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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밥상
이 홍사
온 식구가 함께 밥상머리에 둘러 앉아 밥을 먹어본 게 언제더라?
그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지극히 평범하면서 단란한 광경을 떠올리며 커피로 목을 축인다.
커피는 식어있다. 책상 모서리에 있는, 물이 식은 커피포터의 단추를 다시 누른다. 여기 와서는 물 대신 커피를 상용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입이 심심하면 저절로 커피 잔으로 손이 간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먹는 물이지만 수질을 믿을 수가 없고 물통 꼬락서니를 보니 그냥 마시기가 꺼림칙해서 커피포터에 끓여먹다가 그것조차도 가사 도우미 처녀들의 눈치가 보여 커피를 조금 타서 마신다.
-우린 그냥 마시는데 저는 뭐 특별한 인간이라고?
눈총은 주지 않았지만 내가 너무 민감해서인지 그런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커피를 조금 넣어보았는데 물 보다 낫다. 커피를 조금 넣고 아주 묽게 블랙으로 타서 물 대신 목을 축이면 입에 커피향이 돌면서 갈증을 없어진다. 그게 버릇이 되어 아예 커피포터를 책상 옆에 설치해 놓고 내 전용 머그잔에는 늘 마시던 커피가 들어 있다. 그렇다고 많이 마시는 건 아니다. 마시는 게 아니고 심심하면 입만 축이는 정도인데 그게 하루에 열 잔을 넘어선다. 종일 숙소 겸 사무실 머무는 날만 그렇다는 얘기다. 가사 도우미 처녀들이 지나가면서 일삼아 커피포터에 물이 있는지 수시로 확인한다.
각설하고, 식구들이 단란하게 둘러 앉아 밥을 먹는 그 일상적인 모습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자신이 지니지 못한 사소한 것에서 부러움을 나타내는 욕망의 결정체라고 했으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이긴 한 모양이다. 이역만리 타국, 가족과 떨어져 있으니 그 사소한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이 절실하다. 왜 그런 엉뚱한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되었을까? 지금 내가 외로운가? 눈을 지그시 감고 정체성에 대해 짚어보지만 잘 모르겠다.
3월이지만 날씨는 어지간히 덥다.
에어컨 온도를 더 낮추어보지만 리모컨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설정 온도가 가장 낮은 것인 모양이다. 근 스무 평이 넘는 사무실에 벽걸이 작은 에어컨을 달아놓았으니 이 정도 온도로 호강이라고 생각해야지. 이마에 땀이 찐득하게 배어나온다.
이제부터 이 나라, 미얀마는 여름 시작이란다.
지금도 하루에 두어 번 샤워를 하는데 여름이 시작되면 어떻게 견딜지 모르겠다. 그건 여기 있는 사람들 사정이고 다음 주에는 한국으로 들어간다. 두어 달 있다가 나오면 짓고 있는 건물도 성큼 올라갈 것이고 몬순기후의 우기가 시작 될 것이다. 우기 전에 기초공사만 후딱 마치면 위로 올라가는 공정이나 실내 공사는 날씨와 관계없이 진행될 것이다.
미얀마는 삼 월과 사 월이 가장 덥다.
오 월말이면 ‘모아카’라고 불리는 우기로 들어서서 하루에 한두 번 정도 비가 오기에 후덥지근하지, 견디기 힘들게 덥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미얀마의 ‘모아카’는 시 월까지 대여섯 달 지속된다. 우리나라 장마철로 보면 된다. 매일 비가 오는 게 아니지만 더러는 날씨로 인하여 우울증 증세가 온다고 한다. 하지만 그 우기가 없다면 여기서 더위에 견디지 못하리라. 그런 걸 보면 조물주는 참 공평하게 세상의 절기를 배치했다는 생각이 든다.
