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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聖庵/華嚴寺 探訪記 2011.6.7
새벽 4시에 잠이 깼다. 스마트폰의 모닝콜을 5시40분에 맞춰 놓았는데도 안심이 안되었는지 턱도 없는 이른 시간에 잠이 깬채 눈을 감아도 더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컴퓨터를 켜고 몇년전 다녀온 사성암/화엄사 탐방기를 읽어 보았다. 이번엔 화엄사 에 문화해설을 부탁해 놓았으니 전 보다는 풍부한 내용의 여행기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보견회 유적지 탐방은 전체적으로 10번째이고 장거리 여행으로는 두번째이다. 대중교통이 아닌 전세버스를 내어 가는 장거리 탐방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우선 목적지 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만 하루를 보내는 여행지가 풍경에서 큰 감동을 주거나, 역사성이나 유명도에서 이름이 난 유적지가 아니면 회원들에게 실망을 주기 때문이다. 고심끝에 정한 곳 이 오늘 찾게 되는 전남 구례의 사성암과 화엄사이다. 사성암은 빼어난 풍광으로 실망감은 면 할 것 같고 또 화엄사는 국보와 보물급 문화재가 많은 명승고찰로 볼거리가 많은 유적지라 그 럭저럭 합격점은 되리라 믿었다.
아침 7시에 교대역 14번 출구를 떠난 버스는 죽전임시정류장에서 수지분당회원들을 태운다. 필자도 광교로 이사를 온 이유를 들어 죽전에서 탑승했다. 보견회 정회원 20명중 19명을 태운 버스는 경부선-논산.천안 고속도로- 전주.광양 고속국도를 따라 달린다. 금년 봄 비가 적은 탓으로 몹씨 가물어 걱정이 많다. 그러나 모내기를 마친 논이 제법 많이 보인다.
가는 도중에 정안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아침식사대는 처음 가입한 P 회원이 스폰서 를 해 주었다. 환영과 함께 고맙다는 힘찬 박수를 받았다. 버스를 타면서 점심은 내가 사겠다 면서 C회원이 금일봉 봉투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이토록 금전적인 지원이 풍성하니 회장단 이 너무 행복하다.
오수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급한 볼일도 보고~
정안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시켜놓고-
보견회의 발 마이크로버스
사성암(四聖庵)
예정대로 4시간이 걸려 11시에 사성암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사성암까지는 일반차량 출 입이 안된다. 입구 주차장이 몇년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물어보니 금년 봄 부터 이곳으로 옮겨 조성된 것이란다. 샤틀버스의 왕복요금도 인당 3천원에서 3,400원으로 올랐다. 경노우대도 없다. 샤틀버스로 10여분 꼬불꼬불한 험한 산길을 오른다. 능수능란한 기사양반의 운전솜씨에 칭찬이 자자하다. 걸어서 오른다면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하면서 고마 워 한다. 버스에서 내려서 또 150m 정도를 걸어야 한다. 드디어 사성암의 진기한 모습이 시야 에 들어온다. 마치 바위벽에 제비집을 지어놓은 듯한 풍경에 고개를 든채 감탄연발이다.
사성암(四聖庵)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3호로서 구례읍에서 약 2km 남쪽인 죽마리 오산(鰲山) 꼭대기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원래 오산암이라 불렀는데, 544년(성왕 22) 연기 조사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성암 사적(四聖庵史蹟)》에 4명의 고승, 즉 원효(元曉)·도선국사(道詵國師)·진각(眞覺)·의상(義湘)이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 부 르고 있다. 오산은 해발 531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경승지이다. 지은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암자 근처 암벽에 고려시대 초기 작품인 음각마애여래입상이 있어 창건 내력을 짐작한다. 현재 이 암자는 작은 규모의 목조기와집 으로 되어 있다.
오른 쪽 전각인 약사전으로 오른다. 몇년전에 왔을때 약사전(藥師殿)으로 보았던 편액이 유리 광전(琉璃光殿)으로 바꾸어져 있어 물어볼려해도 알 길이 없다. 琉璃光殿이 곧 약사전(藥師殿) 과 같은 의미이니--짐작이 간다. 약사전 안을 보면 정면 뒤쪽벽에 음각으로 암각한 마애여래 입상이 보인다. 이것은 원효대사께서 손톱으로 음각하여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왼쪽 전각에는 스님들이 수도하는 곳이다. 바로 옆에 있는 지장전을 끼고 도는 돌계단을 오르 면 팔백년 묵은 귀목나무가 섬진강 줄기를 내려다보고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어루만지기만해도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원바위가 있다. 소원바위에 얽힌 전설도 있다.
