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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江湖亭)에 부는 바람
仁守/정용하
萬山環抱一溪頭(만산환포 일계두) 수많은 산으로 에워싸인 한 시내 어귀에
數架松簷夏似秋(수가송첨 하사추) 몇 가지의 솔 처마는 여름에도 가을 같네.
觀物愛吟閒裡句(관물애음 한리귀) 사물을 살피며 한가히 시를 지어 즐겨 읊고
傷時難遺醉中愁(상시난유 취중수) 어려웠던 시절의 걱정은 취중에 잊어보세.
生涯草草隨雲冷(생애초초 수운냉) 하찮은 이내 생애 구름과 더불어 한가하고
啚吝輕輕遂水流(비린경경 수수류) 인색하게 가벼운 이 한 몸, 물 따라 흘러가네.
蔬食只能供我飽(소식지능 공아포) 나물밥만으로도 배부름에 부족함 없으니
更無思慮任浮休(갱무사려 임부휴) 다시는 걱정 없이 부초(浮草:덧없음)에 맡기리.
이 시는 임진왜란 당시 선비로서 분연히 일어나 영천대첩을 승리로 이끌어낸 호수 정세아(鄭世雅1535~1612)선생의 강호정 현판 원문(原文)이다. 선생의 자는 화숙(和淑)이며 시호는 강의(剛義)이며 명종13년(1558년)24세에 사마시(생원과 2등)에 합격했으나 당시 사림의 일반 선비처럼 관직에 뜻을 접고, 퇴계문하에서 학명을 떨쳤던 아버지 노촌公 정윤양(鄭允良)께서 건립한 자호정사(紫湖精舍)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선생의 나이 58세 되던 임진년(1592년) 4월13일 부산을 상륙한 왜적은 파죽지세로 울산 경주 영천으로 밀려오니 동년 4월23일이다. 성주와 관군은 도망가기에 급급하니 왜군의 승승장구는 막을 길이 없었다.
이에 선생은 책을 덮고 분연히 일어나 당시 성균관유생(사마시 합격 25세)이던 장남 의번(宜藩:32세), 삼남 안번(安藩) 두 아들과 제자들을 데리고 격문(檄文)을 돌려 향병을 소집하니 며칠 안 되어 상민, 승군, 향반의 자제 등 도합 900여명이 모였다.
뒤이어 무관출신인 인근 신령 의병장 권응수, 신령현감 한 척, 의흥 의병장 홍 천뢰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7월24일에는 하양 의병장 신해, 하양현감 조 윤식, 자인 의병장 최 문병, 경산 의병장 최대기, 경주 판관 박의장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모이니 그 수가3,500 여명이고 의성 감사졸(결사대)500여명이 합세하니 4,000 명이 넘는 장졸이었다.
그리하여 다른 고을의 의병들은 지리가 낯설기 때문에 서북쪽을 맡게 되고 영천의 의병들은 싸우기가 어려운 동남쪽의 금호강 절벽을 맡아서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동년 7월27일 새벽 때마침 바람을 이용, 마현산 산마루에서 모래와 재를 날려 적진을 요란하게 하고 화공으로 사방에서 성문을 깨트리고 대파하니 남은 왜적들은 강을 건너 경주로 달아났다. 영천성의 수복은 임란이후 가장 큰 반격전이요 승리였다. 이로서 경상 좌도로 올라가던 왜병들은 보급로가 끊겨 큰 곤궁에 빠졌다.
그 여세를 몰아 그 해 8월21일 5,000 여명 아군의 선봉장이 된 선생은 경주성을 수복하기위해 경주 서천으로 나아간다.
