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걷다 / 곽주현
봄볕이 좋아 평소보다 일찍 밖으로 나왔다. 영산강 수변 공원을 걷는다. 벌써 양지바른 곳에는 냉이, 광대나물, 큰개불알풀 등 들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손전화기의 만보기 앱을 열어 본다. 올해는 날마다 만 걸음 이상을 찍었다. 두 팔을 휘저으며 빠르게 나아간다. 이제는 제법 바람이 훈훈하다. 옆으로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획획 지나간다. 요즘 들어 부쩍 그 수가 불어나고 있다. 이들이 계속 영산강 변 자전거 길을 따라 끝까지 간다면 담양댐에 닿게 된다. 갑자기 ‘나도 자전거 한 번 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걷기를 그만두고 (다 걷고) 딸네 아파트로 돌아와 거치대에 세워 둔 자전거를 내렸다. 수북이 쌓인 먼지를 닦아 내고 홀쭉해진 바퀴에 펌프질도 했다. 바람을 가르며 강변을 달리니 날아갈듯 기분이 상쾌하다.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한 시간 넘게 페달을 밟았다. 담양댐에서 목포까지 자전거를 타고 온 경험이 있어 다시 이대로 계속 가고 싶어진다. 그때 다음 코스는 섬진강을 계획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여태껏 그렇게 하지 못했다. 딸이 내일(금요일) 재택근무라며 오늘 광주 집으로 가도 좋다 한다. 그래 이참에 다시 시작해 보자.
집에 도착했다. 장거리를 가야 하기에 자전거를 자세히 점검하려고 승용차 트렁크를 열어 보니 텅 비어 있다. 아뿔싸! 깜박 잊고 그냥 온 것이다. ‘에라 이 정신 나간 사람아.’ 잠깐 자책을 하다가 접고 아파트로 들어왔다. 다음 날, 아내는 친구들과 봄나들이 간다며 일찍 외출했다. 티브이 앞에 앉아 있는데 섬진강 생각으로 궁둥이에 좀이 쑤셔서 가만있지 못하겠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출발해 보자. 아내가 점심밥으로 식탁 위에 놓아둔 꽁꽁 언 찰밥 한 덩이와 물 한 병을 작은 가방에 넣었다. 승용차를 몰아 길도우미의 안내에 따라 임실군 체육공원에 도착했다.
길 건너 맞은편에 “섬진강 찻집” 간판이 보이고 그 옆에 자전거 종주 확인 인증 센터가 있다. 꼭 공중전화 부스처럼 생겼다. 영산강 길을 갈 때 샀던 ‘국토 종주 수첩’을 꺼내서 고무도장을 꽝 찍었다. 표지를 보니 벌써 10년이 지났다. 찻집에 들어가 커피를 시켰다. 탁자, 의자 등의 가구와 소품들이 모두 나무로 만들어졌다. 갖가지 모양을 조각한 게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목공예 장인이 공방을 겸하고 있다. 커피와 함께 빵, 치즈 두 조각, 치즈 주스, 방울토마토 등 쟁반 가득 나왔다. ‘웬걸 이리 많이 주지?’ 치즈의 고장이라 그런가 보다. 물론 커피값은 높았다.
파란 줄이 그어진 길을 따라 천천히 섬진강 걷기를 시작한다. 맑은 날은 아니지만 포근하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 날씨가 한몫한다. (발길을 재촉한다.) 물길이 끝나는 광양까지 148km를 가려고 한다. 물이 흘러야 할 곳에 마른 억새만 무성하다. 그래도 왜가리 몇 마리가 먹이를 찾는지 고개를 들었다 숙이기를 반복한다. 간간이 높이가 1m쯤밖에 안 되는 다리가 놓여있다. 옛사람들은 저 낮고 좁은 곳을 건너 이 마을 저 마을로 마실 다녔지만, 불편이 없었으리라. 그러다가 중간에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맑은 물소리 닮은 정겨운 인사를 나누었을 것이다. 벌써 두어 시간 걸었다. 정자가 보인다. 배가 출출하여 가져온 찰밥을 꺼냈다. 급히 오느라 젓가락도 넣지 않았다. 물론 김 한 장도 없다. 그냥 비닐 주머니를 벌려 닭 다리를 뜯어먹듯 했다. 그래도 꿀맛이다. 행여나 누가 지나가며 볼까 봐 멀리까지 살펴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평일이라 그런가 보다.