미얀마 달력은 사 월에 새해로 들어선다. 그 기간에 새해를 맞이하는 ‘띤잔’ 이라는 물 축제를 한다. 미얀마 달력에는 열흘 이상 빨간 날인데 그 기간이 되면 조용한 국민성을 가진 미얀마 사람들이 열광을 넘어서 그야말로 발광을 한다.
나는 한 번도 그 띤잔을 여기서 맞아보지 않았다. 그 기간을 피해 한국으로 들어가서 일을 했다. 오직 다큐멘터리로 영상제작된 걸 여러 번 보았고 여기서 띤잔을 맞은 사람들에게 들었을 뿐이다. 물벼락을 덮어씌우고, 물벼락을 즐기며 맞고, 너무 열광하기에 해마다 안전사고로 여럿이 죽는,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축제다. 죽건 말건 그건 이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 사정이고 다음 주에 들어가면 온 식구가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평온한 가족의 일상’을 연출할 수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오늘 아침에 받은 문자에는 아내가 내일부터 오 일간 중국의 장가계와 원가계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옛날 주공아파트에 살던 이웃끼리 모은 계다. 명색만 상조계지 순전히 여행을 하기 위한 모임으로 보인다. 아줌마들 여섯 명이서 사박오일을 다녀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장가계!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아내는 벌써 여러 번인 것 같아 토를 달았다.
-가 본 곳에 왜 자꾸 가냐고?
짜증이 섞인 문자를 보내자 장가계는 한 번 가보았지만 원가계는 처음이라고 했다. 말릴 방법이 없다. 벌써 몇 달 전에 세운 계획일 터인데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마지못해 잘 다녀오라고 문자를 보내며 내가 귀국하기 전에 들어오느냐고 물었다. 그 안에는 들어온다고, 걱정 말라고 못을 박았다.
아내가 없는 동안에는 곧 교환학생으로 베이징에 나갈 준이 녀석이 애완견 순자를 돌보며 밥이 하기 싫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것이다. 안 봐도 선하다.
아내의 문자를 보며 식구들이 모여 밥 한번 같이 먹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 절실하지만 이 기분을 문자로 날릴 수가 없었다. 혼자서 밥 먹는 행위가 싫다. 혼자서 차려주는 밥을 먹는 게 고역으로 여겨져 밥을 차려주는 로컬 가사도우미 처녀들과 같이 먹자고 하면 그녀들은 기겁하며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는 반응을 보인다.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 그런 관계에서 엄격하게 생각하는 나라다.
가사도우미들은 절대 우리랑 같이 밥을 먹는 법이 없다. 우리가 다 먹고 난 다음에 주방에서 저희들끼리 먹는다. 그래도 한국인이 사는 집을 가정부들이 선호한다. 이유는 그 만큼 자유가 있고 인격적으로 대해 주기 때문이란다. 미얀마 부자들 집의 가정부는 신분에 엄격하게 차이를 두고 조선시대 몸종 부리듯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직접 보지는 못해서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곳에 있으면 끼니마다 진수성찬이다. 일주일치 식재료비를 주고나면 끼니마다 메뉴가 바뀐다. 두 명의 처녀가 두 시간 준비한 음식을 혼자서 먹어야하니 보통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하지만 아내는 대충 때우는 것을 좋아한다. 아침에 먹다 남은 반찬이 저녁밥상에 그대로 올라오는 게 보통이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전혀 아니다. 한국에서 내가 십 분간 먹을 음식은 아내가 오 분간 준비하는데 반해 여기선 내가 십 분간 먹을 끼니를 두 처녀가 두 시간 준비하니 진수성찬이 될 수밖에.
