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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필 4집 원고 3편을 첨부 파일과 함께 올립니다.
살펴봐주시고 수정할 것이있으면 언제든지 수정하겠습니다.
사람 사는 냄새
모든 사물은 자기만의 고유한 냄새를 지니고 있다. 꽃에서는 꽃냄새가 나고 솔에서는 솔 냄새가 나며 사람의 몸에서도 자기만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후각으로는 도저히 맡을 수 없는 냄새가 있다. 그 냄새는 사람 사는 냄새다. 사람 사는 냄새는 오직 가슴으로만 맡을 수 있는 냄새다. 이 세상 모든 냄새 중에서 가장 향기로운 냄새가 사람 사는 냄새가 아닐까 싶다.
내가 처음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곳은 초임지인 문경 00초등학교 00분교장에서다. 본교 근무 2년 후 3월 신학기 교내 인사에서 00분교장 근무를 희망하였다. 높고 험한 산 넘어 근무지로 이사 가는 날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자기네들 자식 가르쳐줄 훈장 온다고 지게 지고 이사 도우려고 왔다. 아니 이사하려고 왔다. 단칸방 신혼살림이라 이삿짐이라야 옷 넣은 고리짝 하나에 이부자리와 소꿉장난 같은 취사도구뿐이다. 그러나 맨몸으로도 넘기 힘든 굽이굽이 돌고 돌아 오르는 십 리도 넘는 험한 산길을 등짐으로 나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감사하고 고맙지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분교장에는 산비탈에 등 기대고 십여 가구씩 옹기종기 새 둥지 틀 듯 매달려 초가지붕 덮고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난포 불로 밤을 밝힌다. 전화는 건넛마을 이장 집에 간첩신고용 비상전화 한 대가 있었다. 남북으로 분단된 비극의 산물로 설치된 전화가 외부와의 유일한 연락 수단이 되었다. 본교와 급히 연락할 일이 있으며 그 비상전화를 이용했다. 문명의 혜택이라곤 손톱만큼도 누리지 못하는 조선 시대의 삶 그대로였다.
화전을 일구며 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궁핍한 삶이지만 인심만은 넉넉하다 못해 철철 넘친다.
분교장의 봄. 가을 소풍은 따로 없다. 그렇다고 학동들이 제일 손꼽아 기다리는 소풍을 가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1년에 봄, 가을 두 번하는 마을 화전놀이 하는 날이 바로 소풍날이다. 돼지 잡고 닭 잡아 집집마다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챙겨 와 하루를 즐기는 연중 가장 큰 행사다. 그날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도 되고 경로잔치와 마을 단합대회도 겸하니 얼마나 거창한 소풍인가. 아마 이같은 거창한 소풍을 가는 학교는 전국에서 00분교장뿐일 것이다. 학동들은 이렇게 대자연 속에서 함께 웃고 뛰놀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 사는 냄새를 온몸으로 느끼고 배우며 자란다.
어느 집에 기제라도 들고 어르신 생신날이라도 되면 그날은 동네 잔칫날이다. 훈장도 특별 손님으로 당연히 초대받는다. 허리 굽은 할머니는 수업 중인데도 노크도 생략하고 교실 문을 활짝 연다. “선상님요. 어제저녁에 우리 영감 제사 지내심더 빨리 오이소.” 하고 초대장 아닌 소환장 남기고 황급히 돌아가신다. 작은 마을이지만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돌고 돌아 집집마다 소환장을 전달하려면 노인 걸음에 빠쁘게 움직여야 한다. 미처 소환에 불응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지체 없이 강제구인 영장을 들고 온다. 학생들은 내가 강제구인에서 풀려나는 한 시간 정도는 자습을 해야 했다. 그러나 강제 구인된 시간의 학습결손은 항상 몇 배로 갚아주었다. 사람 사는 근본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법도 규칙도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다. 이곳 사람들은 모든 생활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내 것 네 것, 자기 일 남의 일 가리지 않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 사는 냄새가 풀풀 난다.
하늘 아래 첫 동네 화전민촌의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으며 춥고 길다. 가을 추수 끝나면 무엇보다 먼저 밥 짓고 온돌 대울 땔감을 넉넉히 장만해야 한다. 학교라고 예외일 순 없다. 화목난로 피울 나무하는 날이 따로 있다. 학부형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나와 젊은 사람들은 지게 지고 나무 베어 나른다. 나이 든 어르신들은 화목난로에 알맞게 자르고 쪼개어 창고에 차곡차곡 쌓는다. 여자들은 참과 점심 준비에 분주하다. 마치 대가 집 잔치 마당 같다.
