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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수영사적공원,임진왜란 25의용단 모형
* 2022.8.23. / 2022.3.12 촬영
향토 문화 역사를 잘 가꾸는 수영구 화이팅!
[ 내용 구성 ]
▣ 수영사적공원과 <25의용단>
▣ 안용복장군 <수강사>
▣ 수영사적공원 주변 도로변의 <25의용들의 모형>
▣ 수영사적공원 주변 배롱나무 등 여름꽃들
▣ 수영사적공원 부근 <수영선소유허비>와 가사문학 <선상탄>
▣ 수영강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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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의용단(수영사적공원)
수영사적공원 25의용단 본당인 의용사
수영사적공원 25의용단 본당인 의용사
존성문(외삼문, 바깥문)
영회문(내삼문, 사당 안쪽 문)
영회문(내삼문)
(내 친구 이남수 부친이 쓰신 현판이라 더욱 뜻이 깊네.)
25의용단 처음 세운 시기는 철종4년 1853년(장인식 경상좌수사) / 정비 정화 1995년(수영구청)
️1609년 동래부사 이안눌이 25의용 사적을 <정방록> 으로 저술
️순조때 동래부사 오한원이 후손들 챙겨서 부역 면제 등 포상함.
️1853년 철종때 경상좌수사 장인식이 의용제인비를 세우고 의용단을 설치
️1977년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등이 음력 9월 말정일에 제향봉행.
사당을 향해 우측
25의용비(사당을 향해 우측. 13분 배치)
25의용비(사당 향해 좌측. 12분 배치)
의용제인비 .1853년
의용제인비 .1853년
의용제인비 .1853년
의용의 단을 쌓고
스물 다섯 개의 비석을 세운다
장산의 양지이고
영해의 물가로다
충렬지를 본받아
정방록을 지었으니
동악 이공(이안눌 부사)을 사모하고
부사 오공(오한원 부사)에게 감사드리네
비로소 제수를 올리니
굳굳한 혼백 의지하리라
높은 산 깊은 물처럼
영원토록 변함없으리.
(1853년 의용제인비 비문 중에서)
<동래맹하유감(東萊孟夏有感)>
임진년 오늘, 바다건너 도적떼 몰려와
성이 함몰되었소.
온 고을 사람들 한꺼번에 피로 물들고
시체더미 쌓인 아래 투신하여
백명, 천 명에 한 명이 살았소.
그래서 이 날이 되면 제사지내 곡하는데
아버지가 아들 위해 곡하고
자식이 아버지 위해 곡하며
할아버지가 손자 위해 곡하고
손자가 할아버지 위해 곡하며
어미가 딸을곡하고
딸이 어머니 위해 곡하며
아내가 남편을 곡하고
남편이 아내 곡하오
그래도 곡하는 사람은 슬프지 않소
칼날 아래 모두 죽어 곡할 사람도 없는 집이 얼마이리오.
1608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동악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이 쓴 글이다
[출처] 무민사,임란시 25의용 7년간 유격전 민병대를 모시다|작성자 참마음
수영사적공원
수영사적공원 민속놀이마당
수영사적공원 민속놀이마당
수영(경상좌수영)사적공원 남문유적
🟦 안용복 장군 수강사(수영사적공원)
(守疆祠 ; 영토를 지키는 데 힘쓴 분의 사당)
[ 비문 내용 ] 1967.7.
슬프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매양 숨겨진 속에 큰 인물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니 저 동래 사람 安龍福님이 바로 그 한 분이시다. 그는 본시 수영 군졸로 이조 숙종 19년 계유년 서기 1693년 여름 울릉도에 표착하여 국경을 넘어온 倭들과 싸운 끝에 강제로 끌려가 五浪島로 伯耆州로 다니면서도 끝까지 항쟁하여 일본이 울릉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江戶關伯의 서약서를 받아 쥐었으나 대마도에 이르러 도로 빼앗기고 50일 동안 구류까지 당한 뒤에 동래왜관으로 와서 또 40일 갇혔다가 동래부사에게 인도되었던 바 부사 또한 월경하였다 하여 도리어 형벌을 가하는 것이었다.
비분한 속에 2년이 지난 을해년 여름 그는 흥해인 유일부, 낙안인 김성길, 영해인 유봉석, 연안인 김순립, 평산포인 이인성, 순천승 (뇌헌, 승담, 연습, 영률, 단책) 등 열사람의 동지를 데리고 다시 울릉도를 찾아가 도적질 하는 왜선을 추격하여 伯耆州에 이르러 스스로 울릉도 수포장(세금을 징수하거나, 죄인을 체포함)이라 일컫고 대마도주의 야심과 죄상을 추궁하여 마침내 다시는 침범하지 않을 것을 서약 받은 뒤에 강원도 영양으로 돌아왔든 바 감사 심평은 도리어 그들을 묶어 서울로 올려 보냈고, 조정에서는 월경했다는 죄목으로 처형하려 했는데, 尹趾完, 南九萬 등 원로 대신의 변호로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귀양만 갔던 것이다.
