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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강 사마천과 공자세가
1. 태산
내가 제일 처음 보여준 다큐멘터리를 보면 태산에 올라간다. 나는 태산이라고 하면, 어려서부터 양사언의 싯구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를 생각해서 어마어마한 산으로 여겼다.
양사언(楊士彦, 1517~1584)
조선전기의 문인, 서예가. 금강산 만폭동 바위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다.
중국에 가서 태산의 규모를 보는데, 마치 유명한 가수 하춘하의 고향이기도 한 우리나라 영암의 월출산을 보는 느낌이었다.
월출산(月出山)
전라남도 영암군과 강진군 경계에 있는 산. 남국의 소금강이라 불리운다. 해발 809m
사실 태산은 월출산보다는 좀 큰 산이다.
태산(泰山)은 해발 1545m
중국인들에게 왜 태산은 그토록 어마어마한 산이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상대적인 거 같다. 우리나라는 워낙 산이 많은 구릉지대에 있기 때문에 산이 하나 있어봐야 그다지 대단하게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산동은 완벽한 평원이다. 거기에 솟은 산의 위용은 대단하게 느꼈을 거 같다. 노나라와 태산까의 거리가 서울에서 천안정도인데, 노나라에서 태산이 보인다. 맑은 날에 공자가 태산을 봤다고 한다. 그 정도로 산동은 대평원이다. 거기에 태산이 우뚝 솟아 있다.
태산을 천하제일산이라고 부른다. 오악 중에 제일이다. 실제로 가볼만 하다. 계단이 7000여개 있는데, 그걸 한 번 오르면 10년을 더 산다고 한다.
특히 다리가 아픈데도 중국여인들이 그 태산을 많이 오른다. 7000계단은 오를려면 몇 시간이 걸린다. 그 계단은 이태백의 시에도 나온다.
四月上泰山, 石平御道開
- 이태백의 遊泰山
그렇게 오랫동안 쌓아서 청나라 때 완성된 계단이다. 그 계단 말고도 물론 올라가는 길은 많이 있다.
중국 사람들이 태산을 성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곧 산동, 곡부 지역이 중국인들의 원래 고향이라는 의미이다. 진시황도 섬서성 함곡관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낙양도 내륙 안쪽이었다.
태산을 신성시하는 태도로부터 역으로 이 지역으로부터 중국문명이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부터 문명이 시원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곤륜산이니 하는 어마어마하게 위대한 산이 있지만 아직도 태산을 가장 위대한 산으로 받드는 것이다. 태산은 중국인에게 백두산이다.
2. 봉선제
중국의 단군에 해당하는 사람이 황제(皇帝)이다. 이 황제가 바로 공자가 살았던 곡부 지역 사람이다.
황제(皇帝, Yellow Emperor)
중국민족의 시조. 전국시대에 그 신화가 성행
그래서 예로부터 천하를 통일한 자는 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제식을 지냈다. 그걸 봉선제라고 한다. 천하를 통일한 위대한 임금만이 지낼 수 있는 제사였다.
봉선(封禪)
천하를 통일한 천자만이 태산에서 올릴 수 있는 제식
그러니깐 봉선을 누가 제일 먼저 지냈겠나? 진시황이었다. 진시황 이전에 천하를 통일한 사람이 있었을까? 옛날에 있었겠지만 전설뿐이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태산에 올라가서 봉선제를 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봉선제를 어떻게 지내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자세한 것은 도저히 적지도 듣지도 못했다.
- 사마천
그런데 당시 유생들은 하늘에 지내는 봉선제라고 하는 것은 명확한 규정이 없으니깐 함부로 지낼 수 없다고 반대했다. 봉선제는 대제 중에 대제이기 때문에 함부로 못 지낸다며 유생들은 반대를 했다. ‘제사를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태산에 올라가서 지내려고 하느냐?’
그러니 진시황이 오죽 화가 났겠냐? 자기는 천하를 통일하고 바야흐로 봉선제를 지내기 위해 태산을 가야하는데 유생들이 반대를 했다.
진시황이 태산 꼭대기를 올라갈 적에 걸어서 올라갔을까? 아니다. 가마로 올라갔다. 이게 어마어마한 것이다. 진시황에 살았던 곳인 서안에서 태산까지가 간단한 거리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산동성보다 작다.