혼자서 밥상을 받기가 무안해서 인사치레로 ‘아뚜뚜 싸매!’ (같이 먹자)고 말을 하면 처녀들은 기겁을 한다. 설령 같이 먹는다고 해도 보기에 엄청 불편할 것이다. 그녀들은 손으로 밥을 먹기 때문이다. 밥을 비빌 적에는 숟가락으로 비벼놓고 정작 먹을 때는 손으로 먹는다. 희한한 식성이다. 엄지와 검지, 중지를 이용하여 세 손가락으로 밥을 꼭 꼭 눌러서 덩어리를 만들어 인절미 먹듯이 손으로 먹는다. 미얀마 쌀은 찰기가 없어서 젓가락으로 먹기가 힘들다. 밥이 푸석푸석해서 젓가락으로는 집어지지 않고 흘러내린다. 내가 먹는 쌀은 미얀마 쌀에 찹쌀을 조금 넣어 밥을 따로 짓는다. 그래야 젓가락으로도 먹을 수가 있을 정도가 된다. 하지만 미얀마 사람들은 그렇게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고 가사 도우미 처녀들은 저희들이 먹을 밥을 따로 짓는다. 한 집에 산다고 한솥밥을 먹는 게 아니다.
일을 보러 나갔다가 시간이 어중간해서 어쩌다 로칼 식당에서 먹을 경우에는 젓가락은 반찬만 집지 절대로 우리나라처럼 밥에 젓가락을 사용할 수가 없다. 아예 ‘뚜’라고 불리는 젓가락을 준비해주지 않는 식당이 더 많다. 밥은 찰기가 없이 푸석푸석해서 비벼도, 말아도 젓가락으로는 집어지지 않는다. 밥과 국물은 숟가락으로 먹고 젓가락은 반찬을 집는데 사용한다고 해도 어떤 날은 젓가락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미얀마 사람들이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느냐 하면 그게 아니다. 길거리에서 흔히 파는 ‘모힝가’라는 쌀국수를 먹을 적에는 젓가락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손으로 밥을 먹는 모습을 보려면 점심시간쯤에 재래시장을 가면 흔히 볼 수가 있다. 좌판을 벌여놓은 상인들이 도시락으로 싸온 점심을 먹을 때면 모두가 손가락으로 밥알을 뭉쳐서 입으로 가져간다. 헌데 이상한 것은 절대로 지저분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젠가 휴대폰 선불카드를 사기 위해 휴대폰 가게에 들렀다가 가게의 점원으로 있는 어여쁜 아가씨 둘이서 손으로 도시락의 밥을 먹다가 카드를 내어준 적도 있는데 지저분하기는커녕 손으로 밥 먹는 행위가 자연스럽고 거룩해 보이기까지 했다. 밥알이 묻은 손을 식탁 옆에 있는 손수건으로 정갈하게 닦고 카드를 내어주고 계산하고 다시 손수건으로 손가락을 닦고 밥을 먹는 모습이 지극히 자연친화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먹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아무 거리낌이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걸 보고 나도 손으로 밥을 먹어 보고 싶은 충동이 불쑥 일었다.
어쩌다 밥 이야기가 길어 미얀마 사람들 식사 문화까지 들먹이게 되었다. 지금 내가 절실한 것은 식구 모두 둘러앉아 밥을 먹는 단란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업을 하고 있기에 한 달은 미얀마 한 달 정도는 한국에서 일을 한다. 하지만 이번에 들어가면 띤잔이라는 물 축제가 끝날 때까지 한국에서 일을 하다 나올 것이다. 미얀마에 일을 벌인 지가 이제 일 년이 넘었다. 이번 출장은 투자 기간이라 좀 오래 머물렀다. 그 전에는 몽골리아, 울란바트로에서 칠 년 정도 아르바이트 삼아서 투자를 했다. 물론 한국에서도 하고, 그 때도 한 달은 한국, 한 달은 몽골을 오가며 일을 했다.