여기 그의 행적을 대강 적고 다시 헤아리매 저 섬(울릉도, 독도)이 오늘 우리 판도 속에 들어 있음은 오직 그의 은공이다. 남쪽 선비들이 찬양회를 결성하고 겨레의 이름으로 울릉군을 봉한다(평민이었나 위대한 업적으로 후세인이 장군으로 추존함) 함은 진실로 느꺼운 일이다. 그를 위하여 한덩이 돌을 세움에 미쳐 내 이제 노래를 부르노니
동해 구름 밖에 한 조각 외로운 섬
아무도 내 땅이라 돌아보지 않을 적에
적굴 속 넘나들면서 저 님 혼자 애쓰던가
상이야 못 드릴 망정 형벌 귀양 어인말고
이름이 숨겨진다 공로조차 묻히리까
이제 와 울릉군 봉하오니 웃고 받으옵소서.
(노산 이은상 선생)
서기 1967년 7월 일
이은상 지음 / 오제봉 글 씀 / 안재구 시공
<독도의 사명>
이 재 익
언젠가 한번은, 벼르고 또 별러
쉰도 넘어 이제야 찾아 왔더니
저 바위 덩어리가 무엇이건대
이렇게 상기되고 긴장되는 것일까.
경어를 쓰랴 말을 놓으랴
가까이 가면 덥석 손 내밀듯 다정하고
백마 탄 용사 준수한 남아 같고
의연한 자태에 숨이 막힐 듯.
칼날 같은 정의가 저 바위에 녹았어라
자양분 없는 흙도 물보다 진해
한 움큼 파보면 붉은 피가 솟을 듯.
네 무슨 사명으로 외따로이 솟았느냐
한줌의 국토 사랑 교과서라네.
이재익 시인 / 인근 백산 정상 점이대에서. 경상좌수영에서 좌수영 일대를 지키고 보호했던 관측소
🟦 25의용상 조각작품(수영사적공원부근 도로변)
️ 수영사적공원, 25의용단 주위 도로변에
️ 수영 구청에서
️ 25의용들 각인의 특징적 모형을 만들어 8곳에 나누어 분산 배치했다.
️ 2022년 봄에 처음 세웠다.
️ 임진왜란 직후 광해군 초년에 동래부사 이안눌이 조사 기록한 <정방록>에 의한 것이라 행적은 정확하지만, 사진이 없던 시대이므로 얼굴 모습은 이 작품을 만든 작가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대단한 작품인데~ 작가 이름을 밝히지 않았네요.
배치해서 세워둔 모습들을 군락별로 구분해 본다.(2022.8.23.촬영)
🟫 제1군 3명
(수영비콘에서 동원아파트(로얄듀크)를 돌아 수영사적공원 가는 도로변 모서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조형군 )
김진옥, 김팽량, 주난금
김진옥
김팽량
주난금
🟫 제2군 7명
(동원아파트 조경정원 앞 도로변. 이곳이 가장 멋지게 배치한 것 같다 )
김옥계, 김종수, 심남, 이수, 이희복, 정인강, 최막내
김옥계
김종수
심남
이수
이희복
정인강
최막내
🟫 제3군 2명
(25 의용단 주차장 앞 도로변) / 이은춘, 최수만
이은춘
최수만
🟫 제4군 3명
(25의용단 주차장과 민속 공연장 사이 도로변, 배롱나무군락지 옆 )
박림, 이실정, 최한손
박림
이실정
최한손
🟫 제5군 2명
( 25의용단 오른쪽 도로변) / 김덕봉, 박은봉
김덕봉
박응복
🟫 제6군 3명
( 안용복 장군 사당 정문앞 왼쪽, 도로변) / 김달망, 김허농, 최한연
김달망
김허농
최한연
🟫 제7군 2명
( 안용복사당 지나서, 푸조나무 아래 도로변) / 신복, 정수원
신복
정수원
🟫 제8군 3명
(안용복 사당앞~팔도시장 방향 도로변) / 박지수, 최말량, 최송엽
박지수
최말량
최송엽
배롱나무, 맥문동꽃, 푸조나무 외
25 의용단~ 민속공연장 언덕 아래 배롱나무 군락지
지나가는 길가 업소의 백합꽃
접시꽃
수영사적공원 여기저기 맥문동꽃
강낭콩꽃
강낭콩꽃
능소화
능소화
수영사적공원 푸조나무, 여름
수영 사적공원 푸조나무, 여름
수영사적공원 푸조나무, 겨울
500년 수령
높이 18 m, 가슴높이 나무 굵기 둘레 8.5m, 가지 퍼짐 동서 23 m
🟦 경상좌수영선소유허비와 수영강변으로
2022.3.12 촬영
■ 지금 부산시 수영구의 수영이라는 지명은 옛날에 이곳이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 있었던 곳, 경상좌수영에서 '수영'이라는 지명이 남게 된 것이다.
