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7.부활6주일 묵상글>
<요한14,15-17>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관계를 지키려면 사랑하되 모두 주지는 마라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까?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잡았어도, 돈을 벌고 있다 해도, 꿈을 쫓고 있다 해도, 멋진 파트너와 생활한다 해도 인간은 누군가를 자기편으로 만들지 않는 한 사는 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가령 혼자 잘나가고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값비싼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해도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으면 ‘사는 보람’도 없지 않을까요?
또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할 때보다 다른 사람, 예를 들면 가족이나 친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할 때 더욱더 힘을 냅니다.
그렇다면 대체 당신이 ‘어떤 사람’일 때, 주변 사람들이 당신의 편이 돼줄까요?
바로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남녀 관계를 떠나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들은 모두 당신의 편이 되어 응원해주려고 할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랑받는 사람’이란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지 못하고 있거나 일과 인간관게 모두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만 너무 몰두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무의식의 힘에 맡기기는 커녕 ‘힘내자’고 스스로를 컨트롤하려고 하면 쓸데없이 힘이 들어가 더욱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은 앞에서도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주었던 힘만 빼면 됩니다. 이렇게 말해도 진지한 사람은 “어떻게 힘을 빼면 되나요?” 하고 물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다나 수영장에서 헤엄치려고 몸을 띄우려고 할 때, “어떻게 힘을 빼나요?” 하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저는 “그냥 힘을 빼세요!”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의식을 지배하는 사람, 무의식에 지배당하는 사람, 구스도 후토시,김해용 옮김,동양북스,2015,p.148-149)/
행복의 진리, 반반의 법칙
풀이 죽어 있는 당신에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이럴 때 힘을 잘 빼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 방법은 피프티 피프티(fifty-fifty), 즉 반반의 법칙입니다. 당신의 주변사람이나 당신과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고, 지금까지 자신에게만 너무 몰두 했던 삶의 방향을 외부로 돌렸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이름을 붙였습니다. 즉 자신의 행복=50, 타인의 행복=50이라는 뜻입니다.
왜 반반인가 하면, 예를 들어 당신이 ’10’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죠. 당신이 자신의 행복과 소원을 이루는 데에만 몰두하여 타인의 행복을 바라지 않을 때는 다음과 같은 수식이 성립됩니다.
9(자신의 행복)*1(타인의 행복)=9(의 힘)
반대로 타인의 행복은 바라지만 ‘나 같은 사람이 정말 행복해져도 되는 걸까?’ 하고 자기 부정을 할 때는 어떻게 될까요?
1(자신의 행복)*9(타인의 행복)=9(의 힘)
이런 수식이 성립하겠죠. 또한 자신의 행복이나 소원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지만 ‘타인의 행복을 바라면 아무래도 조금 질투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 때 수식은 이렇습니다.
6(자신의 행복)*4(타인의 행복)=24(의 힘)
그런데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데 ‘5’의 힘,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데에도 ‘5’의 힘으로 상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도 행복하면 좋겠지만 남도 행복하면 더욱 기쁘겠다’고 생각하면 최대의 힘을 낼 수 있습니다.
5(자신의 행복)*5(타인의 행복)=25(의 힘)
=>나도 살고 야생도 살고(세계 경제와 환경, 전 지구 인류가 살 수 있다)
이 경우 유일하게 5*5가 되어 양쪽의 힘을 극대화하는 것이죠. 9*1도 안 되고, 4*6도 안되며, 7*3도 안 됩니다. 즉 5*5가 아니면 최대한의 힘은 발휘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연인이나 부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만한 인간관계의 비결은 언제나 ‘반반’인 것입니다.(무의식을 지배하는 사람, 무의식에 지배당하는 사람, 구스도 후토시,김해용 옮김,동양북스,2015,p.150-151)/
무의식의 활용법(13)
슬픔을 반반으로 나누는 방법
1.상대방이 어깨 결림, 요통 등 신체적 고통에 시달리거나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거나 슬퍼할 때 “만약 괜찮다면 당신의 그 고통을 내게 반 나눠주세요”하고 말한다.
