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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왕세자여사부빈객상견의(王世子與師傅賓客相見儀)
정의
왕세자가 스승인 사(師)·부(傅)·빈객(賓客) 등과 만나 인사하는 의례.
개설
조선은 왕세자 교육을 위해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학식과 덕망을 갖춘 학자를 서연관(書筵官)에 임명하여 왕세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서연관 중 사·부·이사(貳師)는 1품관으로 의정부(議政府)의 정승(政丞)이나 찬성(贊成)이 겸직하여 세자 교육을 감독하였고, 빈객과 부빈객(副賓客)은 2품직의 겸관으로 강의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 의식은 왕세자가 사·부·빈객을 처음 만나 스승의 예를 갖추고 인사하는 것으로, 조선초기부터 시행되어 이후 계속 유지되었던 의례이다.
연원 및 변천
왕세자가 사·부·빈객을 만나는 의식이 처음 제정된 것은 1431년(세종 13)이며[『세종실록』 13년 6월 4일], 이때의 의주가 수정·보완되어 『세종실록』 「오례」에 수록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는 조선초기 세자와 사·부의 상견(相見) 사례로는 1455년(세조 1)에 자선당(資善堂)에서 세자와 사·부의 상견례를 거행한 것이 있다[『세조실록』 1년 7월 29일].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선조 26)에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과 사·부의 상견례가 있었는데, 이는 전란 때문에 미뤄졌던 의식을 거행한 것이다[『선조실록』 26년 2월 15일]. 한편 1615년(광해군 7)에는 세자와 사·부·빈객의 상견례 때 궁관(宮官)들의 복색에 대해 논의했는데, 왕세자가 규정된 복장을 갖추었을 때는 공복(公服)을 입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예관(禮官)이 따로 논의하여 처리하도록 했다.[『광해군일기』 7년 10월 10일][『광해군일기』 7년 10월 17일]
1754년(영조 30) 2월에 영조는 세자와 사·부·빈객의 상견례가 폐지되고 있던 당시 상황을 심각한 문제로 거론하면서, 근일 상견례를 행하지 않은 빈객들을 모두 중추(重推)하고 이후로는 서연에 번갈아 입대(入對)하여 감히 빠지지 못하게 할 것을 지시하였다[『영조실록』 30년 2월 24일]. 한편 정조대에는 1785년(정조 9)에 공묵합(恭默閤)에서 왕세자와 사·부·빈객의 상견례를 거행하고 서연관에게 특전을 베풀었다. 이때 정조는 서연관으로 참여한 보덕(輔德)정술조(鄭述祚)가 자신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권면(勸勉)·계도(啓導)한 공이 컸는데, 이제 또 서연에 등대(登對)하였으니 매우 드물고 귀한 일이라고 치하하면서 그를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시키고, 나머지 서연관들도 모두 승진시켰다[『정조실록』 9년 9월 9일].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수록된 왕세자여사부빈객상견의의 절차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행사 당일 액정서(掖庭署)에서 왕세자의 배위(拜位)와 사·부·이사·빈객의 배위를 설치한다. 궁관이 각각 의복을 갖추고, 익위사(翊衛司)는 의장과 시위를 준비한다. 사·부·이사·빈객이 서당에 모여 공복을 갖추어 입는다. 필선(弼善)이 내엄(內嚴)을 알리면 보덕(輔德) 이하 관원과 익위(翊衛) 이하, 사·부·이사·빈객 등이 각자의 자리에 선다. 필선이 바깥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면 왕세자가 동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사·부·이사·빈객은 서쪽 계단으로 내려온다. 사·부·이사가 먼저 자리에 나아가고 왕세자가 그다음 자리로 나아간다. 왕세자가 머리를 조아려 2번 절하면, 사·부·이사·빈객도 머리를 조아려 2번 절한다. 예가 끝나면 사·부·이사·빈객이 계단으로 내려가고 왕세자는 동쪽 계단으로 내려간다. 사·부·이사·빈객이 문으로 나가고 왕세자도 안으로 들어간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왕세자조참의주(王世子朝參儀注)
정의
왕세자가 왕에게 조참(朝參)을 행하는 의례.
