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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국(金安國) 26
출생 - 사망 1478년(성종 9) ~ 1543년(중종 38) 본관 의성(義城)
자 국경(國卿), 호 모재(慕齋), 시호 문경(文敬)
성격 : 문신(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 관련사건 기묘사화
저서(작품) 모재집, 동몽선습, 모재가훈
대표관직(경력) 수교리, 예조판서, 판중추부사
참봉 연(璉)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 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지평·장령·예조참의·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하고, ≪농서언해 農書諺解≫·≪잠서언해 蠶書諺解≫·≪이륜행실도언해 二倫行實圖諺解≫·≪여씨향약언해 呂氏鄕約諺解≫·≪정속언해 正俗諺解≫ 등의 언해서와 ≪벽온방 辟瘟方≫·≪창진방 瘡疹方≫ 등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
151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水苔]와 닥[楮]을 화합시켜 태지(苔紙:가는 털과 같은 이끼를 섞어서 뜬 종이)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모재집≫·≪모재가훈 慕齋家訓≫·≪동몽선습 童蒙先習≫ 등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성리대전언해 性理大全諺解≫·≪농서언해≫·≪잠서언해≫·≪여씨향약언해≫·≪정속언해≫·≪벽온방≫·≪창진방≫ 등이 있다.
가족관계 아버지 : 김연(金連) 동생 : 김정국(金正國)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참봉 연(連)의 아들이며, 정국(正國)의 형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조광조(趙光祖) · 기준(奇遵) 등과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 · 부수찬 ·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하고, 《농서언해(農書諺解)》 · 《잠서언해(簪書諺解)》 · 《이륜행실도언해(二倫行實圖諺解)》 ·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 · 《정속언해(定俗諺解)》 등의 언해서와 《벽온방(辟瘟方)》 · 《창진방(瘡疹方)》 등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 151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 · 대사헌 · 병조판서 · 좌참찬 · 대제학 · 찬성 · 판중추부사 · 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 · 역법 · 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水苔]와 닥[楮]을 화합시켜 태지(苔紙)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하였다.
사대부 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모재집》 · 《모재가훈(慕齋家訓)》 · 《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 · 《성리대전언해(性理大全諺解)》 · 《농서언해》 · 《장서언해》 · 《여씨향약언해》 · 《정속언해》 · 《벽온방》 · 《창진방》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정속언해(正俗諺解)중종 13년(1518) 간행. 1권. 중국의 왕일암(王逸庵)의 〈정속편(正俗篇)〉을 김안국(金安國)이 번역한 것이다. 원간본(原刊本)은 전하지 않고 임진왜란 이후의 후판본만이 전하고 있는데 〈여씨향약(呂氏鄕約)〉과 같이 원문에 이두로써 토를 달고 이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국어사 연구의 자료가 된다.
우리 동방(東方)의 씨족으로 족보에 환히 드러나서 문벌(門閥)이 좋은 집안에 들 만한 숫자는 세상에 많이 보지를 못하는데, 의성(義城)을 관향으로 한 김씨(金氏)는 고려 때 사공(司空) 벼슬을 한 휘(諱) 용필(龍弼)로부터 그 이후 대대로 드러난 인물이 있었다. 휘 호지(好智)란 분은 벼슬이 함흥 소윤(咸興少尹)이고, 휘 통(統)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고, 휘 익령(益齡)은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휘 연(璉)은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으로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영월 군수(寧越郡守) 허지(許芝)의 가문에 장가들었으니, 그 사이에서 공(公)은 맏아들로 태어났다. 참판공(參判公)부터 찬성공(贊成公)에 이르기까지 추증의 은전(恩典)이 내리게 된 것은 모두 공의 귀하게 됨으로 인해서이다.
공의 휘는 안국(安國)이고 자(字)는 국경(國卿)이며 호(號)는 모재(慕齋)이니, 타고난 천성이 영리하고 뛰어나서 7세에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아 ≪소학(小學)≫의 ‘효성스럽도다. 민 자건(閔子騫)이여.’라고 한 장구(章句)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이것으로써 법을 삼을 것이다.” 하였다. 12, 3세에 곧바로 글의 대의(大義)를 관통하여 불과 세 번만 읽으면 언제나 외웠으며, 겨우 성동(成童, 15세)이 되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널리 달통하여 저술한 사부(詞賦)는 걸핏하면 사람들의 칭찬하는 바가 되었다.