훈장이 거주하는 사택의 겨울날 땔감도 한다. “선상님이 나무할 줄 아십니껴. 어린 아기도 있는데 많이 준비해야 지예.” 하시며 넉넉하게 장만해주셨다. 남의 손자까지 걱정해 주시는 따뜻한 마음으로 온돌 데워 춥고 긴 겨울을 무난히 날 수 있었다. 나는 학동들을 가르치는 훈장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인생살이를 배우는 학동이었다. 그러나 아직 그 배움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니 난 많이 부족한 사람인가 보다.
이 세상 어느 꽃 보다도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들이 사는 하늘 아래 첫 동네에는 지금도 사람 사는 냄새가 저녁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나겠지.
궁핍하고 힘든 생활에서도 서로 돕고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 사는 냄새는 내 가슴에 깊이 깊이 스며들어 잊으래야 잊히지 않는다.
숨은 애국자
며칠 전 매주 월요일 오후에 있는 상록아카데미 수필 창작 수업을 마치고 문우들과 같이 반월당 지하상가 차집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가졌다. 정겨운 담소를 나누다 4시경에 문우들과 헤어졌다. 6시 30분에 명덕네거리 부근의 죽영 문학회 저녁 모임 시간까지는 2시간 30분간의 시간이 남았다. 남은 시간을 보낼 마당 한 곳도 없고 해서 시내 구경도 할 겸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기로 했다.
반월당 지하상가 메트로플라자 3번 출구 봉산 문화회관 방향으로 나와 대구초등학교가 있는 골목길로 막 들어서는데 왼쪽에 신흥 짬뽕이란 중화요리 집 외벽에 걸려있는 작은 현수막이 나의 발길을 붙들었다. 현수막에는 태극기 사진과 함께 ‘태극기는 우리나라 국기입니다. 태극기를 정확하게 그려오는 어린이에게 자장면을 공짜로 대접하고 싶어요.’라고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아랫부분에는 작은 글씨로 ‘애국가와 태극기를 바로 알고, 사랑하는 것이 나라사랑의 시작입니다.’는 글도 있었다. 몇 번을 되풀이하여 읽고 또 읽어 보았다.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에 경렬이 일어나는 듯했다.
이 집 사장님은 어떤 분일까? 전직 교육자였을까? 아니면 태극기에 대한 어떤 깊은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실타래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당장 문을 열고 들어가 이런 문구를 내걸게 된 뜻을 알아보고 싶었지만 지나가던 행인이 느닷없이 들어가서 물어본다는 것은 결내가 될 것 같았다. 또 혹시라도 바쁜 시간에 방해라도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손님도 아니면서 선 듯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떤 속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모르겠으나 나라를 사랑하고 태극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다시 찾아와 식사를 하면서 이런 현수막을 걸게 된 연유를 느짓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두 시간 동안 골목길을 걸었어나 그 옛날 거닐든 정겨운 골목길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고, 신흥 짬뽕집 외벽의 현수막만 눈앞에 어른 그렸다. 머릿속에는 태극기에 대한 생각과 그 집 사장님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를 정확하게 그릴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물론 태극기를 정확하게 그리기는 쉽지 않다. 특히 건곤감리를 정확한 비율로 정확한 위치에 그리는 것은 어렵다. 나 역시 40년간 초등교육에서 학생들을 교육한 사람이지만 자료를 보지 않고 태극기를 그리라면 자신이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태극기를 정확하게 그리지는 못하더라도 태극기의 유래와 문양의 의미, 건곤감리의 뜻만이라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국기 제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876년(고종 13) 1월이었다.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가던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이 태극 사괘를 국기로 삼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 일행은 일본 고베의 숙소 건물에 도안한 기를 게양했는데,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다. 그 후 조금씩 다른 모양의 태극기가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1948년 정부 수립을 계기로 태극과 사괘에 대한 규정을 만들고 규격을 통일하였으며 이러한 원칙이 오늘날까지 준수되고 있다.
태극기에 담긴 의미와 뜻은 가로 세로가 3:2로 흰색 바탕은 밝음, 순수, 그리고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우리나라의 민족성이 담겨 있다. 가운데의 태극은 우주 자연의 궁극적인 생성원리를 상징하며, 빨간색은 존귀와 양(陽)을 의미하고, 파란색은 희망과 음(陰)을 의미하는 창조적인 우주관을 담고 있다. 사방 모서리의 대각선상에는 건(乾)·곤(坤)·이(離)·감(坎)의 사괘가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사괘의 건괘(乾卦)는 우주 만물 중에서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상징한다.