예전과 달라 현재 한국의 건설 경기에 목을 매고 있기에는 너무 처량할 정도다. 지난 정부는 사대 강 사업을 하며 전국토를 거대한 공사판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번 정부는 복지에만 신경을 쓰지 건설은 버린 자식이다. 부도가 났다하면 건설사다. 나라꼴이 그 지경이니 중기 임대업자인 나도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하던 중기를 처분하고 보유수를 줄여 바짝 엎드려야 했다. 엎드려서 궁리한 것이 해외사업을 한 번만 더 해보는 것이었다. 미얀마는 마지막 남은 기회의 땅이라 들었고 나에게도 마지막 해외 사업이 될 것이라 다짐하고 이 땅으로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몽골에서는 중기 임대업을 했었고 이곳에서는 중산층에 초점을 맞추어 중저가 연립주택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소형 아파트를 짓고 있다. 땅을 사고 건축비가 들어가고 연일 계약이고 미팅이다.
오 년을 생각하고 투자를 하는 것인데 생각보다 진척이 느려 더 걸릴 지도 모르겠다. 미얀마는 23년간 군부독재를 하며 외부와 경제를 단절한 채 살아서 세계의 최빈국이라 불리고 있지만 3년 전 현 대통령이 들어와 경제를 개방정책을 쓰면서부터 외국인 투자가 물밀 듯이 밀려들어와 지금은 용이 꿈틀거리는 형상이라고 보면 된다. 일 년 전 인천공항에서 뜨는 직항도 생겼다. 처음에는 비행기가 한산했으나 지금은 건기라 밀려오는 관광객과 성지순례를 오는 불교신도들, 시장조사를 오는 사람으로 늦게 예약하면 자리가 없을 정도다. 양곤 시내의 자동차도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고 일 년 전에 내가 현지의 휴대폰을 구입할 적에는 휴대폰 번호를 사는데 로칼 공무원 한 달 월급이 들어갔지만 지금은 이동 통신사가 두어 개 더 생겨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휴대폰 매장에 가면 중국제 휴대폰은 이만 짯대부터 있다. 번호는 이천 짯을 주고 고르면 된다. 우리나라와 같이 통신요금이 후불제가 아니라 선불카드를 사서 넣기 때문에 천 짯짜리를 사서 넣고 받는 전화만 받는다면 서너 달 들고 다녀도 무방한 나라다. 참고로 한국과 미얀마 환율은 거의 비슷하다. 단지 인건비가 한국의 십분의 일 수준이다.
인구가 통계상으로 정확히 조사되지는 않았지만 인구수로는 한국을 웃돈다. 무엇보다 그게 매력적이다. 몽골은 인구가 겨우 삼백만이라 한국 개미 투자자들이 눈독을 들이고 투자가 시작되자 거의 오 년에 걸쳐 모든 잔치가 끝났다. 지금까지 몽골에 남아서 업을 하는 사람들 소문을 들으니 모두가 죽을 지경이란다. 달러가 갑자기 곱절 뛰었다는 게다. 그 말을 정확하게 풀이하면 몽골 돈은 값어치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거기서 조금 벌어봐야 말짱 헛일이다. 하지만 나는 정확한 시기에 투자를 했고 업을 하다가 달러가 치솟기 직전에 손을 털었다. 그게 시장조사까지 칠 년이 걸렸다. 좀 그러나 미얀마는 짚불이 아니라 장작불처럼 좀 오래갈 것이다.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신생국가로 탄생된 몽골보다 더 후진국이고 인구가 많은 까닭이다. 자꾸 두 나라만을 비교해서 안됐지만 내가 속사정을 아는 나라는 두 나라뿐이고 두 나라에서 백 프로 외국인 투자자로 등록했기에 두 나라를 내 입장에서 비교하는 것인즉, 몽골은 식량이 순전히 수입에 의존하지만 미얀마는 자급자족이 되면서 수출품목 맨 앞자리가 농산물이다. 쌀은 일 년에 삼모작을 한다. 우리가 투자하는 것은 농산물을 토대 위에 올라앉을 문화 인프라다. 투자자로서는 무엇을 보아도 구미가 당기는 나라다. 단지 아직까지 군부독재 체제라 법이 수시로 바뀌기에 그 법을 잘 익히고 활용하면 숟가락을 쥐는데 이상이 없을 것이다. 몽골과는 완전히 달라 지핀 불이 짚불처럼 후루룩 금세 타지는 않을 것이다. 일의 진척이 느려 짜증이 나지만 오래 타는 장작에 불을 지피고 있다고 생각하면 속이 편하다. 어쩌다 밥 이야기가 빗나가 두 나라의 경제 전반을 두서없이 훑었다.
