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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초 서종태(徐宗泰)의 연행체험 - 그의 역사관과 문예관을 중심으로
1. 머리말
2. 눈물의 연행 여정
3. 과거를 그리는 역사관
4. 보수와 부정의 문예관
5. 대청관의 갈림길에서
6. 맺음말
1. 머리말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조선은 만주족으로 인하여 다시 병자호란을 치루었다. 남북으로 밀어닥친 전쟁을 겪으면서 조선의 사회⋅경제적 사정이 열악하여졌고, 무엇보다 오랑캐로 경시하던 만주족에게 당한 치욕과 분노, 존중하던 중화(中華)가 만주족에 의해 사라졌다는 해석에서 비롯하는 정신적 혼란은 극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조선의 문사들은 해마다 여러 차례 만주족의 청(淸)왕조에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공납을 받치는 연행길에 올라야 했고, 중국을 차지한 청은 점점 강성해지고 있었다.
서종태(徐宗泰, 1652~1719)는 청왕조가 중국에 건립된 지 십 여년이 지나던 즈음 이 세상에 태어났다. 조선인들의 분노와 혼란이 삭지 않은 분위기에서 그는 성장하였고, 그의 숙부들이 연행의 대열에 끼어있었기에 어린 시절 집안어른들의 연행을 간접체험하면서 시대의 분위기를 실감하며 자랐다. 서종태는 23세에 생원시에서 장원급제한 후 5년 후 1680년 문과별시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1689년 인현왕후의 폐위에 소를 올리고 은퇴하였으나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다시 관직에 나와 승지, 대사간, 대제학, 공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고, 1703년 겨울에서 1704년 봄에 걸쳐 연행을 다녀온 후,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두루 거쳤다. 저서로 만정당집(晩靜堂集)이 판각되어 전한다.
서종태의 연행은 1703년 즉 그의 나이 51세에 이루어졌다. 삼절년공사(三節年貢使)의 정조사(正使)직분이었다. 그의 연행기록은 그의 만정당집 권4의 ‘시(詩)’ 중에 여정에 따른 연행시 67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연행시 만을 따로 묶어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며, 연행 중 본 서화(書畵)나 연행 후의 소감 등은 다른 글들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서종태의 연행기록은 연구자들에게 조명을 받은 바 없다. 조선시대의 연행은 1637년부터 1893년까지 한 해에 2회~8회에 걸쳐 이루어졌기에 청나라로 간 연행의 총횟수는 거의 500회에 달하며, 연행길마다 반드시 뛰어난 문사들이 참여하여 연행기록을 남겼으니 연행록의 수는 그 두 배에 달한다. 이러한 방대한 연행기록들은 아직 정리가 안된 상태이며, 18세기 초기의 연행에 대한 연구는 대개 1710년대 이후의 것들로 대표되고 있는 실정이다. 뿐 아니라 수 많은 연행록 중에는 특별한 관점, 상세한 기록, 혹은 한글기록 등 연구자에게 매력적인 연행기록이 적지 않다. 많은 경우 이러한 연행기록은 연행기록자나 문집정리자에 의해 별도의 이름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서종태의 연행시는 문집 속에 다른 시들과 함께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특별한 기록상 특성도 가지지 않고 있기에 지금까지 집계된 연행록의 목록에서도 그의 연행록은 실릴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하여 전반적으로 이해해 보자면, 병자호란으로 인한 조선문사들의 정신적 혼란과 심리적 분통함이 19세기말까지도 식지 않았지만 그런 가운데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조선의 문사들도 현실을 직시하여 청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적극적인 청대문물 수용론이 등장하여 화이론(華夷論) 자체를 의심하는 거대한 변화가 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의 이러한 관점전환은 특기할 만한 진보(進步)였고, 특히 홍대용(洪大容)이나 박지원(朴趾遠) 등이 보여준 재기발랄한 태도는 조선후기의 근대정신을 발굴하려는 연구자들을 오랫동안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인지 연구자들은 기타의 연행기록 속에서도 진보적(進步的) 관점의 싹을 찾는 데 좀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온 것 같다. 또한 이러한 연구경향으로 인하여 서종태라는 인물 자체가 이미 각 학계의 연구대상에서 누락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서종태의 연행기록은 눈에 띌 만한 서술적 특징을 보여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점은 숭명배청(崇明背淸)의 보수적(保守的) 입장이어서 청을 수용하려는 진보의 관점에서 보자면 부정되어야 하는 범주에 있었다. 그러나 대제학과 영의정을 거친 그의 인생경력이 보여주듯이 그가 그 시대 문화와 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던 한 시대의 대표적 관료문인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종태는, 좀더 거칠게 표현하여 보자면, 반체제적 문제의식을 표현했던 인물들에게 더 깊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온 연구자들의 연구경향 속에서 조명 받지 못하고 묻혀져 있던 역사 속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서종태의 연행시는 연행경로에 따라 성실하게 기록되었고 그 양이 적은 것도 아니며, 내용 또한 진솔하기에, 18세기초 연행체험의 한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살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에 이 글에서는 서종태의 연행내용과 역사 및 문예에 대한 그의 관점을 정리하여 소개하고 또한 그와 동시대 인물로 진보적 견해를 보여준 문사였던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관점과 간단히 비교함으로써, 한 시대를 구성한 보수와 진보의 구조 속에서 그가 남겨준 연행체험의 의미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이 18세기 초 조선문사들의 연행체험 실상과 다양성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 눈물의 연행여정
서종태의 연행기록은 시(詩)로 이루어져 있다. 대개 연행 중 머물고 간 각 장소의 즉석에서 지은 것을 돌아와 다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장편의 시로 상황을 설명해주기도 하였지만 대개는 시적 언어를 빌어 내면의 심정변화를 곡진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그의 시는 연행의 노정에 맞추어져 있기에 시를 읽어가며 그의 여정을 정리해볼 수 있다. 그의 연행은, 여행이라는 공간이동 자체가 여행자의 심리에 설레임과 즐겨움을 안겨준다는 일반론을 무색하게 할 만큼, 눈물과 고통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연경으로 가는 길
1703년 음력 10월에 서종태는 정조사의 신분으로 사행사 일단을 이끌고 궁궐을 나서 고양(高陽)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의관을 갖추고 깃발을 날리고 있었다. 그와 동행하는 부사는 조태동(趙太東)이고 서장관은 김재(金栽)였다. 서종태의 나이 51세이다. 10년 전 그리고 5년 전 숙부 서문중은 두 차례나 연경을 다녀왔으며, 바로 한 달 전 숙부 조문유가 이미 북경을 향하여 출발한 상태이다. 숙부들이 누차 연행하였기에 그에게 연행이란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었으나 궁궐을 나선 서종태는 줄곧 뒤를 돌아보았다. 궁궐에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홍제교의 물이 잔잔히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길 떠나는 이의 만리정(萬里情)을 느꼈다.