17세에 연이어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몸이 여윌 정도로 너무 슬퍼하면서 아침저녁의 제전(祭奠) 설비를 반드시 몸소 맡아서 올렸으며, 삼년상을 마치자 신유년(辛酉年, 1501년 연산군 7년)에 진사시(進士試) 제1명, 생원시(生員試) 제2명에 합격하였고, 계해년(癸亥年, 1503년 연산군 9년)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저작(承文院著作)을 거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옮겨졌고, 또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에 전임되었다가 순서에 따라 부수찬(副修撰)에 승진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506년 연산군 12년)에 명(明)나라 사신 서목(徐穆)ㆍ길시(吉時) 등이 왔는데, 공이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선택 보임되었다. 이해에 중종(中宗)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으며, 이윽고 중시(重試)에 뽑히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 연산조(燕山朝) 때 상기(喪期)를 단축시키고부터 상례의 기강이 크게 허물어졌는데, 공이 맨 먼저 ‘권장하고 징계함을 밝게 드러내어서 풍속의 교화를 부식(扶植)하자’고 청하였으며,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옮겨졌다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승진하였는데, 강직하게 흔들리지 않고서 감화시키는 힘을 애써 유지하였다. 성균관(成均館)의 직강(直講)ㆍ사예(司藝)와 사도시 첨정(司寺僉正)ㆍ내자시 부정(內資寺副正)으로 옮겨졌다. 이때에 공의 계씨(季氏)로 이조(吏曹)의 낭관(郎官)이 된 자가 있었는데, 조정의 의논이 ‘국학(國學)의 교회(敎誨)가 중대한 일이라’고 계청하여 친족이란 혐의에 구애하지 않고서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옮겨 임명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511년 중종 6년)에 일본 사신인 승려(僧侶) 붕중(弸中)이 내빙(來聘)하였는데, 공을 선위사(宣慰使)에 충원하자 예의를 갖추어 대우함이 체모를 얻었으며, 또 시문(詩文)을 지어 서로 주고받은 것이 많았는데, 넉넉하고 민첩하기 한이 없자 붕중이 대단히 추앙하고 복종하여 말하기를, “상국(上國)에 알현하고 이웃 나라에 빙문(聘問)한 것이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공 같은 인물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하직 인사를 하고 돌아갈 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하기를 애틋하게 여겼었는데,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 왜사(倭使)가 내조(來朝)하게 되면 반드시 공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임신년(壬申年, 1512년 중종 7년)에는 붕중이 대마도(對馬島)의 화친을 청하기 위해 국서(國書)를 가지고 왔었는데, 공이 또 선위사가 되었다.
이때에 공이 경연관(經筵官)을 겸하고 있어 ≪역경(易經)≫을 진강(進講)하였던 터라 이 때문에 선위사를 해임하게 되자, 붕중이 간곡하게 만류하였으므로, 임금이 그대로 둘 것을 특별히 허락하였다. 계유년(癸酉年, 1513년 중종 8년)에 내자시 정(內資寺正)에 승진하였으며, 을해년(乙亥年, 1515년 중종 10년)에는 대신이 천거하여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에 임명되었는데, 한리학(漢吏學, 중국과의 외교 문서에 쓰는 용어 등의 학문)을 가르쳐 독습하는 법을 엄히 감독하여 보람을 이룸이 매우 많았다.
