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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보살도
3. 자비와 보리심
아티샤는 『보리도등론』에서 유정들을 단계와 서원에 따라 열등한 사람, 보통 사람, 뛰어난
사람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열등한 단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 이기적이고, 현생이나 미래생에서 단순히 윤회의 쾌락만을 위해 행위한다.
다른 경전에서는 이러한 단계나 서원은 전혀 ‘종교적’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평범한 서원을 지닌 두 번째 범주의 사람들은 존재의 쾌락을 뒤로 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위는 평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곧 아라한이라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행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단계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모든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실로 자신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아티샤는 이 마지막 범주,
즉 대승보살도를 따르는 수승한 유정들을 위해 『보리도등론』을 저술하였다.
따라서 보통의 세속적인 존재들, 아라한의 열반을 향한 길 위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제거하려는 서원을 세운 보살이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차이점은 서원에 의지한다. 이것의 한 필연적인 결과는 대승과 비대승의 차이가 학파나
부파, 계율, 의복 혹은 철학의 차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종교적 길을 따르는
이유인 하나의 동기이다.
일체 중생을 위해 성불을 이루려는 최상의 동기를 지닌 사람은 어떤 불교 부파를 따르더라도
대승 불교도이다. 이것은 분명히 비대승 부파들에서 출발하는 대승의 역사적 기원과
일치한다. 누구나 철학적으로 설일체유부나 경량부의 비대승철학, 그리고 대승의 중관과
유식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도이건 아니건 간에 그 사람이 대승의 동기를 발전
시켰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어떤 특정 사람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티베트 학자들이 종종 지적하듯이) 대승 철학들을 지지하고 또한 대승의 의식
(儀式)을 수행하더라도 참된 대승불교도가 아닌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실제 서원은 오로지
자신만의 해탈이나 심지어 명예 또는 재물과 같은 세속적 목표일 것이다.
진정한 대승의 동기를 발하는 것을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 보리심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깊은 자비심으로부터 나온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인
시인의 한 사람인 적천(寂天, ?antideva, 695-743)은 『입보리행론』 제1장에서 다음과 같이
보리심을 찬탄하고 있다.
존재의 수백가지 고난을 초월하기를 열망하는 사람, 고통받는 존재들을 해방시키기를
열망하는 사람, 수백가지 즐거움을 즐기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결코 보리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 보리심이 존재의 감옥에 사로잡혀있는 가엾은 사람에게서 일어났을 때 그는 곧바로
선서(善逝, Sugata)의 아들, 신들과 인간세계에서 존경받는 존재로 묘사될 것이다.
이 자비심이 보살의 기초이며 동기를 유발하는 힘이고, 그로부터 대승의 완전한 체계가
나온다. 연화계는 “붓다, 세존들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비심으로 전지전능함을 얻는다.
그들은 자비심 때문에열반에 머물지 않고 세간 속에 있으면서 이곳의 행복에 기뻐한다”고
말한다 (Beyer 1974: 100). 현재의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마치 못을 박아둔 것처럼 이 [자비심을] 가슴 깊은 곳에 지니고 있다. 그와 같은
자비심은 친구와 친척들과 같은 가까운 중생들뿐 만 아니라 전 우주와 시방세계의 일체
중생에까지 확대된다. (T. Gyatso 1979: 111)
이 깊은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과 그 결과로 생긴 보리심은 참으로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체험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범한 존재에서 ‘붓다의 아들 딸’이 되는 것이다(『입보리행론
(Bodhicary?vat?ra)』 1: 9; ??ntideva 1960을 보라). 이것은 그저 쓸데없는 생각이 아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붓다가 되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게다가 적어도 도차제(道次第)의
티베트 부파에서 설명하듯이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지속되는 일련의 명상들의 결과이다.