사행의 발길은 북쪽으로 내달아 총수산(葱秀山)을 거쳤다. 대동강의 연광정(練光亭)에 이르니 세상에 더 아름다운 것이 없을 듯 하였으나 그곳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지을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서종태는 그저 시 한 수로 그 풍광을 간단히 기록하였다. 그러나 기성(箕城)에 이르니 각별한 감회가 일어, 십여 수의 시를 지으며 연광정과 부벽루(浮碧樓)의 풍광도 다시 읊고 기자로부터 교화된 옛 역사를 회술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눈이 내리고 강물은 겹겹이 얼어 들었다. 그들이 안주(安州)의 여관(安興館)에 왔을 때 부사 조태동이 서종태에게 안릉(安陵)의 효녀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종태는 이에 ‘효아가(孝兒歌)’를 지어서 노래로 불러보았다.
그들이 선천(宣川)의 숙소에 이르니 어느덧 때는 동지(冬至)가 되었다. 서종태는 눈 쌓인 속에서 봄의 소생을 기다리기 시작했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철산(鐵山)에 이르렀다. 이 곳은 조천(朝天)시 배를 띄운 곳이었다. 여기서부터 중국은 서쪽으로 아득히 눈에 들고 요동은 실제로 가까와졌다. 용만(龍灣)에 이르니 옛 선조들의 연행이 떠올랐다. 이 때부터 서종태의 연행시는 선배들의 연행시에 차운한 형식을 띠기 시작한다. 특히 김석주(金錫冑)의 연행시에 차운하기를 가장 즐겼고, 조정만(趙正萬)과 이정구(李廷龜)의 연행시도 그의 차운대상이었다. 그는 선조들이 명(明)으로 갔던 조천과 자신의 청으로의 연행을 비교하곤 하였다. 용만의 여관에서 밤을 맞아 앉으니, 낮에 길에서 본 아이들 상인들 건물들이 떠올랐다. 자주와 비취색 의복의 여자아이들이 조선인들의 행색에 놀라며 노래를 하였고 사내 녀석들은 놀라는 모습을 과장했던 것, 돈 많은 비단 장사들과 휘황찬란한 비단빛깔 등. 그러다 문득 고향생각이 일어 밖으로 나가 누각에 올랐다. 그 곳에서 술을 마주하고 달을 바라보려니, 자신의 이 사행경로가 곧 만주족이 연경으로 내달려 온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서종태는 이 사실에 몸을 부르르 떨며 울분이 나 눈물이 비오듯 흘러 내렸다.
서종태 일행의 발길은 심양성(審陽城)에 이르렀다. 서종태는 심양이 옛날 고구려의 북쪽 경계라는 데 격앙심이 차올라, 심양의 산천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심양에서는 부사 조태동이 제사날(忌日)을 맞았다. 조태동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슬픔을 시로 읊자, 서종태도 그의 시에 차운하며 그와 함께 감회에 빠져들었다. 집을 떠나 온 지 달포가 되오고 남의 나라에 들었으니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내년이 되어서야 해볼 수 있는 상황이다. 고개를 돌려 동쪽 하늘을 바라보니 외론 구름만 덩그랗게 떠있고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고향산의 잣나무뿐이었다. 이에 느끼어 눈물을 흘리니 옷이 젖었다. 그러자 부모생각이며 아픈 처자 생각에 백감이 교차하였다. 서종태는 긴 탄식으로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그들의 발길은 무려산(巫閭山)을 거치고 십산산(十三山)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종태는 십주삼도(十洲三島)의 경치를 구경하게 되는데, 돌의 기세가 칼처럼 뾰죽한 기이한 풍광에 잠시 흥겨움을 느꼈지만, 곧 떠오르는 명나라의 옛 역사를 회고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후 서종태는 무창산 앞을 지나면서 망부석 정녀 사당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긴 시를 지었다. 이들의 행렬은 산해관(山海關)으로 이르렀고 서종태는 각산사(角山寺)에 올랐다. 산에 올라서야 산하가 큰 줄 알겠다며 시를 읊었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중화문명을 찾아보려는 그의 시선은 실망스럽기만 했다.