이와 같은 깊은 의미와 뜻이 담긴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다. 또 태극기와 함께 애국가와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노래와 꽃이다. 애국가를 외워 부를 수 있고 무궁화 꽃을 그릴 수도 있어야 대한민국의 국민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지난 며칠간은 온통 그 중화 요릿집 외벽의 현수막과 주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끝내 궁금증을 떨쳐버리지 못해 오늘 오후 대경 상록아카데미 시 문학 수업을 마치고 문우 한분과 저녁 식사를 겸해서 신흥 짬뽕 집을 찾아갔다. 현수막과 주인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출입문을 들어서니 왼쪽 벽에는 어린이들이 A4 용지에 그린 태극기가 빼곡히 걸려 있었다. 또 다른 벽면에는 도승회 전 경상북도교육감의 방문 기념으로 함께 찍은 사진과 친필로 남긴 글이 걸려있다. 알만한 다른 유명 인사들이 방문 후 남긴 글들도 걸려 있었다. 사장님은 인자한 인상의 60대 초반이다. 자장면을 시켜놓고 오늘 찾아온 것은 이런 행사를 하게 된 동기가 궁금해서였다고 했더니 쑥스러운 듯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문을 열었다.
중화 요릿집을 하기 전에는 학원을 운영했다고 하였다. 학원을 그만두고 시작한 가게가 마침 대구초등학교와 경북대학교 사대 부설 초등학교에 인접한 곳이었다. 시작하게 된 동기는 학교에서 애국교육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고 있어 초. 중학생 절반 이상은 태극기를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는 기사를 접하고부터라고 했다.
6년 전 처음에는 애국가 4절까지 부르는 어린이와 A4 용지에 태극기를 정확하게 그려오는 어린이에게 자장면을 공짜로 주었는데 지금까지 100명 이상이 다녀갔다고 했다. 그중 십 여 명은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 가게를 찾아온다고 했다. 그때의 일로 지금까지 애국가와 태극기에 애착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가슴이 뭉클 해 진다고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곱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린이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심어 주기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 생각되어 지금까지 실천해 오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 중에 몇몇 사람은 학생들에게 상품으로 나누어 주라고 간단한 학용품을 전달해주시는 분이 있어 더욱 용기가 난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짬뽕을 먹느라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식사를 마치고 사장님이 직접 타 오신 커피를 마시며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라의 상징인 애국가와 태극기 그리고 무궁화 꽃에 이르기까지 나라사랑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토론장이 되었다. 마지막에는 각종 의식 행사에서 애국가도 부르지 않고 국기에 대한 경례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국민 같지 않는 국민을 성토하는 성토장이 되기도 했다. 또한 애국교육과 인성교육의 부재로 야기되는 사회현상에까지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사장님의 철학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교육현장에 있을 때는 애국교육과 인성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학생들을 지도했다고 나름대로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중화요리집 사장님은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고 40여 년간 어린이들과 함께한 나를 한 없이 부끄럽게 하였다. 가계를 나오면서 애국가 가사를 외우고 태극기를 그려오는 훌륭한 학생들에게 나누어줄 학용품을 구입하시라면 적은 돈이지만 놓고 나왔다.
비록 자장면 한 그릇이지만 실천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고, 가볍지 않은 훌륭한 일이다. 이런 분이야 말로 진정 숨은 애국자가 아닐까.
금호강물과 사랑에 빠졌다
나는 동대구역 근처 주택에서 30여년을 살다가 2014년 5월 지금의 율하동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곳으로 이사하게 된 이유는 경제적인 여건도 있지만, 무엇보다 율하 체육공원과 금호강이 좋아서다. 어느 대도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앞마당 같은 넓은 율하 체육공원에는 각종 운동시설과 산책로가 있고 각종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른 봄부터 매화를 시작으로 산수유, 마로니에, 배롱나무 등에서 차례차례로 꽃을 피운다. 잘 조성된 꽃밭에서도 앞다투어 각종 꽃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저마다의 색깔로 피어나 벌 나비를 유혹한다.
여름이면 초록으로 짙어진 나뭇잎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가을이면 오색으로 곱게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유명한 단풍산의 정상에라도 온 착각마저 들게 한다.
율하 체육공원을 감돌아 흐르는 금호강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굽이치며 유유히 흐르고 있다. 금호강은 '바람이 불면 강변의 갈대밭에서 비파(琴) 소리가 나고 호수처럼 물이 맑고 잔잔하다' 하여 금호(琴湖)라 하였다.
금호강(琴湖江)은 대구광역시를 돌아 흐르는 낙동강의 지류다. 포항시 북구 죽장면 가사리의 가사령에서 발원하여 영천시 자양면·고경면 중심 시가지와 경산시 일대를 지나, 대구광역시 달서구 파호동과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경계인 옛 강창 나루터에서 낙동강 본류에 유입된다.