첫째, ‘도차제(道次第)’의 티베트 전통에서는 극소수의 수행자들만 이 보살의 동기를 지니고,
곧바로 시작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모든 중생들은 첫 번째 단계, 즉 이 세계나 다른
세계의 쾌락―그것을 실현하든 못하든―을 추구하는 이기심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예비 명상은 수행자가 서원을 세우기 위해 이러한 ‘감각적’ 동기로부터 함께 윤회에서
해탈하기까지 관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사용한다. 다시 말하자면 아라한에 대한 염원을 위해
명상하는 것이다.
특히 총카파는 출가·자비·공이라는 ‘도의 세 가지 주요한 점’에 대해서 설했다. 진실로 자비를
일으키기 전에 출가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련의 단계별 명상을 권한다.
먼저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려움과 존엄성에 대해 명상한다. 즉 사람으로 태어나 정법을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다.
다음에 명상 수행자는 무상함과 죽음에 대해 집중적으로 명상한다. 즉 비록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닥친다는 사실은 확실하다고 명상한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는 자신의 영적 성장만이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사실은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곧바로
정법을 수행하고자 하는 열정을 일으키게 한다.
수행자는 업과 윤회에 대해 명상한다. 그것은 영적 수행을 위한 도덕적 기반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명상 수행자가 이 명상들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면 이 단계에서 그는 영적·계율의
입장에 관심을 갖고 윤회에서 보다 나은 세계에 태어나도록 도움을 주는 공덕에 참된 관심을
가질 것이다.
다음으로 다양한 형태의 윤회와 육도[六道: 천 (天), 아수라, 인간, 아귀, 축생 그리고 지옥]의
모든 고통에 대해 명상한다. 수행자는 육도의 운명과 그 고통 그리고 궁극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 대해 각각 관한다. 이와 같이 반복해서 명상해야만 윤회의 세계를 완전히
포기하려는 생각과 아라한에 대한 열망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 오로지 그때에만 보리심을
일으키려고 지향하는 명상만이 참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제3대 달라이라마 쇠남갸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신과 타인 모두의 관점에서 완전한 성불을 목표로 해야 한다. 더욱 이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불성을 성취하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중생들을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철저히
이롭게 하기 위해 순수하게 깨달음을 원해야 한다. 마치 당신이 윤회의 고해에 빠진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역시 모두 그러하다. 그리고 당신처럼 그들도 오로지 좌절과 고통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S. Gyatso 1982: 109-10)
일반적으로 보리심과 특히 명상들을 일으키는 원인은 경전마다 약간 다르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에서는 인도 원전에 근거하여 주의 깊게 반복적으로 수행하면 결국 보리심을 일으키게
되는 두 가지 명상을 언급 했다.
첫 번째 명상은 ‘여섯 가지 원인과 한 가지 결과’로 불리는 것이다. 초보 입문자로서 수행자는
모든 중생들을 향한 평등의 감정, 즉 ‘편견 없는 태도’를 일으켜야 한다. 명상 수행자는 적,
친구 그리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인 느낌이 드는 사람을 관한다. 이 모든 사람들은
실제로는 동등하다. 끝없는 윤회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친구, 적 그리고 그저
그런 사람을 사귀었다.
이들은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방해가 되기도 한다. 실로 원래부터 친구이거나 원수인 사람은
없다. 현생에서도 이들은 적, 친구 혹은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갖지 않게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향한 평등의 감정을 갖는다. 여섯 가지 원인들과 한 가지 결과는
이렇다.
1) 우리는 과거에 무수히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미천한 중생일지라도 나의 어머니였던
적이 있다(물론 다른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2) 어머니로서 중생들은 커다란 고통과 근심을 겪으면서도 우리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
3) 현생에 모든 우리의 ‘어머니인 중생들’은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니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어머니들을 도와 그 애정에 보답할
임무와 의무를 지니고 있다. 제3대 달라이라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벼랑을 행해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술 취한 행렬 속의 사람들처럼, 그들은 윤회의 낮은 단계에
있는 중생계에서 고통을 받으며 죄악의 절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생각해 보라.
