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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1절-6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신앙의 어머니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제일 먼저 영을 위한 진리지식이고, 그 다음에는 일반지식이다. 그 다음은 몸 신체 육체다. 몸 신체 육체는 영을 위해 의의 병기로 쓰여질 몸이다. 그러나 일반 세상 어머니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어디에 먼저 두는가 하니 첫째로 일반지식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일반지식을 첫째로 둔다. 두 번째는 몸 신체고, 또는 어떤 부모들은 육체의 어떤 특기를 돈을 많이 버는 것과 연결을 시켜서 그 육체를 어린아이의 교육에서 첫째로 꼽는 부모들도 있다. 부모가 자식의 교육에 있어서 어느 것을 우선으로 하고 교육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어린아이가 하나님 앞에 자라면서 평생을 ‘생명 길로 가느냐, 사망 길로 가느냐’ 하는 이것이 정해지더라.
일반지식은 신체와 더불어서 어떤 특기로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로 편안히 살면 된다고 하는 것이니까 이런 생각은 참 인격의 고상한 자로, 최고의 도덕성자로 만들어지는 것은 전혀 모르고 생각 밖이다. 꿈도 꾸지를 못한다. 이런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 밖이라. 신앙지식을 가진 어머니들과, 일반지식을 가진 어머니들과는 자녀들의 마음 밭에 뿌리는 씨앗이 질적으로 다르고 차원적으로 다르다. 하늘과 땅 차이다. 하나는 하늘의 지식이고, 하나는 땅의 지식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받은 기준지식에 따라서 아이들의 소원과 목적과 취미와 추구성도 달라진다. 하나는 하늘의 소원 목적을 가진 자식이 되고, 하나는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진 자식이 된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해도 어릴 때부터 받은 지식에 따라 만들어지기를 그렇게 만들어져 가게 되는 거다. 말하자면 사람은 먹은 대로 그 영양가 그 살이 오르기 마련이고, 무엇을 배우던 취미대로 배운 그것을 써먹는 사람이 돼버리고 그 욕심의 사람이 되는 거다. 그것으로 가치판단 평가를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방세상에서 영재교육, 혹은 일등국민, 또는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 하고 구호를 외칠 때 인간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웃으실까? 돈을 많이 벌었고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참 인격성장이 없으면 그 사람은 악한 사람이 돼버린다. 도둑질하는 것만 악하게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선악과 따먹은 그 지식이 생명과를 따먹은 지식으로 바꿔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악한 사람이 되고 마는 거다.
부모를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고,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원망불평을 하고, 신세타령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자살을 하는 이런 보여지는 일들이 왜 생길까? 공부를 안 해서 그런가, 아니면 세상이 그렇게 만든 건가, 아니면 마음 밭에 무슨 씨앗이 심어져서인가? 이걸 눈여겨 볼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인간 자기를 창조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르면 자기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무엇이 중요하다’ 하는 것을 모르게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다.
‘나는 안 하려고 그랬는데, 나는 착하게 살았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과의 의사단일, 진리신앙의 사람으로 맞춰지고 만들어지고 하지 않으면 결심을 하는 게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다 그 말이다. 그런고로 어린아이들의 마음 밭에 먼저 영을 위한 진리지식을 심어줘야 한다. 그 면을 우리가 명심해야 한다.
여름은 혈기 왕성한 청소년 시절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청소년들은 다 컸기 때문에 제 발로 제 마음대로 다니기 때문에 부모들이 뒤따라 다니면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해타산과 평가성을 정확하게 내릴 수 있는 진리지식을 심어줄 수밖에 없다.
세 번째는 가을은 장년의 시절로 비유할 수가 있다. 청년 때의 망나니가 나이를 들어가면서 점점 철이 드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물론 골 백 살을 먹어도 전혀 철이 안 든 노인도 있다. 나이는 먹어서 어른이라 할지라도 ‘언제 철이 들까’ 할 정도의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나이는 어리지만 그 생각과 마음이 바로 된 어린아이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사람의 나이 4, 50대라면 인생의 풍파를 많이 겪었다. 세상의 단맛과 쓴맛을 어느 정도 보았을 것이고, 많이 경험이 됐기 때문에 ‘인생이 무엇이다’ 하는 것을 어느 정도 깨달은 것이 있다. 말하자면 사람이 많이 되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4, 50대의 어른이 되었음에도 인생의 행복을 물질 제일주의로만 부르짖고, 자기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환경의 소산으로 울고 웃는 인생으로 산다면 4, 50년을 살아온 인생의 값어치가 어디 있겠느냐? 그러니 속된 말로 헛 밥 먹고 헛살았구나.