드디어 통주(通州)로 접어들자, 북경성(北京城)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서종태는 자신의 사행이 선배들의 명나라 조천만 같지 못할 것을 내심 각오하였다. 바라보니 실로 흥흥거리는 말소리와 누런 흙먼지가 북경성곽을 에워싸고 있었다. 때마침 비취는 저녁햇살에 빗대어 서종태는 북경성을 바라보는 자신의 비감(悲感)을 표현하였다.
자금성(紫禁城) 안으로
해가 바뀌어 1704년 초하루(元日), 서종태 일행은 의관을 갖추고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원일조참(元日朝參)이다. 만주족의 말소리와 그들의 음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그의 발길은 청황제로 나가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중화문물의 과거로 거슬러 갔고,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종횡으로 흩날렸다.
結束冠紳進禁城 의관을 여미고 자금성에 들어가노라.
鳳闕參差皆漢制 궁궐 들쑥날쑥 즐비함은 모두 옛 중국제도인데,
氈車雜畓半夷聲 오랑캐 수레 분잡스럽고 거반은 오랑캐 말소리.
啁啾金石喧丹階 떠드는 소리 음악 소리가 붉은 계단에 시끄럽고,
慘憺風雲繞彩旌 참담하고 고요한 바람 구름이 채색깃발 에워쌌네.
昭代千年鳴珮地 밝은 시절 천 년이 패지에서 우는구나.
綿懷文物淚縱橫 문물을 회상하노라니 눈물이 종횡으로 흐르네.
서종태의 사은사 무리는 북경의 ‘십방원(十芳院)’이라는 곳에 머물렀다. 북경에서 서종태 일행은 서장 이언경(李彦經)과 합류되었다. 이언경은 여산군(礪山君)을 정사로 하여 서종태보다 한 달 먼저 떠난 사은사(謝恩使)일행이다. 이제 사행의 업무도 마쳤고 어느덧 북경땅에도 봄기운이 일고 있었지만, 서종태에게 그 곳은 황량하고 추워서 머물 만하지 않았고, 그의 행색은 그가 보기에도 수심에 차고 백발 너저분한 노인나그네였다. 이언경 일행과 만나 같은 곳에 머무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만리타국에서 느끼는 그의 외로움과 수심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꿈에서조차 그의 근심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연경의 숙소에 머무는 동안 그는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사은의 예를 올리는 일이며 지나온 길들이 차근차근 떠올랐다. 그러나 천하를 더럽히고 진동하는 오랑캐 누린내를 견디지 못하여 서종태는 크게 소리 내어 시를 읊으며 마음을 달랬다.
돌아오는 길
북경에 머물고 난 뒤 그들은 발길을 동쪽으로 돌렸다. 다시 심양을 지나 옛 요동성(遼東城)에 이르렀다. 서종태는 명나라가 요동성을 수비했던 옛 일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귀에 들리는 것은 오랑캐의 갈잎피리소리뿐이었다. 봉황산(鳳凰山)에 이르렀을 때는 음력 3월 17일이다. 봄이 무르익어 살구꽃이 피었다. 낭자산(狼子山)에 머물 때 서종태는 제삿날을 맞았다. 참으려 하였으나 눈물이 흘렀다. 국가의 일을 맡은 사람이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한 밤에 홀로 일어나 새벽까지 흐느끼며 자신의 신세를 슬피 여겼다. 그가 북경을 벗어나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읊은 다음의 시는 그의 연행체험을 요약적으로 전달해준다.
我行雖踐中國, 우리 행차 비록 중국땅을 밟았건만,
其趣似游北庭. 그 기분은 오랑캐땅을 다닌 듯하구나.
不聞華風禮樂, 중화풍의 예악은 들어보지 못했고,
只見夷俗羶腥. 그저 본 것은 오랑캐 풍속과 누린내 뿐.
- 「연산역 도중(連山驛途中)」
그리하여 서종태는 이듬해(1705년) 연경으로 떠난다는 황흠(黃欽)에게 시를 써주기를, 중국황실 담벼락은 의구하건만 고을에는 말소리가 곳곳에서 시끄러웠다고 하며 “가는 곳 마다 산천에는 눈물만 더해지더라. 언제나 해와 달이 하늘과 땅 비추어 줄지”라며 다시 서글픈 감회를 토로하였다. 청이 건재하는 현실이란 그에게 일월의 광명이 사라진 세계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의 연행은 야만의 어둠 속을 다녀온 고통스런 여정이었다.
3. 과거를 그리는 역사관
서종태의 사행은 북서쪽으로 옮겨가며 중국의 연경에 이르렀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공간의 여행이었지만, 동시에 그에게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현재로 돌아오는 시간여행(時間旅行)이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바라본 것은, 누린내 나는 어둠으로의 여정 속에서 그를 비추어준 과거(過去)의 시간 혹은 지나간 역사와 그의 회상이 빚어내는 빛이었다. 이 빛은 연행 내내 서종태를 위로해주었던 것 같다.
八條敎自九疇流, 팔조법금의 가르침이 구주로부터 흘러와,
井劃依然百代留. 井자 구획 의연하게 오랜 세월 유지되었지.
- 「기성 잡영(箕城雜詠)」 중 제 7수
天外層陰看渤海 저 하늘 가 겹겹 구름 밖에 발해가 보이네,
雲邊朔氣認胡山 구름 가 찬 기운 오랑캐 산하를 견디고 있구나.