맑은 물이 흘렀던 옛날에는 유원지마다 강바람을 따라 보트가 다니고 인근의 매운탕집 등이 성업하였다. 그중에도 하양읍의 청천 유원지, 대구의 동촌유원지, 팔달교의 밤숲, 강창나루터가 유명했다. 산업화의 바람을 타고 강 주변에 들어선 공장들의 폐수로 강물이 오염되어 버렸다. 오염물질로 죽어가는 강에 맑은 물이 다시 흐르게 하기 위해 안동의 임하댐에서 금호강 상류 영천댐을 잇는 도수로가 2001년에 완공되어 수질이 대폭 개선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죽어가든 강물이 한결 맑아져서 고기 때가 노닐고 철새들이 찾아와 겨울을 나고 있다.
넓은 강 가장자리따라 갈대숲과 왕버들이 무리 지어 자생하며 각종 수생식물들이 여기저기 터를 잡고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강둑길에는 아침저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붐빈다. 빠른 걸음으로 걷기 운동하는 사람에서부터 손잡고 거니는 연인이나 부부, 애완견을 운동시키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나는 걷기 운동 할 때는 반듯이 들리는 곳이 있다. 가천잠수교다. 가천잠수교에 가면 강따라 불어오는 시원한 강바람이 좋고, 대구 부산 간 신고속도로의 널신한 다리발 사이로 강물에 너울지는 낙조도 장관이지만 그보다 보고 싶은 오리가족과 주절대는 금호강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해질 무렵에 가면 어김없이 오리가족을 만날 수 있다. 오리는 새끼를 적게는 여덟 마리에서 많게는 열 마리가 넘는 대가족이다.
3월경에 병아리 같은 노란 새끼들을 데리고 나오더니 6,7월이면 언듯 보아서는 어미와 새끼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란다. 유심히 관찰을 하다보면 어미와 새끼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먹이 짓을 할 때는 맨 뒤편에서 자기는 먹을 생각은 하지않고 고개를 곧곧이 세우고 사방을 살피고, 이동을 할 때는 항상 맨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오리가 어미다.
이렇게 어미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는 새끼들도 다자라면 어미 곁을 떠나 또 하나의 가족을 만들어 어미에게서 배운데로 새끼들을 보살피며 살아가겠지.
어미의 지극한 사랑이 묻어나는 오리가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부모님이 생각난다. 나는 7남매인데 빈농의 가난한 살림이라 부모님도 오리 어미처럼 배고픔도 참아가며 우리들을 보살폈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생전에 좀 더 잘 모시지 못한 불효가 못내 한스럽기만 하다.
난 두 형제를 두었는데 이제 모두 결혼하여 분가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그래서 거리관계로 자주보지 못해 허전할 때도 있다. 특히 오리 새끼 같은 귀여운 손자 손녀의 재롱이 보고 싶을 때는 속눈썹이 젖는다.
부모님이 생각나거나 아들과 손자들이 보고 싶은 날이면 어김없이 가천잠수교에 간다. 오리가족을 보며 그리움을 달래곤 한다. 또 오리가족과 정이 들었어 가끔씩은 보고 싶기도 하다. 어느 수풀에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는지, 천적으로부터 안전한 곳이지, 밤사이 잘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금호강물의 노래가 듣고 싶었어도 가천잠수교를 산책길 필수 코스로 정했는지도 모른다. 강가에서면 강물은 나에게 말을 건다. 주로 강물은 주절 대고 나는 듣는다. 인생은 흘러가는 강물 같으니, 일렁이는 물결이 강바람의 무늬니, 갈대숲에서 나는 비파소리가 구슬프니 어쩌니 하고 출렁대며 주절 그린다. 자기는 낙동강 엄마 찾아간다며 남의 아픈 가슴에 풀무질을 한다. 자기는 가다 보면 엄마를 만나겠지만 난 엄마가 보고 싶어도 갈 수 없는데, 남의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 강물이 얄밉기도 하다.
나들이 나온 오리 가족에게 수영 연습시키느라 제 갈 길을 잊고 있다가 석양 너울지니 “엄마 엄마” 부르며 가던 길을 재촉한다. 나는 먼 길 떠나 돌아오지 않는 울 엄마에게 보내는 엽서 한 장 부치려고 ‘그립다’라고 말하면 ‘출렁출렁’이라 받아쓰고, ‘보고 싶다’라고 적으라면 ‘너울너울’이라 받아 적는다 항상 엉터리로 받아 적은 글자마저 바람 잠든 저녁이면 벙어리에다 까만 백지다.
아린 가슴에 풀무질만 하고 있는 매정하고 바보같은 강물이지만 바르게 받아 적을 때까지 나는 편지를 쓰고 또 쓸 것이다.
오리가족과 함께 금호강물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나만의 행복을 맛보고 있다. 나는 금호강물과 이렇게 사랑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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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