영천의 의병들은 서문(西門)을 맡아 공격하여 성안으로 진입하였으나 북문으로부터 기병을 투입한 왜군은 아군의 후미를 엄습하고 또한 복병으로 아군의 전면을 공격해오자 이에 아군은 당황하기 시작하고 원사인 박 진의 군사들이 잠시 후퇴를 하자 아군은 와해되고 선생도 포위되어 고전분투 하고 있는데, 선생의 장남 의번(宜藩)은 호수공과 헤어지게 되자 그 소재를 찾아 헤매다 분연히 칼을 휘두르며 포위를 뚫고 들이치니 적병의 포위망 일부가 무너지는지라 호수공은 이틈에 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의번은 온몸이 창에 찔려 피투성이로 적진 속을 호수 공을 찾아 이리저리 뛰었다. 이렇게 적의 진영을 드나들기를 셋 차례, 마지막 회에는 종(僕) 억수에게 “아버지가 전사한 것이 분명하니 내가 어디로 돌아가겠느냐. 너는 나와 관계없이 떠나가라”하니 억수가 말고삐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주인이 아버지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였는데 종이 어찌 차마 혼자 살겠습니까?”하므로 재삼 꾸짖고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하며 말을 힘껏 채찍질하여 적중에 뛰어들어 굳센 활로 적을 쏘니 족족 맞아 쓰러졌으나 화살은 다되고 활 또한 꺾이고 게다가 타고 있던 말조차 적탄에 쓰러졌다. 적이 무기로 공을 위협했으나 분연히 꾸짖어 호통하며 굽히지 않고 전사하니 듣는 사람마다 놀라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그 후 다시 경주 복성전에 참전하여 설욕을 풀었으나 아들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집에 보관 중이던 의복과 신발 그리고 시(詩)를 지어 장례를 치르니 이름 하여“시총(詩塚)”이라 칭한다. 이듬해 평양과 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에게 맡기고 영천 자양(紫陽)에 돌아와 학문과 낚시로 세월을 보낸다. 훗날 영천대첩 공로를 포상하려하자 호수공은 “이것은 모든 장병들의 힘에 의한 것이다. 내 어찌 상을 받겠는가. 내가 군사를 일으킨 것은 나라의 위급함에 따랐을 뿐이고 공명에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라고하며 단호히 거절하고 공로를 남에게 주었다.
그 후 체찰사 이원익 대감에 의하여 여러 번 천거 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중에 황산 도찰방을 잠시 지내다 곧 사직한다. 그리고 긍계 황 준량, 장현광, 조호익, 이 준, 손 처눌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다 78세에 생을 마감하니 조정에서는 충효가문으로 정려가 내려 선생에게는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시호는 강의공으로, 선생의 장남 의번(栢巖公)에게는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어 부자가 함께 정조2년 왕명으로 환고 세덕사에 제향된다.
현재 강호정(구 자호정사)에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 각지에서 명사들이 찾아와 29수의 시문(詩文)을 지어 차운하니 1709년 강호정 중건 시 이것을 각자(刻字: 글씨를 조각함)해서 강호정 벽에 현판 되어 전해오고 있는데 그 중 선생의 후학이며 숙종31년 생원이 되어 병조좌랑을 지낸 유 정무(柳鼎茂)선생의 글을 소개해 본다.
-공경히 호수선생 자호정에 차운하다 -
전쟁터엔 이끼 쌓이고 몸은 이미 백두 되어
영천 자호천에 평민으로 돌아 왔네.
공세우고 양보함은 독서한 힘이며
몸은 비록 후퇴하나 나라걱정 항상 했네.
차마 어찌 경주 땅 원한 맺힌 혼백 부를 손가
앉아서 큰 바다 거센 흐름 막았도다.
조대의 빼어난 경치는 그림 같은데
티끌세상 떠다니던 이름은 쉬어 감을 좋아했네.
선생의 6세손 진사 정 일전(鄭一銓)은
-중건 후 노인회를 베풀고 선조 詩에 차운하다-
허물어진 정자 중건한 땅 자호 머리여
인간들의 흥폐 함을 몇 년이나 보았는가.
산골짜기 구름연기 옛날모습 여전한데
삼춘의 꽃과 새는 새 시름 알려 주네
술잔 주고받고 종의(종친의 친목)를 돈독히 하며
시와 노래 서로 불러 물과 화합 흘러가네.
이 모임 우리가문 진정한 경사이니
천년토록 길이길이 남는 경사 있으리라.
각지 명사 스물아홉 분의 시문을 종합인용 하여 필자도 느낌을 한번 적어보았다.
요망한 기운이 바다에 덮이고
팔도가 붕괴되고 주인이 없던 날
붓 대신 검(劍)을 잡고
묘한 꽤로 적을 치니 귀신 또한 근심했네.
전답 팔아 영걸한 피는 이끼로 변화되고
눈물 젖은 이끼에서 옛 바람 불어오니
산기슭 시총에는 자규새가 슬피 운다.
공세우고 양보함은 독서의 힘 이런가
하찮은 이내 생애 구름처럼 한가하고
가벼운 이 한 몸은 물 따라 흘러가네.