이곳 사성암은 몇년전 찾았을 때 아직 방영전의 "추노"라는 드라마를 촬영한 곳으로 소개되었 는데 얼마뒤 그 드라마 방영이 시작되어 빠짐없이 보았던 기억이 난다. 카메라 앵글 속에 비친 아름다운 풍경에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과 함께--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도선굴과 진각국사가 참선을 했던 ‘좌선대’등을 지나 오산 정상부 쪽 으로 가면서 반대쪽 시야가 확 트인다. 구비구비 도는 섬진강이 역사를 흘러보내고 있고 넓은 구례 곡성평야가 그림처럼 펼처져 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내친 김에 오산 정상까지 올랐다. 530.8m의 정상표지석이 우릴 반긴다. 팔각정에서 내려다보는 구례읍과 섬진강의 아름다움에 취해 내려갈 생각을 않는다. 돌아갈 버스 시간이 있기에 독촉하여 하산을 한다.
사성암 약사전을 올려다 보며 기념촬영을 하였다. 미리 내려간 일행도 있어 전원촬영이 안되 니 나중에 합성하여 만들라는 주문이다. 이젠 포토샾 합성을 모두 알고 있으니 속일래야 속일 수가 없다. 모두들 기대도 많았지만 역시 직접 보는 아름다운 풍광에 기분이 들떠 있는 듯하 다. 버스를 타고 내려오니 어느듯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배꼽시계가 식당으로 빨리 가자 고 재촉을 한다. 화엄사 입구의 식당이다. 산채나물밥으로 유명한 식당이란다. 특별메뉴로 자 연산 도토리묵과 전을 시켜 막걸리와 소주로 밥과 술을 마음껏 먹고 마셨다. 작년 백담사 템플 스테이 갈때 쫓겨난 얘기가 화제가 되면서 너무 과음하지 말자는 스스로 절제하는 모습들이 보기 좋다. 점심은 P회원으로 부터 받은 금일봉으로 계산을 하였다. 고맙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2시반으로 예약한 문화해설사에 전화해서 2시로 당겼다. 화엄사는 채 10분도 안걸려 도착했 다. 일주문 앞에서 해설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소개했다. 고교동문들 유적탐방모임이 라고--대부분의 해설사들이 그러하듯 나이로 보아서인지 전문가들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해설에 부담을 느낀다고 한다.
사성암까지 왕복으로 운행하는 마을버스
정상부에 사성암이 위치하는 오산 휴양림 안내도
150m정도 삼림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긴 돌담길이 이어진다.
사성암 유리광전이 보인다.
사성암 약사전(유리광전)
아래 종무소 계단 위로 오르면 지장전과 소원바위가 나온다.
마애약사여래불 안내판
약사전 뒤 바위에 음각으로 새긴 마애약사여래불
마애약사여래불 설명 약사전 뒤 쪽에 마애약사여래불이 있다/기와불사한 기와가 곳곳에 쌓여있다/ 바위의 담장 넝쿨이 옛 부고 교정을 생각케한다.
사성암은 기도처로 유명하다.
돌계단길로 오르면 지장전,산신각,도선굴,소원바위,좌선대가 있고 800년 수령의 귀목나무도 있다.
귀목나무
소원바위
산왕전
도선굴 오산 정상 표지석
전망대
바위 속의 보살상
지장전 동자승과 약수
보견회 전원을 포토샾으로 한자리에 모았다.
