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 춘천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데
모처럼 미세먼지가 걷힌 푸른 하늘에 형형색색 배너가 펄럭이니
소양강 처녀도 춤추게 할 것 같았습니다.
케냐 선수들과 겨룰 비장한? 각오로 출발지인 공지천에 도착했는데
정작 신발을 잊고 왔기에 부랴부랴 가평 다시 가서 신고오니 출발도 하기 전에 난 지쳐버리고
초청선수들은 떠나버려 그들을 따라잡는건 포기해야 했습니다.
첫 출전의 설렘을 즐길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다크홀스 그룹인 H조로 가다가
앞 조에 엄회장님과 유항열친구를 만나자 겨우 기분이 정상으로 돌아오네요.
출발을 기다리며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생각하니 웃음이 납니다.
돈 생기는 일도 아닌데 미친 마라톤 인파에 일원이 되어 있다니!!!
지난 9월초 산마 동지들과 북한산엘 올랐을 때 춘천마라톤이 주된 관심사였지요.
주제를 공유하지 못하는 소외감도 싫었지만
다들 풀코스 준비로 10월까지 두어 달은 산행을 못한다 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요.
다음날 사무실에서 통화한 거래처 사장님도 오랜 기간의 준비 끝에 춘마 풀코스에 도전한다고 들떠 있었고
내게도 참여를 권하시길래 건성으로 “아~예”라며 얼버무렸습니다.
퇴근 길에 통화한 동생도 회사에서 지원해준 버스로 세종시에서 춘천으로 간다 하고
사무실 직원 한 명도 준비하고 있네요.
고등학교 밴드도 난리가 났어요.
미국에 사는 친구가 춘마 참여를 위하여 방한하는데 격려차원에서 우정의 레이스팀을 만들자는 겁니다.
10년전에 마라톤을 그만둔 녀석도, 기초체력이 과대평가된 나도 합류하라고 제안을 받았습니다.
결국 여기저기 보이지 않는 손들의 압력으로 얼떨결에 10km를 뛰는 걸로 동의했습니다.
신청하는 과정에서 또 한번의 무리수가 생겼습니다.
풀코스 참가비가 5만원인데 10km가 4만원이라니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 풀코스 5만원을 송금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풀코스란 말을 못했습니다.
‘과대망상증 아냐?’ 라고 비웃을 것 같아서 한동안 비밀로 하고 있다가
초록별님이 십키로 뛰는 주제에 별걸 다 물어본다고 핀잔을 주는 바람에 실토했지요.
반응은 “ㅍㅎㅎ”.
우정의 레이스팀 8명이 동시에 출발은 했지만 3키로 지점에서 2명이 쳐지고 세 명은 앞으로 치고 나가니
세명만 남아 과거 썹쓰리했던 친구가 리딩하고 나와 미국서 온 친구가 동행해서 하프 지점까지 꾸준히 달렸습니다.
11km지점에서 산마님들을 다시 만나 힘을 돋우며 기념촬영도 했지요.
반환점까지는 별 무리는 없었는데 춘천댐 오르는 구간에 이르자 허벅지가 뻑뻑해 오고
한계에 이른 것 같아 걷고 뛰기를 번갈아 했지요.
초반엔 별거 아니던 페이스 메이커들의 풍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집니다.
거대한 조류 속에서 팔다리를 아무리 저어봐야 소용없는 바로 그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고통이 아까와 포기할 수 없는 30키로 지점에 이르자
두 다리를 다그치며 더 이상 걷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마침 H조 5시간을 알리는 풍선이 날 앞지르려 하길래 끝까지 추월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쉽지는 않았습니다.
임예진의 ‘여고 졸업반’을 촬영한 강원농고(현 소양고)와 누나가 다녔던 소양중
그리고 어린 시절을 지낸 사우동 삼거리를 지나며 회환도 있었지만 그건 사치란 걸 내 몸이 말해주네요.
소양강 처녀상을 지나 40키로 부근에서 엄회장님이 기념촬영을 제안했지만 냉정하게 거절했지요.
5시간을 넘느냐 마느냐가 중요했으니까요.
드디어 ‘내생애 더이상 마라톤은 없다’ 라고 다짐하면서 결승점을 통과했는데 고통이 곧 환희로 바뀌네요.
비록 허리 숙여 칩을 풀지도 못할 만큼 몸은 뻑뻑해 졌지만 피로감 마져도 좋았습니다.
해냈다는 성취감과 4시간 56분 55초의 기록도 맘에 듭니다.