뜻을 아는 문객들 구름처럼 몰려와
시를 지어 차운하니
병기 씻은 호수는 지금도 흐르는 듯한데
빛을 감춘 겸손의 덕 천추토록 빛나리라.
필자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전후로 기억되는데 40여 세대의 산중 집성촌에 타성(他姓) 두 세대가 있었는데, 마을 어귀에 백발에 등이 약간 구부러진 환갑이 훨씬 지난 노인 한 분과 아들인 젊은 부부 그리고 어린 자녀가 셋 있었는데 막내가 아들이고 둘째 딸이 필자보다 한 살 위이나 초등학교 동창으로 기억되는데 마을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노인의 이름을 부르며 막 대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필자의 부모님께서 생전에 그 분들을 인정스럽게 대해 주셨고 그분들 중 젊은 가장되는 사람은 저희 집에 마음 편히 가끔 출입하곤 했는데, 일 년에 한번 정도는 잊지 않고 제사에 사용될 음식 재료 한두 가지를 보내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님께서 그 집 제사까지 참석하셨는데 당시는 그저 외가 쪽으로 먼 친척쯤 되는 것으로 막연히 추측했는데 최 근년에 와서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다섯 형제분의 막내이신 아버님이 출생 당시 젖이 없어 그 노인의 안 사람(부인)에게 젖동냥 한 탓에 생명을 보존 하였으며 그분들에 대하여 심적으로 모정에 가까운 생각을 지니고 계신 듯했는데 그분들이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복 억수의 후손들이란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고려조의 마지막 정신적 지주인 포은 정몽주선생의 방계 후손으로 태종 이방원과 뜻을 함께하지 않는 관계로 조정으로부터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다소 소외된 신분의 한 선비가 나라와 백성들의 어려움에 비분강개하여 전답 500여 마지기를 팔아가며 의병을 모집하여 전쟁터에서 자식마저 잃고 시총을 가슴 깊숙이 묻고 전공을 남에게 양보하며 벼슬마저 거부한 채 한적한 시골에서 마음을 비우며 생을 마감하려고하였다하나 선생도 한사람의 자연인이기에 시문에서 고뇌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몇 가지의 솔 처마는 여름에도 가을 같은데
어려웠던 시절의 걱정은 취중에 잊어보세
하찮은 이내 생애 구름과 더불어 한가하고
가벼운 이 한 몸 물 따라 흘러가네. 에서 자식에 대한 타들어가는 아픔과 시름 그리고 인생의 덧없음과 무의미함이 시문에 생생히 남아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티끌세상, 허공에 떠 있는 이름은 그저 잠시 쉬어 감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모른 채 우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정(情)도 귀천(貴賤)도 모두 하나 되어 이끼 낀 강호정의 기둥 사이를 스쳐가는 바람이 되어 귓가에 전해준다.
세상은 태우면서 그저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고......
(2008.12. 어느 날)
*참고사항
○갈매기들도 싫어하지 않는다하여 호를 “호수(湖叟)”라 하였으며, 강호의 고사(高士)가 머무르는 정자라 하여 “강호정(江湖亭)”이라 칭함.
○솔 처마: 작은 소나무가지로 덮은 흙 담의 지붕으로, 이것이 해를 묶어 오래 지나면 여름에도 단풍처럼 빨갛게 마르는데 선생께선 자식 잃은 자신의 타들어가는 마음을 시문에서 이에 비유함.
○황산도찰방: 황산은 경남 양산 물금부근의 지명이며, 도찰방은 오늘날의 역장(驛長)에 해당하는데 품계는 6품이나 지방 수령의 동향을 파악하여 조정에 보고하는 권한이 있어 지방관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함.
○전투전과 비교
영천성은 임진왜란 발생 1년 전에 급히 보수한 성으로, 왜군 제5번대 후쿠시마 마사노리 휘하 2만4천여 명 중 1,000여명이 영천성에 상주하였는데 전투에서 왜군 사망517명, 군마200필 노획, 창칼 등 무기900여점노획, 남녀포로1,090명 구출하였고, 아군 피해는 전사83명, 부상238명이며 8월21일 경주성 전투에서 아군1만5천명 동원(경상좌병사 박진1만 명, 호수선생 5000명)되어 아군 주력군600여명 전사, 그해 9월8일 2차복성전에서는 비격진천뢰를 사용, 화공으로 기선제압 후 수복함.