- 「만부로 드는 길에서 읊노라(入灣府途吟)」
대동강에 이르러 그는 기자성(箕子城)을 보았다. 그의 시간은 곧장 기자조선으로 거슬러갔다. 기자조선에 대한 감회가 깊어 서종태는 <기성잡영>을 십수로 길게 지었다. 기자가 백마를 타고 한반도의 북녘땅으로 온 일이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기자는 멀리 동으로 와서 제대로 봉토를 받지 못하고 고생하며 이 땅에 중국 상고시대의 율법을 전달해주었고 그 교화가 오래토록 이 땅에 유지되었다고 생각하노라니, 중국 고대의 교화를 유지해온 우리의 과거가 자부심으로 차올랐다. 이어서 사행의 발길은 용만에 이르렀다. 그가 본 것은 발해(渤海)였다. 저 멀리 구름 속 아득한 발해가 추위 속에서 오랑캐 천지를 견디고 있는 모습은, 추운 오랑캐땅으로 가야 하는 그에게 힘이 되었다. 그 다음 서종태는 본 것은 고구려(高句麗)였다.
曾識遼東是我疆 요동이 우리 땅이라는 걸 일찍부터 알고 있지
高句北界近龍荒 고구려의 북쪽 경계 용황에 가까웠지.
隋唐遙統提封蹙 隋⋅唐으로 멀리 이어지는 봉토는 오그라들었고
丹鞨交爭壁壘長 거란⋅말갈 싸우느라 성채가 길어졌구나
昭代百年同漢輔 좋은 시절 오래 동안 중국과 더불어 도왔거늘,
本朝何日復河湟 우리나라 어느 날에 하수⋅황수 북녘을 다시 얻을까.
中宵勑勒奚歌發 한 밤에 맘을 추스르노라니 어찌 노래 부를고.
俛仰山川淚數行 산천을 우러러 바라보며 눈물 여러 줄기 흘리누나.
-심양성(審陽城)
서종태에게 심양성은 고구려의 옛 영토이자 우리가 찾아야 할 영광이었다. 그러나 영광의 과거 앞에서의 자부심은 곧 눈물로 변했다. 현재 조선의 힘은 약하고, 의지하던 중국도 사라지고 없다는 현실의 서러움이, 위안이던 과거의 빛에 짙고 무거운 그림자로 길게 드리워졌기 때문이다.
嗟我弱國人, 아, 우리 약한 나라 사람들
將幣來北庭. 예물을 가지고 오랑캐 땅에 왔구나.
仰瞻舊鳳闕, 우러러 옛 궁궐을 바라보며
感憶祝萬齡. 느껴 회상하며 만세를 축원하노라
煌煌文物會, 휘황스런 문물이 모이고,
喧喧戎馬聲. 시끌시끌 오랑캐말들의 소리
天回一甲子, 세월이 한 갑자를 돌았거늘
歎息乾坤腥. 탄식하노라 하늘과 땅에는 오랑캐 누린내로다.
- 「포명원의 승천행에 차운하노라(次鮑明遠昇天行韻)」
당시 조선은 ‘약(弱)’했기 때문에, 서종태가 추위를 무릅쓰고 오랑캐 땅에 온 것이다. 그가 중국땅에서 느낀 감회와 축원은 과거 속 중국 명을 향한 것이었고, 그에게 청나라의 문물은 휘황하고 시끄럽고 못마땅하였다. 청이 들어선 지도 어언 60년이니, 한 갑자를 돌았다. 1643년부터 시작된 청왕조는 서종태가 연경에 든 1704년 회갑을 맞은 셈이다. 그의 탄식은 천지의 누린내처럼 깊었다. 이 절대적 힘의 현실에 눌려있는 그를 위로한 것은 과거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또한 ‘소중화(小中華)’라는 자부였다. 그가 산해관을 거쳐 중국을 벗어나며 쓴 시이다.
東服驚人眼 우리나라 복장이 사람들 눈을 놀라게 하지만
猶能識小華 오히려 알게다. ‘소중화’라는 것을.
- 「길 가다 겪은 일을 기록하노라 (途中記事)」
‘강’한 청나라는 누린내와 말소리가 진동하는 야만의 소굴이었고, 그들의 야만은 우리의 약함보다 열등한 것이라고 서종태는 믿었다. 조선을 ‘소중화’(위 시에서 ‘소화(小華)’)라고 하는 자부는 사라져 버린 과거를 거룩한 문명의 중화라 규정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태도이다. 당시 그가 입은 복식은 오랑캐무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당당한 중화의 증거였다. 이러한 믿음과 척도는 당시에는 물론 그 후로도 효용이 발휘되지 못한 작위적 척도였을 뿐이지만, 과거에 매달리는 소중화의 자부는 그에게 커다란 위로였고, 암흑과 누린내 속에서 꺼지지 않고 흔들거린 빛이었다.
幽燕民物可哀憐, 연경의 백성들은 가엾게 여길 만하지
垂老那知舊煥然. 노인들인들 어찌 알리. 옛날 눈부셨던 것.