가을에는 발탁되어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고,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옮겨졌는데, 체직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병자년(丙子年, 1516년 중종 11년)에는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승진하였는데, 일찍이 야대(夜對)에서 아뢰기를, “벼슬길이 깨끗하지 못한 것은 바로 시험과 음직(蔭職)이 쓸데없이 범람한 데 연유하였으니, 청컨대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의하여 정월(正月)에 시험을 보이도록 하고, 또 제과(諸科)에 따라 대간(臺諫)을 보내어 시험을 참관하게 하여, 합격한 자를 방(榜)에 써서 붙인 다음 패(牌)를 주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때에 노산군(魯山君, 단종)과 연산군(燕山君)의 후사(後嗣)를 두자는 의논이 일어나서 조정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았는데, 공은 말하기를, “두 군(君)이 비록 폐출(廢黜)은 당하였으나 지친(至親) 관계를 따져 보자면 모두 선왕(先王)에 관계되는 동시에 더욱 금상(今上, 중종)께는 가깝습니다. 더구나 살았을 때는 일국(一國)을 군림하고서도 죽어서는 의탁할 데가 없어 그 외로운 혼령의 나쁜 기운이 족히 화기(和氣)를 범하여 대신(大臣)이 주상의 성대하신 마음을 받들어 순응하지를 않으니, 신(臣)은 의혹스럽습니다. 청컨대 (의안 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의 후사를 세운 전례를 상고하여 마땅함을 참작해서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당연히 효제(孝悌)를 우선으로 하여, 반드시 어릴 때부터 익히어 성덕(成德)에 이르도록 하여야 합니다. 어려서 익히는 요점은 주 문공(朱文公, 주희(朱熹))의 ≪소학(小學)≫만한 것이 없으며, 또 선조(先朝) 때에 이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지어서 백성을 가르치는 데 방향이 있게 하였습니다만,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에 대한 것은 빠졌으니, 청컨대 여기에다 충족시켜 오륜(五倫)을 만들어 아울러 중앙과 지방에 널리 반포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외어 익히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때에 중종이 송사(訟事)를 판결하는 데의 대한(大限)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인심의 후하고 야박함은 실로 교화(敎化)에 달렸으니, 백성들로 하여금 송사를 없게 함이 옳을 것입니다. 대한을 세울 것까지야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517년 중종 12년)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옮겨졌는데,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의 임기가 만료되었다고 고하자, 어찰(御札)을 내려 말하기를, “김안국이 비록 관직의 순서는 아니나 사람의 기국(器局)이 상당하기 때문에 품계를 더해 특별히 보내는 바이다.”라고 하므로, 공이 감격하여 몸 바쳐 일할 것을 생각하였다. 하직 인사를 드리기에 미쳐 다시 ‘정유(程愈)가 지은 ≪소학집설(小學集說)≫ 한 건을 본도(本道)에서 판본을 간행해 갖추도록 할 것’을 청하였으며, 부임하는 처음에 현풍현(玄風縣)에 이르러 맨 먼저 김굉필(金宏弼)의 묘소를 심방하여 몸소 강신 술을 부었는데, 풍화(風化)로 백성들을 감동시키려고 힘써 가는 곳마다 학행(學行)이 있는 자를 혹시 집을 지어 주기도 하고 혹은 선물로 음식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 효자(孝子)와 절부(節婦)를 찾아내어 모두 표창하여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를 더하는 한편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짓고 또 송(宋)나라 때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언해(諺解)하여 간행해 시골의 백성들에게 반포하였다. 공은 도내(道內)에 있는 주현(州縣)의 학교(學敎)를 찾아 반드시 성묘(聖廟, 대성전(大成殿))를 배알하였고, 또 권학시(勸學詩) 한 편(篇)씩을 각각 지어 현판에 써서 강당(講堂)에 걸게 하여 학도(學徒)들을 면려하였다. 백성 가운데 형제가 토지를 가지고 쟁송(爭訟)하는 자가 있어, 공이 직접 효제(孝悌) 친애(親愛)의 도의로 타이르자 백성이 그 간곡하고 절실함에 감복하여 마침내 문권(文券)을 찢어버리고 갔다.