2.상대방이 “네, 좋아요!”라고 말하게 한다.
‘겉’과 ‘속’, ‘남”과 ‘여’, ‘위’와 ‘아래’, ‘빛’과 ‘그림자’….이렇게 우리는 한 짝을 이루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를 끌어 당기는 힘이 같아질 때, 더욱더 강력한 힘이 파생됩니다. 박수도 포옹도 누군가 한 사람이 강한 힘으로 치거나 끌어안아봤자 좋은 소리는 나지 않고, 유쾌한 기분도 들지 않습니다.
이제 머리로는 ‘반반’의 이치를 알았을 겁니다. 저는 이 반반의 법칙을 어떻게 하면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았고 마침내 그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설명한 무의식 활용법입니다.
정말 간단하죠! 게다가 이 방법은 어떤 경우에도 응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독신인 당신에게 행복하고 즐거운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친구가 있다면, 이렇게 말해보세요.
“혹시 괜찮다면 그 경험을 나한테 반 나눠줄래?”
상대방은 별 뜻 없이 알겠다고 말해줄지 모르지만, 당신은 그 때부터 잠재의식 속에 ‘상대방의 행복’을 담아둘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에이, 말도 안 돼. 누가 그런 말을 믿겠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시험 삼아 다음과 같은 실험을 친구나 가족에게 해보세요.
스텝(1) 2인 1조로 A가 B의 합곡이라는 혈을 주무른다. 이때 아프다고 하면 A가 B에게 “그 고통의 절반을 나한테 나눠줄래?”라고 말한다.
*합곡(合谷)은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에서 약간 위쪽에 위치합니다. 보통 체했을 때 누르는 부분입니다.
스텝(2) B는 “응, 그래”라고 말한다. 다시 한 번 A가 합곡혈을 주무른다.
이 실험을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B의 아픔이 방금 전보다 가벼워지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문제로 골몰해 있을 때일수록 누군가가 힘들어 한다면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당신이 힘을 빌려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고민을 들어주거나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곁을 내줄 수 있다면 꼭 그렇게 해보세요. 자신의 처지를 잊고 그만큼 상대방을 도와줄 때 자신에게 필요한 아이디어나 방법이 떠오를 수도 있을 테니까요.(무의식을 지배하는 사람, 무의식에 지배당하는 사람, 구스도 후토시,김해용 옮김,동양북스,2015,p.152-154)
이해하지 못해도 공감할 수 있다
어떻게든 힘이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당신은 최선을 다해 도와주거나 자기 희생을 하면서까지 상대를 돌봐주려는 경향이 있지 않나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당신만 지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방법이라면 당신은 절반 정도의 노력(힘)만으로도 상대방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그것도 단 한 마디 말로 말이죠.
인간은 타인이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자신의 기쁨이나 슬픔을 공감해주면 좋아하는 법입니다. 그 마법의 말이 ‘나한테 반 나눠줄래?’ 입니다.
100퍼센트 힘이 되어주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나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아내는건 좀 미안해. 언젠간 그 사람한테도 보답해야 하잖아!’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당신이 지갑에 지금 10만원 들어 있다 칩시다. 그 때 제가 “지금 돈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그 돈 나한테 다 빌려주라. 이다음에 꼭 갚을께!” 하고 말하면 당신은 어떨까요? ‘이 돈을 다 빌려주면 나도 곤란한데…’라는 생각이 들어 얼굴로는 웃지만 마음 속으로는 울지 않을까요? 또는 당신이 “1만원 정도면 빌려줄 수 있어!” 하고 대답하면 이번에는 제가 얼굴로는 웃지만 마음속으로는 울 겁니다(점심조차 사주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반만 빌려주지 않을래? 꼭 갚을게!” 하고 말하면 빌려주는 쪽도 ‘그 정도로 도움이 된다면…..’ 하고 서로가 납득할 수 있습니다.