‘만일 내가 이 애처롭고 나약한 존재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할 것
인가? … 이 중생들을 무시하고 윤회에서 오로지 나의 개인적인 해탈만을 추구한다면 얼마나
양심과 동정심이 없는 일인가!’
4)와 5) 이러한 입장에서 명상 수행자는 대자(大慈)를 일으킨다. “이 어머니인 중생들을 기쁨과
그 원인을 가지게 해 주소서.”
5) 명상 수행 자는 대비(大悲)를 일으킨다. “그들을 고통과 그 원인으로부터 해탈하게 해
주소서.”
6) 마지막으로 모든 중생들을 책임지고 돕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과연 소수의 중생들에게,
아니 한 사람 에게만 이라도 얼마 나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수행자는 명상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모든 능력과 힘을 지닌 완전히 깨달은 붓다가 되어야만 자신의
염원과 의무를 이행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결과’ 즉,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깨달음을 완성하려는 이타적인
염원인 보리심을 낳는다.
보리심을 발전시키기 위한 두 번째 명상은 ‘자타(自他)의 치환(置換)’ 이다. 우선 모든 중생들도
나처럼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피하려는 점에서 같다고 명상한다. 적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나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처럼 그들도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다른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처럼 그들도 중생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 모두는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내가 무엇이 그렇게
특별한가? 왜 나는 내 행복만을 위해 애쓰는가? 내가 두려움과 고통을 싫어할 때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특별한 무엇으로 보호한다면 다른 이들도 다르겠는가?
다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나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는 수적으로 훨씬 많기 때문에 언제나 나보다 더 소중하다.
그래서 나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합리적이다.
명상 수행자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나와 중생을 같다고 보는 명상을 반복해야 한다. 이때 그는
다른 중생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왜 안 좋은지를 명상한다. 적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1960: 8: 129).
“세간의 모든 고통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서 온다. 세간의 모든 행복은 다른 중생들의
행복을 바라는 데서 온다.” 결론은 ‘나와 남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강조한다.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은 중생들이 나를 활용하는 것, 중생들에게
봉사하는 것에 있다. 이 생각, 이 태도, 이 결심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야만 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야만 한다”(T. Gyatso 1975: 140).
방금 말한 명상은 ‘주고받기’ 수행과 관련이 있다. 즉 수행자는 자신의 눈앞에 여러 가지
상태나 윤회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떠올린다. 또한 숨을 들이쉬면서[吸] 중생들의
고통을 떠맡고, 숨을 내쉬면서 [呼] 중생들의 행복을 책임진다고 상상한다. 이것은 중생의
부정적인 상태를 행복으로 변화시킨다. 티베트인들은 종종 이 수행이 완성되면 보살이 다른
중생들의 고통과 질병도 진정으로 끌어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보리심이 일어난다. 아티샤는 올바른 스승 앞에서 보살의 서원을 맹세하는 의식에
대해 말한다. 그 근본 사상은 붓다 앞에서 서원하는 것이다. 후대의 의식집에 따르면 서원하는
사람은 다음을 세 번 반복한다.
시방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들과 보살님들 이시여, 저를 살피소서! 스승님 이시여, 저를
살피소서! 아무개라고 불리는 저는 이 생과 다른 생에서 보시, 지계 그리고 선정으로 쌓은
선한 공덕으로―제가 행하고 있고, 행했던, 혹은 기꺼이 하고 있는―마치 과거의 여래,
아라한, 모든 것을 성취하신 세존과 뛰어난 경지에 있는 위대한 영웅인 보살님들처럼 먼저
가장 뛰어나고 올바르며 완전한 깨달음을 향한 생각을 일으키겠습니다.