개설
조참의는 조선시대에 중앙 관서에 근무하는 관원들이 한 달에 4번씩 정전(正殿)에 모여 왕에게 문안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왕세자조참의는 왕세자가 백관들과 함께 왕에게 문안하는 의식을 말한다. 왕세자조참의는 『세종실록』 「오례」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의 국가 전례서에 수록되지 않았고, 『조선왕조실록』에도 구체적인 의주(儀註)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는 왕세자가 왕에게 조참을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세자의 조참의주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1488년(성종 19) 2월이다. 당시 예조(禮曹)에서 왕세자의 조참의주를 정하여 보고했는데, 그 핵심은 왕세자가 먼저 들어와서 사배(四拜)를 행하고, 왕세자가 나간 뒤에 종친(宗親)과 문무(文武) 2품 이상 관원이 들어와 사배를 행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성종은 왕세자가 문무백관보다 먼저 예를 행하는 것은 어떤 예문(禮文)에 근거한 것인지를 물었고, 이에 대해 예조에서는 왕세자조참의주는 『국조오례의』에 나오는 조하의(朝賀儀)의 내용을 참작하여 정한 것이며, 고례(古禮)까지는 검토하지 못했다고 답하였다. 이에 성종은 고례를 상고함이 마땅하다고 지적하면서 일단은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예를 시행하도록 지시하였다[『성종실록』 19년 2월 24일].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는, 왕세자조참의주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의식에 관한 더 이상의 기사가 없고 국가 전례서에도 관련 내용이 없기 때문에 왕세자조참의주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정리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절차 및 내용
왕세자조참의주는 국가 전례서에 없는 것이어서 의주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성종실록』에서 조하의에 의거하여 왕세자가 먼저 행례(行禮)하도록 한 예조의 의주에 대해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예를 행하도록 했던 성종의 지시 내용을 고려할 때, 왕세자조참의는 왕세자가 종친 및 문무백관과 함께 왕에게 문안하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 기본적으로 조참의식이라는 점에서 『국조오례의』나 『춘관통고(春官通考)』에 수록된 조참의와 유사한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국조오례의』의 조참의 내용에 조하의의 왕세자 관련 내용을 참작·추가하여 의주를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참 1일 전에 액정서(掖庭署)에서는 어좌(御座)·향안(香案) 등을 정전(正殿)에 설치하고, 전의(典儀)는 왕세자의 막차와 왕세자·종친·문무백관의 자리를 설치한다.
조참 당일에 종친·문무백관은 조당(朝堂)에 모여 있다가 신호에 따라 정전 문밖의 정해진 자리로 나아가며, 왕세자도 필선(弼善)의 인도를 받아 정전 밖의 막차로 나아간다. 이어 종친·문무백관이 정전 안으로 들어와 배위(拜位)로 나아가고 왕세자도 안으로 들어와 배위로 나아간다. 왕이 정전에 도착하여 어좌에 오르면 왕세자와 종친·문무백관이 왕에게 사배를 하고 일어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왕이 여(轝)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면 왕세자와 종친·문무백관도 차례로 정전을 나온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장녕전(長寧殿)
정의
숙종의 어진(御眞)을 봉안한 강화부(江華府)의 진전.
개설
숙종은 1688년(숙종 14) 경기전(慶基殿)에 있던 태조 어진을 옮겨 그리게 한 후 도성 안 남별전(南別殿)에 봉안하였다. 1695년(숙종 21)에는 자신의 어진을 그린 후 강화부에 보관하도록 했다. 1713년(숙종 39) 강화부의 어진에 숙종의 모습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하여 새로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어진을 그렸다. 완성된 어진 2본은 각각 장녕전과 궁궐 안에 보관하였고, 초상의 초본 역시 따로 전각을 만들어 봉안하지 말라는 글을 붙여서 오대산 사고에 보관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후 어진 봉안각이었던 장녕전에 보관된 숙종 어진을 벽에 펼쳐 봉안하고 향사 절차를 정하였다. 장녕전은 외방의 진전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성립 경위
숙종은 1695년 강화부에 장녕전을 세우고 자신의 어용(御容)을 봉안하게 하였다. 1695년 숙종은 비공식적으로 화원 조세걸(曺世傑)에게 어진을 그리게 한 후 내시들에게 강화부로 옮겨 봉안하게 했다. 당시 강화유수(江華留守)였던 김구(金構)도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서(吏胥)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황급하게 나루로 나갔을 정도로 완전히 비공식적으로 진행된 일이었다.