예수님을 믿는 기독자들의 세계에서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성장이 되어야 하고, 어느 한 교회에 다닌다면 교회의 짐을 질 줄도 알고,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한 코스라도 짊어지고 갈 수가 있어야 된다. 그런데 이것이 없이 어린아이 때는 철이 없어서 응석을 부리며 마냥 놀았고, 청년의 때는 헛꿈 꾸느라고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병까지 얻고서 4, 50대가 되었다면 이때까지 자라오는 속에서 무슨 열매가 맺혔겠느냐? 참으로 한심하다. 교회에 다니면서 처음 믿는 그 때나 4, 50년이 흐른 지금이나 똑같다면 예수 헛 믿었다. 도대체 뭐하려고 교회에 다닌 거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린아이 때는 유년 주일학교에 잘 다니고, 이제 중고등 학교에 들어가면 반사 선생님 밑에서 보조교사 역할을 하고, 그 다음에 대학교에 들어가면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돼야 하고, 청년이 되면 전도를 해서 친구들을 교회로 데리고 올 줄도 알아야 하고, 3, 40대가 되면 가정을 가지기 시작을 하니까 자녀들의 교육에 신경을 쓰고, 아이들의 모범이 되고, 가정을 잘 다스리고, 그러면서 가정이 정화가 되고, 교회도 정화가 되고, 사람이 건전해지고, 절제생활도 잘 돼 나가고, 그러니 이 사람에게서 교인들이 배울 게 많고, 경험이 많아서 아랫사람들을 가르쳐 주고 한다면 이게 얼마나 좋으냐? 인생 사는 맛이 나는 거다. 그런데 요즘 대부분 보면 속화된 교인들이 제 멋대로다. 사람이 신앙 면에 안정되지 못하고, 가정도 안정되지 못하고, 세상바람이 부는 대로 여기서 펄떡 저기서 펄떡 하고 있으니 믿을 수가 없다.
세상에서도 20대가 되면 군대에 나간다. 젊음의 힘으로 싸울 줄을 알아야 한다. 신앙으로 말한다면 젊은 신앙은 싸울 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평소에 뭘 듣고 배웠는지 속에 찬 것도 없고, 무장된 것도 없고 한다면 무슨 세월을 산 거냐? 인생이 아깝다. 이런 인생으로 살면 되겠느냐? 이건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드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 면에서 볼 때 아무 것도 모르고 무목적적으로 산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 인간은 막 태어나서 하나님을 향해 물어야 한다. ‘왜 나를 이렇게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습니까? 나를 만드신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야 할 우리 인간이다. 부모들은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이것을 가르쳐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교회 인도자들은 이것을 가르쳐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모른다면 심판이다.
우리가 몰랐던 때를 생각하고 통곡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통곡은커녕 지금도 세상으로 절여진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 그저 덤덤하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죽은 자와 산 자의 심판이 있다. 이게 다 우리 믿는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기독자라면 사람이 진리 자체화로 되는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속 성품이 예수님으로 닮아져야 한다. 교회에 다닐수록, 나이를 먹어갈수록 속 성품이 성령의 열매로 들어가야 한다. 맺혀져야 한다. 이게 성화다. 이렇게 되면 행동도 따라서 아름다워진다.
자기가 자기를 쳐다보면서 ‘아, 내가 이 점은 고쳐야 되겠다. 이것 때문에 도무지 덕이 되지 못하는구나’ 하는 게 있으면 빨리 고쳐야 한다. 부지런해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하고, 눈치가 빨라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엉덩이가 무거우면 안 된다. 가벼워서 부지런해야 한다. 그래야 몸에 병이 안 든다. 움직이기 싫으냐? 일하기 싫으냐? 그렇다면 밥도 먹지 말아라.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라.’ 영적 면으로 생각을 한다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안 써먹을 바에야 뭐하려고 교회에 다니고, 뭐하려고 설교를 듣느냐? 어디에 써먹으려고 듣는 거냐? 자기는 그렇게 안 살고 남만 가르치려고 하는 거냐? 우리는 깨닫고 고쳐야 한다.