말머리를 돌려서 보나마나 오늘도 저녁을 혼자 먹지 싶다. 혼자 먹는 밥은 언제나 빌어먹을 놈의 고독이 달라붙어 참 불편하다.
총괄 매니저인 이 부장으로부터 손님을 만나 저녁을 먹고 들어오겠다는 전갈 왔다. 우리 일과 상관없는 사람도 현지인 한국인 가리지 않고 주제넘게 잘 만나 부탁을 들어주고 미주알고주알 참견하는 게 이 부장의 고약한 버릇이다. 그러다가 뒤에 가서는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도리어 욕먹는 일이 허다하지만 고치지를 못한다. 실속 있게 놀라고 수없이 일렀거늘, 공과 사의 구분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오늘도 누구를 만나는지 밝히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업무와는 무관한 인사를 만나는 모양이다
아무튼, 오늘도 혼자서 밥을 먹어야하는 고역을 앞두고 있다. 식구 넷이지만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어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고 문득 식구들이 같이 단란하게 앉아 밥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득히 밀려든다.
딸애는 지금 영국에 가 있다. 다음 달 말이나 들어오지 싶다. 학교에서 보내주는 단기 어학연수로 석 달을 일정으로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런던에 머물고 있다. 딸애가 중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식구들이 자연스럽게 밥상머리에 둘러앉았다. 그러나 그 땐 그 자체가 행복이라는 걸 몰랐다. 딸애가 외국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으니 일주일에 잘 하면 한두 끼 같이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아들 녀석이 학원이다, 오락실이다, 제 때에 끼니를 찾아먹지 않았고 쉬는 날이면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침을 같이 먹지 못하고 또 내가 저녁이면 거래처 손님들과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일 년의 반은 외국을 들락거렸으니 같이 밥상머리에 둘러앉는 시간이 점차 줄었다. 아이들이 커가니 이래저래 식구가 둘러앉아 밥상을 마주할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아부지 저녁 드셨어요?’
카톡이 날아왔다. 밥상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아들 녀석의 카톡으로 밥 먹었냐는 문자를 받으니 좀 이상했다. 생전에 카톡 문자를 날리기는커녕 딸애와는 달리 문자를 보내도 답장도 않던 녀석인데 이상했다. 부자간이라 밥상에 대해서 뭔가 필이 통했나?
‘야 인마! 두 시간 반의 시차가 있어서 여기는 저녁 먹을 시간이 안 되었어.’
퉁명스런 답장을 날리고 생각하니 문자가 날아온 전화는 로밍을 한 한국 폰이 아닌 미얀마 폰이었다. 어제 아내에게 통화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하니 받지 않아 녀석의 폰으로 전화를 했었다. 아마도 그 번호가 친구 찾기로 등록되어 녀석이 추가 버튼을 누르고 친구로 등재하기 위해 카톡 문자를 날린 모양이다.
‘그럼 시간이 되면 맛있게 잡수세요.’
불알 달린 녀석이라 딸과는 다르게 퉁명스러운 게 귀여움을 받는 짓으로 아는지 애살맞은 잔정이라곤 서푼어치도 찾아볼 수 없는 답장이 금세 날아왔다.
‘너랑 같이 먹는 밥이 제일 맛있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애절한 심정이 녹아있는 답장을 날렸다.
‘아부지랑 밥 먹는 시간이 젤 싫어여. 식사시간이 아니라 잔소리 시간이잖아요.’
-헉, 이게 무슨 소리야? 동상이몽이구먼!
