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地巡禮>
혜목산 고달사지
(蕙目山高達寺址巡禮)
혜목산(蕙目山) 기슭의 고달사(高達寺)는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傳) 한다.
이 절은 고려 초기(高麗初期)에 국가가 관장하는 3대 선원(禪院) 가운데 하나로서
왕실(王室)의 보호를 받은 중요한 사찰(寺刹) 이였다.
975년 세워진 원종대사(元宗大師) 비문에 의하면 당시 에는
고달원(高達院) 또는 고달선원(高達禪院) 으로 불렸다고 기록 되어 있다.
1530년 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고달사 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까지는 번창 했으나 1799년 에 편찬한
“범우고(梵宇攷)”에는 폐사 된 것으로 나타나 안타깝다.
여주고달사지석조대좌(麗州高達祀址石造臺座)
이 석조대좌(石造臺座)는 불상(佛像)은 없어진 채 대좌만 덩그렇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고 조각솜씨가 명쾌한 4각대좌(四角臺座)의 수작(秀作)이다.
이 방형대좌(方形臺座)는 장방형(長方形)의 석재를 상, 중, 하대등 3중으로 겹쳐놓은
이른바 방형대좌(方形臺座) 상대(上臺)는 양련(仰蓮)을 시원하고 뚜렷하게 조각했고
중대(中臺)는 4면에 모두 하나의 큼직한 안상(眼象)을 음각했는데 솜씨가 명쾌하며
하대(下臺)는 상대와 같은 수법의 연꽃을 복련으로 새기고 그 아래로
안상도 조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방형의 중첩과 연꽃과 안상무늬의 교체를 명쾌하고 산뜻한 조각솜씨로
조화시킨 고려 초기 역작의 석조대좌라 할수 있겠다.
원근에서 바라본 고달사지
그 규모가 상당히 넓다.
대웅전이 있던 터로 예상 된다.
고달사지 원조대사탑비
이 구부(龜趺)와 이수는 혜목산고달선원원종대사지비(蕙目山高達禪院元宗大師之碑)
를 받쳤던 귀부와 시신석 위에 얹혔던 이수 이다.
비는 일찍이 무너져 신석(腎石)은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 옮겨져 현재는
경복궁 근정전 서쪽화랑(西廻廊)에 진열되어 있며 이곳 고달선원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다.
비문(碑文)에 의하면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新羅景文王) 9년(958) 13세에
출가하여 상주(尙州) 공산 삼랑사(公山三郞寺)에서 융제선사(融蹄禪師)에게
사사(師事) 하였다.
22세에 양주(楊州) 삼각산 장의사(藏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23세에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 동성현 적주산에서 자선화상에게 사사 하였으며
경명왕 5년에 환국하여 봉림사 에서 정진을 계속 하였다.
그 후 광주 천왕사 에서 고려 광종9년 8월에 90세로 입적하니 왕이 애도 하여
원종대사 혜진 이라 추시하고 진영일정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 입적후 17년에
이비가 세워졌음을 알수 있다.
귀부는 거대한 단일석 으로 조성되고 6각 귀갑문이 장식이 되어 있으며
장방형의 비좌는 운문이 새겨져 있는 연화좌 위에 조출 되고 상명 둘레에는
북련문이 조출되어 있다.
네 다리와 손톱끝의 조형은 사실적이며 예리하나 귀두 의 면모는 흔히 볼수 있는
용형이다.
이수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상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가 꽃혔던 흔적으로 보인다.
동쪽에서 바라본 석조대좌
귀부의 뒷모습
대웅전터 쪽에서 아래를 바라본 풍경이다.
멀리 아내와 딸이 보인다./ 이근처에는 뽕나무가 많아서 이날 아내와 딸은 오디를 많이 따먹었다.
원종대사탑(元宗大師塔)
보물 제7호
시대 고려초기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광종때 까지 활동한 원종대사(869~958)의 부도
원종대사 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977년 세워진 것으로 확인 되었다.
이 부도는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로 높이 2.5m이다.
이 부도는 4장의 돌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지대석과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이 높여 있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대석에는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린
거북을 중심으로 네 마리의 용이 있는데 몸통 사이에는 구름 문양을
가득 새겨 넣었다.
상대석의 아래쪽에도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위쪽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한 1단의 받침이 조각되어 있다.
팔각형으로 이루어진 탑신부의 각 면에는 자물쇠문양과 사천왕상이
교대로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의 끝에는 꽃무늬(귀꽃)가 크게 조각되어 있고 상륜부에는
꽃무늬가 조각된 복발(覆鉢)위에 작은 보개(寶蓋)와 보주(寶珠)가 놓여있다.
원종대사부도
원종대사 부도에 오르는길은 이런길을 따라 산중턱까지 올라야 한다.
고달사지승탑(高達寺址僧塔)
국보 제4호
시대는 고려초기로 추정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는 신라경덕왕 23년에 건립되었다.
지금은 폐사되어 터만 남아있는 이곳에 스님의 부도가 있는데 누구의 것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지붕돌은 상대적으로 크게 만들어졌으며 추녀 끝에 꽃무늬가 조각되어
상륜부에는 복발과 보개가 올려져 있다.
이 고달사지 부도는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같은 절터에 남아있는
원종대사탑 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달사지 승탑(부도)
탑신에 새겨진 용무늬
내려오면서 바라본 승탑(국보 제4호)
고려 승탑(부도)가 멀리 보인다.
터를 보니 규모가 상당했던것으로 여겨진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산에서 수도하는 모습
日日是好日 / 날마다 좋은 날
날마다가 좋은 날이다 (碧巖錄)
'날마다 좋은 날'
이 말은 벽암록에 나와 있는 것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날마다 길일(吉日)'이라는 뜻과는 다른 것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선어(禪語)입니다.
먼저 일진이 좋다,
나쁘다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날씨나 계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떠나 환경 속에 아름다운 것,
참된 것을 개발해야 합니다.
"날씨 개인 날에는 개인 것을 사랑하고,
비오는 날에는 비를 사랑한다.
즐거움이 있으면 즐기고,
즐거움이 없어도 즐긴다"는
한 소설가의 말이 이 말의 뜻과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당시선(唐詩選)을 보면
"꽃이 피면 비바람이 많고,
사람으로 살다보면 이별의 슬픔이 많다
(花發多風雨 人生別離足)"는 시가 들어 있습니다.
천무릉(千武陵)이라는 시인의 권주가의 한 구절입니다.
시인은 인생의 슬픔을 이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탄에 투철해지면 투철해질수록,
허망하면 허망 할 수록,
무상하면 무상 할 수록, 꽃도 아름답게
인생도 귀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또한 선(禪)을 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차를 좋아하던 한 스님이 차를 마시며
명상을 즐기기 위해
깨끗하고 조용한 방을 짓고는 이름을 짓기 위해
전부터 모시고 있던 선사를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급한 볼일이 생겨 집을 비울 수밖에 없어서,
사과의 말과 함께 내일 뵙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제자에게 들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볼일을 보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을 비운 동안에 찾아온 선사가 쪽지를 놓고 간 것이었습니다.
펴보니 여덟 글자가 씌어 있었습니다.
게으른 중아, 나는 내일을 기약 할 수 없다
(懈怠比丘不期明日 해태비구불기명일)
그는 절을 찾아 선사를 뵙고 사죄하고는,
그 마음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오늘 오늘 하고 그날을 충실히 살지어다
내일의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르니...
<B>우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것은
오늘이라는 지금 뿐입니다. </B>
우리는 오늘 이 하루를 소중히 알고 힘껏 살아야 합니다.
명상음악 / Deva Yoko - Next To Silence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