무인년(戊寅年, 1518년 중종 13년)에 임기가 차기에 미치자 조정에서 불러 사은 부사(謝恩副使)에 충원하여 연경(燕京)에 갔는데, 특별히 자헌 대부(資憲大夫)의 직질을 더하여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임명하였다. 연경에서 돌아올 때는 염락 제현(溓洛諸賢)의 성리(性理)에 관한 서적을 많이 구입해 와서 인간 반포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므로 학자들이 힘입게 되었다. 이윽고 지경연 동지성균관사(知經筵同知成均館事)를 겸임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는 의정부에 들어와 우참찬(右參贊)이 되어 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겸임하였으며, 여름에는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특별히 제수되어 떠나려 할 때 편전(便殿)에 불러 만나보고는 ‘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치적(治績)의 효과가 대단히 드러났으므로 특별히 선택해서 임명하는 것뿐이다.’라고 유시하였다. 공은 명을 받들어 선정(宣政)하는 이외에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게 된 조항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비교하여 더욱 두루 미침이 더하였다. 이해 겨울에 조광조(趙光祖) 등이 귀양을 가자, 공 역시 파직되어 이천(利川)에 있는 촌장(村庄)에 물러나 살면서 조그마한 집을 따로 지어서 ‘사일(思逸)’이라는 편액을 걸어 놓고 날마다 학문을 좋아하는 제생(諸生)들과 더불어 강론하자 제자들이 점점 번성하니, 당시의 의논들이 옳지 않게 여겨 더러 견책(譴責)을 하려 하였으나 공은 듣고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여전히 강학(講學)만 하였다. 무자년(戊子年, 1528년 중종 23년) 중종이 영릉(英陵, 세종의 능)에 전알(展謁)하러 갈 때 길이 이천(利川)을 경유하므로, 공이 의복을 정제하여 입고 도로 왼편에 엎드려 어가(御駕)가 지나가도록 기다렸었다.
공이 일찍이 여주(驪州) 천녕(川寧) 물가에 나아가 터를 잡아 조그마한 집을 지어 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사를 하여 그 곁에 초정(草亭)을 만들어 놓고 멀리 산꼭대기에 올라가 의지하여 푸른 들판을 내려다보매 넓디넓은 뗏목을 타고 떠 있는 것 같았으므로 정자를 ‘범사정(泛槎亭)’이라 명명하고, 또 옛 현인(賢人)들이 풍취(風趣)를 붙였던 물체를 취하여 여덟 가지 제영(題詠)을 삼아 그 당(堂)에 이름을 ‘팔이당(八怡堂)’이라 정해 놓고, 고을 사람이 술을 싣고 오는 자가 있으면 귀하고 천하거나 젊고 늙거나를 가릴 것 없이 번번이 그들과 더불어 실컷 마셨으며, 아침저녁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서 거닐며 시(詩)를 읊고 먼데를 바라보곤 하였는데, 앞으로 이렇게 수명을 마칠 것처럼 지낸 지가 19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생각은 일찍이 조금도 쇠퇴하지를 않았다.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년)에 권흉(權兇)이 모두 죄과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되자, 공을 기용하여 상호군 겸 동지성균관사(上護軍兼同知成均館事)로 삼았는데, 이듬해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 33년)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로 옮겼으며, 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오르고 가을에는 다시 우참찬 겸 예문관 제학(右參贊兼藝文館提學)에 임명되었는데, 이어서 좌참찬(左參贊)에 승진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539년 중종 34년)에 명(明)나라 사신 화찰(華察)ㆍ설정총(薛廷寵) 등이 와서 태자(太子)를 세웠다는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는데, 공이 관반(館伴, 외국 사신을 영접하는 관직)의 명을 받고 정성을 다해 응접하면서 예의 또한 어그러짐이 없었으며, 시를 지어 서로 증답(贈答)한 편장(篇章)이 두루마리에 가득 찼으므로, 명나라 사신이 그 바르고 아담한 데 감복하였다. 여름에 체직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가 곧바로 좌참찬으로 임명하였다.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모시고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 선비를 뽑는 데 있어 반드시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강독하므로, 힘을 씀이 나누어져 공을 거둠이 얕습니다. 만일 주자(朱子)의 의논에 의하여 매 식년(式年, 간지(干支)로 자(子)ㆍ오(午) ㆍ묘(卯)ㆍ유(酉)가 드는 해)마다 번갈아서 한 경(經)씩 시험 보인다면 지금 중국에서 경학(經學)만 전공하는 제도에 비교하여 더욱 상세하게 갖추어질 것이니, 청컨대 시험삼아 실행해보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해 겨울에 숭정 대부(崇政大夫)의 품계에 특별히 올려 판중추부사 겸 세자 좌빈객(判中樞府事兼世子左賓客)으로 옮겼으며,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고 드디어 좌찬성 겸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세자 이사(左贊成兼弘文館藝文館大提學世子貳師)에 승진하였다. 이에 앞서 중국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을 지제교(知製敎)와 문관(文官)에게 나누어 맡겨서 짓게 하여 가져다가 대제학이 재정(裁定)한 다음에 초고(草稿)를 바로잡아 임금께 아뢰어서 가하다고 하여야만 사용하였는데, 공이 수임(受任)하기에 미쳐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어렵게 여겼다.