강화부에는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영숭전(永崇殿)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파괴된 상태였다. 강화유수김구는 영정을 강화부 객헌에 임시로 봉안한 후 영전(影殿)을 신속하게 건립하여 제대로 봉안하겠다고 보고했다. 숙종은 이 영전에 ‘장녕(長寧)’이라는 칭호를 내렸다[『숙종실록』 21년 8월 7일]. 장녕전은 강화부 송악산 아래 계좌 정향에 자리 잡았다. 강화부 송악산은 현재 북산으로 불리는 곳으로 그 아래에 강화부 행궁이 있었으니, 장녕전은 강화부 행궁 안에 자리 잡은 것이다.
1713년 장녕전 어진을 대체할 새 어진을 그리기 위해 도감을 설치하였고, 어진 정본 2본을 완성하였다. 완성된 어진 하나는 궁궐 안 선원각(璿源閣)에 보관하고, 하나는 다시 장녕전에 봉안했다. 어진 초본은 정본이 완성되면 세초해 버리는 것이 상례이지만, 숙종은 이것도 오대산의 선록각(璿錄閣)에 보관하게 했다.
변천
숙종이 세상을 떠난 후 장녕전 내에 흑장궤에 담아 보관하던 어진을 꺼내 벽에 펼쳐 봉안하고 향사하는 절차를 영희전(永禧殿)에 준하여 마련했다[『경종실록』 즉위년 6월 21일]. 1744년(영조 21) 영조는 자신의 어진 중 하나를 강화부 장녕전 옆 가마와 의장을 봉안하는 장소에 보관하게 한 후 ‘만녕(萬寧)’이라는 이름을 내렸다[『영조실록』 21년 1월 9일]. 1776년(정조 즉위) 정조는 즉위 후 영조의 유지에 따라 만녕전의 영조 어진을 장녕전에 봉안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5월 1일]. 1866년(고종 3) 프랑스 군과의 전투 중에 장녕전이 전소되었다. 봉안하던 숙종과 영조의 어진은 미리 옮겨 도성 안 영희전의 숙종실과 영조실에 각각 봉안하였다[『고종실록』 3년 10월 7일].
참고문헌
『어용도사도감의궤(御容圖寫都監儀軌)』
『춘관통고(春官通考)』
김지영, 「숙종·영조 대 어진도사와 봉안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 『규장각』27, 2004.
김지영, 「19세기 진전 및 어진봉안처 운영에 대한 연구」, 『장서각』 26, 2011.
전위교서(傳位敎書)
정의
조선시대에 다음 왕으로의 계승을 명하는 교서.
개설
조선시대에 왕의 즉위 의식은 계승의 형식에 따라 수선(受禪), 사위(嗣位), 반정(反正) 등으로 구분되었다. 즉위 의식을 통칭하여 등극(登極)이라 하였는데,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의미이다. 수선은 선왕으로부터 직접 자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왕위에 오르는 일을 가리킨다. 이때 선위를 명하는 왕의 교서를 선위교서(禪位敎書) 또는 전위교서라고 했다.
내용 및 특징
태조가 혁명할 때 여러 신하가 고려 공민왕의 왕대비로부터 교서와 국새를 받아 태조에게 바쳤다. 천명을 받아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고, 유덕자(有德者)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원칙을 지키려 했던 조선에서도 왕위의 계승에서 선왕이나 선후(先后)의 교서가 중요했다. 개국할 때 태조의 즉위식뿐 아니라 이후 모든 왕위 계승에서 후계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왕의 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수선에 의한 계승에서 왕이 전위를 명하는 교서를 반포했고, 이 뜻을 받은 세자가 경복궁으로 가서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에는 예조(禮曹) 판서(判書)변계량(卞季良)에게 전위교서를 짓게 하고, 대소 신료들이 조복을 갖추고 전정에 차례로 서 있게 한 후 교서를 반강하였다[『태종실록』 18년 8월 10일].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선위할 때에도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김예몽(金禮蒙)에게 선위교서를 짓게 했다. 그 선위교서는 어린 나이에 대업을 물려받아 내외의 모든 사무에 제대로 응접하지 못하여 국가에 많은 사고가 있었다며, 종묘사직을 위하여 숙부에게 부탁하여 왕위를 넘긴다는 내용이었다[『세조실록』 1년 윤6월 11일].