산동성 15만 Km2
대한민국 9만9천 Km2
진시황이 태산을 가려면 당대에는 몇 달이 걸리는 어마어마한 행렬이 가야 했다. 그래서 진시황이 태산에 가서 봉선제를 지낸다고 자기가 강행을 해서 올라갔다.
유생들은 절대로 봉선제를 지낼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진시황은 봉선제를 강행했다. 봉선을 지내고 나서 그 제식의 내용을 완벽하게 싹 없애버렸다. 아무도 모르게 없애버렸다. 자기가 어떻게 제식을 지냈는지 모르게 했다.
그런데 진시황이 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제식을 지내고 내려오다가 벼락을 맞는다. 다행이 소나무 아래 피해서 살았다. 그래서 그 소나무에 오대부라는 벼슬을 준다.
下, 風雨暴至, 休於樹下, 因封基樹爲五大夫
- 사기, 진시황본기
다큐멘터리에 그 장면이 나온다. 그 오대부송은 지금도 있는데, 물론 진시황 때 것은 아니다. 그 자리에 다른 걸 심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진시황은 태산을 내려와서 분서갱유를 한다. 책들을 태우고, 자신한테 반대한 유생들을 잡아다가 산채로 묻어버렸다. 유생들은 그 당시 비 맞고 천둥번개 맞았다고 하니깐, 천벌이라며 고소하다고 했다. 진시황은 화가 나서 그렇게 했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책을 태워버리고 유생들을 산채로 묻는다.
사마천의 사기에 봉선서라는 게 있다. 거기에도 봉선제의 제식 내용이 실려 있지 않다.
3. 태사령 사마담
그런데 중국에서 두 번째로 봉선제를 도전한 사람이 누구일까? 바로 한 무제였다. 한 무제도 한사군을 설치하고, 천하를 통일한 후, 태산에 오르려 했다.
사마천의 아버지는 태사령 사마담이었다.
사마담(司馬談)
사마천의 아버지로서 주나라시대부터 천문과 기록을 담당한 명가의 후예였다. 태사령(太史令)
태사령에 사(史)자가 들어가서 옛날 사관으로 알고 있는데, 사관은 정확하게 말하면 역사만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다. 갑골문을 보면 사(史)자는 천문 관측 기계를 들고 있는 손의 모양을 하고 있다. 옛날에 사가(史家)는 단순히 역사만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천문이나 왕의 제식을 관장하던 사람이었다.
한 무제가 봉선제를 올리려 간다고 하니깐, 그 당시 최고의 사관이었던 태사령 사마담은 당연히 자기가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자기 생에 있어서 최고의 영예였다. 그런데 어떤 사정으로 못 가게 되었다.
사마담은 봉선제 인선에 빠져서 낙양에 남게 되었다.
자기가 평생 기다려왔던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소외되니깐 사마담은 화병이 나서 죽게 된다. 죽으면서 눈물을 흘려가면서 유언을 한다.
‘주공이 죽고 500년 후에 공자가 태어나서 춘추 역사를 지었고, 공자가 죽은 다음에 500년이 지나서 무언가 새로 역사가 쓰여져야 할 시기가 왔는데, 나는 불행하게도 여태 뜻을 두고 준비를 해온 봉선제도 못 가보고 여기서 죽는다.’
自周公卒五百歲而有孔子.
孔子卒後至於今五百歲.
- 태사공자서
사기(史記) 마지막에 태사공자서라는 게 있다. 사마천이 방대한 역사서를 쓰고, 자기가 어떻게 이걸 썼는지 아주 솔직한 이야기를 적은 자서가 있다. 그걸 보면 아주 위대한 문장이다. 그 태사공의 자서를 보면 누구나 눈물이 안 나올 수가 없다.
그 자서에 보면, 아버지가 자기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제발 내가 여기서 죽지만 내 한을 풀어다오.’라고 울면서 죽는 장면이 나온다.
太史公執遷手而泣曰:... 余甚懼焉,汝其念哉!
사마천은 아버지를 붙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답한다.
遷俯首流涕曰:小子不敏,請悉論先人所次舊聞,弗敢闕.
