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처가 6근6경과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심연생인가 하는 논쟁은
<잡아함경>이 문자로 수록되기 전 부터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잡아함경> 11권과 12권에 나오는 <경> 내용을 보면 기록자는 둘을 거의 구별하지 않고 마치
잡탕 요리한 듯 수집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잡아함경>이라 이름한 것인가?.
그러면서도 <잡아함경> 안에서 문제가 거의 없었던 것은..
<구사론>이나 <청정도론>은 12처와 6근6경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있어..
차음부터 그것을 배운 후학들은 별 의심없이 받아들여 왔기 때문으로 본다.
더 깊이 생각해보면..
6근6경을 존재로 알아.. 주체의 감각기관인 6근이 대상의 6경을 접촉하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에서..
12처라 하며.. 마음을 연해 생긴 심연생임을 이해시키는 작업은 너무 어려운 길이었기에..
제자 가운데 소수만이 바르게 이해하고 이해력이 떨어진 제자들은 둘을 같은 것으로 일단 이해하고
이해가 깊어지면 심연생임을 일깨워주는 게 낫다는 현실 속에
석가 세존 스스로 때로는 12처를 6근6경처럼 설명하셨던 데 아닌지..
<잡아함경>을 있는 그대로 석가모니 진설이라는 가정 아래..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남방불교에서 전하는 <니까야>에 나오는 삼특상[삼법인]인 무상. 고. 무아를 배우는 자는
12처를 심연생으로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12처를 6근6경과 같은 것처럼 설하는 내용은 수두룩인데.. 그 가운데 하나인 <273경>을 보자.
273. 수성유경(手聲喩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이 때 어떤 비구가 홀로 고요히 사색하고 있었다.
'어떤 것을 나라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선정에서 깨어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혼자서 어느 고요한 곳에서 '어떤 것을 나라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이제 너를 위해 두 가지 법에 대해 설명하리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안과 색이 둘이요, 이와 성·비와 향·설과 미·신과 촉·의와 법이 둘이니, 이것을 두 가지 법이라고 하느니라.
비구야, 만일 어떤 이가 '사문 구담(瞿曇)이 말하는 두 가지 법은 둘이 아니다. 내가 이제 그것을 버리고 다시 두 가지 법을 세우리라' 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말만 있을 뿐이다. 여러 차례 질문하고 나면 알지 못하고 그 의혹만 더할 것이니, 그것은 대경(對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안(眼)과 색(色)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비구야, 그 안(眼)이라는 살덩어리이고, 그것은 안[內]이며, 그것은 인연(因緣)이고, 그것은 단단한 것이며, 그것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안(眼)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지계(地界)라고 한다.
비구야, 안(眼)이라는 살덩어리에서 안이요 인연이며, 촉촉한 것이요 윤택한 것이며, 이것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안(眼)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수계(水界)라고 한다.
비구야, 그 안(眼)이라는 살덩이에서 안이요 인연이며, 밝은 것이요 따뜻한 것이며, 이것은 느끼는 것이니, 이것을 안(眼)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화계(火界)라고 한다.
비구야, 안(眼)이라는 살덩어리에서 안이요 인연이며, 가볍게 요동하는 것이고 이것은 느끼는 것이니, 이것을 안(眼)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풍계(風界)라고 하느니라.
비구야, 비유하면 두 손이 합해서 서로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안과 색을 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촉(觸, 3사화합)이니, 촉이 함께 하면 느낌[受]·생각[想]·의도[思]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법은 내가 아니요, 영원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무상한 나요, 영원하지 않고 안온하지 않으며 변하고 바뀌는 나이니라. 왜냐 하면 비구야, 그것은 이른바 나고 늙고 죽고 사라지며 태어남을 받게 하는 법이기 때문이니라.
비구야, 모든 행(行)은 허깨비와 같고 불꽃과 같으며 잠깐 동안에 다 썩는 것으로서 진실로 오고 진실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구야, 공(空)한 모든 행에 대해서 마땅히 알고 마땅히 기뻐하며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공한 모든 행은 항상 머무르고 변하거나 바뀌는 법이 아니다. 공(空)에는 나[我]도 없고 내 것[我所]도 없느니라.
비유하면, 안(眼)이 밝은 사부(士夫)가 손에 밝은 등불을 들고 빈 방에 들어가서 그 빈 방을 관찰하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비구야, 일체의 공한 행과 공한 마음을 관찰하여 기뻐하면
공한 법과 행은 항상 머물러 변하거나 바뀌는 법이 아닐 것이니,
나와 내 것이 공하였기 때문이다.
안(眼)에서와 같이 이(耳)·비(鼻)·설(舌)·신(身)도 마찬가지이며,
의(意)과 법(法)을 연하여 의식(意識)이 생긴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접촉(3사화합촉)이니, 접촉이 함께하면 느낌·생각·의도가 생긴다.