신축년(辛丑年, 1541년 중종 36년) 여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옮겨졌다가 가을에 해임하여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제수하였으며, 겨울에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공이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기 때문에 세자 이사(世子貳師)를 겸대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다가 오래지 않아서 곧 체차(遞差)시켰는데, 동궁(東宮)의 상청(上請)으로 인하여 공에게 다시 서연(書筵)에 시강(侍講)할 것을 명하자, 공이 사양하기를, “지난번에 외람되이 세자 이사에 임명되어 이미 강계(降階)의 예의를 받았었거늘, 지금에 이미 해임되었으면서 어찌 감히 이를 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명하여 마땅히 그 예의를 간략히 하라고 하자, 공이 다시 사양하기를, “세자께서 일찍 이사(貳師)로써 신을 대우하였는데, 지금 만일 생략하는 예의로 대우하게 되면 이는 앞뒤로 다름이 있게 되어, 세자께서 스승을 대우하는 예의에 관계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이 간곡히 사양하기 때문에 예의를 간략히 할까 생각하였었는데, 경의 말이 과연 옳도다. 이사(貳師)의 예의에 의하여 행하도록 하라.” 하므로, 공이 굳이 사양하여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해 겨울에 병으로 인하여 사직(辭職)하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 진문(診問)하고 다시 내의원(內醫院)에서 조제한 약을 내렸으며, 동궁에서도 사자를 보내 문병하였다. 체차하여 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가 이윽고 판중추부사로 올렸다. 공이 젊어서부터 직무에 관한 일을 힘써 다하느라 피로가 쌓이어 초췌(憔悴)해졌는데, 이때에 이르러 한 달이 넘도록 휴가를 얻어 있었으며, 마침내 병이 낫지 않고 오래도록 끌었다. 이때 마침 명(明)나라 황제의 궁액(宮掖)이 변란을 꾸몄다가 곧 안정된 때를 당하여 우리나라에서 진하(進賀)하는 표전(表箋)을 닦아야 할 제, 대신이 공의 병환이 위중하다고 하여 제학(提學)을 시켜 대신 초안하여 탈고(脫稿)케 하자, 공이 듣고서 말하기를, “이는 나의 직분인데, 어찌 병석에 있다고 하여 타인의 손에 맡길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병을 참고 견디며 지어서 올렸는데, 이로부터 병세가 더 위독하게 되어 계묘년(癸卯年, 1543년 중종 38년) 정월에 이르러 이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판서(判書) 허자(許磁)와 참판(參判) 윤개(尹漑)가 일찍이 공의 문하(門下)에 있으면서 알아줌을 제일 많이 받았었는데, 나아가 문병(問病)하자, 공이 매우 괴로워하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나랏일, 나랏일’ 하며 말하였다. 이날에 임금께서도 공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서 승지(承旨)를 보내 문병하려 하였으나 승정원에서 ‘아무런 탈이 없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김안국이 비록 삼공(三公)은 아니었으나 나랏일에 심력(心力)을 다 바쳤도다.” 하고,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문병하게 하여 공의 집에 도착하자, 공이 일어나서 대답하지를 못하고 다만 ‘임금의 은혜가 지중(至重)하다’고만 일컫더니, 말을 마치고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매우 애도(哀悼)하여 2일 동안 조정의 정무(政務)를 중지하고 부증(賻贈)을 보통보다 더하였으며, 동궁도 대단히 애통해 하여 치제(致祭)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저녁에 온 조정에서 달려와 통곡하며 입관(入棺)과 염습(殮襲)을 직접 보지 않는 이가 없었고, 