'선소' 란 수군의 병선이 정박해 있던 곳을 말한다. 지금은 매립이 되어 그 흔적이 없어지고 아파트 도로 주택지가 돼 버렸다. 그러나 그 위치를 알려주고자 이 비가 세워진 것이다.
■ 비의 아래 부분은 선소유허비이고, 윗 부분은 수영에서 복무하던 수군 출신 문학가, 노계 박인로의 가사문학작품 <선상탄> 일부 구절을 뽑아서 새긴 것이다.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 선소 유허비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 선소 유허비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동남해역을 방어하였던 경상 좌도수군 절도사영의 군선이 정박한 선소이다.
경상좌수영 예하에는 2개의 첨절제사영(첨사영)과 1개의 동첨절제사영 및 4개의 만호영이 있었으면 거북선을 비롯한 군선 50 여척과 2만여 명의 상비병력을 거느린 거진으로 경북 영해에서 낙동강 까지의 해상을 방수한 본영이다.
이 선소에는 전선 3척, 병선 5척, 귀선 1척과 사후선 12척이 주둔하였으며 이 주위에는 적을 탐지하는 점이대(覘夷臺)와 망경대(望景臺)가 위치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선조들의 호국얼이 깃든 현장을 기리고자 통주사로서 이곳을 지킨 노계 박인로의 <선상탄, 船上嘆> 중 몇 귀절을 새겨 기념한다.
경상좌도수군 절도사영 선소 유허비
경상좌도수군 절도사영 선소 유허비
박인로의 가사문학 <선상탄>이 왜 여기 있는가?
* 박인로는 수영(경상좌수영)의 수군으로 임진왜란때 종군하였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가사이다. 전선에서 사색 창작한 가사문학으로 창작지가 부산 수영의 진중문학인 것이다.
* 이 비석을 세운이는 부산대학교 사학과 김석희 교수이며, 글씨는 부산대학교 중국어 교수였던 한형석 부산출신 독립운동가 이다. 이 비석은 수영사적공원에서 수영강변 부근으로 나가다 보면 있는 현대아파트 부근 삼거리에 있다.
박인로는 무인 출신이지만 정극인, 송순, 정철, 윤선도 등과 함께 가사문학의 대가였다.
담양 가사문학관에 박인로의 조홍감시가 눈에 확 띄었다.(아래↓)
[보충자료 사진] 노계 박인로 시조 <조홍감가> (담양 가사문학관)
이 <조홍시가>는 작자는 노계 박인로이며, 담양의 가사문학관에 걸린 것이고, 글씨는 모산 심재완 님이 쓰신 것이다.
박인로(임진왜란시 의병 참가, 군관 출신)의 조홍시가
* 영천 출신, 본관 밀양, 호는 노계 蘆溪. 가사 9편, 시조 68수 지음.
조홍시가는, 오나라 육적이 6세 때 원술 집에서 귤을 얻어 먹고 3개를 품속에 감췄다가 인사를 하느라고 흘려버렸는데, 어머니 갖다드릴려고 했다는 고사를 활용하여, 소반에 올라온 일찍 익은 감홍시를 보고, 유자가 아니지만 품어서 어버이를 드리고 싶은데, 계시지 않으니 그것이 서럽다는 내용.
* 육적의 회귤(懷橘)은 효성의 상징.
가사 <선상탄>의 내용 구성의 요지는 대강 이렇다.
삼황오제시대 훤원씨를 원망한다. 처음 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배가 없으면 무슨 수로 왜적이 쳐들어 와서 괴롭히겠는가?
다음에는 진시황제가 불로초 구하러 동남동녀 3천명을 보낸 것을 원망한다. 서불이란 자는 못구했으면 돌아갈 것이지 일본에 눌러 앉아 왜구들의 씨가 됐다는 것이다.
죽은 제갈공명도 산 중달을 쫓아냈고, 다리잘려 앉은뱅이 된 손빈도 방연을 잡았는데, 나는 몸이 성하다. 적들아 섬멸하기 전에 항복하라. 왜구들을 물리쳐서 태평성대를 이루리라.
수영에서 센텀으로 건너가는 수영교 다리 난간에 돌고래 상이 멋지다.
수영강과해운대 센텀 빌딩들
수영강과 좌측은 수영구 주택들, 우측은 해운대 센텀주택 빌딩들
광안대교 진입부분 고가교가 수영강을 진나간다.
광안대교 진입부분 고가교가 수영강을 진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