‘아버지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버지의 유언을 받아서 분명히 이걸 이룩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약속을 한다.
4. 궁형을 당한 사마천
그리고 아버지가 죽고 몇 년이 있다가, 원봉 3년, 사마천은 태사령이 된다. 그런데 사건이 생긴다.
한 무제는 북쪽의 흉노와 싸워야 했다. 흉노의 정체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는데, 영어로 Huns라고 한다.
흉노(匈奴 Huns)
BC 4세기말부터 500여년간 북방에 번영한 유목 기마민족
지금의 헝가리다. 여기가 훈스 계통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유럽까지 퍼져 있었다. 흉노가 정확하게 뭔지를 모른다. 이 흉노가 방대한 세력을 가지고 중앙아시아 쪽으로 대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 무제는 그 흉노를 깨야 했다. 이릉이라는 장수를 보내는데, 이 사람은 이광의 아들이다. 이광은 맹장으로 흉노와 싸우다 포위되어서 자결해서 죽은 위대한 장수였다. 그 아들 이릉도 대단한 장수였다.
이릉(李陵 ?~BC74)
전한시대의 군인. 이(李)廣의 아들. 한 무제때의 騎都尉.
이릉은 BC 99년에 불과 보병 5,000명을 거느리고, 적진으로 들어간다. 또 다른 장수 이광리는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들어간다. 이광리는 형편없이 싸웠다. 그렇지만 무제는 이광리를 총애했다.
이광리(李廣利)
이릉과 같이 출정한 장수인데 한무제의 애첩의 오빠였다.
이릉은 보병으로 아주 잘 싸워 군공을 세운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흉노족과 싸우다 결국은 화살이 떨어져서 체포당해서 굴복한다.
그래서 조정에서 이릉에 대한 재판을 한다. 그때 사마천도 있었다. 모든 사람은 이릉은 흉노한테 당했으니깐 자결을 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릉을 옹호한다. 사마천과 이릉은 실제로 안면도 없었다. 사마천은 그냥 소신껏, 사가(史家)로서 이릉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5천의 적은 병사로 최대한 싸웠고, 적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으니 이릉은 죄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원군을 보내서 그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무제는 이광리에게 전공을 주려했지만 사마천이 이릉을 옹호했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 일로 사마천은 한 무제에게 노여움을 산다. 이광리를 표창하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마천에게 가장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을 내린다.
궁형(弓形) : 부형(腐刑)이라고도 한다. 남자의 거세.
궁형이라는 것은 거세를 하는 것으로 사내로서 아주 치욕적인 형벌이었다. 그런데 옛날에도 요즘의 보석처럼 돈을 왕창 내면 면제가 되었다. 사마천의 화식열전을 보면, 자신이 돈을 못내는 억울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식열전(貨殖列傳)
사기 열전의 마지막 권. 돈을 적극적으로 벌어야 한다는 사마천의 생각이 반영됨.
선비는 궁형을 당하고 비겁하게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개 궁형을 당하기 전에 자결을 했다. 그런데 사마천은 눈물을 흘리면서 자살을 하지 않고 궁형을 당한다. 왜냐? 아버지한테 약속한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게 살아서 역사를 쓰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죽지를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울분, 이걸 울결이라고 표현하는데, 맺힌 한을 가지고 그때부터 역사를 집필한다.
此人皆意有所鬱結, 不得通其道也, 故述往事, 思來者。
거세를 당하고 이제 내 몸은 쓸모가 없게 되었지만, 내 정신만 살아남아서, 오로지 역사를 집필한다고 절규한다.
身毀不用矣!
사마천의 자서를 보면 아주 처절한 이야기가 나온다.
西伯拘羑里,演周易;孔子戹陳蔡,作春秋;屈原放逐,著離騷;左丘失明,厥有國語;孫子臏腳,而論兵法 不韋遷蜀, 世傳呂覽 韓非囚秦 說難孤憤
서백이 유리에 갇혀 주역을 썼고, 공자는 진채에 액난을 당해 춘추를 썼고, 굴원은 추방된 후에 이소를 썼고, 좌구명은 실명된 후 국어를 썼고, 손빈은 다리가 잘려서 그 유명한 병법을 썼고, 여불위는 촉으로 좌천된 후에 비로소 여씨춘추를 썼고,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힌 후에 고분과 같은 탁월한 문장을 썼는데, 나는 이렇게 억울하게 당해서 비로소 역사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이 마음 속 울분을 풀 방법이 없어서, 도저히 현재에는 기대를 걸 데가 없어서 지난날을 서술하여 미래에 희망을 건다.’고 하고 있다.
