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튤립이 사라졌어요.
김 란
자동차의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내렸다. 훅, 장마 끝의 후덥지근한 열기가 몰려온다. 한여름 염천(炎天) 속에서도 국도변 가로수 아래엔 연분홍빛 접시꽃이 화사하게 피어있다.
내일이면 친정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일 년. 나는 지금 고향집에 가는 중이다. 도로변을 화사하게 수놓고 있는 접시꽃을 보자 두어 달 전에 받았던 엄마의 전화가 생각난다.
“얘, 어쩌면 좋으니… .”
막상 전화를 해놓곤 엄마는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글쎄 노인정에 갔다가 왔더니… 아이구, 이일을 어쩌면 좋으니. 니 아부지가 그토록 아끼던 튤립이 몽땅 없어졌어.”
엄마는 니 아부지가 끔찍이 아꼈는데, 하시며 연신 울먹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집을 비우는 시간을 알고 미리 장비를 갖고 와서 파간 것 같다고 했다. 하긴, 최소한 삽이라도 있어야 수십 송이의 튤립을 캐갈 수 있었을 게다. 그래도 그렇지. 남의 집 대문 앞을 파헤치고 그걸 가져가다니, 참 양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생전에 아끼고 가꾸던 꽃을 돌보며 지내는 게 유일한 낙인 엄마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어서 더욱 암담했다.
생전의 아버지께서는 꽃을 참 좋아해서 집 안팎이 온통 꽃으로 뒤덮이곤 했다. 다른 집과는 달리 대문 밖에도 작은 정원을 만들어서 오래전에 심은 주목을 에워싸고 온갖 꽃들이 계절마다 피고지곤 했다. 아버지는 그 중에서도 초여름에 피는 튤립을 몹시 아꼈다. 마당과 담을 에워싼 채 흐드러진 옥잠화와 금낭화, 그리고 원추리 등을 가끔씩 친정에서 얻어다가 내 작은 화단에 옮겨심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유난히 아끼는 튤립만은 차마 달라고 할 수 없어서 동네 화원에서 한 송이 사온 적도 있다.
튤립이 사라진 후 썰렁해진 화단
그 날 이후, 엄마는 외출하기가 겁이 난다고 했다. 어느 날은 대문을 심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낯선 이가 떡, 하니 버티고 서서 바깥 정원에 있는 연자방아를 팔라고 막무가내로 조르더라고 했다. 그 커다란 돌덩어리를 가져가려면 보통 장비로는 어림도 없을 테니 쉽게 어쩌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뜨거운 맛을 본 엄마는 걱정돼서 옴짝달싹 못하고 지냈다. 그런 엄마가 안쓰러워서 차라리 팔아버리라고 했다.
“그걸 어떻게 파니. 니 아부지가 힘들게 구해온 건데….”
평생 동안 공직 생활을 했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길가의 벚나무 가로수까지 소중히 여겼다. 아버지가 무서워서 내 어린 시절 친구들도 함부로 벚나무에 오르거나 꺾어대지 못했다. 덕분에 우리 집 주변의 벚꽃은 지금도 유난히 색이 짙고, 오랫동안 꽃이 지지 않는다.
고향집은 국립공원 입구에 있다. 지나가던 관광객들은 붉게 핀 튤립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차를 세웠다. 그들은 연자방아를 배경삼아서 사진을 찍어대곤 했다. 때로는 주인이 궁금하다며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정년퇴직 후에 달리 소일거리가 없던 아버지는 그게 자랑거리였다.
젊어서는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겼던 아버지. 게다가 후리후리한 키와 건장한 체격까지 빠지지 않았다. 내가 집을 떠나 도시에서 여고를 다닐 때였다. 점심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오던 같은 반 아이가 나를 불렀다.
“네 오빠가 찾아왔어. 지금 교장선생님하고 얘기중인데 널 불러 달래.”