近閱皇明昭一代 근래에는 명왕조가 일대를 비추었지만
初從耶律汙千年 처음에는 야율(耶律)로부터 천년이 더렵혀졌지
- 「밤에 앉아 무료함을 달래느라 식암 김석주의 ‘연경의 여관에서 감회를 읊노라‘에 차운하노라–연경에서의 일을 읊노라 (夜坐亡聊次金息菴燕館感懷韻–詠燕中事)」-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요나라를 세우고 연경을 점한 바 있지만, 명왕조 때 연경이 눈부시게 발전되었다고, 서종태는 연경의 오랜 정치문화사를 회고하며, 청나라 사람들이 명대 연경의 문명을 보지 못한 것이 가엾다고 하였다. 청나라가 들어선 지 60년이 되는 시점이니, 연경에 사는 노인들이라도 명왕조의 연경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종태 또한 명왕조가 망한 후 태어났고 게다가 중국 땅 밖의 나라에서 온 처지였지만, 그의 내심에는 조선은 중화의 문물을 계승한 소중화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청나라의 노인들을 가엾다고 한 것 같다.
연경의 과거를 바라보는 서종태에게 연경이 보여주는 현실의 번화함은 눈에 들지 않았다. 그는 “민간의 노래는 지금 설령 변했지만, 중국의 산하는 예전과 변함없도다” 라고 거듭 읊었다. 그는 변치 않은 산천과 유지된 성곽에서 ‘중국’을 확인하였으니, 그의 연행시가 노래하는 중국은 중국의 과거이자 그가 꿈꾸는 중화문명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의 연행시가 과거로 향하는 시정(詩情)과 눈물로 가득한 것을 그의 현실인식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정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잠시 시선을 돌려 그가 실제로 담당했던 현실에서의 역할과 그의 현실인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실제입장은 현실을 비난하거나, 초월적 자세로 자처하거나, 또 탄식으로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당장의 국가대사를 담당해야 했던 고위관료였기 때문이다. 그가 현실과 역사 속에서 중시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는, 그의 글 「책문(策問)」 한 편에서 정리된 상태로 만나볼 수 있다. 「책문」의 내용은 앞으로 관료가 될 유생(儒生)들에게 묻는 몇 가지 주제의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천의 형승과 나라의 도시, 인재와 세상의 도, 유학의 도 및 양명학의 도, 또한 백성을 구제하는 정책 등이 그의 「책문」에서 질의된 주제로, 각 주제에 있어서 서종태는 자신의 이해내용와 현황설명을 자세히 더하였다. 그 가운데 인재와 세상의 도에 관련된 질의는 그의 연행록이 보여주는 역사관 및 현실파악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묻노라. 사람들이 항상 말하기를 “인재와 세상이 번갈아 나빠진다고 한다”고 한다. 대개 시대가 오랑캐에 이르렀고 풍속과 세상의 분위기가 이에 따르며 사람들이 그 속에서 품성을 받는 것은 절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는 세상의 당연함이다. 그런 즉 끝내 가까운 시대를 끌어다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듯하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 과거에서 보기를 어떤 이는 하고 어떤 사람을 하지 않은데, 어떠한가. 대개 이로써 논하건대, 삼대(夏⋅殷⋅周) 이후로 삼대의 인물보다 나은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 (그러나) 비록 후세가 전대를 미치지 못함이 멀기는 하더라도 그 사이 왕왕 전대의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계발하여 이전에 베풀지 못한 것을 창조하여 이전 보다 나아지는 자도 있다. ⋯ (그러하니)만약 지금의 세상으로 과거의 성대함을 뛰어넘어 명황을 생각하는 선비가 탁연히 함께 일어나 세상이 날로 쇠퇴하지 않도록 하려면, 그 이치는 어디로부터 끌어내야 하는가.
고(古)가 금(今)보다 낫다는 생각은 동아시아 중세의 일반적 관점이었다. 이는 기실 과거의 실상으로 돌아간다기 보다는, 인간의 이상이 실현되었던 사회가 과거가 존재했다는 일종의 믿음이자 현재의 이상실현 가능성에 대한 소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종태가 맞이했던 현실이란 꿈꾸는 과거의 중화는 아예 사라졌고 인재도 나오지 않는 절망적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위 글에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내려보는 관점의 태도에 대하여 객관화시켜 논하며 과거라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이치를 묻고 있다. 사실 국정에 임한 그에게 직면한 더욱 위급한 상황은 청이 중화를 멸한 것보다도 국내의 경제사정이 도탄에 빠진 것이었다. 위에 인용한 부분에 이어 「책문」의 후반부에서 그는 국내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며 이를 구할 방책을 또한 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가 실제로 해야 한 일은, 청왕조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리고 간청하는 글을 쓰는 것이거나, 갈수록 심해지는 백성들의 굶주림에 적절한 방책을 구하지 못하고 노심초사하는 것이었다. 서종태가 1685년 월과(月課)로 쓴 한 편의 글은, 청황제에게 금은기(金銀器) 공납(貢納)을 줄여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그 글은 실용의 외교문서답게 조선이 사대(事大)를 성실히 할 것을 굳게 약속하면서 약한 나라(小邦)인 조선의 상황을 간곡히 전달하고 금은기공납의 어려움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진정하고 있다. 강건한 청과 열악한 국내현실의 구심점에 선 관료로서 몸소 담당해야 했던 서러운 역할과 고달픈 심정을 이에서 헤아릴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연행길 내내 적어내린 눈물의 연행시들이 현실을 외면한 듯 과거로 향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직면하고 있었던 현실 및 그가 겪어온 현실, 나아가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의 난관에 대한 체험이 반영되어 시적 감상으로 표현된 결과임을 이해할 수 있다.