화엄사 입구 식당에서
천년고찰 문화재 보고(寶庫) 화엄사(華嚴寺)
민족의 영산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 스님 이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 후, 백제법왕(599)때 3천여 명의 스님들이 머물며 화엄종을 선양한 명찰이다. 과 공양탑을 세웠고, 원효스님은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기 초를 닦았다. 문무왕 17년(677)에 의상 스님은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 법당(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했다. 경덕왕(742~764)때 이 르러 8원 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었다. 암자를 중수했다. 조선시대에 세종 6년(1426)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는 배불의 와중 에도 설응, 숭인, 부휴, 중관, 무렴 등의 고승대덕들이 주석했고, 임진왜란(1592~1598)때는 호남의 관문 구례 석주관에서 승병 300여 명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이 앙갚음으로 왜장 가등청정은 화엄사를 전소시키는 환란을 맞는다. 때 계파선사와 문도에 의하여 장육전 자리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규모로 웅장한 각황전 건립했다. 근대에 이르러 도광 대종사의 전면적인 중수에 힘입어 지금의 화엄사로 모 습을 갖추었다.
자랑하는 각황전과 세련된 조각이 아름다운 사사자 삼층석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기가 큰 각황전 앞 석등, 각황전 안의 영산회괘불탱 등 4점의 국보와 대웅전, 화엄석경, 동·서 오층석탑 등 8점의 보물을 비롯해 천연기념물 제1040호로 지정된 올벚나무까지, 빛나는 문화유산을 간 직한 천년 고찰이다.
해설사를 따라 일주문 앞에서 전반적인 화엄사의 개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일주문을 들어갔다. 일주문에는 智異山華嚴寺 라는 해서체로 쓴 현판이 시선을 끌었다. 이 글씨는 선조의 8번째 아들(서자)인 의창군(義昌君; 李珖)이 1636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큰 벽면에 또 하나의 멋진 붓글씨체가 눈에 뜬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는 불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문귀이다.
사자 등에 서 있는 저 비석은 무엇인가? 궁금해서 가보니 인조 때 화엄사 대웅전 등을 중건한 벽암대선사의 공적비였다. 벽암대선사께서는 임란때 승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후 인조 때는 남한산성을 축성하면서 전국 승려들을 동원,팔도도총섭으로 공을 세우신 분이다. 화엄사를 중건한 것과 함께 또 한가지 유명한 것은 화엄사 올벚나무 군락지를 조성한 분이 바로 벽암 선사이다. 당시 전쟁에 사용되는 화살을 만드는데 이 올벚나무가 쓰였기 때문이다.
우측에는 화엄사 성보관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없어 들르지 못했다. 박물관으로 많은 유적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바닥돌은 이음새가 없는 원석이 깔려 있었는데 익산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화엄사에는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금강문이 더 있다 금강문 역시 천왕문처럼 외 부의 잡신과 악귀를 물리치고 불법을 수호하는 대문 역할을 하는데 두명의 금강장사가 안치 되어 있다. 금강역사 옆에는 문수보살이 동자로 화현한 문수동자가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서 있고 또 한쪽에는 보현보살이 동자로 화현한 보현동자가 행원의 실현을 상징 하는 코끼리의 등에 타고 있다. 일직선이 아니게 비켜 배치한 점이 특이하였다.
천왕문 앞에는 하얀꽃이 피어 있는 보리수나무가 이채롭다. 보리수나무는 불교의 상징이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불국 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인 사천왕(四天 王)이 안치된 전각이다. 화엄사 사천왕상은 흙으로 만든 소조불(塑造佛)이며 높이는 378㎝이 다. 1630년(인조 8)에서 1636년(인조 14) 사이에 벽암(碧巖)선사가 화엄사의 대웅전을 비롯하 여 금강문·보제루·천왕문·적묵당·일주문 등의 건물을 중건하였을 때 사천왕상도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천왕문 내부 왼쪽으로는 비파를 든 동방 지국천왕과 칼을 쥔 남방 중장천왕 이, 오른쪽으로는 용과 여의주를 든 서방 광목천왕 그리고 깃발 달린 창과 사자를 쥔 북방 다문천왕이 있다. 네 구의 사천왕상은 공통으로 화염 무늬가 새겨진 화관을 쓰고 갑옷을 입고 있으며,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네명의 천왕들 모두 목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있 었는데 무섭고 험상궂은 얼굴에도 예쁘게 스카프를 두른 모습이 의외로 조화를 이룬다.
천왕문을 지나 계단으로 오르면 보제루가 나오는데 계단 아래 마당에는 목마른 나그네의 갈증 을 풀어주는 샘물이 있고 1964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소나무가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있 다. 또 두개의 당간지주가 그 옆에 서 있다. 원래 당간지주는 일주문 밖에 있는게 원칙임에 비 추어 화엄사 배치가 원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짐작케 한다.
