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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9장1~9절
제목 : 사울을 둘러 비추는 빛
세상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가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만남이 있습니다.
정채봉씨가 쓴 에세이집 “만남”이란 글에서
여러 가지 만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선같은 만남, 꽃과 같은 만남, 지우개 같은 만남, 손수건 같은 만남입니다.
첫째, 생선같은 만남이란 만지기만 하면 비린내가 나는 만남을 말합니다.
만나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원한을 남기게 되는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은 오래 갈수록 더욱 부패한 냄새를 풍깁니다.
둘째, 꽃과 같은 만남은 만나면 향기가 나고 좋아 어쩔 줄 모르지만
금세 시드는 만남을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습니다.
풀은 쉬 마르고 꽃은 10일을 넘지 못합니다.
꽃과 같은 사랑은 풋사랑입니다.
셋째, 지우개 같은 만남이 있습니다.
금방의 만남이 순간에 지워지는 만남입니다.
냇째, 손수건같은 만남이 있습니다.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하고,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며 언제나 함께 하는 만남을 말합니다.
부부나 목자와 성도의 만남은 손수건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간의 만남도 손수건 같은 만남이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날,
주님께서도 손수건으로 우리 눈물을 닦어주신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남에 있어 신중해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남에 따라 우리의 인생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만남
어떤 청년이 3년 전 야산을 지나다가, 그는 땅에 떨어진 대마 잎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들고 있던 신문지에 말았습니다.
그리고 불을 붙여서 한 모금 빨아봤습니다.
그 날 이후 막노동도 그만두고 그는 야생 대마초를 찾아 야산을 돌아다녔습니다. 대마 흡연량과 횟수가 점점 늘어났고,
지병인 폐결핵과 당뇨병은 점점 악화되어갔습니다.
대마를 끊겠다고 몇 차례나 결심을 했지만 언제나 허사였습니다.
자신의 무력함이 안타까웠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아파트 공터에 앉아 마지막 남은 대마를 피웠습니다.
그리고는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구속을 자청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마를 끊어야겠기에 ·····
좋은 만남이 있습니다.
창세기 46:28~47:12절에 보면 두 좋은 만남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 즉 야곱과 요셉의 상봉이요,
또하나는 야곱과 바로왕과의 상봉입니다. 둘다 축복의 만남입니다.
23년만에 부자가 상봉한 만남은 눈물의 만남이었습니다.
23년전에 그 아들이 죽은 줄 알고 슬품과 외로움 속에 살았던 아버지가
그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 왔을 뿐 아니라
대 애굽제국의 총리대신이 되었으니 그 기뿜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아들을 만나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여한이 없도록 울었을 것입니다.
서로의 유익 되는 만남이었습니다.
요셉에게는 잃어버린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이었고,
아버지 야곱은 아들을 찾았을 뿐 아니라,
자기들의 식솔들의 흉년을 해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과 비전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끝은 이런 만남이 예비 되어 있었습니다.
인연있는 만남이 있습니다.
영국의 한 시골에서 부잣집 소년이 연못에 빠져 거의 죽게 됐을 때,
가난한 집의 수영 잘 하는 소년이 그를 구해줬습니다.
그 후 둘은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잣집 소년이 그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친구, 소원을 하나만 말해 줄래? 너의 소원을 꼭 듣고 싶어!”
그러자 가난한 집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내 꿈? 내 꿈은 런던에 가서 의학(醫學)을 공부하는 거야!”
그 부잣집 소년은 친구의 소원을 자기 아버지에게 얘기했고,
마침내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런던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의사(醫師)가 됐습니다.
그가 바로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이었습니다.
그런데 페니실린을 발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플레밍은 그 부잣집 친구가 폐렴으로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들고 급히 달려가 그 친구를 간신히 살려냈습니다.
