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84)
2부(34)
질긴 인연(因緣)의 시작(始作)
해(年)도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김삿갓은
이날도 이풍헌 댁으로 바둑을 두려고 모임방을 나서려고 하는데,
조조가 술을 한 병 들고 찾아왔다.
"여보게! 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나하고
술이나 한잔하세! 이 술은 어떤 여자가
자네한테 보내온 특별(特別)한 술일세!" 하고 집을 나서려는 김삿갓의 발길을 잡았다.
술이라면 어떤 술도 마다할 김삿갓이 아니다."술이라면 먹음세 그려.
그런데 어떤 여자이길래
나한테 술을 보냈단 말인가?"
"왜, 궁금해? 그런 사람이 있어. 하하하."
조조는 술상 앞에 앉으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김삿갓이 물었다.
"이 술이 어떤 술이란 말인가?
또 어떤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고 했는데
그 여자는 또 누구인가?"
"왜?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니까 궁금한가?
"아따, 이 사람! 더 궁금하게 하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우선 술맛부터
알아보기로 하세. 자네가 한 잔 마셔
보아서 술맛이 자네 입에 맞으면,
내가 어떤 여인이 보냈는지 말해주지."
"술이 입맛에 안 맞으면?"
"아따, 이 사람!
언제, 삿갓 입맛에 맞지 않는 술도 있었던가?"
"그랬던가? 하! 하! 하!"
김삿갓은 술잔을 손에 들고
조조와 얼굴을 마주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김삿갓은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닌걸.
이 사람아! 이런 좋은 술이 어디서 생겼는가?"
김삿갓은 40 평생을 살아오며 술이라면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셔왔다.
그러나 술맛이 좋고 나쁜 것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마셔 본 술은 국화 향이 그윽하니 술이 혀끝을 톡 쏘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술을 다시 한번 마셔 보고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이 술은 맛으로 평가(平價)한다면
우리 같은 사람보다는 신선(神仙)들이나
즐길 수 있을 것 같구먼 그래."
김삿갓이 술맛을 극구(極口) 칭찬(稱讚) 하자,조조도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고,
비아냥거리는 어조(語調)로 말을 했다.
"여자가 보내 준 술이라 하니 자네가
무슨 착각(錯覺)을 일으키고 있는 게 아닌가? 술은 다 마찬가진데 쏘기는
뭐가 쏜단 말인가?"
"예끼 이 사람아! 내가 좋은 걸 좋다고 하지,
아무렴 나쁜 것을 좋다고 하겠나?
정말이지 이 술은 보통 술이 아니야.
대관절 이 술을 빚은 여인은 누구길래
이렇게도 기막힌 술을 빚어냈을까?“
김삿갓은 여자(女子)에게 관심(關心)을
가지기보다는, 술맛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조조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했다.
"이 술을 빚은 여자(女子)의 정체(正體)를
알고 나면, 술맛이 대번에 뚝 떨어져
버릴지도 모를 일일세."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술을 빚은
여인(女人)이 누구이든 이렇게 기막힌
술을 빚을 수 있는 여인(女人)이라면
보통(普通) 사람은 아니겠는걸."
김삿갓이 술맛을 극구(極口) 칭찬(稱讚)하자 조조는 어이없어하면서,
"자네가 진심(眞心)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실대로 말해줌세. 실상(實狀)인즉,
이 술은 취향정(醉香亭) 주모(酒母)가
보내온 술이라네. 자네는 며칠 전에
그 여자(女子)를 만나 본 일이 있지 않은가?"
김삿갓은 취향정(醉香亭)이라는 소리에 어리둥절하였다.
"뭐! 취향정(醉香亭)? 내가 언제 취향정
(醉香亭)주모(酒母)를 만나 본 일이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은 왜, 지난번 제제네 집에서
생일 술을 얻어먹고 돌아오는 길에
2차로 취향정(醉香亭)이라는 술집에
갔던 일이 있지 않은가? 이 술은 그날 밤
만났던 수안댁(遂安宅)이 자네에게
특별(特別)히 보내 준 술이란 말일세!"
조조는 그렇게 말하면서 의미심장 (意味深長)한 미소(微笑)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그 집 주모(酒母)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좋은 술을 공짜로 보내 주었단 말인가?"
"수안댁(遂安宅)이 자네에게 왜 이 술을
보내 주었는지 궁금하겠지? 그렇다면
그 이유(理由)를 솔직(率直)히 말해줌세."
그러면서 조조는 수안댁(遂安宅) 이야기를
들려주었다.황해도(黃海道) 수안(遂安) 태생(胎生)인 수안댁(遂安宅)은 열여섯
살 때 나이가 열 살이나 더 많은 신랑
(新郞)에게 시집을 왔었다.
남편은 밥보다도 술을 더 좋아하는
모주망태였지만, 수안댁(遂安宅)은 아무런
불평(不平)도 없이 남편(男便)을 하늘처럼
정성(精誠)스럽게 받들어 모셨다.
※ 모주망태(母酒-망태) = 모주꾼(母酒-꾼),
술을 늘 대중없이 많이 마시는 사람.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수안댁(遂安宅)이 시집을 와서 5년째 되는
여름에 남편(男便)은 독주(毒酒)를 잘못
마시고 세상(世上)을 떠나 버렸다.