다시 일어나 한참을 걸었다. 어떤 마을 앞을 지나는데 커다란 느티나무가 두 그루가 수호신처럼 서 있다. 조그만 푯말이 보인다. “제13회 풀꽃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마 환경단체에서 아름다운 나무에 주는 상인가 보다. 사방으로 길게 뻗은 나뭇가지가 힘차 보인다. 크기가 우람한 젊은 느티나무다. 그 아래로 까만 자연석이 십여 개 놓여있다. 잎이 피어나면 오고 가는 사람들의 좋은 쉼터가 될 것 같다. 10여 미터를 더 갔는데 푯말이 또 하나 보인다. “김용택의 작은 학교”라 쓰여 있다. ‘섬진강 연작’으로 유명해진 그 시인이다. 마을 맨 앞집이고 “회문(回文)재”라는 편액(扁額)이 걸렸다. 글이 모여든다는 뜻이다. 자연석 돌담이 인상적이다. 둘러봐도 인기척이 없다. 아마 살림집이 따로 있는 듯하다. 걸어서 왔기에 이런 곳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해가 서쪽 끝에 갈 때까지 걸었다. 승용차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택시를 검색하고 있는데 아주머니 지나간다. 사정을 말하니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며 친절하게 전화를 걸어 준다.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몇 분 지났는데 곧 차가 왔다. 현지에서 숙박하려다 번거로워 집으로 갔다. 50분도 안 걸렸다. 정오에 시작해서 22km를 걸었다. 한 시간에 평균 4km를 이동했다. 일을 많이 한 다리는 괜찮고 별로 쓰지 않는 어깨가 결렸다. 그래도 견딜 만하다.
다음 날(토요일), 어제 멈추었던 곳에 차를 주차했다. 저쪽에 ‘섬진강 미술관’이 보인다. 둘러보고 싶지만, 아직 문을 열 시간이 아니어서 그냥 길로 들어섰다. 하루 체험 (어제) 경험이 있어서인지(두 번째여서인지) 오늘은 허둥대지 않고 곧장 걷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시각인데 부지런한 낚시꾼은 벌써 찌를 띄웠다. 물이 적은 강은 볼품이 덜하다.(볼품없어 보인다.) 긴 가뭄 탓이다. 그래도 강가 버드나무 가지에 엷은 연둣빛이 돈다. 가파른 길을 오르니 웬 굴이 나타난다. 입구에 ‘향가터널과 다리’라는 간판이 붙어 있고 커다란 자전거 바퀴 위에 사람이 앉아 있는 멋진 조형물도 걸려 있다. 일본인들이 철로를 놓으려고 파 놓은 굴이란다. 일제 강점기 남원-광주를 잇는 철로를 만들려고 바위산을 뚫었다. 길이가 384m로 순창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만들었다 한다. 완공되기 전에 해방이 되어 방치되었다가 자전거 길로 조성하여 섬진강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언젠가 친구에게 어렴풋이 들었지만 처음 와 봤다. 지인들에게 이곳에 꼭 와 보라고 권하고 싶다.
다시 해가 저문다. 오늘은 28km를 걸었다. 삼 분의 일쯤 왔다. 이정표의 남은 거리가 두 자릿수로 바뀌었다. 몸이 얼마큼 따라 주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충분히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전거를 깜박 잊고 온 것이 오히려 잘되었다. 순창 읍내를 지나오는데 학교 교문에 긴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여러분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
첫댓글 홍길동이십니다. 도술을 부리는 것처럼 잘 걷기도 하려니와 척척 알아들으니까요.
걷기를 그만두고- 이렇게 말하면 어색하지요. 그래서 선생님이 한 대로 없애 버리거나 뜻을 살려서 '다 걷고'로 바꾸면 좋겠어요.
(어제) 경험이 있어서인지- 어제 해 봐서인지, 두 번째여서인지(두 번째로 해서인지)
교수님 다시 바꾸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