그렇게 살아난 친구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 주의 제자들을 끌고 오려는 사울(1~2절)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한 위협과 살기가 등등함 (1절)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가서”
'주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누가의 다양한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누가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표현을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2절), '제자'(10절), '성도들'(13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14절), '형제'(17절) 또는 '형제들'(30절) 등으로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이 표현은 사울의 호흡이 살기와 위협의 숨소리로 들릴 만큼 박해가 잔인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사울의 행위가 얼마나 능동적인 행위였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사울 자신은 박해 행위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과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간 것”은 기독교인에 대한 체포권을 부여받기 위함이었습니다(2절).
2) 사울이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함(2절)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여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다메섹은 예루살렘 동북쪽 약 230km정도 거리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서 삼 면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해발 671m의 고원 지대입니다.
이곳은 아브라함 때부터(창 14:15;15:2) 다윗 시대(삼하 8:6)와 솔로몬 시대에(왕상 11:24) 걸쳐 계속 언급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B.C.73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하고 B.C.64년부터 로마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다메섹에 거주했던 유대인의 수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A.D. 66년 네로 박해 때 약 10,500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는 요세푸스(Josephus)의 보고가 이를 뒷 바침합니다.
“공문을 청한”이유는 “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여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요세프스에 의하여 당시 대제사장이 이방 지역의 유대인에게까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고 합니다.
2. 사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3~6절)
1) 사울이 다메섹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춤(3절)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초자연적 개입이 일어난 것에 대한 묘사이지만 그 지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빛”에 대하여
본절에서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라고 하였으나,
22:6에서는 “큰 빛”이라고 언급되고,
26:13에서는 “해보다 더 밝았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둘러 비친 '빛'의 성격은 그빛에 대해 언급된 세 곳의 묘사를 종합해 봄으로써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하늘로부터 온 빛에 대해 강조하기 위한 의도와 함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함으로써 나타나는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없애기 위한 저자의 배려로 이해합니다(Haenchen).
아무튼 사울과 함께 다메섹으로 가던 일행들도 사울이 경험한 그 빛을 목격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2) 사울은 땅에 엎드러지고 소리를 들었씀(4절).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
갑자기 내려 비취는 빛에 의해 사울은 엎드러졌습니다.
엎드러졌는데,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애정 어린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두 번씩 불렀던 경우는 아브라함(창 22:11), 모세(출 3:4), 사무엘(삼상 3:10), 시몬(눅 22:31)을 들수 있습니다.
이는 부르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냅니다.
3) 사울이 대답하고, 예수님이 “스스로 있는자”임을 밝힘.(5절)
“[5]대답하되 주여 누구 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은 초자연적인 능력과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 대해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
본절의 헬라어 본문에는 복음서에서 예수의 자기 선언의 한 양태인
'에고 에이미'가 언급되었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언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를 70인역(LXX)이 '에고 에이미'의 문장으로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에고 에이미”를 사용하심으로써
구약에서 모세가 만난 그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기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란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선포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밝힌 반면,
예수님은 스스로의 신적권위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본절에서도 역시 예수님은 사울에게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선언하심으로써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와 동일한 언어 습관을 나타내셨습니다.
4)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행할 것을 지시하심(6절)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자신의 정체를 밝힌 예수님께서 곧이어 사울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셨던 것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1) 사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이미 예수께서 그를 자신의 제자로 지명하여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2) 사울이 예수님에 대한 어떠한 반응도 없이 일방적으로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활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암시합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종합해 보면 사울의 소명 의식이
부활한 예수님의 강권적인 능력의 부름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예수님이 이미 예정된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암시합니다.
아마 바울은 자신이 핍박하는 자들이 섬기던 예수를 만나자 놀라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던 것입니다.
3. 다메섹으로 끌려 들어간 사울(7~8절)
1)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함(7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과 함께 동행하였던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면서 그들이 시각적으로 아무것도 감지하고 있지 못함을 언급하고 있으나 22:9과 26:14에서는 각각 조금씩 달리 설명했습니다.
22:9에서는 일행이 소리는 못 들었어도 빛은 보았다고 진술하여 본절과 정반대의 상황을 나타내었습니다.