이 모든 법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없고 무상한 것이며, ……(내지)…… 나와 내 것이 다 공한 것이니라.
비구야, 네 생각은 어떠하냐? 눈은 영원한 것인가, 무상(無常)한 것인가?" 대답하였다.
"무상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또 물었다.
"만일 무상한 것이라면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대답하였다.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또 물었다.
"만일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이 과연 그런 것에 대해 '나다. 나와 다르다.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보겠느냐?"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비·설·신·의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그러므로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눈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싫어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으며,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解脫)하고, 해탈지견(解脫知見)이 생겨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을 이미 다 마쳤으므로 후세에는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아느니라.
귀·코·혀·몸·뜻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이 때 그 비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합수성비경(合手聲譬經)의 가르침을 듣고 홀로 어느 고요한 곳에서 정신을 집중하여 사유(思惟)하면서 방일(放逸)하지 않으며 지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는 아라한이 되었다.
<273경>은 2법 12처를 6근과 6경처럼 설명하는 경이다.
안[눈] 설명을 보면..
1. 안(眼)이라는 살덩어리이고, 그것은 안[內]이며, 그것은 인연(因緣)이고, 그것은 단단한 것이며, 그것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안(眼)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지계(地界)라고 한다.
안은 존재하는 지수화풍 4계가 결합하여 있다고 하는 게 아니라..
안(眼)이라는 김각기관[안근]은 인연, 견고, 그렇게 느껴지는[受] 지, 수, 화, 풍 의 4계가 결합되어있다 하여..
안은 존재하는 감각기관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2. 비구야, 비유하면 두 손이 합해서 서로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안과 색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촉(觸, 3사화합)이니,
촉이 함께 하면 느낌[受]·생각[想]·의도[思]가 생긴다.
3사화합이란 마음 안에 무엇이 나타나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그것에 촛점을 맞추며[촉], 느낌이 생긴다[수].
그 말을 더 분석해 관찰해 보면..
1) 망막에 무엇이 나타났다는 것이 느껴지면.. 보통은 스냥 스쳐 지나가기 십상인데..
문득 그것에 관심이 생겨 보려는 마음[안식1]이 일어나.. 그것을 알려하면..
2) 먼저 보려는 자[안]가 있어 보이는 것[색]과 만나 망막에 생겨 있는 것을 보려는 마음이 있다[안식2]고 3사로 분별하고..
3) 3사를 다시 만나게 하여[3사화합] 그것을 알려는 접촉이 일어난 게 된다[안촉]
이렇게 1)2)3) 과정으로 설명을 할 수 있지만..
실제 그 과정은 찰라라 할 수 있는 삽식간에 일어나기에 어떻게 일어나는 지 우리는 의식할 수 없다.
그러기에 6내처, 6외처는 6근, 6경과 같은 것으로 취급 설명해도 그것이 아니다. 그이유는.. 하고 설명하기가 어렵다.
3. 두 손이 합해서 서로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나니,
종종 큰스님이 상단에 오르시면 탁자를 탁. 치며 이 소리는 어디에 있는고? 하고 묻는다.
두 손 사이에 있나?.. 공중에 있나?. 우리 귀에 있나?.
선 질문이라는 생각은 내려놓고.. 경에 나오는 논리로.. 손뼉 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두 손이 만나면 소리가 일어나는 데.. 우리가 그 소리를 인식하면..
앞에서 설명한 1)2)3) 순서로 고막에 전해진 소리를 의식이 알아챈게 된다.
다시 설명하면
대상의 탁 소리[성처]를 귀[이처]가 들었고, 만들어진 탁 소리를 인식하는 이식이 있었기 때문임을 안다..
곧 이와 성과 이식인 3사가 결합하여
생긴 소리를 접촉하는 자[안촉]가 있고,
탁 소리 느낌[안수]을 인식한다.
스님이 탁자를 치니 탁! 소리가 들었을 때 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소리는 안의 느낌이인 안수에 의해 아는 것으로..
탁 소리는 자신의 마음[이식]에 있다.^^
4. 이 세 가지[18계]가 화합한 것이 촉(觸, 3사화합촉)이니, 촉이 함께 하면 느낌[受]·생각[想]·의도[思]가 생긴다.
촉이 함께 하면 수, 상, 사[행]가 생긴다는 것은
5온의 수온, 상온, 행온이 생긴다는 것이요.
수상행이 생기기 까지 모든 과정을 이해하는 것을 식온이라 하니..
석가세존께서는 3사화합촉에 의해 5온이 생긴다고 설하신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은 5온이 있고, 5온 안에 있는 6근[나]의 감각작용으로 대상을 잡촉하여 수, 상, 의도가 생기는 것으로 알지만..
그게 아니라 3사화합촉으로 5온이 생기고 그런 작용을 보며 5온을 자기[5취온]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5온인 내가 대상을 접촉한다는 것과
3사화합촉으로 5온인 내가 생긴다는 의미의 차이가 보이는지?..
