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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축만제> 그리고 항미정
축만제, 다른 이름은 서호.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벚꽃, 개나리, 버들가지가 자아내는 봄의 풍광을 만끽하고,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가마우지 등의 철새섬을 바라보면 신선놀음이 따로없다. 저수지를 만든 정조의 손길과 절경을 품은 항미정, 1908년 이곳에 들른 손종의 흔적까지 더듬어볼 수 있다. 역사와 현재의 아름다움이 조우하는 곳이다.
1.방문지 대강
명칭 : 축만제, 속칭 서호
위치 : 경기 수원시 권선구 수인로 126
방문일 : 2026.4.3.
입장료 : 없음
교통편 : 1호선 화서역 5번 출구, 꽃뫼공원 주차장(서호공원에 이어져 있는 공원, 공원이 커서 이름을 구분한 듯하다)
2. 둘러보기
한바퀴 전체 도는 데 2킬로가 조금 넘는 듯하다. 한가한 걸음으로도 시간도 마음도 여유롭다. 7,8년 전 이 카페의 시작 정보로 올린 글이 바로 이 저수지 소개글이다. 다시 간간이 들렀지만 항미정을 그때만큼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다. 늘 미완의 산책만 했던 탓이다.
호수의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노송의 정정함도 호수와 어우러져 장관이다. 둑을 쌓은 곳은 버드나무를 잘라낸 듯하다. 행여 둑이 상하는 것을 염려함인가.삼천리 어디나같은 아름다운 춘광과 조선말 아름다운 역사의 흔적까지 한낏 품어볼 수 있다.
호수 한 바퀴는 네 구획쯤으로 나누어져 풍광과 기능이 다르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개나리와 벚꽃, 건너면 벚꽃길, 끝나는 곳엔 항미정, 수문을 지나는 다리는 호수위 물길, 다음은 둑방길, 소나무가 장엄하고 아름답게 일행을 함께한다. 다음은 점차 가까워지는 하얀 나무의 철새섬을 바라보며 운동기구 등 생활인을 위한 공간으로 이동한다.
화성행궁을 짓고, 여러 저수지를 짓고 둔전을 만들어 백성들 먹거리와 일거리를 해결해주면서 왕조의 기강의 세우려 하던 조선의 성군 정조, 그의 짧은 생이 다시한번 애닯어지는 곳이다. 수원 곳곳의 저수지와 화성에 담긴 포부, 아마도 수도 이전을 속으로 기획하지 않았을까 싶은 정조의 꿈이 축만제 어딘가에 담겨 있는 듯하다.
1794년 11월에 화성의 후탁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뒤 이듬해인 1795년(정조19) 11월 7일에 “장안문(長安門) 밖 북쪽 들판에 새로 둔전을 설치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는 내용이 보인다. 《日省錄 正祖 19年 11月 7日, 20年 9月 10日》 정조는 농업 진흥책으로 화성 4대문 밖에 만석거(萬石渠), 축만제(祝萬堤), 만년제(萬年堤) 등 대규모 수리 시설과 대유둔(大有屯), 축만제둔(祝萬堤屯) 등 둔전을 설치하여 자생(資生)할 터전을 마련하였다. 《최홍규, 정조의 화성 건설, 일지사, 2001》
항미정에서는 순종이 융건릉을 방문하고 들러 차를 마셨다. 정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울어버린 국운을 감당해야 했던 비운의 황제, 호칭은 신분상승이지만 실제는 형편없는 신세 하강. 몰락의 종지부를 향해 가던 그 시절에 황혼의 절경인 이곳에서 서호낙조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다행스러운 것은 순종의 비운은 이제 역사속에 묻히고, 정조의 포부는 부상하여 날개를 펴고 있다는 것, 서울의 번다함과 어지러움은 빼고 화성의 위엄과 성군의 손길만은 살아남아 서울보다 더 기품과 여유를 간직한 수원, 물의 근원, 수원이 우리 백성의 생명의 젖줄 도시로 위용과 소용을 자랑한다.
2.1. 축만제 소개
농촌진흥청 북서쪽에 있는 저수지로, 수원화성의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西湖)라고도 불린다. 현재는 농촌진흥청의 시험답(試驗畓)과 인근 논의 관개용 수원 및 시민들의 쉼터인 서호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2005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축만제의 축조연대는 1799년(정조 23)으로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로 조성된 관개 저수지이다. 수원성을 쌓을 때 일련의 사업으로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조하였다고 한다. 당시 정조는 수원성의 동서남북에 네 개의 호수〔四湖〕를 축조하였다.
북지(北池)는 수원성 북문 북쪽에 위치한 일명 만석거(萬石渠)를 말하는 것으로 1795년에 완성한 속칭 조기정방죽을 가리킨다. 또한 남지(南池)는 원명 만년제(萬年堤)라 하여 1798년에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시설한 것이다. 그리고 동지는 수원시 지동에 위치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형체를 알 수가 없다.