반면 26:14에서는 사울과 그 일행 모두가 엎드려졌다고 한 점으로 보아
모두가 초자연적 경험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세 가지 진술이 모두 서로 일치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된 '소리'는 음성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바울에게 명령한 음성이 예수님의 음성인지,
아니면 사울의 음성(5절)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또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 하늘로부터 온 빛을 말하는 것 인지는 분명치 않다.
이러한 의문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게 됩니다.
(1) 일행들은 '주여 누시오니이까?'라는 사울의 외침만 들었을 것입니다.
(2) 그들이 무슨 소리를 듣기는 들었으나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Bengel).
여기서 강조된 분명한 사실은 사울이 환상이라고 할 수 있는 초자연적 경험을 하였고 그 사건을 목격한 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격자들은 사울이 어떤 경험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증언할 수 없는 피상적이거나 부분적인 이해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2:9과 26:14의 기록과 본절의 기록이 지닌 차이는 모순이라기 보다는 구체적으로 초자연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사울뿐임을 강조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말을 못하고 섰더라 - 본 구절은 사울의 일행들이 무엇인가를 경험하면서도 아무 말을 못하고 있음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아마 누가는, 사울의 일행이 자신들과 사울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2) 일어나 눈은 떳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함(8절)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울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던 모습은
땅에 엎드러진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지 못했다'라는 말은 사울이 보고자 했으나 볼 수 없었던 상태, 즉 빛을 경험한 순간부터
일어서는 시점까지 보이지 않고 있는 사태를 암시합니다.
사울이 빛으로 인해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음성은 그에게 실제로 들려왔습니다.
3) 사흘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함(9절)
“[9]사흘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여기서는 강조점은 보지 못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흘 동안 식음(食飮)을 전폐한 사실입니다.
즉 사흘 동안에 걸쳐 사울에게 내면적인 어떤 큰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아마도 사울 자신이 지금까지 배웠고 자랑스럽게 고수했던 사상 체계와 자
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예수님의 음성을 연관지어 깊은 고뇌나 생각에 빠졌을 것입니다.
특히 '사흘'(엔 헤메라스 트레이스)이라는 숫자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낸 요나의 이야기(마 12:40)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예수님의 부활처럼 사건의 대전환을 예고합니다.
이와 같이 사울의 회심은 자기 자신의 엄청난 내면적 고통을 통한 결단이었습니다.
이 사흘 동안 사울은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구약적 차원에서 재해석해야 했으므로 그의 신학적 체계가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에 신중을 가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사울의 어두운 눈을 밝히려고 환한 빛으로 찾아오십니다(3절).
사울은 누구보다 율법에 해박했지만, 정작 율법이 지시하는 그리스도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어두운 생각과 완고한 마음을 단번에 깨트리시려고 친히 부활하신 자신의 육체를 보여주십니다.
성경 지식이 많고, 신앙의 열심히 있어도 부활하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다면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날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2) 성도가 박해받는 것을 자신이 박해받는 것으로 여기십니다(4,5절).
땅에 남겨두신 성도들은 십자가의 피 값으로 산,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소외되거나 손해를 감수할 때가 있습니까?
그 고난의 중심에 주님이 계시고, 수많고 지체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당당히 이겨냅시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사울은 하나님을 위한 열정으로 성도들을 박해합니다(1,2절).
옛날 광야에서 하나님과 조국을 위한 열정으로 창을 들었던 비느하스의 열심(민25:7~11)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열정을 가지고 한 일은 결국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옳다고 여기고 의심 없이 행하는 일이 혹 하나님 나라를 위협하는 일은 아닌지 세심하게 살핍시다.
2) 사울의 인생은 ‘길 위에서’전환점을 맞습니다(6~9절).
박해자의 길이 전도자이 길로 바뀝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예수를 위해 핍박받는 자가 됩니다.
전에는 모든 것을 보면서도 주님을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주님만을 봅니다.
기세 등등하게 사람들을 끌어오려 했지만, 힘없이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사울은 충격에 빠졌고, 비로소 진실을 깨달았으며,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이 나의 가치관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