일찍이 공에게 수업(受業)한 선비들이 현요직(顯要職)에 많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모두 변복(變服)하여 자제들의 일을 집행하며 감히 뒤지는 자가 없었으므로, 원근(遠近) 지방에서 듣는 사람들이 모두 사문(斯文, 유도(儒道))을 위해 대단히 애석해 하였으며, 태학(太學, 성균관)의 유생들 역시 조제(弔祭)를 닦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의 타고난 품성이 이미 두터운데다가 보충해서 수양한 것이 또한 돈독하여 굳세고 과감한 마음을 속에 지녔으면서 화락하고 온순한 빛을 밖으로 나타내며, 선(善)한 자는 도와서 일으키고 악(惡)한 자는 마음에 괴롭게 여겨 반드시 나아가서 교도(敎導)하여 스스로 처신할 것을 알도록 하였으므로,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벼슬에 임하여 일을 처결할 때는 지극한 정성을 다 바쳐 반드시 조그마한 것도 조심스럽게 하였으므로, 신의(信義)의 믿음성이 있어 나쁜 풍속도 다 변화하였다. 공은 15, 6세 때부터 문득 학문(學問)의 방향을 알았는데, 김굉필(金宏弼)의 학문 강론하는 것을 듣게 되자 개연히 구도(求道)의 뜻을 두어 그 깊은 경지에 이른 바가 모두 정자(程子)ㆍ주자(朱子)로써 표준을 삼았기 때문에, 공부하고 몸가짐에 있어 고원(高遠)한 곳으로 달리지 않고 항상 날마다의 생활하는 그 사이에 잘하였으며, 직분을 맡은 곳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자세하게 다 알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혹시 그의 번쇄(煩碎)함을 비난하면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이란 거칠기도 하고 세밀하기도 하여 성우(聖愚)의 나누어짐이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인데, 어찌 바깥으로는 세밀한 체하고 속으로는 거칠면서 저절로 일에 통달할 수 있겠는가?
옛사람은 하루의 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하늘에 고하고, 또한 그날에 국사(國事)를 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저녁밥을 폐한 자도 있었는데, 내가 어찌 번쇄한 짓을 구차히 회피하여 직분의 맡은 일을 거행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로써 일이 폐추(廢墜)된 데 속한 것은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를 물을 것 없이 그 원본(原本)을 깊이 캐내어 지엽적인 일에 도달하게 하되, 옛 법에 거리끼지 않고 반드시 시대에 적합하도록 하였으며, 조종(祖宗) 때의 좋은 법과 훌륭한 뜻이나 중국 조정의 제도와 문물(文物) 가운데 대저 미루어 행해야 할 것은 일일이 열거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부지런히 힘쓰고 피곤함을 잊었으며, 오랫동안 제조(諸曹)와 대성(臺省)의 장관으로 있을 때는 상주(上奏)하는 공문서를 이식(吏式)에 구애하지 않고 사정을 상세히 알기에 힘썼으므로, 날카로운 말이 환히 빛나서 모두 법을 외었을 정도였다.
공이 일찍이 경악(經幄)과 서연(書筵)에서 시강(侍講)할 때는 깨우쳐 인도하는 말을 반드시 성리학(性理學)을 위주로 하면서 간결하고 유순하게 끝까지 관철시켰으므로, 임금이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였으며, 좌우에서도 모두 귀를 쫑긋하여 들었다. 공은 모든 서적(書籍)에 통달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며, 더욱이 역수(易數)에 깊이 들어가 심오한 이치를 탐색하고 변석(辨析)하여 극도에 다다르지 않음이 없었으며, 천문(天文)ㆍ지리(地理)의 여러 서적을 두루 탐구하여 널리 관통하고 막힘이 없었으므로, 공의 학술(學術)에 대해 차례로 변론한다면 빈틈없이 상세히 갖추기는 육 경여(陸敬輿, 당 덕종(唐德宗) 때의 육지(陸贄))와 같았고 순수하게 간략하기는 여 회숙(呂晦叔, 송 신종(宋神宗) 때의 여공저(呂公著))과 같았으며, 뛰어나게 오묘하기는 채 계통(蔡季通, 송 이종(宋理宗) 때의 채원정(蔡元定))과 같았다.