사위 의식에서 전위 유교(遺敎)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사왕(嗣王)은 빈전 문 밖에서 선왕의 유교와 대보(大寶)를 받으며, 이를 정전에 벌려 놓고 어좌로 나아가 조정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문종실록』 즉위년 2월 23일]. 빈전 앞에서 선왕의 유교를 받는 것은 『서경(書經)』에 나오는 책명(冊命) 의식을 의례화한 것이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김지영 외, 『즉위식, 국왕의 탄생』, 돌베개, 2013.
민현구 외, 『조선시대 즉위의례와 조하의례의 연구』, 1996.
김지영, 「조선시대 사위의례에 대한 연구」, 『조선시대사학보』61, 2012.
준원전(濬源殿)
정의
조선시대에 함경도 영흥에 있던 태조진전(眞殿).
개설
준원전은 함경도 영흥부 순안사 흑석리에 세운 태조진전이다. 이곳은 환조의 옛 집이며, 태조가 태어난 곳이다. 1398년(태조 7)에 창건하여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외방의 태조진전은 이 준원전을 비롯하여 평양 영숭전(永崇殿), 개성 목청전(穆淸殿), 경주 집경전(集慶殿), 전주 경기전(慶基殿) 등이 있었는데, 준원전과 전주 경기전 2곳만 조선후기까지 존속하였다.
성립 경위
1398년 성석린(成石璘)을 보내어 태조 어진을 당시 함주(咸州: 현 함경도 함흥)의 준원전에 봉안하였다[『태조실록』 7년 2월 26일]. 1410년(태종 10) 전함(前銜) 품관 4인으로 하여금 진전을 수호하게 했다[『태종실록』 10년 2월 12일]. 1413년(태종 13)에는 영길도(永吉道: 현 함경도) 준원전과 팔릉(八陵)에 도순문사(都巡問使)와 가까운 지경의 3품 이상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태종실록』 13년 12월 22일]. 1443년(세종 25)에는 정인지(鄭麟趾)를 보내 다시 준원전에 태조 어진을 봉안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5년 9월 13일]. 이때 새로 태조 어진을 그려 봉안한 것인지 본래 준원전에 봉안하던 어진을 다시 그려 봉안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세종실록』 「오례」의 시일(時日) 조에는 준원전에 세시와 삭망에 제사하도록 했고, 축판(祝版) 조에도 세시와 삭망에 축판을 전하는 절차를 기록하고 있어 준원전의 진전 제향 의식이 세종대에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준원전 등 진전에서 속절에만 5차례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나, 숙종대 이후로는 납향제를 추가하여 6차례 제사를 지냈다.
변천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외방 진전이 파괴되고 태조 어진이 소실되었다. 준원전의 수복(守僕)들이 부(府)의 서쪽에 있는 요덕산(耀德山)으로 옮겨 겨우 위험을 면하였다. 어진은 1629년(인조 7) 준원전을 중수한 후 다시 봉안하였다[『인조실록』 7년 3월 18일]. 병자호란 때 영흥의 유생 박효남(朴孝男)이 어진을 말응도(末應島) 안에 있는 뱃사공의 집으로 옮겨 모셔 보전하였고, 1641년(인조 19) 다시 준원전을 중수한 후 봉안하였다[『인조실록』 19년 8월 30일].