회장님과 항렬친구와 함께 기념촬영도 하고
우정의 레이스를 응원하는 뒤풀이에서 40여명의 친구들에게도 ‘예상외의 첫 완주’로서 축하를 받으니
영웅이 된 듯 우쭐해졌습니다.
노력보다 과분한 보상을 받았기에 미안한 마음까지 생겼지만 세상이 다 그런건가 봅니다.
오래 전 미지의 바다로 떠난 콜롬부스도 그랬으니까요.
사실 그는 무식하게도 지구둘레를 잘못 알아 6분의 1정도 가까운 거리에 인도가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스페인의 후원으로 거기에 맞게 양식을 준비하고 항해를 떠났는데 생각하지도 못한 신대륙을 발견한 거죠.
신대륙이 그들을 막지 않았다면 항해 중 모두 굶어 죽었을 텐데 정말 행운아들이죠.
신대륙이 보내온 고추는 후추보다 더 사랑 받게 되고
감자와 옥수수는 메밀 등으로 연명하던 대륙 반대편 척박한 강원도에도 풍요를 안겨주었다지요.
이번 시도는 약간 엉성했으나 인생 하반기에 자신감이란 모멘텀을 발견했으니
내겐 신대륙처럼 귀중한 보답입니다.
ps
또 한 분의 산악인 선배 라인홀트 메스너에게 전화라도 하고 싶어집니다.
히말라야 8000m이상의 14봉을 최초로 등정한 그는 남극과 북극을 탐험하고 지금은 서재에서 글을 쓴답니다.
수직과 수평의 세계를 탐험하다가 인간을 연구하는 셈이죠.
나 역시 산 과 '수평의 달리기' 그리곤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역동적인 여정을 따랐으면 합니다.
한결같이 성원해 주신 엄산마님,
스스로를 망가뜨려 상대적 자신감을 북돋운 항렬친구 등 산마님들 모두 감사드려요.
조언해준 주산마님에게도 감사는 드리는데.....
겪고나니 서브포는 아주 독한 인간임에 틀림없으니 두려워해야 될지? 멀리해야 할지? 아니면 존경해야할지?ㅎㅎㅎ
첫댓글 와우~대단하십니다
풀 코스 완주 하셨군요
신대륙을 발견한 명렬님께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ㅉㅉㅉ^^
감사합니다~~~
아마 제이님 체력이면
좋은 기록 + 완주 보장!!!
레이스 중에 한컷~
이땐 다 쌩쌩했는데....
언제나 명열님의 후기는 감동과 재미
그리고 새로운 지식으로의 초대네요
마라톤은 달리면서 극심한 고통 때문에
다시는 안뛰겠다 다짐한다는데
그래도 완주하고 나면 정말
뿌듯한 마음에 고통은 잊게 되죠
어떤이는 달리면서
다음 세상엔 마라톤 없는 세상에서
태어날꺼라고 절규를해 웃었는데
그 말속엔 마라톤이 있는한
달리겠다는 말이겠죠? ㅎㅎ
하여간 아무나 할 수 없는
멋진 운동입니다
명열씨 정말 첫 완주 왕 축하해요
11월엔 날잡아 축하파티해요^^*
축하 넘 감사합니다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처음이자 마지막 완주인데....
산후조리 끝나고
해산의 고통을 또 겪을 건지
생각할게요~ㅎㅎㅎ
자랑질하더니 비싸게 굴어 미안합니다~~
ㅍㅎㅎ~ 미친건 아니죠?
풀신청했다하길래 그랬었는데...
그말에 오기의힘이생겨 완주하는데
큰도움이된듯 하네요~ ㅎ
그렇게 멋찌게 첫풀을 완주하다니..
명열님의 저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첫풀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이제
진정한 마라토너로 인정해 드립니다~ㅎ
빠른회복하시고 앞으로 더멋진 레이스
펼쳐보시길...
오기의 힘으로 완주?
내키진 않지만 인정할게요.
마라토너로 인정?
주최측에서 인증서까지 받았는데
뭘 또 인정?ㅎㅎㅎ
그런데 산마에서 인정해주시니
정말 행복해져요
동기부여와 성원 넘 고맙구요~~~
소양제2교 건널때 사진
한장 추가했어요
실물 대비 아주 훌륭해서~~ㅎㅎ
실물대비 아주 훌륭에 한표
@초록별(주동예) 분명 칭찬 맞지요? 하여간 감사 ㅎㅎㅎ
와우~ 사진 정말 좋은데요
실물 대비 아주 훌륭에 나도 한표요~^^*
@산유화(엄미자) 실물대비 좋다는
맘에 없는 겸손에 동의해주시니 감사~
실물이 좀 딸리긴 딸리지요
ㅆㅆ(씁쓸)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