오빠? 내겐 오빠가 없는데 무슨 소리지? 교장실에서 날 기다린 건 아버지였다. 병무청에 일이 있어서 출장 왔다가 딸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들렸다고 했다. 마침, 교장 선생님은 아버지의 고등학교 시절 은사이셨다. 나중에 같은 반 아이는 아버지가 너무 젊고 잘생기셔서 오빠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랬던 아버지도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머니께서 이십여 일만에 돌아가시고 나자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으로 변해버렸다. 퇴직 후 아버지는 가끔씩 엄마랑 여행을 다녀오거나 꽃을 가꾸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재작년 겨울, 아버지는 갑자기 음식을 삼킬 수가 없다고 했다. 대학병원에서는 식도암이라고 진단했다. 빨리 서울의 전문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부랴부랴 서둘러 원자력 병원에서 아홉 시간이나 걸리는 식도암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은 잘됐다. 아버지께서 퇴원하실 즈음 나는 문예지에 보냈던 소설이 당선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보내놓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투병중의 아버지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좋았다.
퇴원하신 아버지는 검사와 치료를 위해 매달 서울에 올라오셨다. 병실 창문을 통해서 눈이 녹는 걸 지켜봤고, 진달래가 피었다가 지는 걸 봤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담당 의사선생님이 불렀다.
“더 이상의 치료는 환자에게 고통만 줄 겁니다. 차라리 고향집에서 지내시면서 진통제로 견디기 힘들 때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가셨으면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다른 때처럼 치료가 끝나서 내려가시는 줄 아셨다. 며칠 후면 내 신인상 시상식이 있었지만, 걷기도 힘겨워 보이는 아버지께 차마 참석해 달라고 할 수 없었다. 한 달이 채 안돼서 아버지는 다시 대학병원에 입원하셨다. 수많은 검사와 방사선 치료, 일주일 후에 결과를 보자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내내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던 엄마와 함께 병원에서 모시고 나왔다.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고향집에서 옥수수도 쪄먹고, 텃밭의 토마토를 따기도 했다. 저녁 무렵이면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엄마랑 산책을 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단지 기운이 없다며 손을 내저으시고 집에 계셨다.
둘째의 수능 시험도 백여 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언제까지 친정집에 있을 수는 없는 일. 이틀 밤을 자고 고향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대문 밖까지 나와서 차 앞 유리를 닦아 주시며 안전운전을 당부하셨다. 내 손을 잡아주던 아버지의 눈이 너무 투명했다. 돌아오는 내내 앙상해진 체구 때문에 구부정해진 모습과, 깊이를 알 수 없이 투명하던 눈빛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고향집에서 돌아온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전화벨이 급하게 울렸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다시 울렸다. 구급차로 병원에 가시던 중 운명하셨다는…. 아버지는 그렇게 가셨다.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외사촌 동생이 전해줬다. 검사결과가 최악이었다고. 암 세포가 모든 내장에 침투하고 있었다고 했다. 차라리 더 큰 고통이 오기 전에 가신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그걸로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다.
아버지께서 가시고 일 년도 안돼서 아끼시던 튤립을 도둑맞고 내내 마음 아파하고 불안해하던 엄마는 결국 대문밖에 멋지게 버티고 있던 연자방아를 팔아버렸다. 아깝지만 그게 엄마의 정신건강에 좋을 거라고 우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연자방아가 사라지기 전 대문의 오른쪽에서 본 화단
저수지를 지나고 구불거리는 고갯길에 올라섰다. 이 고개만 내려가면 곧 고향집이다. 이제는 처음 찾아오는 사람에게 고향집을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고개를 넘어서 학교를 지나고 대문밖에 연자방아랑 튤립이 흐드러진 집. 그렇게 설명해 줄 수도 없게 되었다.
아버지가 가시고 나서 많은 것이 집을 떠났다. 타시던 자동차도, 마당에 넝쿨지던 포도나무도, 아버지께서 입원해 계신 동안은 물 한모금도 입에 넣지 않던 푸들 뽀미도, 아버지를 따라 가버렸다. 그때마다 엄마는 힘들어했다. 아버지 계실 때는 대학생 손녀를 둔 할머니로 볼 수 없을 만큼 고운 자태를 간직했던 엄마도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지고 있다. 도시로 나오시길 우리 형제들이 권했지만 아버지의 체취가 남아있고 오래된 이웃과 친구가 있는 고향이 좋다고 했던 엄마다. 이제는 튤립도 사라지고 연자방아도 없는 집에서 어떻게 지내시려는지. 차는 금세 고향집에 도착했지만 튤립과 연자방아가 보이지 않는 정원이 휑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원고지 20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