이렇게 외침의 와중에서도 무사히 보전한 준원전 영정은 뜻밖에도 조선 사람에 의해 파손되었다. 1837년(헌종 3) 준원전에 도둑이 들어 진전 안에 있던 여러 기물을 훔치는 데 그치지 않고 태조 영정을 찢어 훼손하는 일이 발생했다. 조정에서는 바로 태조 어진을 서울로 옮기고, 이한철(李漢喆)과 조중회(趙重晦)에게 새로 그리게 한 후 다시 봉안하였다. 1899년(광무 3) 12월 19일 고종은 태조·장종·정종·순조·익종을 황제로 추봉하는 의례를 거행했고, 12월 22일에는 원구단에서 태조 고황제를 하늘에 배향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와 함께 선원전(璿源殿) 제1실에 태조 어진을 봉안하기로 하고,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옮겨 와 옮겨 그린 후 봉안하였다[『고종실록』 37년 5월 22일]. 이 선원전 어진은 같은 해 10월에 불에 타 소실되었다[『고종실록』 37년 10월 14일]. 다시 진전을 중수하고 어진을 모사하여 선원전을 복구하였는데, 이때 역시 태조실에는 준원전의 어진을 옮겨 그려 봉안하였다[『고종실록』 37년 11월 19일]. 또 개성부의 목청전 또한 복구하기로 결정하고 이곳에도 준원전의 영정을 옮겨 그려 봉안하였다[『고종실록』 37년 12월 1일].
1907년(융희 1)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칙령에 의해 영희전, 목청전, 화령전(華寧殿), 냉천정(冷泉亭), 평락정(平樂亭), 성일헌(誠一軒) 등 진전과 어진 봉안각에 모신 어진들을 선원전으로 옮기고 냉천정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각들을 모두 국유화하였으나, 준원전은 왕실의 재산으로 보전하였다.
참고문헌
『춘관통고(春官通考)』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模寫都監儀軌)』
이성미·유송옥·강신항 공저, 『조선시대어진관계도감의궤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김지영, 「숙종·영조 대 어진도사와 봉안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 『규장각』27, 2004.
김지영, 「19세기 진전 및 어진봉안처 운영에 대한 연구」, 『장서각』26, 2011.
중궁양로의(中宮養老儀)
정의
왕비가 80세 이상의 여성 노인들을 초대하여 베푸는 연향.
개설
조선시대 국가 전례서에 규정된 양로 의식은 왕이 주관하는 ‘양로의(養老儀)’, 왕비가 주관하는 ‘중궁양로의(中宮養老儀)’ 그리고 개성부와 지방 주(州)·부(府)·군(郡)·현(縣)에서 거행하는 ‘개성부급제주부군현양로의(開城府及諸州府郡縣養老儀)’의 3가지이다. 이 중 중궁양로의는 매년 음력 8월인 중추(仲秋)에 예조(禮曹)에서 길일(吉日)을 택해 정하면 왕비가 80세 이상의 여성 노인들을 초대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의식이다. 『세종실록』 「오례」에서는 명칭이 ‘중궁양로의’였으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중궁양로연의(中宮養老宴儀)’로 바뀌었다. 한편 중궁양로의가 시행될 때 왕이 남성 노인을 초대하여 대접하는 양로의도 함께 거행하였다.
연원 및 변천
여성을 위한 양로연 시행이 처음 논의된 것은 1432년(세종 14) 8월이다. 당시 세종은 양로연에 여성이 참여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왕비가 직접 주관하여 여성을 위한 양로연을 베풀 수 있도록 의주(儀註)를 의논하여 정할 것을 지시하였다[『세종실록』 14년 8월 14일]. 이어 이듬해 윤8월 세종은 다시 예조에 명하여 늙고 병든 부인들이 오래 앉아 있기 곤란하여 양로연에 참석하기 꺼려함을 지적하고, 양로연에서 왕비에 대한 예를 마친 여성은 임의로 귀가할 수 있도록 했다[『세종실록』 15년 윤8월 2일].
이상의 준비 과정을 거쳐 1433년(세종 15) 윤8월에 왕비가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에서 사대부의 아내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362명의 여성을 초대하여 양로연을 베풀었다[『세종실록』 15년 윤8월 6일]. 이후 세종대에는 1434년(세종 16) 8월, 1435년(세종 17) 9월, 1440년(세종 22) 9월, 1442년(세종 24) 8월 모두 4차례 더 왕비 주관의 양로연이 거행되었다[『세종실록』 16년 8월 25일][『세종실록』 17년 9월 11일][『세종실록』 22년 9월 12일][『세종실록』 24년 8월 27일]. 이상의 양로연 시행 과정에서 정비된 의주는 『세종실록』 「오례」에 수록되었다[『세종실록』 오례 가례 의식 중궁 양로의].