수안댁(遂安宅)은 장사(葬事)를 지낸,
그날부터 남편(男便) 무덤 옆에 초막
(草幕)을 치고 삼년상(三年喪)을 꼬박 치렀다.
그런 뒤에는 자기(自己) 집에 돌아와
"취향정(醉香亭)"이라는 간판(看板)을
내걸고 술장사를 시작하였다.
자식(子息)이 한 명도 없는 그녀에게 재혼(再婚)을 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수안댁(遂安宅)은 모두 거절(拒絶)하고 술장사를 시작(始作)한 것이다.
동네 노파(老婆)들이"아까운 나이에 재혼(再婚)은 안 하고 하필이면
왜 술장사를 하냐?"고 충고(忠告)를 했지만,수안댁(遂安宅)은 그때마다
"내 남편(男便)은 나쁜 술을 마셨기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느 집이나 그런 비극(悲劇)이 다시는 없어야 하겠기에, 나는
술꾼들에게 좋은 술을 내 손으로 직접
빚어 대접(待接)하고 싶어서 술장수로 나서는 겁니다." 하고 대답(對答)했다.
이와 같은 수안댁(遂安宅)의 결심(決心)은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수안댁(遂安宅)은 술을 직접(直接) 빚어 팔아 오기를 10, 4~5년, 계절(季節)에
따라 앵두주, 두견주(杜鵑酒)와
국화주(菊花酒) 같은 꽃잎과 과일로
만든 술도 썩 잘 빚어 왔지만,
대중적(大衆的)인 막걸리 소주(燒酒)
조차 빚어 놓은 술의 맛과 향(香)은 타(他)의 추종(追從)을 불허(不許)할
만큼 손맛이 뛰어났었고, 시간(時間)이 더해 갈수록 양조(釀造) 기술(技術)도 발전(發展)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녀에게는 남모르게 탄식(歎息)할 일이 하나 있었으니 술을 아무리 정성 (精誠)스럽게 빚어 팔아도 술맛을 제대로 알아주는 진짜 술꾼을 한 사람도 만나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술꾼들은 하늘에 별처럼 많아도,
술맛을 제대로 알아주는
진짜 술꾼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수안댁(遂安宅)은 날마다 술을 팔아
오기는 하면서도, 술맛조차 모르는 술꾼들을 내심 은근(慇懃)히 경멸 (輕蔑)하고 있었다.
"술맛을 제대로 알아주는 진짜 술꾼을
단 한 사람이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있는데 어느 날 저녁, 조조가
친구(親舊)들 네댓을 데리고 술을 마시러 왔다.
제제네 집에서 생일잔치를 얻어먹고 돌아가는 길에, 한 잔 더 마시려고 들렀던 것이고 그 일행(一行) 가운데는 처음 보는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다.
수안댁(遂安宅)은 손님들에게 술을
손수 한 잔씩 따라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평소(平素)와
다름없이 무심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조차 모르는 초면(初面)
손님만은 술을 한 모금 마셔 보다가,
별안간(瞥眼間)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감탄사(感歎詞)를 지르는데,
"아니! 이 집 술맛이 어쩌면 이렇게도
기가 막히지!"
수안댁(遂安宅)은 그 말을 듣는 순간 (瞬間),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사람을 쳐다보았는데
그는 오늘 처음 온 김삿갓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어느 친구(親舊)가 김삿갓을 놀려대는데,"여보게 삿갓! 술이야 어느 집이나 마찬가진데 이 집 술맛이 뭐가
좋단 말인가?"
이번에는 다른 친구(親舊)가
대답(對答)을 가로막고 나섰다.
"모르는 소리 말게, 삿갓이 음흉(陰凶) 스럽게 수안댁(遂安宅) 환심(歡心)을 사려고 일부러 수작(酬酌)을 부리는 모양이지!"
김삿갓은 친구(親舊)들이
놀리는 말을 하자 이렇게 나무라 주었다.
"이 못난 친구(親舊)들아!
자네들은 술맛을 그렇게나 모른단 말인가?
정말이지 이 집 술맛은 보통 술맛이 아니야!“수안댁(遂安宅)은 그런 말을 들을수록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김삿갓은 수안댁(遂安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친구(親舊)들과
어울려 연방 술만 마시고 있었다.
이윽고 일행(一行)이 돌아가고
수안댁(遂安宅)은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삿갓이라는 사람이 술을 마셔가며
"이 집 술맛은 어쩌면 이렇게도 기가 막히지?“하고 연신 감탄(感歎)하던
소리가 자꾸만 귓전에 울려 오는 것 같았다.
삿갓이라고 하던 그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기에
술맛을 그렇게도 잘 알아줄까?
조조 일행(一行)과 네니 내니 하는 것을 보면, 마을 사람들과 가까운 사이임은 분명(分明)해 보였으나 그의 행동거지로 봐서는,마을 사람들처럼 우매(愚昧)한 농부(農夫)는 아닌 것 같고.
수안댁(遂安宅)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밤은 깊어 이슥토록 잠을 못 자고 계속(繼續) 뒤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