역에서 ‘버스 찾아 삼만리’ 대신 주차장에서 유유히 차에 오른다. 버스에서의 나만의 시간이 반갑다. 비몽사몽, 이런저런 생각이 들다가 사라지고 또 떠오르고, 어쩌면 등산보다도 이 시간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 와정삼거리 ~ 개치고개 5km > 눈꽃 핀 소나무의 고고한 자태와 산허리에서 굽어보는 대청호 풍경에 반하다.
옥천, 어느 낯선 2차선 도로 앞에 선다. 마을 뒷길로 산으로 들어선다. 초입 눈을 머리에 인 소나무의 자태가 무척 인상적이다. 눈꽃이 가득 핀 선경에 걸음을 멈춘다. 시작부터 횡재한 기분이다. 세한도 속 고고한 소나무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호반 둘레길이 맞나 싶게 꽤 치고 오른다. 설송의 자태는 내내 계속된다. 연신 감동하며 걸었다.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산마루에 올라선다. 국사봉 줄기의 능선을 따라 걷는다. 우측 발아래는 천길 낭떠러지, 그 끝에는 대청호가 유유히 흘러간다. 이 길이 대청호 오백리의 일부임을 알리는 노란 리본이 희망의 메신저가 되어 산객을 반긴다. 눈이 쌓인 소나무 가지에 묶여 있는 강렬한 노랑색에 반해 아웃포커스하여 사진 몇 장을 찍어 둔다. 기대된다.
고도를 높여간다. 전망이 열린다. 나뭇가지에 가려 감질나던 대청호의 전모가 드러난다. 흐린 하늘 아래 희미한 연무 속, 하늘과 산과 호수의 풍경이 모두 연한 회색으로 통일된 느낌이다. 농담이 옅은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웃자란 소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향해 높이 솟구쳐 올라 있다. 햇빛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느껴진다. 신영복 선생의 글귀가 떠오른다. ‘봄이 가장 먼저 오는 곳은 솔잎이었습니다. 꼿꼿이 선채로 겨울과 싸워온 소나무 잎새에 가장 먼저 봄빛이 피어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아직 한겨울이지만 마음은 봄을 읽는다.
크지 않은 업다운이 계속된다. 노랑 리본은 거의 50미터 간격으로 붙어있다. 누군지 모를 고마운 이의 손길이 느껴진다. 예상보다 산길이 길어진다. 4.5km 알림이 울린다. 길고 다소 험한 비탈이 이어지더니 햇살이 가득히 내려앉은 도로로 내려선다. 개치고개 인 것 같다. 도로 건너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 개치고개 ~ 회남대교 8.5km > 황량한 마을길과 긴 도로에 지쳐가다.
도로에 내려서니 그 많던 노란 리본은 사라졌다. 행정 구역도 보은군으로 바뀌었다. 인적 없는 마을 주변을 따라 걷는다. 멀리 호수는 조망되지만 길은 그리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트랙을 받아 오길 잘했다. 여기저기서 일행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다. 별 특색 없는 마을 길을 돌아 다시 도로에 선다. 차들이 쌩쌩 달린다. 위험을 느낀다.
가지 않아도 될 곳을 멀리 돌아온 느낌이다. 어수선한 마을 길을 돌아 언덕에 선다. 붉은 지붕 집 뒤로 호수 풍경이 펼쳐진다. 바라던 모습이다. 그것도 잠시 다시 임도와 도로 따라 오르막을 오른다. ‘산적소굴’이라는 곳과 묘지를 지나 물가 옆 거친 오솔길을 걷는다. 계절이 겨울이라 그런지 주변 풍경은 을씨년스럽다.
지친 발을 쉬어 가야지 할 무렵, 커다란 벚나무가 있는 양지 바른 묘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다. 동래 정씨 묘가 여럿 있다. 앞으로는 대청호가 조망된다. 볕이 유난히 잘 드는 곳이다. 이런 곳이 명당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여분 쉬고 나니 뱃속이 든든해 지고, 피로도 조금은 풀렸다. 길에 선다. 호숫가에 외딴 집이 한 채 있다. 풍경이 근사하다. 처음으로 삼각대를 세운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대추나무 밭이 등장한다. 규모가 꽤 넓다. 비탈에 선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다. 대추나무 붉은 열매가 열린 때에는 장관이겠다. 상상만으로도 멋지다. 허나, 지금은 휑하다. 마을을 돌아든다. 이정은 없고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트랙을 무시하고 내 감을 믿고 걷는다. 한참 후 또 도로와 마주한다. 이런 젠장….
이번 도로는 아주 길었다. 중간에 연꽃단지와 어부동 마을을 지났다. 마름골 갈림에서 마을 분께 주변 풍경을 물으니 시큰둥하다. 가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고는 사음리를 지나 회남대교로 향한다. 대교 초입에 위치한 카페 마당에 선다. 호숫가 풍경에 반한다. (지나고 보니 이곳에서 식사를 할 걸 그렇다.)
< 회문대교 ~ 남대문교 4.5km> 회문대교 위에서 본 대청호의 너른 품에 반한다.
45분이나 이어진 긴 도로를 걸었다. 남은 길 역시 차도다. 그러나 회남대교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지난 모든 고난을 잊게 만들만큼 멋지다. 우측으로는 내려앉은 햇살에 물길이 여울지는 풍경이 먼 추억을 불러오고, 좌측으로는 선 굵은 허허한 겨울 산 아래 푸른 호수가 넓게 펼쳐진다. 왜 이곳의 물에 비단(錦)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알겠다.
다리 위로는 차도 뜸하다. 이곳저곳에서 삼각대를 세우고 내 흔적을 남겼다. 회남대교 위에서의 즐거운 유희는 10분 넘게 계속되었다. 긴 찻길을 걸어 온 대가를 제대로 받았다.
날머리 남대문교로 가는 길, 몇 군데 식당에 들렸으나 혼자 먹을 음식은 없다고 한다. 회 1kg과 탕까지 먹을 엄두가 안 나 그냥 나왔다. 홀로 여행의 비애다. 그나마 회문대교에서 남대문교 가는 길은 내내 시원한 호수 풍경을 보며 걸어서 좋았다. 아쉬운 건 보은 땅에 들어서며, 이곳은 대청호오백리길에 관심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한 도로 구간이 꽤 오래 되는데도 안전시설은 전무하다. 사정은 있겠지만, 그리고 무분별한 개발이 능사는 아니지만 많이 아쉬웠다.
고운 잔디가 깔린 펜션을 지나 날머리에 도착했다. 소요시간은 예상과 큰 차이는 없었으나 거리는 더 멀었다. 다리 건너 주차장에 서 있는 산악회 버스를 보자 안도감이 들었다.
대청호 둘레길 6구간은 겨울에 올 곳은 아니었다.
< 에필로그 >
오늘도 걷기는 일상의 탈출이며 활력의 재충전이 돼 주었다. 강렬한 긴장감과 희열에 중독되어 간다.
같은 길을 걷지만 모두가 똑 같은 눈으로 보지는 않는다. 현장의 대청호 둘레길 6구간은 먼저 다녀온 이의 산행기 속 묘사와는 많이 달랐다. 계절이 변수이고 유감이다.
대추나무가 붉게 열리고 연꽃이 핀 호수의 풍경을 그리며, 마음 속의 허전함을 달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