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 없는 주막
도창회(본회 고문)
찌뿌드드한 날씨가 오늘따라 볼 일 없고, 할 일 없는 나를 괴롭힌다. 이럴 때는 펜을 들고 글 장난이나 하는 게 상책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번지 없는 주막>이란 제(題)를 글로 써보려 한다. 주막은 주막인데 문패와 번지가 없는 주막이라니, 그러면 무허가 술집인가. 얼마나 부실하고 초라한 주막이면 번지도 없고 문패가 붙지 않았을까. 내가 가장 애창하는 유행가의 제목이 <번지 없는 주막>이다. 요새 말로 나의 18번이다. 이 노래를 부른 옛날 가수 백년설 씨는 나와 같은 고향 성주 사람이기도 하다. 노래방, 술집, 연회 장소에서 노래잔치가 벌어져 “이번은 도창회 씨의 차롑니다.” 사회자가 목청을 높여 다음 잇는 말은 “우리 토속의 심포니 곡, 번지 없는 주막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나의 노래 밑천을 익히 아는 사회자는 자기 배짱 꼴리는 대로 남의 곡목(曲目)까지 건방지게 지정해 버린다. 하긴 내가 노래를 불렀다, 하면 이 곡뿐이니 보나마나 도창회에게는 이 노래 말고는 없을 거란 추측으로 그리하는 것이다. 건방지긴 하지만 사실대로 사회자의 그 추측은 맞는다. 내가 알고 있는 노래라곤 고작 이 <번지 없는 주막>뿐이니 말이다. 옛적 배운 유행가가 더러 있었으나 지금은 그 가사를 다 까먹어버렸다. 그러면 <번지 없는 주막>이란 유행가의 노랫말을 적어보기로 한다.
(1절)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 궂은 비 내리는 그 밤이 애절구려 /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
(2절)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 앉아서 / 따르는 이별주가 불같은 정이었소 /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
사연이야 어떠하든 남녀의 이별 장소가 하필이면 주막집이었을까 싶다. 귀밑머리를 쓰다듬으며 울고 있는 여인을 달래는 장면은 한 폭의 그림으로 떠 올릴 수 있다고나 할까. 주막! – 그렇다. 주막은 퍽 낭만적인 장소이다. 주막에는 마실 술이 있고, 바라볼 주모가 있고, 어울릴 술꾼이 있고, 거기다 흥을, 돋구어 줄 소리꾼까지 있으면 금상첨화가 되련마는, 서서 오줌을 싸는 위인이고 보면 어찌 한 번쯤 들르고 싶은 장소가 아니랴. 주막은 우리 정서로 해석한다면 별 볼 일 없는 술집을 이르는 말이다. 허름한 초가에 술청이 있고, 박주(薄酒) 한 주전자와 무 깍두기 한 사발이면 쉽게 술상을 봐 올 수 있는 그런 빈민 계급이 드나드는 주점이다. 그런데 내가 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는 나는 나대로 시골 어느 한적한 장소의 주막집을 생각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새파랗게 젊은 시절에 내가 꼬였을 법한 어떤 예쁘장한 여인을 떠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 여인이 실물이든 상상 속의 여인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그런 기분에 젖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궂은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창가에 능수버들 가지가 넘실대는 주막집에서 한사코 울며 치근덕거리는 한 여인, 피마자기름을 발라 곱게 빗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내 다시 꼭 오마”고. “안 돼요, 난 못 믿겠어요” 절규하며 사내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매달리는 아낙을 뿌리치며 떠나가는 장면, 그러니깐 무대는 시골 어느 주막이 되고, 등장하는 인물은 소박한 소시민인 듯 남녀 한 쌍, 무대 분위기는 부슬비가 내리는 회색빛 이별 장면, 그리고 무대 배경이라고는 고작 능수버들이 바람에 나풀대는 창살이 있는 오두막 하나가 있으면 그만이다. 내가 눈을 지그시 감고 이 노래의 끝마무리를 할 때쯤이면 나는 어느덧 1950년대 어느 신파극의 한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이다. 울고 웃는 인생사 – 인간의 감정이란 게 묘한 기분이다. 나이가 이대도록 주워 먹었건만,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다가 코안이 따뜻해지면 나는 나 혼자 엉덩이를 들먹인다. 사지가 뒤틀리며 가슴이 갑자기 더워지면서 환희의 순간이 속을 저민다. 부지불식간 야릇한 희감(喜感)같은 것에 사로잡혀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다. 아이들 말로 기분이 찢어진다고나 할까, 이런 순간에 여자라면 찔끔 눈물이라도 한줄기 쏟거나, 남자라면 빽 하고 고성으로 노랫가락이라도 한 곡조 뽑음 직하다. 순간적인 발작치곤 격렬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패, 주막, 궂은 비, 능수버들, 아주까리 초롱, 이별주, 귀밑머리...이런 용언들은 순간적으로 그리움이 발린 정언(情言)들로 변해 나래를 달고 저 옛날 추억의 강가로 날아간다. 꿈결 같은 옛날이 되살아나면서 마치 자기가 금세 인기 탤런트나 찬란한 배우가 된 것처럼, 허공에 둥실 뜨는 것이다. 제발 생시라면 참아주고 꿈이라면 깨지 마라. 왜 나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있나? 으쓱해지는 어깻죽지가 하늘로 치솟는다. 갑작스레 고운 옷을 입고 싶고, 진하게, 화장을 하고 싶고, 화려하게 몸치장을 하고 싶어진다. 아편을 먹은 듯 어떤 환각에 사로잡혀 몰아의 경지에 드는 순간이리라. 아니 잠깐 의식의 장난에 속은 것이라고 할까. 마른 날에 무지개를 만나는 신기루 같은 현상이라고 할까? 그러나 그런 환희의 순간이 얼마나 오래 가랴. 의식의 장난에 속은 환각이 얼마나 가랴. 감정이 가라앉으면 다시 침통해지고 치켜들었던 어깻죽지가 차츰차츰 낮아진다. 과거사는 언제나 아름답다는 것을 알 뿐, 현실의 벽이 얼마나 차디찬가를 실감하게 된다. 회색빛 우수 속에 덩그러니 들어앉는 <번지 없는 주막>의 주인공이 자기라는 서글픔이 조용히 자리 잡는다. 어느 심리학자가 하던 말이 기억난다. “고독이 심하면 환희로 변한다.”라고. 나 같이 나잇값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간간이 코미디 같은 주책도 생활의 촉매가 되는 법이다. 이래서 번지 없는 주막의 단골 식구는 쓸쓸히 무대 뒤로 사라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