계단을 오르니 정면으로 보제루(普濟樓)가 있는데 화엄사 보제루는 다른 사찰의 보제루와는 달리 기둥 아래층으로 지날 수가 없다. 옆으로 돌아가야 하는 특이한 구조로 건축되어 있다. 보제루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으로 법회 때 승려나 신도들의 집회강당으로 지어진 2층 누각 건물이다. 인조 때 벽암대사가 창건하였고 1827년 순조 때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계단 층계를 돌아 마당에서 보면 정면에 멋진 글씨의 현판이 걸려 있다. 꽃비그림과 함께 걸린 현판에는 "華藏"이라는 명필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다.보제루는 장식을 배제하고 단청도 하지 않아 그야말로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국보 4점 화엄사에는 국보가 4점 그리고 보물이 8점이 있다. 어느 사찰보다 중요한 문화재가 많은 편이 다. 유적탐방 최적지 중의 하나이다. 국보보물이 많은 사찰은 경주 불국사,영주 부석사 그리고 구례 화엄사가 꼽힌다. 먼저 국보 4점을 소개한다.
화엄사 각황전 (覺皇殿):국보 제67호로 본래 각황전 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 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1703년(숙종 29)에 세워졌으며,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5칸이고 양식은 중층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원래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그 후 숙종 때 계파(桂波)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완공 후 숙종이 사액(賜額)하여 각황전이라 하였다. 현재 건물 중앙에 길게 설치된 불단 밑에는 석각(石刻) 화엄경석(華嚴經石)이 수장 되어 있다.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건물은 원래 3층이었으나 임란때 소실후 2층으로 건축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643년(인조 12년)에 재건한 것이다.건물 안쪽은 위 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 고 있다. 천장은 우물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건물 옆 활주가 휘어진 것이 시선을 끈다. 전각 문살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단청이 되지 않았는데 알료가 없어 단청을 못했다 한다. 편액 글씨는 숙종시 형조참판 을 지낸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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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황전 앞 석등(石燈): 국보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크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 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멀리 퍼지게 한다는 의미로 장고 모양을 택하였다고 한다.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 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 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8각은 불교의 8정도를,4개의 창은 사지법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4사자삼층석탑 적멸보궁 안내판을 따라 각황전 뒷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국보 제35호인 4사자삼층석탑이 있다.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와 어머니의 전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 14년(645)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불사리 73과를 모셔와 연기조사의 공덕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고 하여 불사리공양탑이라고도 한다.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 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 러내고 있다. 각기 모양이 다른 네마리의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 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 이라 한다. 그래서 이곳을 효대언덕이라고 부른다.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 루고 있다. 4사자삼층석탑이 세워진 이곳은 백두대간의 기가 멈춘 곳으로 풍토지리상 명당으 로 꼽힌다 한다. 언제 심어진 지는 모르나 크고 아름다운 소나무 한그루가 이 명당을 지키고 있는데 그 아름다운 모습에 모두 탄성을 지른다.
국보 제301호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인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중심으로 사천왕과 십대제자, 2구의 분신불, 시방제불(十方諸佛) 등이 적절하게 배치된 군집 도 형식의 영산회상도이다. 화면 중앙의 석가불은 높다랗게 만들어진 단의 연꽃 받침 위에 앉 아 있으며, 마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의 손가락을 땅으로 향한 손모양을 취하고 있다.
사천왕 중 2구는 그림의 하단에, 2구는 상단에 배치해 마치 네 모서리를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홍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중간색을 사용해 은은하면서도 밝은 느낌을 주며 채색무늬와 금색무늬가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조선 효종 4년(1653)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각 상들의 늘씬
화엄사 일주문
가람배치도
일체유심조
벽암대사 공적비
화엄사 성보관
반야문/종무소,템플스테이수련원
바닥돌
금강문
금강장사와 사자등에 탄 문수동자
금강장사와 코키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
천왕문 앞 보리수 나무
천왕문
천왕문의 사천왕상/험상궂은 얼굴이나 머플러가 예쁘다.
돌계단 위로 보제루와 법고루가 보인다.
상왕문 화단의 예쁜 꽃들이 일행을 환영한다.