故述往事 思來者
5. 사기의 구성
이렇게 해서 쓴 책이 그 유명한 사마천의 사기라는 책이다. 정말 위대한 문장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동양문명의 모든 기초를 놓은 위대한 책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 세가, 표, 서, 열전의 5개의 장르로 만들었다.
본기(本紀) : 제왕치세의 연대기
세가(世家) : 제후치세의 연대기
표(表) : 사건의 도표, 연표
서(書) : 문물제도의 연혁과 원리, 주제별 항목
열전(列傳) : 탁월한 역사적 개인의 전기
조선왕조실록은 승정원일기 등을 기초로 사관이 몇월 몇일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루하루 일어난 일을 써나간다. 이런 것을 편년체라고 한다. 이게 역사를 가장 쉽게 쓰는 방식이다.
편년체(編年體) 연대순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
그런데 사마천이 쓰려는 역사는 신화적 역사인 황제(皇帝)로부터 하은주를 거쳐서, 춘추전국을 지나, 진시황, 한나라에 이르는 것이었다. 지난날의 모든 역사를 다 쓰려는 것이었다.
이걸 어떻게 편년체로 다 쓰겠는가? 그 광막한 중국대륙의 이야기를 다 쓸 수가 없다. 그래서 한 것이 이런 5가지 장르를 정한 것이다.
그 장르 중 하나인 본기는 옛날부터 내려온 왕들의 연대기였다. 은본기, 주본기, 하본기, 진시황본기, 한고조본기까지 중국 천자들의 역사를 하나하나 드라마로 다루고 있다.
그 다음에 세가라고 하는 것은 제후국들의 역사를 다룬다. 이게 중국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데, 중국에는 천자가 있고, 주변에 제후가 있다. 노나라, 제나라, 초나라, 위나라 같은 분봉된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들의 역사를 초세가, 진세가라는 이름으로 따로따로 쓴 게 세가이다. 세가는 30개다.
그 다음에 표는 연표를 말한다.
그 다음에 서는 율서, 역서, 봉선서처럼 주제별로 쓴 것이다.
그 다음에 유명한 게 바로 열전이다. 이게 아주 탁월한 것이다.
열전(列傳) 개인의 전기를 병렬한다는 의미
열전은 위대한 개인들의 전기이다. 여기서 열(列)은 병풍처럼 벌려놓았다는 뜻이다. 즉 전기들이다. 이 열전이 대단한 것이다.
역사를 쓴 태도를 보면, 사마천한테는 분명한 의식이 있다.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의 전기일 뿐이다 - 에머슨
아주 생생하게 모든 구전 자료까지 다 기록한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자기의 생각들을 거침없이 쏟아놓는다. 조선왕조실록처럼 승정원의 사관들이 써놓고 이름을 싹 빼는 게 아니다.
사마천의 주관의 피력은 "太史公曰..." 이라는 부분에서 강력히 표출되고 있다.
사마천은 다 써놓고, ‘난 이렇게 생각한다. 이 자는 나쁘다. 이 자는 좋다. 역사가 여기서 잘못되었다. 이게 정말 위대하다.’ 등 자기 생각을 확실하게 썼다. 이렇게 자기의 주관적 편견을 쓰면서도 가능한 모든 객관적 자료를 다 제시한다.
사마천의 역사서술방법의 수준은 서양에서는 18세기 말엽 로마제국흥망사를 쓴 에드와드 기본에게서나 달성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나만 제시하는 게 아니라, 노자에 대해서는 확실히 모르니깐, 이런 이야기도 있고, 저런 전설도 있다면서 4, 5개를 같이 써놓는다. 그리고 자신은 잘 모르겠으니, 독자들이 판단하라고 한다. 역사서술방법이 21세기 사람들보다 더 초현대적이다. 그렇게 개화된 역사를 이 사람이 쓴다.