4. 보수와 부정의 문예관
서종태가 연행할 당시 청나라의 연경에는 시장경제가 활발해져서 상가에는 화려한 물건들이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서종태는 새로운 청의 문물에 일말의 호기심조차도 보여주지 않았고, 오히려 단호하게 청의 문물 일체를 경시하였다. 그가 본 연경의 문물들은 믿을 수 없고 조잡하며 쓸 만하지 못하고 비싸기만 했다. 양을 달아 측정하는 천박함과 이윤추구에 들떠 있는 북경 상인들의 태도는 모두 가증스럽게 보였다.
提督門禁密, 제독의 문은 경계가 삼엄하고
官夫物價倍. 관부의 물건은 값이 두 배더라.
書畵多贋假, 그림과 글씨는 가짜투성이에
器用輒雕繪. 도자기엔 그림장식 조잡할 뿐.
百物必稱量, 온갖 물건 양으로 칭량하여
些利必靳愛 작은 이익이라도 반드시 챙기네
勺水不堪飮, 한 국자의 음료도 마실 만하지 못하고,
片柴難可貸. 조각 나무 하나도 쓸 만하지 않도나.
慢肆看可憎, 너저분한 상가들 보기에 가증스럽고
呌呶聽可駭. 떠들어대는 소리 듣자니 놀랄 지경이로다.
- 북경탄(北京歎)
청나라 문물에 대한 그의 부정적 시각은 문인으로서 새로운 문예상황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그의 태도와도 직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이 문예적 성향을 보기 위해서는, 그가 왕세정(王世貞, 1526-1590)과 전겸익(錢謙益, 1582-1664)의 문집을 읽고 쓴 독후감들이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서종태가 왕세정의 엄산집(弇山集)을 여러 차례 보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20대였으니(1673년), 그가 쓴 「독엄산집(讀弇山集)」은 그의 연행체험 이전의 문예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왕세정은 의고(擬古)를 대표하는 명대의 문인으로, 그의 글과 문학론 및 예술론은 조선의 중⋅후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종태는 왕세정의 인물됨과 글의 넓이가 ‘굉박(宏博)’에 마음이 끌렸고, 그의 문장이 기발하며 음악의 변화에 비견될 만한 변화와 웅혼한 기운이 있어 읽는 이를 기쁘게 한다고 하였다. 왕세정이 양명학(陽明學)의 심성론을 보여주어 성인의 도에서 벗어나는 바가 있고, 그의 기반이 되는 정신은 송대 문인들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지적하였지만, 왕세정이 원대의 비루함을 씻어내고 명대 문학을 새롭게 일으킨 공적이 큰 문인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서종태는 또한 이 글 속에서 왕세정을 전반적으로 좋게 평가하면서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정주학(程朱學)과 및 송대 문물이라는 점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한편 전겸익에 대하여 서종태는 몹시 불만스러웠다. 전겸익에 대하여 쓴 「전목재집(錢牧齋集)」은 그가 연행을 다녀온 후 수년이 지나(1713년) 쓴 글이기에, 연행체험 이후의 문예관이라는 점에서 앞서의 「독엄산집」과 비교하여 살필 만하다. 전겸익은 명대의 새로운 문예현상을 집약한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문인이다. 서종태는 전겸익이 “사실에 임하여 물상을 읊고, 세상일에 격분하여 글을 쓰는 것은 두보(杜甫)의 여음이라”고 좋게 표현하였지만, 송대의 한유나 구양수 등이 “심히 넘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앞뒤를 조리 있게 하여 차질이 없도록 하였”던 것보다 못하다고 하며, 명대에 들어 꾸며서 쓰고 장난스럽게 쓰고 사정에는 곡진하지만 넘치는 것이 있고 기벽한 말을 많이 하니 글 쓰는 법칙으로 삼을 만하지 않다고 혹평을 하였다. 특히 묘문이나 비문을 쓸 때 전겸익이 정도를 벗어난 내용을 쓰는 것은 예를 들어가며 비난하였다. 나아가 명청대의 글에서 정도를 벗어나는 표현(甚溢之辭)이 많아지는 상황이 사실은 왕세정에게서부터 시작되어 전겸익에게 이어졌다고 거듭 지적하였다. 연행 후 전겸익에 대한 서종태의 글 속에서, 왕세정에 대한 평가에 대한 어조가 매우 부정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서종태는 간결하고 엄정하며 예스러운 것을 좋아하였다. 이러한 그의 미감은 연행을 다녀온 후 더욱 고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서화(書畵)에 대한 글도 여러 편 남기고 있는데, 넘치는 표현을 싫어하고 당송대의 문물을 애호하는 성향이 뚜렷하였다. 그가 연경에 머물 때 안진경(顔眞卿)의 서첩에 얻었다. 그는 이 서첩의 자체(字體)가 더욱 근엄하고 법칙에 맞아(謹嚴典則) 공경할 만하다고 극찬을 하였다. 그러나 서종태가 송대의 미불(米芾) 의 서체에 대하여 쓴 글은 그 어조가 사뭇 다르다. 서종태는 미불이 법도에 구애받지 않고 풍운이 넘쳐나 기이한 태가 가로지르듯 하여 진인의 범주에서 논할 것이 아니라고 칭송하였지만, 미불서체는 안진경체의 침착하게 가라앉는 분위기(沈鬱)나 소식체의 뛰어난 묘미(逸妙)보다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미불의 서화가 송대의 대표문물이라는 점에 그는 후한 점수를 주면서도 법도를 넘어서는 듯한 기이함에 대하여 그는 불만을 토로한 셈이다.