80퍼센트도 아니고, 20퍼센트도 아닙니다. 딱 절반이 서로에게 만족감을 주고 최대한의 힘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반반의 법칙을 이용해보세요.
당신이 원하는 경험(업무 기술이나 살아가는 지혜)이 있다면, 그 경험을 쌓은 사람에게 “반만 나눠주세요”하고 말해 보세요. 경험이라면 눈에 보이는 자신의 소유물을 덜어주는 것도 아니므로, 공유하고 싶다거나 나누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흔쾌히 “좋다”고 허락할 겁니다.
다만 많은 돈을 가진 사람에게 “그 돈을 반만 나눠주세요! 당신은 ‘그래, 좋다’고만 대답하면 됩니다!” 하고 억지로 돈을 달라고 하는 행위는 또 의미가 다르므로 그런 식의 말투나 태도는 주의하시길 바랍니다.(무의식을 지배하는 사람, 무의식에 지배당하는 사람, 구스도 후토시,김해용 옮김,동양북스,2015,p.155-156)
혼자는 틀리고 같이는 맞다
어쨌든 우리의 바람은 언제든 마지막에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일, 돈, 인간관계, 건강 등등, 모든 소원의 끝에는 ‘행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부자가 되는 게 꿈인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야 행복한 마음이 들고,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행복해집니다.
뭔가를 통해 ‘행복한 마음’을 체험하고 싶은 게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 바람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닙니다. 물론 그 소원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우리이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만남’과 ‘기회’, ‘인연’은 결코 의식적으로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왜?’ 하고 추궁할수록 ‘왠지 모르겠다’는 대답이 나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이치’를 뛰어넘어야만 그 대답은 찾아오는 법입니다. 어떻게 해야 소원을 이룰 수 있는지를 이치로 전부 설명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누구도 소원을 품지 않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원하는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소원을 이뤄 나 혼자만 행복해져도 기뻐해줄 사람이 없다면 공허할 테고, 반대로 행복해진다면 질투심이 절로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서로 반반인 관계에서는 다음 두 가지가 성립했을 때, 당신은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느낄 겁니다.
(1)진심으로 타인의 행복도 기뻐하고 축복해줄 것.
(2)자기 자신이 행복할 때는 겸손과 배려 없이 타인의 축복을 받아들일 것.
예를 들어 당신이 누군가의 힘이 되어주었고, 상대방이 몹시 기뻐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분명 그때는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도움을 받은 상대방도 기쁘지만 상대방의 좋아하는 얼굴을 본 당신도 기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거죠.
우리는 날마다 업무나 공부, 집안일이나 육아로 분투하며 바쁜 일상을 보냅니다. 열심히 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좀처럼 다른 사람의 문제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행복까지 진심으로 바라는 일도 없을 테죠.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일은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당신이 소원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은 ‘타인이란 존재’이니까요. 당신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일을 통해 수천만 원의 연봉을 받는 것도 혼자서는 결코 불가능합니다.
당신이 소원을 이루었을 때, 함께 기뻐해줄 사람이 있습니까?
또는 주변에서 누군가가 소원을 이루었을 때, 당신은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주나요?
제가 이 책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가고 싶은 세계가 바로’서로 행복한 세계’입니다.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이나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신을 내몰고 있는 사람은 오늘부터 조금씩이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고, 반만이라도 다른 사람의 힘이 되어주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물론 당신이 행복해지는 것도 잊지 말고요.
Tip
누군가가 불행한 세계에서 나는 행복하지 않다!
(무의식을 지배하는 사람, 무의식에 지배당하는 사람, 구스도 후토시,김해용 옮김,동양북스,2015,p.157-159)
“기쁨은 나누면 2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혼자가 아닌 함께여야 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도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이 혼자가 아닌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계시면서 사랑으로 일치해 계신 것처럼, 함께 할 때 사랑도 행복도 배가 됩니다.