이런 방식의 역사기술 방법을 본기(本紀)의 기(紀)와 열전(列傳)의 전(傳)을 따서 기전체라고 부른다. 기전체 역사방식이라는 말이다.
기전체(紀傳體) 본기와 열전의 줄임말
사마천의 사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편년사가 아니다.
6. 공자세가
그런데 여기 재미난 것이 있다. 공자는 제후가 된 적이 없다. 벼슬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대사부라는 직책을 했다고 하지만 벼슬을 산 적이 없다. 그럼 공자의 이야기는 어디에 들어가야 하나?
당연히 열전에 들어가야 한다. 탁월한 역사적 개인이었으니깐 열전에 들어가야 한다. 노자열전, 한비자열전, 이사열전 등 모든 탁월한 개인은 열전에 들어가 있다.
열전은 70권으로 되어 있다.
여러분들이 아는 중국의 유명한 사람들이 전부 이 열전에 나오는데, 공자만 세가에 넣었다. 이건 사실 월권이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이건 뭐냐? 그 만큼 사마천의 시대에 공자는 벌써 추앙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사마천이 공자를 세가에서 다룬 것은 부당하게 공자를 대접한 것이다.
우선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그 형식부터 이렇게 문제가 있다.
공자는 열전에 들어갈 인물인 것은 알지만, 공자는 어떠한 제후보다도 더 중국역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므로 공자를 세가에 넣겠다는 입장을 사마천은 암암리에 밝히고 있다.
진승(陳勝)
오광 진승의 난의 주인공. “왕후장상에 어디 씨나 있냐?”라는 유명한 말을 남김. 진제국의 멸망을 초래.
또한 진승은 촌사람인데 6개월을 파죽지세로 역사를 뒤흔든다. 이 사람의 영향도 어마어마하다. 일시적으로 왕국을 건설한다. 이 진승도 세가에 편입시켰다. 왜냐? 이 사람은 가장 위대했던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를 무너뜨린 계기가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마천의 역사를 쓰는 태도는 특이하다.
7. 사마천의 공자에 대한 태도
사마천은 소신껏 공자를 세가에 집어넣었지만, 내가 보기에 사마천이 세가에서 공자를 다루는 태도는 조금 조심해서 봐야 한다. 왜냐? 애초부터 사마천은 공자에 대한 엄청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저처럼 사마천은 실제로 곡부를 갔다. 거기에 가서 공자가 입던 옷, 수레, 제기 등을 다 본다.
유생들이 거기 모여서 아직도 공자가 남겨놓은 유훈에 따라서 공부를 하고, 예식을 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감동해서, 공자의 집에서 발길을 떼지 못하고 머뭇머뭇하면서 그 위대한 인격에 다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공자세가를 끝내고 있다.
適魯, 觀仲尼廟堂車服禮器, 諸生以時習禮其家, 余祗迴留之不能去云.
그만큼 공자를 높게 보았는데,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공자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
8. 성서의 문제점
문제를 좀 돌려서 이렇게 생각해보자.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예수는 나사렛 사람이다. 갈릴리가 있으면, 그 밑에 사마리아가 있다. 그 밑에 유대라는 지방이 있다. 유대 속에 예루살렘이 있다. 갈릴리에는 커다란 갈릴리 호수가 있다. 그 북단에 가보나옴이 있다. 여기가 어부 베드로가 살던 집이다. 그 옆에 나사렛이 있다.
내가 하버드에 유학할 때 하도 궁금해서 70년대 초반에 배낭여행을 했다. 이 지역을 모두 가보았다.
갈릴리 호수 밑에 사해(四海)가 있다. 그 사이를 잇는 강이 요단강이다. 갈릴리 호수가 참 희한하다. 아주 큰 사막인데 거기에 어마어마한 호수가 있다. 그 위쪽이 강우량이 많은 곳인데, 그쪽 비가 아래로 내려온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바로 이 갈릴리 호수 때문에 사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예수는 나사렛 사람이다. 나사렛에서 컸다. 요셉과 마리아가 다 나사렛 사람들이다. 나사렛에서 선교를 시작해서 제일 처음 간 곳이 가보나옴이다. 가보나옴이 바로 산상수훈을 한 곳이다.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내려와서, 빌라도 총독한테 재판을 받고 그곳에서 죽은 것이다.