공은 일찍 부모를 여의어 일생을 마치도록 애모(哀慕)하여 출입할 때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 초하루 보름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냈으며, 사당[祠宇]곁에다 조그마한 집을 설치해 놓고서 공이 항상 한가히 거처하였는데, 대저 일상 생활할 때나 음식을 대하였을 때면 반드시 애모함을 의탁하였으므로, 호(號)를 ‘모재(慕齋)’라 하였다. 또 우애가 돈독하여 누이동생들의 생활이 궁핍한 자는 매양 녹봉(祿俸)으로 받은 쌀을 나누어주었으며, 항상 ‘겸공(謙恭)’ 두 글자를 거론하여 자제(子弟)들에게 힘쓰게 하기를, “이것이야말로 군자(君子)의 성대한 덕행(德行)일 것이니, 너희들은 깊이 마음속에 지니어 몸에서 떠나지 않도록 함이 옳을 것이다. 내 평생에 일찍이 오만하고 나태함을 남에게 미치지 않았고 또한 일찍이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은 평상시 거처할 때에 반드시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서 토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항상 탄식하기를, “우리 동방(東方)의 땅덩이는 협소하여 사람들의 타고난 기질이 두텁지 못하고, 또 성리학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덕(成德)한 자가 있음이 드물다.”고 하였다.
공은 자신을 건사하기를 검약(儉約)하게 하면서도 심지어 친구들이 사망한 상사(喪事)에까지도 물품을 주어 도와줌이 갖추 지극하였는데, 공은 일찍이 춘조(春曹, 예조(禮曹))에 있을 때 ‘사방의 유생(儒生)들이 서울에 와서 유학하느라 있던 자가 사망하게 되면 궁색하여 고향으로 반구(返柩)할 수 없는 것’을 가엾이 여기어 계청(啓請)하여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여러 곳을 차례로 거쳐 그 널을 보내어 그들의 고향에 도달하도록 하였다. 공은 일찍부터 현달(顯達)하기에 이르기까지 항상 승문원(承文院)의 직함을 겸하여 띠고서 중국에 보내는 문서의 사무를 오로지 맡았으므로, 조정에서 의지하였다. 공은 늘 말하기를,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수신전(守信田)이 있는 것은 바로 조관(朝官)의 과수된 아내에게 내리는 늠급(廩給)을 갖추어 빈궁하여 주리지 않도록 한 것인데, 대전(大典)을 고쳐 지어서 취하여 직전(職田)을 삼은 것은 매우 조종(祖宗) 때의 충실하고 순수한 뜻을 잃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옛날에 사마공(司馬公)이 스스로 말하기를, ‘평생에 하였던 바가 일찍이 사람을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않다.’고 한 것을 사가(史家) 역시 말하였는데, 공은 병이 위독하여 꿈속처럼 상세하게 말한 것이 모두 조정과 천하(天下)에 관계된 일이었으니, 공은 자신을 닦아 조심하고 성실하여 언제나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었으며, 병들어 말을 못하면서도 오히려 국사(國事)를 잊지 아니하고 남에게 부탁하였으니, 그가 행한 것을 공정하게 고찰해 보건대 거의 옛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공은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무술년(戊戌年, 1478년 성종 9년) 8월 초6일에 태어나서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계묘년(癸卯年, 1543년 중종 38년) 정월 초4일에 운명하였으니, 춘추가 66세이다. 이해 3월 29일에 장단(長湍) 해촌리(海村里) 축좌 미향(丑坐未向)의 묘터에 예식을 갖추어서 장사지냈는데, 생전(生前)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諡號)를 문경(文敬)이라 내리고, 인종(仁宗)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는데, 국조(國朝)에서 문경이란 시호를 얻고 직위가 삼사(三事, 의정부의 삼공(三公))에 이르지 않았으면서 종묘(宗廟)에 배식(配食)하게 된 이는 몇 사람이 안 된다. 