자기가 교회 인도자가 되고 싶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서 쓰임이 되고 싶다면 속에서 성령의 불이 일어나서 성경을 보고, 그 뜨거움에 동네에 나가서 아이들을 전도해서 교회로 데리고 와서 가르치고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열심을 긍휼히 보셔서 인도하시는 거다. 그런데 가르칠 줄도 모르고, 봉사활동을 할 줄도 모르면서 신학교를 마쳤으니 목회를 하겠다고? 이건 틀렸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필히 주님처럼 참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진리 자체화, 진리 실상화, 진리 인격화, 진리 사상화로 만들어지는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어릴 때부터 진리지식을 듣고 배우고 깨닫고 또 실습을 하고 이러면서 능력자가 되어지는 것이다. 한 번 왔다 가는 인생 헛살지 말고 보람 있게 살다 가자 그 말이다. 예수 믿으면서 신나게 한 번 살다 가자 그 말이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신난다고 하는 것은 돈을 많이 벌어서 실컷 놀자는 것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많이 깨달아서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이룰구원을 많이 이뤄놓고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게 얼마나 재미가 있느냐?
우리가 일반 세상 사람들을 보면 그동안 세상의 욕심을 부리며 살았는데 장애인들에게 봉사를 하면서부터는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기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점점 인생 사는 맛을 느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볼 때 ‘그래, 맞다. 너만 위해 살지 말고 남도 좀 생각을 하면서 살아봐라.’ 남 생각을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도 그렇다.
산천초목은 봄에 움이 돋고, 여름엔 성장을 하고, 가을엔 씨를 남기고 간다. 우리도 영원한 것을 남기고 가자. 자녀를 낳아서 길렀느냐? 그렇다면 가정이 하나님 앞에 구원계대로 흘러가도록 하자.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이삭의 어깨에 나뭇짐을 지우면서 모리아의 산으로 올라가자고 한다. 사흘 길을 서로가 입도 벙긋하지 않고 걸어갔겠느냐? 이삭이 툴툴거리면서 사흘 길을 걸어갔겠느냐? 아버지가 이삭에게 ‘너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래? 하나님께서는 어떤 제물을 기쁘게 받으시겠느냐?’ 이런 대화를 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삭의 입에서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
그리고 아버지는 늙었고 아들은 젊었는데 둘이 산에 다 올라와서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고 ‘네가 번제가 돼야 한다’ 하면서 이삭의 손발을 꽁꽁 묶을 때 이삭이 가만히 있었을까?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을 가면서 ‘이 늙은 영감이 미쳤나? 아버지나 제물로 바치지’ 했을까? 이삭이 어떻게 스스로 제물로 바쳐졌을까? 아버지가 이삭의 손발을 묶기 전에 평소 살 때 이삭의 마음속에는 ‘내가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겠습니다’ 하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주저 없이 스스로 제물로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삭이 나뭇단에 누여질 때의 그 느낌 그 감각성이 마음속에서 원망 불평이 나오면서 ‘내 몸이 불에 타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했다거나, 아버지는 ‘저 자식이 불 위에서 타들어 갈 때 펄펄 뛰는 걸 어떻게 볼까’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을 것 같다. 이게 다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거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실 때 클라이막스의 찬송을 부르듯이 그런 경지의 마음이 아닐까? 참 부럽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이삭의 아들이 야곱이었는데, 아브라함의 계대에서 삼대 사대로 왕통계통이 일어난다. 이게 구원계대다. 누구든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인데 우리는 왜 그렇게 못 살까? 왜 그 면에 대한 욕심을 못 낼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를 위해서 우주만물을 돌리고 있다. 네가 그걸 아느냐? 이런 인간을 위해서 우주만물을 돌린다. 그런데 네가 어디에 가서 종노릇을 하고 있느냐? 세상이 어떤 곳인지 네가 아느냐? 네 목숨이 몇 개냐? 우리 모두가 자자손손 영원한 진리지식을 주고 남기고 가야 한다.