그런데 베들레헴은 나사렛에서 한참 먼 곳에 있다. 그런데 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까? 정말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까? 동방박사가 간 곳은 베들레헴이다. 크리스마스 때 베들레헴에 갔다.
누가복음을 읽어보자.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이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메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리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 누가복음 2:1~5
무슨 말이냐? 로마황제 아우구스티누스 대제 때에 로마제국의 총 호구조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때 명령을 내렸다. ‘너의 본적지에 가서 호구조사에 응해라.’ 그래서 나사렛의 요셉이 정혼하여 만삭이 된 부인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을 받으러 그 먼 거리를 갔다는 것이다.
이게 이해가 되는가? 그 당시에 호구조사라는 게 사람을 괴롭히려고 하는 일이다. 세금을 거두려고 하는 것이다.
국가에서 식민지 정책으로 호구조사를 한다는데, 요셉이 만삭이 된 부인을 데리고 그 먼 길을 갔을까? 그래서 거기서 아기를 낳았다고? 조금 미심쩍다.
여기 재미있는 여러 문제가 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총 호구조사를 하라는 명이 내렸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의 로마역사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로마사는 아주 자세하게 알려졌다. 사학가들이 조사해보니, 호구조사는 AD 6년에만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AD 0년에 나와야 한다. 그런데 그때 호구조사가 없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총호구 조사명령은 AD 6년에 있었다. 당대의 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의 증언에 의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가 헤롯왕 치세였다고 하는데, 이건 말이 안 된다.
헤롯왕의 치세기간 기원전 37년 ~4년
헤롯왕이 치세한 건 BC 4년까지였다. 그러니깐 예수시대는 헤롯왕의 치세가 아니었다. 그리고 헤롯왕 치세기에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을 한 적이 없다.
헤롯왕의 치세기간 동안에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 된 적이 없다.
그럼 이건 어떻게 된 것인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라든지 아우그스가 호적조사했을 때와 같은 이야기를 넣어서, 역사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아주 그럴싸하게 정혼한 요셉이 거기까지 갔다고 한다. 아주 그럴듯하게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한 것이다. 우리가 드라마를 쓸 적에는 그렇게 쓴다.
그런데 문제는 왜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굳이 이야기했을까? 중요한 사실은 베들레헴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웅인 킹 데이비스, 다윗 왕이 태어난 곳이다.
그러니깐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예수의 전기를 쓴 사람의 입장에선 예수가 다윗 왕의 적통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드라마를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이게 멋있는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제1장 1절을 보면, 예수의 족보가 나온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
- 신약 성서의 첫말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그러다가 요셉을 낳고 요셉이 예수를 낳았으니 예수야말로 다윗왕의 적통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 - 다윗 14대
다윗 - 바벨론 이거 14대
바벨론 이거 - 그리스도 14대
- 마태복음 1:17
9. 성서의 양식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기독교를 거부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적에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을 캐묻기 위해서 성서를 읽는 게 아니다.
성서는 역사적 사살의 정보를 전하는 문헌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선포하여 우리에게 신앙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성서를 쓴 사람은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이 땅으로 보내졌고, 여기서 많은 고난을 받고, 다시 부활했다. 이렇게 위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을 믿음으로서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정당화하게 하기 위해서 이 복음서를 쓴 것이다.
그 복음서를 쓴 태도를 우리는 케리그마라고 부른다. 케리그마는 일종의 선포다. 역사적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이것은 선포다.
케리그마(Kerygma) 초대교회 사도들의 선포양식
예수는 독생자고, 인류를 구원하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서 쓴 게 오늘날의 복음서다
그러한 케리그마의 장르 속에서 복음서를 읽어야 한다.
김용옥이 KBS에서 녹화를 하고 나오다가, 차에 치여서 죽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왔다고 하자.
만일 이 기사가 사회면에 실렸다면 여러분들은 사실을 확인할 것이다. ‘오? 이거 사실이야?’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서 당장 확인할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문장이 신문 소설란에 나왔다면 사실 확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 주인공의 이름이 김용옥이었던 것이다.
글자로 보면 똑같다. 언어로 보면 똑같다. 그런데 사회면에 나온 것은 사실 확인을 한다. 그런데 똑같은 말이 신문 소설에 나오면 사실 확인을 안 한다.