공의 부인 이씨(李氏)는 종실(宗室) 송림군(松林君) 휘 효창(孝昌)의 따님으로, 어질고 덕(德)을 짝하여 집안을 법도 있게 바루고 아들을 방향이 있도록 가르쳤으며, 성품이 검소함을 숭상하여 혼란하게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공의 가법(家法)이 세상의 모범이 되었던 것은 부인의 내조(內助)가 상당히 차지하였다. 갑인년(甲寅年, 1554년 명종 9년) 12월 초9일에 세상을 떠나니, 수(壽) 79세이며, 을묘년(乙卯年, 1555년 명종 10년) 2월 27일에 공의 무덤에 합장하니, 또한 예장(禮葬)이었다. 대저 3남 1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김유부(金有孚)로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이고, 다음은 김여부(金汝孚)로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년)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 되어 한창 문행(文行)으로 드러났으며, 다음은 김재부(金在孚)로 활인서 별좌(活人署別坐)이다. 딸은 충의위(忠義衛) 강복(姜復)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 소생의 아들은 김연부(金衍孚)로 관상감 참봉(觀象監參奉)이다. 전설사 별좌는 처음에 판결사(判決事) 한숙창(韓叔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김요명(金堯命)ㆍ김요선(金堯選)을 낳았고, 뒤에 통례(通禮) 이건(李楗)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나 자녀(子女)가 없다. 의정부 사인은 진사(進士) 구원(具元)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요서(金堯敍)이고 딸은 충의위 이담년(李聃年)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활인서 별좌는 찰방(察訪) 성계례(成繼禮)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요석(金堯錫)이고 딸은 어리다. 충의위 강복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강극성(姜克誠)으로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이고, 딸은 별좌(別坐) 허강(許橿)에게 출가하였다.
내가 공에게 사우(師友)의 의리를 겸하여 직접 가까이서 가르침을 받아서 보고 기록한 것이 익숙지 않은 것이 없으나, 문장을 짓는 생각이 쇠잔하고 퇴락하여 조금도 천양하지를 못하고 다만 공의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대략 행적(行蹟)을 서술하여 문사(文辭)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선비는 학문을 힘씀에 귀하고 학문은 근본을 아는 것이 귀한데, 몸에 선비의 복장을 하고서도 실로 충용(充容)하지 않도다. 이것을 유자(儒者)의 병통이라 이르나니 늙어서도 분란(紛亂)하여 고치기 어려워서, 눈 흐릿하게 백세(百歲) 동안 이득과 녹봉(祿俸)만을 편안히 여기네. 공은 세상에 드문 기질로 태어나서 일찍이 석유(碩儒)를 찾아뵙고, 강론을 들어봄에 헤매지 않는 정도(正塗)였는데, 나의 몰아 달림이 빨라 길이 먼데도 오히려 가까워져, 예상치 않게 갑자기 이르러 나에게는 들림이 있지 않았네. 홍문관[玉堂]에 들어가서는 임금의 실덕(失德)을 도우려 했고, 대성(臺省)에서의 감화시킨 힘은 강직하여도 알소(訐訴)에 훼상하지 않았도다.
문득 자신의 힘 다할 것만 생각하여 사심(私心) 없이 보좌하였는데, 내직(內職)에 임명되고 외방의 기용에서 어느 것 잘 상량함이 아니었으리? 오직 마음을 옛 것에 두어 번번이 금세(今世)와 엇갈렸으니, 위배됨을 따르는 즈음에 뉘 능히 그 뒤를 이었겠는가? 비록 소신을 크게 베풀지는 못했으나 과반(過半)은 되는 듯 생각되는데, 말년에 폐출(廢黜)에서 기용되어 기대가 조찬(調贊)에 촉망되었네. 구경(九卿)의 직질에 머물러 있으면서 거의 바로잡아 개혁을 마쳤는데, 삼공(三公)의 자리까지 도달 못했으니 벼슬길 어찌 액운(厄運)이 아니리요? 배웠던 바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족히 그 지녔던 것 쓰여졌다 하겠으나, 예부터 이러한 것을 천운(天運)이 사람과 틀림이었네. 높다랗게 큰 비석에 사적 기록하여 매우 드러냈으니, 지나는 자 필히 경의(敬意)를 표할 것일세. 이곳이 문경공(文敬公)의 무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