그가 회화를 보고 남긴 글들에서도 그의 심미관을 찾아볼 수 있다. 1704년 봄 그가 연경에 머물 당시 <온릉십경도(溫陵十景圖)>를 팔러온 중국인을 만났다. 이 그림을 펼쳐 본 서종태는 이 중국 그림이 우리나라의 속화(俗畵)보다 낫다고 하였다. 이유는 “그 형상을 가지런히 하고 점철한 것이 섬세하면서 먼 감이 있고, 담박하면서도 기교가 있으니 우리나라의 속화가 법도 밖에 있는 것 보다 낫더라.”는 평가였다. 당시 18세기 초 이미 조선의 사회에는 속화와 춘화 등이 세속적 내용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서종태는 새롭게 등장한 세속태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중국 청나라 화가가 그린 <도원도(桃源圖)>를 보고 서종태는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도화도>에 대한 불평은 도잠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원래의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도화원기의 내용을 떠올리며 그림 속 도원이 물길에 닿아 있지 않은 점, 그림에서 도원의 뽕나무, 삼베, 개와 닭, 어린아이들 등이 모두 누락되어 있는 점을 일일이 지적하였다.34) 이로 보건대, 서종태는 명청대 문예의 성향이었던 기이한 품격이나 상상의 표현보다는 근엄하고 간결한 품격과 옛 글을 존중하는 고아한 태도를 좋아하였으며, 이러한 미의식을 주장하면서 그는 명⋅청대 이후로 변화하는 중국문예의 방향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선 입국(立國)의 근본이 송대의 문명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가 소중화를 말하는 것은 송대의 문명을 조선이 계승한다는 자부를 기반으로 과거를 그리는 그의 역사관과 연결되는 일이다.
5. 대청관(對淸觀)의 갈림길에서
만주족 오랑캐가 중국을 차지하고 청을 세운 사실을 분통하게 여기는 것은 당시 조선문사에게 공통된 감정이었다. 그러나 청이 강성해지는 현실이 수십 년 지속되면서 조선문사들이 청을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일고 있었다. 서종태가 눈물을 흘리며 연행을 떠날 당시, 이미 조선의 문사들 중에는 청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서종태와 다른 방향의 견해를 펼치는 문사들이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18세기 초 조선문사들의 대청관은 크게 다른 방향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서종태의 연행태도와 역사 및 문예에 대한 관점은, 그와 다른 방향의 관점을 택한 문사와의 비교를 통하여 좀더 선명하게 그 특성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서종태와 다른 관점을 보여준 대표적 문사로 김창협을 들어 보도록 하겠다. 김창협은 서종태가 태어난 해(1750)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났으니(1751), 정확하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넓게는 모두 노론파에 속하므로 그들의 관점차이는 학파에 따른 불가피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창협의 대청입장과 현실인식, 문예관, 그리고 연행에 대한 태도 등은 모두 서종태와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
비근한 예로 1705년 황흠이 연경으로 떠날 때, 서종태와 김창협이 모두 황흠에게 글을 주었는데, 서종태가 암흑의 땅으로 간다고 황흠을 위로했던 반면, 김창협은 새로운 문명지로 떠나는 점을 황흠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정반대의 관점이다. 김창협은 황흠에게 “지금 천하가 오랑캐 손에 들어간 지 오래다. 우리나라가 한 구석에 있으면서 홀로 의관예악의 오랜 전통을 바꾸지 않고 엄연히 ‘소중화’라고 자처하면서 옛 중국을 돌아보면서 요순(堯舜)과 삼황의 정치와 공맹(孔孟) 정주(程朱)의 가르침이 있던 그 땅과 그 백성이 모두 오랑캐가 되었으니 다시는 좋은 문헌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우리나라 사신들이 해마다 줄지어 연경을 다녀오면서 끝내 (중국의 좋은 학자를) 한 명도 못 들었다고 하니 어찌된 일인가?” 라고 물었다. 이 글에서 김창협은 그 당시 서종태과 같은 관점의 문사들이 허다하지만 그들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나아가 김창협은 황흠에게 청나라에 가거든 새로 나온 좋은 서적을 물색하여 구해와 달라는 당부까지 하였다. 이러한 김창협의 태도는 서종태가 소중화를 자처한 데 반해 소중화의 자부를 비판하고 있는 점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문예에 대한 태도 또한 달랐다. 서종태가 왕세정에게 약간의 매력을 느끼면서 전겸익을 비편하였던 데 반해, 김창협은 왕세정을 몹시 싫어하고 전겸익을 지극히 높이 추앙하였다. 김창협은 청대의 새로운 문예론을 개방적으로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종태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미불의 서체는 조선후기 18세기후반에서 19세기에 이르면 노론인사들을 중심으로 가장 인기를 누리는 서체 중 하나가 된다.