왜냐? 같은 문자지만 그 문자의 양식이 다르다는 말이다. 이런 것을 포름이라고 한다.
포름(Form) 양식
포름스게쉬히테(Formsgeschichte)
양식 사학이라고 불리우는 20세기 고등문헌비평
‘포름스게쉬히테’라고 해서 이것을 양식사학이라고 한다. 성서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양식이 다르다는 말이다.
인간의 언어는 언어로 그냥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양식이 있다. 이것이 편지양식이냐? 선포양식이냐? 일기예보약식이냐? 공문서 양식이냐? 그 양식 속에서 그 의미가 결정된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 고전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무조건 사실이라고 하는 단순한 구조 속에서 읽으면 안 되는 것이다.
케리그마의 양식 속에서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어야만 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복음서를 지배하고 있는 양식이 있다. 그 양식의 가장 큰 것이 케리그마다. 이게 블트만 신학의 가장 중요한 논점이다. 블트만 신학이 내가 보기엔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문헌비판학이다. 서양의 소위 양식사학이라는 것이다.
블트만(Rudolf Bultmann, 1884~1978)
20세기 독일 신약학의 대가. 비신화화 철학으로 유명
복음서를 지배하는 그러한 양식이 있듯이 공자세가를 지배하는 양식은 없을까? 분명히 한 제국에서 공자를 기술할 적에 공자를 어떠한 위대한 인물로서 선포하고자 하는 사마천의 케리그마가 있다.
여태까지는 이것을 도외시하고 고전을 읽었다. 그러니깐 나 같은 사람은 복잡해지는 것이다. 과거의 학자들이 앉아서 공자왈 하면서 읽고, 옥편 찾아보고 하는 것은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게 읽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이제 고전을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 정확하게 이게 어떠한 양식이냐?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집필된 것이며, 이것은 과연 오늘날 우리의 체험 속에서 어떠한 의미에 상응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10. 신화일 수 있는 공자세가
인간 예수의 드라마에는 초자연적인 사태들이 상당히 많이 개입한다. 죽은 자를 살려냈다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든다든가, 앉은뱅이를 일으켰다든가, 이어오병(二魚五餠)으로 몇 천 명에게 나누어 주었다든가, 그런 게 많다. 예수가 죽은 것은 로마제국의 법을 어겼다는 오해를 받아서 반역도로 사형당한 것이다. 옛날에는 십자가가 별 게 아니다. 로마의 사형 방식이다. 모두 그렇게 죽였다. 또 그리고 나서 부활해서 살아났다. 시체가 일어나서 돌맹이를 열고, 무덤을 나왔다. 나중에 상처를 다 보여주고 하늘로 승천했다. 그러니깐 예수에 대한 전기는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기가 참 어렵다.
그러나 공자의 일생을 보면, 하나도 그러한 초자연적 사태가 개입된 게 아무것도 없다. 평범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숙량흘이고 엄마가 안씨녀였다. 들에서 야합을 해서 태어났고, 몇 살 때 어떤 일을 했고 등등 쭉 써나간다. 드라마틱하게 써나가는데, 그건 내 일생을 기술하는 거나 똑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자연적 사태가 개입된 예수의 일생이나, 그러한 사태가 개입되지 않은 공자의 일생이나, 내가 보기에 똑같은 캐리그마의 양식 속에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해서 신화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화의 구성은 초자연적 사태의 유무와 관계가 없다.
아주 비근한 우리의 경험 세계를 가지고 이야기해도, 거기에 신화적 양식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예수, 공자를 따로 이야기할 게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방법론과 가치관을 가지고 공자세가를 분석해 들어가야 한다. 이런 분석이 어렵다.
그럼 공자라는 사람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공자의 일생을 이제부터 진지하게 들어간다.
11. 노나라
공자는 일단 노나라 사람이다.
예수가 태어난 유대도 당시에는 로마대제국의 식민지였다. 예수가 태어난 상황도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당시 유대민족이 로마치세하에 있었다. 그러니깐 우리나라의 일제 시대 때의 테라우치 총독나 유대의 빌라도 총독은 똑같은 것이다.