'어떤 것을 나라고 하는가?' 하는 제자의 질문에..
부모님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 외부에 있는 대상을 접촉하여 수상행 5온으로 새겨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를 나라고 한다,
이것이 세존의 답이다.
5. 그러나 이러한 모든 법은 내가 아니요, 영원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무상한 나요, 영원하지 않고 안온하지 않으며 변하고 바뀌는 나이니라. 왜냐 하면 비구야,
그것은 이른바 나고 늙고 죽고 사라지며 태어남을 받게 하는 법이기 때문이니라.
세상에서 '나'라고 하는 자는 어떤 자인가?.
일생 동안 태어나 늙고 죽을 때 까지 '나'는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자기 동일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제까지 남편이었던 자가 오늘 "어제 나는 오늘 나가 아니니 오늘 나는 당신 남편이 아니다" 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만큼 '나'라고 자는 살아있는 동안만은 변하지 않는 실체[일생, 단견]가 있는 것이요,
윤회하는 자[아트만]처럼 생사를 전전하면서 영원[상견]해야만 하기에..
단멸론자나 상론자는 자아의 실존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석가모니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무상한 것으로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하는 것 뿐이니.. 그것은 나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가?. 5온은 찰라도 멈추지 않고 변하는 자이므로 나라고 할 수 없다는 게 맞다고 보이느냐 말이다.
6. "만일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이 과연
그런 것에 대해
'(5온은) 나다. 나와 다르다.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보겠느냐?"
5온은 곧 나다는 주장은 유물론으로.. 유물론자 5온을 나라고 하지만. 그 때 나는 5온의 부산물로 간주한다. 고로 5온이 사고나 인연을 다해 흩어지면 부산물인 나는 완전히 멸한다. 쾌락주의나 도덕 부정론, 허무주의가 여기서 생긴다.
5온은 나와 다르다는 주장은 윤회론자의 주장으로 5온과는 따로 존재하는 나[아트만]가 있다고 하며.. 5온이 인연이 다하면 아트만인 다른 5온을 찾아간다. 천당과 지옥이 있듯이 선행은 천당으로, 악행은 지옥으로 간다고 가르친다.
5온은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다 라는 주장은 자이나교의 주장으로 5온은 유물론적인 산물이지만 부산물로 나라는 의식이 생기는 게 아니라 몸이 죽어도 죽지 않는 나인 영혼[지나]이 5온과 함께 있다는 주장이며,
그와같은 육신이 생긴 것은 탐욕의 업이 있는 죄 덩어리이기에 고행을 해서 멸해야만 한다는 무살생의 고행주의를 가르친다.
그러나 세존께서 깊은 선정에 들어 그 눈[법안]으로 5온을 관찰해 보니..
저들이 주장하는 실체있는 나는 그 어디에도 없음을 이치적으로 깨닫고, 실천을 깨쳤다는 것이다.
한편 '나'라는 의식은 물질인 5온의 부산물로 보는 단견은 항상하는 유아를 부정하고
죽으면 그냥 무아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적극적인 무아론으로 보여..
부모미생전을 묻는 화두와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불교와 어떤 차이가 있는건가?.
세존은 나라는 의식이 있게 하는 근본 마음과 에너지 보존 법칙이 작용하는 근본 물질을 부정하지 않는다.
무아를 깨쳐도.. 무아를 깨친 근본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살아서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3사화합을 자세히 보면..
안처과 색처가 만나면 망막에 맺힌 것을 아는 안식이 일어나는 데.. 그 안식의 바탕인 마음은 부모에게 받은 게 아니라..
부모가 아닌 밖에서 들어온 것으로 그것의 이름을 아뢰야식[제8식]이라 했다.
제8식인 아뢰야식은 몸이 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다른 몸을 받으니 윤회가 있다.
또 말하겠지만 제8식을 멸해야 구경 열반을 이룬다.
그러나 유물론자들은 제8식을 모르거나 부정하기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죽으면 나는 모든 게 멸하므로 윤회는 없다고 주장한다.
7. 이 6처(處)에 대해서 나도 아니요 내 것도 아니라고 관찰한다.
그렇게 관찰하고 나면 모든 세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취할 것이 없게 되고,
취할 것이 없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게 되며,
집착할 것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열반을 깨닫는다.
세존꼐서는 단언하신다.
안이비설신의 6내처는 나가 아니라고!.
그런데 6내처를 나가 아니라고 하여 관찰하였다 하여..
욕탐이 머물고 있으면서 12처에서 생겨 존재화가 된 안근과 색경과 안식의 결합인 3사화합촉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니..
모든 세간을 접촉하면서 취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
<경>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하시지만..
주위를 보면..
임파시블!
그것은 마치 지류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을 그냥 두고 강물을 모두 퍼내 강을 마르게 하겠다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수행을 하여 존재화된 6근을 생기게 하는 6처를 깨닫고.. 수행으로 6처멸하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