○호수선생께서 벼슬거부에 대한 見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시호는 강의 공” 이라했으니 이는 초창기 의병장 곽재우와 동일 급의 수훈인데, 선생께서는 젊은 나이에 사마시 합격하였어도 처음부터 관직에 뜻이 없었으며 또한 임란의 공적 등으로 여러 차례 관직추천이 있었으나 거절하시면서 황산도찰방을 잠시 지내신 것은 자신에 대한 조정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며 관계에 정식으로 진출한다고 하더라도 차후 주변관료들의 시기와 폄하 그리고 권력의 암투에 휩쓸리게 됨을 불 보듯 전망하셨고 또한 백암公을 잃은 슬픔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셨기에 이를 거절한 것으로 보임. 실제로 곽재우 장군은 후에 벼슬에 진출하여 곤혹을 치렀음이 이를 증명함.
《호수선생 전투기록》
1)1592.5 의병모집(장남, 차남, 삼남이 역할 분담, 선생을 보좌, 4남 수번은 당시 13세)
2)동년 6.9 장남 백암公 대동하여 문천회맹참석(항일의지 다짐)
3)동년 7.26 영천읍성 탈환(의병장)
4)동년 8월초 경산 자인에서 적 격퇴.
5)동년 8.21 경주성 1차 탈환전 참가(실폐, 백암공 순직)
6)동년 9.8 경주성 2차 탈환전 참가(승전)
7)1594년 영천 창암전투 참가
8)동년 경남 언양에서 경주오는 길목인 양천교 전투(승전, 4남 수번 대동)참가.
9)동년 10월 부산성 전투 참가
8)1596년 3월 팔공산회맹(八公山會盟)참석
9)1597년7.21 정유재란 시 곽 재우 휘하의 경남 창녕 화황산 회맹참석 및
수성에 공 세움(4남 수번 대동)
*차남 처사公 유번은 보급 및 연락업무 담당.
《호수선생 및 백암公 관직 추증경과》
《호수선생》 《백암공》
1)선조38년(1605년)선무원종공훈 3등 ?
2)광해군7년(1615년1월)병조참의 추증 ?
3)동년 6월 승정원 좌승지 추증 ?
4)광해군11년 병조참판 추증 1)호조정랑 추증
5)영조8년(1733년)병조판서 加贈(가증) 2)승정원 좌승지 추증
3)정조17년(1783년)이조참판 加贈(가증)
《매산문집 기록 관련하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김 한상 박사가 매산 정 중기선생 문집을 번역. 요약한 내용에 의하면 1731년 매산 선생께서 호수선생과 백암공의 임란시의 공훈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음을 조정에 상소하였는데, 이때 가문의 외손이며 이조판서로 있던 이덕수公(1673-1744)의 영향력 작용으로 1733년 호수선생에게는 병조판서로, 백암 공에게는 승정원 좌승지로 각각 상향 추증됨.(그 후 매산 선생께서 이덕수公에게 조정에서 선조에 대한 특전을 내린 것에 대한 감격의 글을 적은 간찰을 보냈음)
그 외에도 문집에는 “옥간정 중수기”란 제목 하에 1757년 영천(횡계)에 있는 옥간정이 실화로 파손되어 제자들이 힘을 모아 중건한 내력이 기록되어있으며, 1725년 “승훈랑 오천 정공유장”이란 제목 하에 강의공의 손자 정호신이 17세에 父를 여의고 형을 부모 섬기듯 했으며 과거에 뜻을 접고 자양의 산수를 사랑하여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삼휴당”이라 칭하고 구경하던 꽃이 져도 쉬고, 마주하던 달이 기울어도 쉬고, 술이 다 떨어져도 쉰다하여 삼휴(三休: 욕심을 버린다는 의미)라 했다는 내용 등이 있음.
첫댓글 호수할아버님의 좋은 詩句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글자체가 너무 작아서 읽기가 무척 피곤한 것이 안타까워서 유감입니다.
미흡한 글을 끝까지 보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글씨 크기를 조금 크게 해보았는데 약간은 커진 것 같으나 제가 의도한 만큼은 되지않네요.
설 연휴 마지막 밤 뜻있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예~제 청을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는 읽기가 훨씬 좋습니다.
인수씨도 좋은 밤의 주인공이 되시고~~~~~~
새해에는 더욱 정답고 친근감 넘치는 일족이 되도록 우리 노력하여 봅시다.
앞으로는 글씨를 크게하여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