이와 같이 현생에서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나아가겠습니다. 좌초되어 있는 존재들을
피안으로 건너게 하기 위해, 속박된 것을 풀어주기 위해, 죽은 것을 소생시키기 위해, 아직
열반에 이르지 못한 것들을 열반으로 이끌기 위해, 저는 가장 뛰어나고 올바르며 완전한
위대한 깨달음을 향한 생각을 일으키겠습니다. (Gyaltsen 1982: 30)
이러한 입문식을 거치면 서원한 사람은 보살이 되며, 어떠한 중생도 포기하지 않으며, 혹은
아라한과 같은 소승의 낮은 단계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책임의식을 갖게 된다.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의 가장 감동적인 서원과 희망은 언제나 그렇듯 적천(3: 7-10)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제가 병을 고치는 치료약이기를 비옵니다. 그리고 제가 의사이며 간호사이길 비옵니다.
세간에 살고 있는 모든 아픈 존재들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치료될 때까지. 음식과 감로가
내리도록 하소서. 굶주림과 갈증의 고통을 씻어낼 수 있도록, 그리고 영겁의 굶주림 동안
제가 음식과 감로가 되게 하소서. 저는 고갈되지 않는 보물이 되겠습니다. 가난하고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제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으로 되게 하소서. 그리고 이것들이 언제나
그들 곁에 가까이 있게 하소서. 지켜보소서, 저는 모든 중생의 선행을 완수하기 위해
삼세(三世)동안 얻은 나의 몸, 나의 즐거움, 그리고 나의 선한 것들을 모두 후회하지 않고
포기할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공의 깨달음 속에 자비가 깊이 간직되어 있을 때만 보리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보리심은 공과 자비를 본질로 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미 『해심밀경』 이래로 줄곧
두 가지 보리심, 즉 궁극적인 보리심과 가립적(假立的)인 혹은 상대적인 보리심을 말하고
있다.
경전에 따르면 궁극적인 보리심은 “이 세계를 초월해 있으며, 개념이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매우 빛나는 것이며, 궁극적인 모습이며, 오염되지 않았고, 움직임이 없고, 어두운
밤을 비추는 등불에서 끊임없이 타오른 불꽃처럼 대단히 밝은 것이다.”
『해심밀경』은 유식 계통의 경전이므로 궁극적인 보리심은 자비를 지니고, 깨달은 자의
밝고 청정한 마음과 같다고 본다. 『해심밀경』에서 말한 것처럼 안혜는 보리심을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현현하는’ 법신과 같다고 한다(Suzuki 1963: 299; 『the tath?gatagarbha』
를 참조하라). 또한 총카파와 같은 귀류논증학자의 관점도 궁극적인 보리심을 자비와
공의 직접 자각에서 나온 불·보살의 마음의 흐름으로 이해하는 점에서 같다
(Hopkins 1984: 56).
가립적인 보리심, 즉 도덕적인 보리심에는 서원하는 보리심과 참여하는 보리심의 두
종류가 있다. 적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1: 15-6).
간단하게 보리심은 2종류가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깨달음에 대한 [열망하는] 결심을
하는 보리심과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참여하는] 보리심이다. 가려고 하는 것과 (실제로)
가는 것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처럼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을 현인은 차례로
이해한다.
연화계는 이와 견해를 약간 달리한다.
이 의지가 성불에 대한 최초의 열망이다. 오,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내가 붓다가 되었으면
좋을 텐데! 그리고 시작하는 것(참여하는 것)은 붓다가 되겠다고 진심으로 맹세하고
공덕과 지혜를 실제로 쌓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로 다른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를 원하거나, 더욱이 중생들의 고통을 보면
언제나 그들을 도와주려는 소망을 자발적으로 일으키는 보살은 참여하는 보리심을
일으킨다. 기초로서의 이것과 함께 실제로 보살도와 바라밀 등의 수행이 참여하는
보리심이다. 이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이 도―혹은 적어도 그것에 대한 몇몇
경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