『화성지』, 『수원군읍지』 등에 기록된 축만제의 규모는 제방의 길이가 1,246척(尺),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되어 있다. 제방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에 따라 심은 듯 아직도 고목들이 서 있다. 보수관리는 축제 후 4년만에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하여 도감관(都監官) · 감관(監官) · 농감(農監) 등을 두어 관수와 전장관리를 맡게 하고, 이에서 생기는 도조는 수원성의 축성고(築城庫)에 납입하였다는 것을 보면 제방 아래 몽리구역(물이 들어와 관개의 혜택을 받는 곳)의 농지는 국둔전(國屯田)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표석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1831년 화성유수 박기수는 축만제 남쪽에 풍광이 아름다운 항미정(杭眉亭)을 지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호낙조’(西湖落照)는 수원팔경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가 되었다. 항미정은 1908년 조선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융 · 건릉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잠시 쉬어간 정자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하여 농사의 중요성이 계속 강조되어 왔고, 이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농촌진흥청이 설치되어 그 맥을 이어왔으나, 현재는 서호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축만제의 역사적 배경과 중요성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아 2016년 11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 제67차 집행위원회에서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국내 최초 등재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수양벚꽃. 말로도 못 듣던 수양버들처럼 늘어진다는 벚꽃. 그냥 벚꽃보다 꽃잎도 더 탄탄해 보였다.
2.2. 항미정 소개
1) 순조 31년(1831년) 당시의 화성유수 박기수가 건립했다. 그 이름은 중국 시인 소동파의 시구에 "서호는 항주의 미목같다"고 읊은 데서 따 지었다고 한다.
2) 무명자(無名子, 尹愭 윤기)
윤기(尹愭)
호서기행일백운 〔湖西紀行 一百韻〕
(이 시의 일부 내용이 수원과 이곳 서호 관련 내용이라 소개한다. )
화성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니 / 華城忽入矚
흰 성벽에 성가퀴 늘어섰네 / 粉堞列千雉
길게 두른 만석거에는 / 逶迤萬石渠
물이 그득 넘실대누나 / 盈陂水浩瀰
앞으로 대유평을 바라보니 / 前臨大有坪
거둥길이 숫돌처럼 평평하네 / 御路平如砥
기하동에선 그윽한 향기 맡고 / 荷洞挹幽香
매교에선 새로 핀 봄꽃 구경했네 / 梅橋訪新蘂
창오엔 오색구름 비꼈고 / 蒼梧霱雲橫
송백은 울창하게 아름답구나 / 松栢鬱乎美
성상의 효성이 백왕에 우뚝하니 / 聖孝卓百王
백관들이 밝은 성지(聖旨) 받드네 / 諸臣承明旨
배다리 놓아 해마다 행차하신 지 / 橋舟歲一幸
지금까지 십여 년이라 / 于今十餘禩
관방을 경영함이 웅장하여 / 經營壯關防
원근에 형승이 소문났네 / 形勝聞遠邇
북쪽으론 장안문이 솟았고 / 北聳長安闉
남쪽으론 팔달로 뚫렸네 / 南通八達軌
사방의 백성들 들썩이고 / 雷動四方民
백화가 시장에 모여드네 / 輻湊百貨市
맹수 같은 장교들이 늘어섰고 / 虎鶡列健校
비단옷의 기녀들이 현란해라 / 綺羅炫遊妓
화려하고 아름다운 누각들 / 雕樓與畫閣
헤기도 벅찰 만큼 즐비하네 / 顧眄勞點指
유천의 갈랫길 따라 나오다가 / 行出柳川歧
무언가 기다리듯 천천히 갔네 / 遲遲如將竢
아련히 성덕을 생각하니 / 緬焉懷聖德
흐르는 눈물 멈추지 않았네 / 灑涕不自已
산천 모습 점점 바뀌건만 / 山川漸遞易
돌아보며 걸음 떼지 못했어라 / 回首惜移跬 (한국고전종합 전재)
*호서기행 :
60세에 지은 작품이다. 상성 지(紙) 운을 압운한 일운도저격의 장편 오언고시이다. 무명자가 호서로 먼 길을 떠난 것은 양자를 얻기 위해서였다. 목적지까지의 대략적인 이동 경로는 동작 나루, 수원, 천안, 충남 예산 삽교, 청양군 칠갑산, 해미이다.
*만석거(萬石渠) :
정조 19년(1795)에 발생한 유례없는 가뭄으로 인해 화성 북쪽에 만든 인공 저수지이다. 이 때문에 북지(北池)라고도 불린다. 만석거 주변에 벼가 익어 황금물결을 이루면 일대 장관을 연출하는데, 이것이 수원 팔경 가운데 하나인 석거황운(石渠黃雲)이다. 지금은 만석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대유평(大有坪) :
화성 북쪽 만석거와 축만제(祝萬堤) 사이에 조성했던 대규모의 둔전(屯田)이다. 지금의 수원시 정자2동의 수성고등학교와 상공회의소 일대에 있었다.