김창협의 형제들, 김창흡(金昌翕), 김창집(金昌集), 김창업(金昌業) 및 그들의 문하인들은 등은 모두 김창협의 대청관을 공유하였다. 김창흡은 연행길에 올라 견식을 넓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끝내 청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시로 남겼고, 연행에 오른 김창집과 김창업은 청나라 문물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여 상세한 연행체험산문을 남겨주었다. 김창업의 노가재연행록은 청대문물을 자세히 소개한 산문으로 거듭 평가되고 있다. 그들의 관점은 그들에게 연행에서 눈물을 흘릴 여가를 주지 않았을 것이며 상세한 산문기록의 태도를 요구하였을 것이며, 이가 곧 그들 특유의 연행문체로 결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창협이 황흠에게 주는 글에서 분명히 지적하였듯이, 18세기 초 당시 조선의 대부분 문사들은 서종태와 유사한 입장이었다. 말하자면 갈라지는 대청관의 여러 가닥 길 중에서 서종태는 큰 길의 중심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강경한 보수의 길도 있었지만 서종태의 보수는 그보다 온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종태와 김창협 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이었던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의 입장은 강경한 보수의 길도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원진은 청을 토벌하려는 북벌의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호기를 내세울 정도로 적극적인 숭명배청자였다. 기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홍대용 박지원 등에서 시작되어 박제가(朴齊家)에 걸쳐 청대문물을 적극적 호기심과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문사들이 활동할 때에도 박제가와 절친한 벗이었던 이덕무는 청문물의 오랑캐 누린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대청관의 갈림길은 이렇게 이어지면서 대개 문예관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수적인 서종태와 김창협이 청대의 전겸익에 대하여 정반대의 견해를 보여주었듯이, 18세기 후반의 박제가가 청대에 유행하는 소설류를 즐겨 읽었다면 이덕무는 박제가의 이러한 독서태도를 우려하면서 유가경전을 좀더 심독하라고 권하였던 것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보수적 현실관과 진보적 현실관은 서로 다른 취향의 문예관을 향유하면서 각 시대를 구성해 갔던 것을 알 수 있다.
6. 맺음말
서종태의 연행체험을 보고한 그의 연행시는 시종 눈물과 탄식으로 가득하다. 그는 연행은 오랑캐 소굴이라는 어두운 공간으로의 여정이었다. 어둠 속 소굴을 다닌 그에게는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았고 산문으로 기록할 만한 곡진한 체험도 없었다.
그는 연행에서 현실의 연경, 청 왕조의 권력, 중국의 신흥경제 등을 목도하였지만 매번 고개를 돌려 무시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의 연행시는 줄곧 과거의 우리 역사와 중국 옛 문명을 읊었으며, 현실의 청은 사라져야 할 부정의 대상으로 경시하였다. 그가 꿈꾸는 미래는 청이라는 암흑이 걷히고 중화의 빛이 비취는 것이었고. 그가 시로 읊으며 스스로를 위로한 것은 조선이 중국의 교화로 세워졌고 중국의 과거문물을 계승하고 있다는 소중화의 자부였다. 이러한 연행시 내용의 내면은 그가 현실적으로 담당한 역할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담당하였던 국가관료로서의 현실적 책무는 거대한 역사적 어둠에 굴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청에게 머리를 굽혀 간청을 올리고 인사를 하러 가야 했고, 대내적으로는 굶주려 도탄에 빠져가는 백성들의 경제상황을 구제할 방법에 고심해야 했다. 그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었기에 연행의 심리적 고통이 컸고 이것이 눈물과 탄식의 연행시로 표현된 것이다.
그의 문예관은 엄정하고 간결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보수적 관점이었다. 양명학과 전겸익 등 명청대 문인들의 글에 보이는 기벽한 표현은 정도에 넘치는 듯이 보여서 싫었고, 한유나 소식 등 당송대 학자들의 글이 좋았으며, 회화도 담박하면서도 충실하게 세부가 표현된 것을 애호하였다. 서체는 안진경의 법도에 맞는 서체를 가장 칭송하였고 송대 미불의 글씨체를 인정하면서도 거슬리는 면을 일일이 지적하였다. 연경의 시장에 나온 현란한 물건과 서적, 상인들의 상업활동은 몹시 경박스럽게 보였다. 서종태는 명청대 이후의 새로운 문예 및 문물에 대하여 완고한 부정의 태도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미학적 관점은 조선의 가치를 송대의 문물을 계승한 소중화라고 자부하는 역사관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서종태의 연행태도, 역사관, 문예관 일체는 같은 시대의 문사 김창협과 비교하여 좀더 객관적인 이해를 도모해 볼 수 있었다. 김창협은 청의 강성함을 인정하면서 우리가 청의 문명을 탐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당시 조선의 대부분의 문사들이 소중화를 자부하고 청의 문명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김창협과 측근의 무리들은 청대의 문사들에게 실제로 관심이 깊어 김창협은 전겸익을 매우 좋아하였고 그의 문인들은 공안파 글을 애호하였다. 이는 서종태가 송대의 근엄함과 충실함을 좋아하고 전겸익을 비난한 것과 크게 다르다. 김창협의 아우 김창흡은 청에 들기를 소망하였고 김창업은 상세한 연행보고를 남겼으나, 서종태는 연행에 대한 호기심과 체험기록의 의욕이 없었다. 김창협과 서종태의 비교를 통하여, 우리는 18세기초 대청관이 크게 갈라져 가고 있었던 상황을 알 수 있으며, 서종태는 보수적 관점의 길 위에 있었고, 또한 그 길은 당시 대부분의 조선문사들이 취하였던 대세의 흐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서종태의 연행시 전체에 넘쳐 흐르는 눈물의 표현들은 그가 처했던 현실의 어려움과 그의 역사관과 문예관이 감정적으로 응축되어 드러난 결과물이며, 그의 감정표현을 위하여 시는 가장 적절한 문학장르였다. 나아가, 서종태의 연행시는 18세기초 엄존했던 보수주의자의 연행체험을 전달해 주고 있으며, 그들의 내면을 진실되게 표현해 준 보고(報告)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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