그 다음에 겨울은 노년의 시절로 비유할 수가 있다. 겨울이 되면 나뭇잎은 찬바람에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더더군다나 오래 된 나무는 가지가 메말라서 꺾이고, 벌레는 나무의 속을 파먹고, 나무둥치에는 이끼가 끼면서 그 나무는 서서히 생명력을 잃고 썩어 들어간다. 노년의 시절은 마치 겨울을 만난 나무처럼 오그라지면서 고통이 오기 시작한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 몸에 진통이 오거든 ‘아, 이거 여리고 성 앞에서 불던 나팔소리가 들리는구나’ 하고 깨달아야 한다. 여리고 성이 마지막 나팔에 무너졌듯이 우리 인간의 몸도 마지막 나팔이 불면 붕괴돼 버린다. 죽는다 그 말이다. 그런데 죽기 전에 먼저 몸에 진통이 오기 시작한다. 이건 죽을 준비를 하라고 나팔을 부는 거다. 전:의 마지막에 보면 창문에 안개가 서린다고 했다. 자기에게 이런 것이 오는 것은 죽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회개하고 네 몸을 거룩하게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뼈 마디마디가 쑤시고, 몸 구석구석마다 바람이 솔솔 불고, 얼굴에는 검은 버섯이 피고, 머리는 흔들리고, 손발이 떨리고, 맷돌소리는 적어지고, 눈에는 늘 비가 오는 것 같고, 기둥은 휘어지고, 다리에 힘이 없어지면 죽음이 오는 소리가 자꾸 가까워지는 거다. 이때에 죽음의 고개턱에 서서 인생을 잠깐 뒤돌아보며 ‘아, 그 때 내가 한 그 일은 참 잘 했다. 그때뿐만이 아니라 지금 생각해도 그렇고 미래적으로도 영원히 참 잘 했다. 그 때 내가 자칫 실수를 했다면 평생을, 아니 영원히 후회할 뻔했는데 그 때 아무개가 옆에서 나를 죄 짓지 말라고 말렸지? 참 고마운 분이다’ 이런 게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느냐? 그런데 어떤 분들은 다른 사람을 죄를 짓는 곳으로 꾀여서 데리고 가고, 영원히 사망성공을 이뤄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만드는 못된 인간들도 있다. 옳은 진리지식을 받지 못하면 이렇게 된다.
구약성경의 아합의 경우에 죽음의 문턱에 서서 자기의 일생을 되돌아본다면 영원히 후회 막급할 것이다. 이를 테면 ‘내가 시돈 땅의 바닷가에 가려고 할 때 그것을 막았던 엘리야 선지자의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후회가 안 될 텐데’ 했을 것이다. 아합이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그 때 시돈 땅 바닷가 모래밭에서 여름밤의 축제가 열린다고 하면서 놀기 좋아하는 친구가 얼마나 바람을 넣던지.’
아합이 그 때 장가를 안 갔으니까 친구의 그 말에 구미가 당겨서 축제장을 가보니 천국이 따로 없다. 온 천지가 아주 찬란하다. 오늘날로 말을 하자면 이 축제장에 청춘남녀가 타는 배도 있고, 사람을 싣고 뱅뱅 돌아가는 것도 있고, 오색조명이 비취는 가운데 노래자랑이 펼쳐졌는데 그 때 나와서 노래를 하는 여자가 누구였느냐? 아합의 아내가 된 이세벨이다. 이 축제장에서 아합이 이세벨을 만난 것이다.
나비처럼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방긋방긋 웃어가면서 노래를 하다가 아합을 보고 살짝 윙크를 하는데 아합의 입장에서 보니 ‘저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냐, 천 년 묶은 여우냐’ 했을 것 같다. 그래서 그 아가씨가 자기 눈에 들어서 데리고 와서 살았는데, 죽음의 문턱에서 이 모든 것을 생각을 하면 ‘내가 미쳤지. 내가 눈도 삐었지. 그 때 내가 왜 이세벨을 데려왔던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세벨로 인해서 사람 망했지, 구원계대의 대가 끊어졌지, 가정이 망했지, 국가가 망했지, 그러니 그 원통성을 어디에 가서 풀겠느냐? 자기가 좋아서 그랬으니 누구에게 원망을 하겠느냐?
이제 와서 아합이 하는 말이 ‘나는 영원히 망했구나. 영원한 것이 다 망했구나. 이제 와서 내가 무슨 말을 할까? 그러니 선민 이스라엘아, 너희들은 절대로 이세벨을 아내로 취하지 말아라. 아달랴를 아내로 취하지 말아라. 겉모습에 홀리지 말아라. 영원히 영원히 후회한다’ 할 것이다. 이세벨이 딸을 낳았는데 그 딸 이름이 아달랴다. 이 이세벨이 남조 유다로 시집을 와서 남조도 망했다.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힐 일이냐? 믿는 부모들이 여기에서 교훈을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속회된 기독교 안에 이세벨이 많고, 아달랴가 많다. 그리고 거의가 아합이다.