* 기하동(芰荷洞)에선 …… 구경했네 :
일대의 모습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고 원래의 모습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설명과 도설(圖說)로 전하고 있다. 장안문(長安門)을 나와 북쪽으로 5리쯤 되는 곳이 기하동이고, 그 입구 진목정(眞木亭) 아래가 만석거이다. 매교(梅橋)는 팔달문에서 3리쯤에 있는 다리이다. 현재는 새로 만든 ‘매교’ 표석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새로 조성된 수원성 일대의 절경이 근기(近畿)의 남쪽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창오(蒼梧) :
순(舜) 임금은 요(堯) 임금에게 제위를 양위받아 39년간 통치하다가, 남방에 순행을 갔을 때 창오(蒼梧)의 들에서 죽어 구의산(九疑山)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일설에는 우(禹)임금에게 쫓겨나 창오에서 죽었다고도 한다. 화성에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隆陵)이 있기 때문에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 배다리 :
주교(舟橋)라고 불리우나, 저본에 교주(橋舟)라고 한 것은 평측 때문에 의도적으로 도치시킨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할 때 한강을 쉽게 건너기 위해 배다리 설치를 제안하였는데, 여기에 특별히 관심을 가져 몸소 《주교지남(舟橋指南)》이란 책을 지었고, 주교사(舟橋司)라는 담당 부서를 두었다.
무언가 …… 갔네 :
지지대(遲遲臺) 고개를 지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곳은 원래 사근현(沙近峴)이었는데, 고개 정상 부근에 미륵당(彌勒堂)이 있어 미륵현(彌勒峴), 곧 미륵고개로 불리기도 했다. 정조가 생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고 돌아갈 때, 이곳에 이르러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지체하였다. 이윽고 1795년(정조19)에 “매번 원소를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미륵현(彌勒峴)에 이르게 되면 걸음을 멈추고서 멀리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에서 내려 서성이곤 했었다. 이번 행행 때 미륵현 위에 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臺) 형태와 같은 곳을 보고는 지지대(遲遲臺)라고 명명하였다. 다음부터는 행행하는 노정에 지지대를 추가하도록 하라.”라고 하교하고, 1800년 1월에는 “새벽녘 떠나온 화성땅 돌아보니 멀고 먼데, 지지대 어름에서 발걸음 더디고 더디어라.〔明發華城回首遠 遲遲臺上又遲遲〕”라고 시를 읊었데, 이때부터 이 고개를 ‘지지대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國朝寶鑑 卷74 正祖條74, 卷75 正祖條75》 무명자가 지지대고개를 지나면서 이 고사를 빌려와, 정조를 존모하는 마음 때문에 화성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 자신의 발걸음이 더디고 더디다는 뜻으로 이 시구를 만든 것이다. (고전종합 전재)
3)
죽석관유집(竹石館遺集)
서영보
바람이 저 멀리 장막 날려도 / 杭眉亭逈風幔開
술기운과 화로 덕분에 추위는 저 멀리 / 酒氣爐薰寒不來
통쾌해라 얼음 수레가 빠른 말과 같아서 / 快意氷軺如迅馬
평평한 못을 잠깐 새에 백천 번 돌았네 / 平潭頃刻百千廻
:서영보가 노래한 이때의 항미정은 북한 영변의 항미정杭眉亭으로 추측된다. 杭眉亭은 수원과 영변 두 곳에 있다.
철새 섬. 멀리 아파트 단지 앞쪽, 갸름하게 둥근 섬이 철새의 섬이다. 하얀 나무가지들은 새들의 처리물이다. 나무가지에는 까맣게 가마우지가 잔뜩 앉아 있다. 가마우지는 시간이 지나자 가지에서 물 위로 옮겨 안기 시작했다. 자맥질하는 시간을 보니 잠수 시간이 20분도 더 되었다. 저런 실력이니 얼마나 물고기를 잘 잡을까.
이곳 서호는 바로 옆의 일월저수지와 함게 대표적인 탐조인들의 명당이다. 많은 탐조인들이 새를 찾아 서호로 온다.
이 녀석들이 물가 언덕까지 왔다. 먹이활동 마치고 쉬고 있는 것이리라.
둑 건너편으로 반듯반듯한 밭둑과 수로가 눈에 띈다. 기계 경작도 가능하겠다. 이런 논에 물대기 위해 만들어진 저수지, 저 논밭이 바로 둔전이었을 것이다.
새들이 물위를 날아다닌다.
호수가 시작되기 전 주차장 옆에는 멋진 커피숍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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