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조정이 약속을 어기고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자 1018년 소배압을 총사령관으로 10만 대군이 침공한다.
거란의 3차 침략이다.
고려에서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흥화진에서 매복과 수공으로 적군을 무찌르고 퇴각하는 적병을 귀주에서 습격하여 수천 명만이 살아 돌아갔다고 한다.
이에 요나라와 1019년 화친조약을 맺는다.
[출처 :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안국사'라는 명칭은 거란군을 물리치고 받은 호인 '추충협모안국공신'에서 땄다.
사당안에 모셔진 장군의 영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0의 금천현 「인물」조 기록이다.
“한 사신이 밤에 시흥군으로 들어서다가 큰 별이 인가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전을 시켜 가보도록 하였더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사신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는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 기르니 이 사람이 바로 강감찬이다.
뒷날 송(宋)의 사신이 그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절을 올리며 말하길, ‘문곡성(九星의 네번째 별로 文星이라고도 함)이 보이지 않은 지 오래더니 지금 여기에 있군요’라고 했다 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낙성대 (답사여행의 길잡이)
'별이 떨어진 곳', '낙성대(落星垈)' 명칭의 근원 설화이기도 하다.
구전설화에는 또 이런 것이 있다.
그가 소년의 나이로 한 고을의 원님이 되어 부임했다.
어린 그를 본 관속들은 공공연히 얕잡아보았는데, 어느날 강감찬이 관속들을 불러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집어넣어보라고 명한다.
관속들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는 호통을 쳤다.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집어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 속에 집어넣으려 하느냐!”
이렇게 해서 관속들의 기를 꺾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 그가 어느 고을에 부임하여 여름날 업무를 보는데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아전에게 부적을 써주면서 못에 던지게 했더니 다시는 개구리가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지역에 전승되고 있다.
한성판윤으로 부임했을 때 남산(또는 삼각산)에 사는 수백 년 묵은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여 길 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해친다는 말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 크게 꾸짖고는 앞으로는 새끼도 평생에 한 번만 낳고 몇몇 산에만 살게 했다는 내용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낙성대 (답사여행의 길잡이)
장군을 신격화한 구전들이 황당하지만 그만큼 추앙을 받았다는 증거이리라.
사당안에 영정이 있다.
옛문헌에 의하면 강감찬의 외모가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되어있는데 영정은 무난하게 그려져있다.
영정 좌우 벽면에 장군과 관련된 일화들이 그려져있다.
안국사를 관람하고 나오는 길, 멀지않은 곳에 있는 생가터를 찾아간다.
'관악구민 종합체육센터'를 지나 물어 물어 생가터를 찾아간다.
벽화가 그려진 옹벽을 지난다.
가정집 담벼락에 '강감찬 10리길' 이정표가 보인다.
건물에 둘러쌓인 공터에 소나무가 유난한 색을 지니고 있다.
장군의 생가터이다.
생가터에 세워진 '유허지' 표지석이다.
'강감찬장군 낙성대 유허비'라고 적혀있다.
'유허'란 '오랜 세월 쓸쓸하게 남아 있는 옛터'를 말한다.
장군의 생가 옛터에 비를 세운 것은 나라 위해 공을 세운 업적을 기리기 위함이다.
전시관에 전시된 향나무 고사목 밑동이다. 생가터에 장군과 더불어 자랐다는 향나무가 있었다. 1968년 서울특별시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나 다음 해 고사되어 해제되었다. 이후 고사된 향나무는 생가터 소유자에 의해 잘려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2014년, 수소문 끝에 두 갈래로 갈라져 자란 한 갈래를 찾아 전시관에 전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