이세벨과 아달랴의 특징이 뭔지 아느냐? 교회적으로 봐도 그렇고 사람을 봐도 그렇고, 그 특징이 액세서리가 많다. 기독자의 액세서리는 속으로 매달아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말한다. 무화과나무는 속으로 꽃이 핀다. 겉으로 보면 별로 볼 게 없다. 무화과 열매를 겉으로 보면 방망이처럼 생겼지만 그러나 쪼개서 그 속을 보면 하얀 젖이 나온다. 이건 참 성도들을 상징하는 거다. 성도는 그래야 한다. 사람들이 겉으로 볼 때는 ‘저까짓 거 별로다’ 하게 보일지라도 그 사람을 사귈수록 그 사람에게 고개가 숙여지는 것.
우리는 자라나면서 배우고 듣고 하는 것이 속으로 가득 가득 차여지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던 사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줘야 한다. 말로써만이 아니라 말로 해도 안 들으면 행동으로 들어가는 거다. 사람은 사랑에 감동이 돼야 한다. 송곳을 가지고 콕콕 찌르면 안 된다.
아합 왕이 그런다. ‘선지자 엘리야의 말을 들었으면 좋았을 걸.’ 그 때 당시 아합만이 아니라 아합과 같이 늙어가는 다른 사람들도 ‘엘리야의 말을 들을 걸’ 그랬을까? 반면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니 빨리 가서 그 면류관을 받고 싶구나’ 하는 이게 누구냐? 사도바울이다. 이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느라고 장가를 안 갔다. 이 사도바울이 참 부럽다. 장가를 안 간 그게 부러운 게 아니라 사도바울이 달려간 그 신앙의 걸음걸이가 참 부럽다. 그 신행의 발걸음, 진리의 노선대로 말씀의 이치대로 걸어가는 그 발걸음이 참 아름답고 고상하다.
우리 부모들도 이런 발걸음을 남겨서 자녀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우리 부모가 그렇게 걸어갔구나’ 하는 게 생각할수록 속에서 새록새록 올라오게 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닌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자식에게 못된 것만 가르쳐주고 못된 것만 보여준다면 그 자식은 그것을 보고 자랐으니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인간노릇을 하며 살 수가 있겠느냐? 어째 사람이 그렇게 살아야 되겠느냐?
우리가 ‘바울도 만나보고 싶고, 요한도 만나보고 싶고, 다니엘도 만나보고 싶고, 모세도 만나보고 싶고, 다 만나보고 싶다’ 이런 고백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앙으로 사는 사람이라야 이런 마음이 있는 거지 신앙으로 살지를 않는다면 이런 마음조차도 없는 거다. 그런데 죽음의 문턱에 서서 죽기 싫어서 눈을 부라리고 이빨을 갈면서 ‘내가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 네 놈의 목을 물어뜯겠다’고 하면서, ‘저승사자가 나를 잡으러 왔네’ 하며 혀를 깨물고, 몸을 비비 꼬면서 안 가려고 팔을 휘젓고, 발로 버티고, 죽으면서까지 ‘빨리 술 가져와라’ 하며 소리 소리를 지르고, 그러면 옆에서 자식들은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죽어가는 부모에게 빨리 죽으라고 하고. 이거 참 얼마나 기가 막힐 일이냐?
우리 성도들은 하나의 자연인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 성도들은 교회로서, 하늘나라 사람으로서 특수인이니 하늘나라의 특수한 정신으로 연관을 짓고, 특수성을 길러가야 할 삶의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자녀들의 교육도 이래야 하고,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인간 사랑이요, 이렇게 사는 것이 세상을 바로 사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 밭에 이 진리의 씨를 심어야 한다. 인간의 존재목적을 알게 해야 한다.
씨를 심으면 그것이 자라서 그 나무의 결과로 열매가 열리듯이 사람의 마음 밭에 진리의 씨를 심으면 그 사람의 인생의 삶의 결과가 진리 자체화 된 성령의 사람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 밭에 진리의 씨가 심어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열매가 없는 사람이 돼버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