예수는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총독이 와서 다스렸을 때, 그 총독한테 재판받아서 죽은 사람이다. 그러니깐 역사적 상황은 일본 총독한테 재판을 받아서 죽은 유관순이나 예수나 비슷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된다.
그러니깐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로마와 싸우면서 문제가 복잡해진 것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로마에 팔아넘긴 거 같지만, 가룟 유다는 정치적 입장에서 과격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 설들이 있다.
노나라도 그 당시 형편없이 연약한 나라였다. 노나라 위쪽에 태산이 속하는 제나라가 있었다. 이 제나라는 엄청난 강대국이었다. 그래서 노나라는 항상 제나라의 시달림을 받았다.
이 노나라는 족보가 있다.
고대 중국을 쉽게 말하면 하은주라고 한다.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가 있었다.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이 걸(桀)이라는 놈이다. 각 나라의 마지막 임금은 항상 폭군이다. 당연하다. 폭군이 되어야 망하기 때문이다. 사실 걸(桀)이 폭군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다음으로 은나라의 마지막에 나온 나쁜 놈은 바로 주(紂)였다. 이 주(紂)라는 자는 주지육림의 주인공이다. 신영균 씨가 홍콩 여배우랑 만든 달기라는 영화도 있었다.
주지육림(酒池肉林) 주(紂)임금의 애첩 달기(妲己)의 발상에 의하여 만든 술 연못과 고기 숲. 사기, 은본기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음.
은의 폭군 주임금을 밑에 서백창이라는 훌륭한 신하가 있었는데, 간(諫)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다. 그래도 반란을 안 일으켰는데, 이 사람의 아들이 武王이다. 무는 물론 후대에 추증된 것이다.
서백창(西伯昌)
서백이라는 지방의 제후. 유리에 갇힘. 후에 주나라 문왕(文王)으로 추증됨
이 무왕이 참다못해서 주임금을 친다. 이때 주임금을 치는 게 잘못되었다고 은나라의 충신이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당신이 왕조를 반역하면 안 된다.’고 매달린다. 그 충신이 바로 그게 백이 숙제다.
叩馬而諌曰 : 以臣弑君, 何謂仁乎?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 은나라의 마지막 충신으로 사기 열전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결국 혁명이 성공했지만, 자기들은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만 캐서 먹다 죽었다고 한다. 아주 유명한 충신이다. 내가 보기에 백이, 숙제가 그렇게 주임금을 옹호할 정도면 주임금이 그렇게 형편없는 놈은 아니었을 거 같다. 그러나 하여튼 은나라는 망한다.
그렇게 무왕이 세운 나라가 주나라이다. 은나라와 주나라는 대비를 많이 한다. 은나라는 쉽게 말해서 굉장히 종교적이었다. 주나라는 인문주의를 표방하는 새로운 문명이었다.
그러다 무왕이 죽고, 아들인 성왕이 들어선다. 그런데 이 무왕의 동생이 아주 훌륭한 인물이 있다. 이 사람이 주공이다.
주공(周公)
문왕(文王)의 아들. 이름은 단(旦). 성왕(成王)을 섭정하면서 새로 세운 주나라의 기틀을 완성했다. 기원전 1000년 경
이 주공이 자기 조카를 도와서 결국 주나라의 기초를 모두 만든다. 이 주공이라는 인물이 굉장히 훌륭한 인물이다.
주라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고, 이 주공이 분봉된 나라가 바로 노나라였다. 주공한테 땅을 주었다. 그런데 주공이 바빠서 못 가고 자기 아들 백금을 보낸다. 그래서 백금이 거기에 가서 통치를 시작한다. 주공과 백금이 같이 분봉된 나라가 노나라이다.
백금(伯禽) 주공의 아들. 노(魯)나라의 실제적인 시조.
노나라는 과거부터 작고 굉장히 연약한 나라였지만, 주나라의 가장 중요한 문물의 기초를 닦은 주공이 분봉된 나라라고 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강력한 프라이드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최고의 양반이다! 문화인 중에 문화인이다!’ 그런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 바로 노나라 사람들이다.
그런 노나라를 문화적 배경으로 해서 공자가 태어났다. 우선 공자가 노나라 사람이었다는 것만 말씀드리고 다시 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