어떠한 일이 잘 안 될 때는 혹시, 나의 모든 에너지를 내 자신만을 위해서 쓰지 않았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내 안의 무의식을 방해하는 일이 되어 더욱 일을 어렵게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힘을 빼는 일은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무의식을 의식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 일에 관계되는 기억들을 예수성심께 봉헌하고 예수성심 안에 머물며 그 일도 맡기시면 됩니다. 그리고 내 앞에 주어진 일을 해나가면서 가끔 떠오르는 기억들을 순간 봉헌하면 어느 순간 무의식이 의식화됩니다. 전혀 의미도 뜻도 모르는 것이 떠올랐을 때 봉헌하면 그 밑에 있던 무의식들이 떠오릅니다.
2.마에게 10니라는 에너지가 있다면, 나의 일에 10이라는 에너지를 다 쓰지말고, 나에게는 5라는 에너지, 이웃에게 5라는 에너지를 분배 해서 쓰십시오. 그러면 의식적인 힘이 빠집니다.
1)슬픔에 대한 것
“나한테 반 나눠줄래?”라는 말로 공감해주면 됩니다.
2)기쁨이나 어떤 기술에 관한 것
“나한테 반 나눠줄래?”라고 말하면 상대방도 별 뜻없이 대답하면, 내 잠재의식은 그 기술을 얻어내기위해 부투하면서 노력하게 됩니다. 결국 그 기쁨이나 기술을 마음에 담아 무의식적으로 습득하려고 노력하게 되겠지요.
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가진 공감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겠지요.
타인이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자신의 기쁨이나 슬픔을 공감해주면 좋아하는 법이지요. 그냥 들어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 응대의 말을 해주셔도 되지만, 또 하나의 마법의 말은 “나한테 반 나눠줄래?” 입니다.
우리는 내 일보다는 상대방을 도와줄 때 더 힘을 내지 않나요?
*내가 가진 힘이 10이라면, 상대방을 도와줄 때 반만 힘을 쓰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 일에 대한 창의력과 아이디어가 생기게 됩니다.
내가 가진 힘(5)*상대방 도와주는 힘(5)=25의 힘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지요.
즉 10이라는 힘이 25라는 힘으로 변형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내가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상대방이 도와달라 할 때 반절의 힘으로 도와주게되면 고맙게도 그 반절의 5배의 힘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공감을 해 주며 에너지가 교류되는 의미 입니다.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사람’이 되는 까닭은 이러한 공감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복(5)*상대방 행복(5)=25
예수님은 어떻게 행복을 나누실까요?
예수님은 여기에 성령을 더하십니다. 그래서 25가 아니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행복이라는 말은 그 속성상 혼자가 아닌 두 사람 이상이 함께 할 때 오는 것이지요.
천국에서도 하느님 혼자가 아닌 우리와 함께 해야 더욱 행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시려고 성령을 보호자로 주십니다. 그 성령께서는 우리가 진리 깨닫도록 도와주시며, 성령안에 다시 태어나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며,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에 함께 이르도록 해주십니다.
진리란 자기 의식 너머에 있습니다.
진리를 깨닫는 데에 자기의 방식과 능력만을 고집하는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 너머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반면(요한7,34; 8,21 참조), 제자들은 죽음 너머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그분의 새 생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믿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분을 알아보고 그분의 생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이미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과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응답은 우리가 수행하는 계명의 준수 곧 순명이며, 이것이 예수님께 사랑과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응답이 되는 것 입니다. 이러한 순명으로, 그리스도께서 나타내 보이신 성부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John14,15-17>
15 “If you love me, you will keep my commandments.
16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to be with you always,
17 the Spirit of truth, which the world cannot accept, because it neither sees nor knows it. But you know it, because it remains with you, and will be in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