세종대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는 중궁양로의의 사례는 세조대에 8회, 성종대에 5회, 연산군대에 2회, 중종대에 5회 해서 모두 20회이다. 그리고 중종대 이후에는 양로연 시행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중궁양로의의 절차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행사 1일 전에 상침(尙寢)이 왕비의 자리와 향안(香案)을 설치하고 여령(女伶)은 악기를 배치한다. 행사 당일 전찬(典贊)이 양로연에 참석하는 노인들과 의식을 진행하는 관원들의 자리를 설치한다.
양로연 참석자들은 복장을 갖추고 시간에 맞추어 궁궐 밖의 장막에 모인다. 바깥 준비가 끝나면 왕비가 복장과 수식(首飾)을 갖추고 나와 왕비의 자리에 오른다. 양로연 참석자들이 배위(拜位)로 나아가 절하고 다시 2번 머리를 조아린다. 참석자들이 자리에 나가 꿇어앉아 부복한 후 왕비가 자리에 앉으면 참석자들도 정해진 자리로 나아간다. 상식(尙食)이 왕비에게 찬안(饌案)을 올리고 여집사가 참석자들에게 찬탁(饌卓)을 베푼다. 상의(尙儀)가 왕비에게 꽃을 올리고 여집사는 참석자들에게 꽃을 나누어 준다. 상식이 왕비에게 선(膳)을 올리고 여집사는 참석자들에게 선을 나누어 준다. 상식이 왕비에게 첫 번째 술잔을 올리면 여집사는 참석자들에게 술을 돌린다. 이어 탕을 올리고 술을 올리기를 반복하여 모두 5잔의 술을 올린다. 제5잔 이후 상식이 대선(大膳)을 올리고 여집사는 참석자들에게 선을 베푼다. 식사를 마치면 상식은 왕비의 찬안을 치우고 여집사는 참석자들의 찬탁을 치운다. 참석자들은 남은 음식을 푸른 보자기에 싸 가지고 간다. 참석자들이 배위로 나아가 절하고 2번 머리를 조아린다. 상의가 예식이 끝났음을 알리면 왕비가 자리에서 내려와 안으로 들어가고 참석자들도 밖으로 나간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중궁전진연의(中宮殿進宴儀)
정의
중궁(中宮)을 위해 베푸는 연향 의례.
개설
중궁은 왕후를 뜻하며 진연(進宴)은 진찬(進饌)이나 진작(進爵)보다 규모가 큰 연향을 이르는 용어로 사용된다.
연원 및 변천
중궁전진연의는 숙종대에 확립된 의례로서 영조대의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 ‘왕비진연의(王妃進宴儀)’라는 명칭으로 올랐다. 『조선왕조실록』에 중궁전진연의라는 명칭이 보이기는 하지만[『영조실록』 42년 8월 27일], 그에 대한 상세한 의주(儀註)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숙종대 이전의 중궁전진연의는 일반 진연의(進宴儀)의 절차에 준하여 시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절차 및 내용
영조대에 거행된 왕비진연의를 기준으로 중궁전진연의의 절차를 살펴보면, 1일 전에 상침(尙寢)이 왕비의 자리를 설치하는 것으로부터 의례가 시작된다. 왕세자, 왕세자빈, 여타 참여자의 자리와 악기, 의장 등을 모두 설치해 놓는다. 행사 당일에 왕세자가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으로 나오고 왕비가 적의(翟衣)에 수식(首飾)을 갖추고 나오면 음악이 연주된다. 이어 4번 절하는 사배례(四拜禮), 휘건을 올리는 진휘건(進揮巾), 음식상을 올리는 진찬안(進饌案), 꽃을 올리는 진화(進花), 소선을 올리는 진소선(進小膳)에 이어 제1잔부터 제9잔까지 아홉 잔의 술을 올린다. 술에 이어 다시 소선과 대선(大膳)을 올린다. 술과 음식을 모두 올린 후에는 사배례를 행한 후 의례를 마친다. 매 술을 올리는 절차 사이에는 궁중 정재(呈才)를 음악 반주와 함께 연행한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