만월대
법고루
보제루
보제루 화장 현판
보제루 내부
보제루 안에 걸려있는 영산회괘불탱(복사)
보제루 꽃무늬 문살
화엄범종 복원불사
주련풀이
박정희 대통령이 심었다는 소나무
당간지주
보제루에서 보는 각황전
각황전
각황전
각황전 불상
각황전 문살
각황전을 받치는 기둥 각황전 주련 석등
석등 귀두부
적멸보궁 가는 길
사사자삼층석탑(적멸보궁) 가는 계단길
동백숲
사사자3층석탑
4사자삼층석탑
석등을 이고 있는 연기조사
소나무
영산회괘불탱
아래 묻어둔 석경(보물 제1040호),동5층석탑(보물 제132호)와 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이 와 목비로자나삼신불좌상(보물 제1548호) 등 모두 8점이나 된다.
화엄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299호로 조선 인조 때 건립된 것으로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현존하는 화엄사의 당우(堂宇)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 (인조 14) 벽암대사(碧巖大師)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석단(大石壇)과 대석계(大石階)가 있고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불단 위 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비롯하여 석가모니불 그리고 노사나불의 3구의 금동불을 안 치하였다. 각황전과는 직각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주불전인 대웅전이 각황전의 7칸에 비해 2칸 이 적은 5칸의 크기이지만 오르는 계단이 넓어 결코 적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셔야 하는 것이 통설인데 이곳 화엄사 대웅전은 주불이 비로 자나불이고 협시불로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을 모셨다. 그래서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야 타 당하다는 해설사의 설명이다.
동.서5층석탑 대웅전 마당 앞 2개의 5층석탑이 서 있다. 모두 국가보물로 지정된 유적이다. 동5층석탑(보물 제132호)와 서5층석탑(보물 제133호)이다.통일신라 9세기말-10세기초에 건 축된 이 탑중 서5층석탑의 기단 하단부에는 12지신과 여덟무리의 신들 사천왕이 함께 새겨진 드문 예로서 1995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비롯한 유물 47점이 탑 속에서 발견되었다.
원통전 앞 사자탑 대웅전 옆 영전과 나한전 중간에 위치한 원통전(圓通殿) 앞에 보물제300호인 사자탑이 서 있 다.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 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露柱)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 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은 무 늬없는 석재로 구성된 소박 한 모습이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탑신(塔身)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 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 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은 이곳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이나, 조각수법은 이에 못미처 이보다 훨씬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각황전 아래 묻힌 석경(보물 제1040호)은 원래 3층이던 장육전이 불타고 그 사방의 벽에 부 처님의 말씀을 적은 기록(석경:石經)이 있었으나 불타고 1000여개의 조각이 각황전 밑에 보관 되어 있다. 그외 보물로는 대웅전 내 삼실불탱(보물 제1363호)이 있다. 대웅전 내부 뒤면 중앙의 비로자나불화를 중심으로 왼쪽에 노사나불화, 오른쪽에 석가모니불화를 각 1폭씩 그린 3폭의 삼신불화로, 18세기 전라남도 순천의 조계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겸(義謙) 등 13 명의 화승이 조성한 것이다. 그외 서5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도 보물(제1348호)로 지정되었다. 화엄사 서오층석탑 해체보수작업을 하던 중 탑 내부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1층 탑신 중앙에 지름 22㎝ 정도의 둥근 홈에 청동불상범(불상주조틀)과 청동방울 및 장식, 철제칼, 금속편, 수정 등 사리장엄구가 안치되어 있었고 그 옆 33㎝×10㎝의 네모난 홈에 백지 묵서다라니경(白紙墨書陀羅尼經)이 탑인(塔印) 찍힌 종이와 함께 뭉치로 발견된 것이다. 또 한점의 보물은 목비로자나삼신불화상(보물 제1548호)이다.
원통전,나한전과 영전,명부전 원통전(圓通殿)은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불전인데 주불전일 때는 원통전, 부속 전각일 때는 관 음전이라고 부른다. 닷집으로 전각이 매우 아름답다. 단청도 화려하고 곱다. 원통전 옆에 아담한 크기의 나한전이 위치한다. 나한전은 부처님의 500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 각이다. 나한전(羅漢殿)에 봉안되었던 영산회상도는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 하는 장면이다. 가섭존자, 아난존자 등 석가의 18제자가 둘러싸고 있으며, 하단에는 보현보살 과 문수보살이 서 있는 모습의 불화이다. 나한전은 그 자체 건물보다 후불탱화가 더 유명하며 아울러 나한전 앞 홍매화도 유명하다.워낙 꽃색상이 검붉어 흑매라고도 한다. 수령 300년을 자랑하는 이 매화나무는 조선조 임진왜란 시절에 화마를 입은 자리에 각황전이
대웅전 좌우에 영전과 명부전이 있다.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한 영전(影殿)은 조사(祖師)들을 모신 전각인데 영전 기둥에 쓴 주련이 유명하다. 치문경훈(淄門警訓)이라는 책의 제현송구(諸賢頌句) 둘째편에 나오는 송나라 때의 굉지(宏 智) 스님의 시귀인데 모두 8句 중 6句가 주련에 행서체로 멋지게 장식하고 있었다.명부전은 대웅전 오른쪽에 위치하며 이 법당의 주불은 지장보살이며 그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봉안하며 그 좌우에 명부시왕상을 안치하고 있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화엄사는 빛나는 문화유산을 간직한 천 년 고찰이다. 짧은 시간에 주마간산격으로 탐방을 마쳤지만 머리와 가슴에 남는 여운은 크다. 약간의 전라도 사투리가 묻어나오는 미인 해설사와 작별을 고하고 이제 마지막 덤으로 가는 노고단 트레킹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대웅전과 동오층석탑 대웅전 전경 배례석 대웅전 비로자나불과 협신불 노사나불,석가모니불 그리고 삼신불 후불탱화
서5층석탑/동5층석탑 원통전 앞 사자탑 각황전 밑 석경 원통전 나한전 나한전은 500나한을 모신다. 300년 수령의 홍매화 영전 행서체의 영전 주련 명부전 명부전의 지장보살 범종각 범종각의 사자상 화엄사 일주문 입구의 放下着 다리
성삼재~노고단 트레킹 유적지 탐방 외에 팊으로 노고단 트레킹을 택했다. 성삼재까지는 버스로 오를 수 있다. 주차장에 내려 전망대에 오르면 사방에 유명한 지리산 명 봉우리와 희뿌연히 가리고 있는 운무가 경치를 한결 운치있게 만들고 있다. 시간이 부족해 노고단(1508m)까지는 오를 수가 없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가 오기로 했다. 원래 왕복 3시간 코스인데 불과 한시간도 안되는시간이지만 숲속을 걷는 트레킹 길은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이다. 특히 가을 단풍철에는 수많은 산행객이 모여든다. 섬상재가 해발 1,100m이 니 그다지 높이 오르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계단길은 가파르지만 둘러가는 완만한 코스도 있 다. 걸어가는 양쪽 숲에는 봄과 여름 사이의 꽃들이 피어 있다. 병꽃나무, 함박나무(산목련)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지런히 걷는다. 의외로 잘 걷는 친구도 많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가는 트레킹길
층층나무
병꽃
개다래나무
산목련(함박꽃나무)
수줍게 피어있는 붓꽃
철늦게 피어있는 영산홍
진녹색으로 물든 지리산 자락이 한없이 넓게 펼쳐저 있다.
약속한 시간이 되니 어김없이 모두 모였다. 이제 오늘 하루의 스케줄은 모두 끝난 셈이다. 단지 아침에 약속했듯이 보견회 회원들 모두 집에 돌아가면 영식님으로 불릴 수 있도록 저녁 식사를 제공해야 한다. 고속도로에서 먹는 식사는 뻔한 것이라며 분당까지 가서 제대로 술까지 한판 벌리자는 파가 있는가 하면 집에 가기 바쁜 스케줄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고 고속도로에서 저녁식사를 하자는 편이 우세하여 대세를 따르기로 했다. 정안휴게소에서 물병에 숨겨간 쇠주와 함께 저녁식사를 마쳤다. 저녁 식사는 k 회원이 계산했다. 우리 보견회 회원들은 약속이나 한듯 서로 경쟁적으로 스폰서를 자임하고 나선다. 보견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죽전에서 필자를 포함 몇명이 내리고 나머지는 아침에 출발한 교대역에 10시 10분경 도착했 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떤 보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다정한 친구들과 좋은 명승 지를 구경했다는 보람으로 마음이 행복했던 하루였다.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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