다시 날아온 그 답장을 거듭 읽으며 숨이 콱 막히는 걸 느꼈다. 녀석은 아버지란 존재와 같이 밥을 먹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 모르는 게다. 그 시간이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는 시간으로 인식되어 있다. 잘못 되어도 엄청 깊숙하게 잘못되었다. 잔소리를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녀석은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데 마주하는 시간이 밥상머리뿐이다. 그래서 한 마디씩 하는 걸 두고 녀석은 잔소리 시간이라고 거침없이 명명했다.
녀석의 문자를 거듭 읽으며 옹골찬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이 말한 잔소리 시간을 수정 인식시키기 위해 문자를 다시 날려야 하나 그냥 넘어가야 하나 한참을 생각했었다. 결론은 문자로 날리면 이해가 안 되고 얘기만 길어질 뿐이다. 이런 절실한 심정은 녀석을 앉혀놓고 녀석이 심정을 이해하도록 말로 설명을 해야 하는 게다.
가족을 두고 식솔食率이라고도 하고 식구食口라고도 한다. 그 의미를 풀이하면 가족은 같이 먹는다는 데 뜻을 두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인데 녀석은 그 진지한 뜻을 곡해하고 있다. 이번에 들어가면 녀석을 앉혀놓고 그 의미를 단단히 새겨주어야 할 일이다. 그 의미를 말해주는 자리가 또 밥상머리라면 같이 밥 먹는 시간을 잔소리 듣는 시간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따로 불러서 식구와 식솔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새겨주고 그 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이 평범해 보이지만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 녀석의 그릇된 사유에 인식을 전환시켜야겠다.
아버지와 밥을 같이 먹는 시간은 영원할 수가 없다. 지극히 평범한 사실이다. 평생 같이 밥을 먹도록 아버지란 존재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말도 녀석에게 꼭 해주어야겠다. 녀석이 교환학생으로 갔다가 와서 군에 갔다가 오면 저절로 체득할 일이지만 먼저 짚어주어야겠다. 순전히 내 경우지만 지금 아버지와 같이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공연한 생각을 해서 우울해진다.
철이 들고 아버지와 밥상을 마주한 것은 명절과 아버지 생신을 빼면 손에 꼽을 정도다. 중학에 다닐 때까지는 철이 없었다 치고, 철이 든다는 고등학교시절에는 가까운 도회로 유학을 가서 자취를 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포기하고 바로 취업의 길로 나서서 포클레인 조종기술을 익히느라 객지를 떠돌아 다녔다. 포클레인이 귀한 시절이라 전국을 무대로 뛰었다. 이곳저곳 현장을 따라 다니며 객지의 눈칫밥을 먹다가 군대 갔다 오고 또 현장을 따라 전국을 싸돌아다니다 결혼을 하고 가깝고 만만한 도시로 딴살림을 난 것이다.
아버지와 단 둘이 먹은 밥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밥은 들밥이다.
들밥! 말을 하고보니 가슴이 치민다.
군 시절에 병장을 달고 말년휴가를 오니 모내기철이었다. 그 때는 이양기란 게 없던 시절이라 손으로 모를 심었다. 우리 논들은 일찌감치 모내기를 마쳤으나 들판에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아버지께서 아침나절에 ‘머들이’를 하러 가자고 하셨다.
머들이란 모내기를 마친 논에 빠진 모와 또 설 심어 물위로 뜬 모를 찬찬히 둘러보며 빠진 곳과 물위로 뜬 모를 다시 심는, 수정 보완작업인데 우리 고장에서는 ‘머들이’라고 불렀다. 농번기라 집에서 빈둥거리기 눈치가 보여 따라 나섰다.
모내기를 마치면 바로 논에 물을 대지 않는다. 뿌리가 착근되도록 논을 한 번 말린다. 그 다음에 물을 대면 바쁜 손놀림에 설 심은 모는 물위로 뜬다. 마른 논에 물꼬를 트고 물을 대면서 손에 모를 한줌씩 쥐고 나란히 몇 고랑씩 잡아서 머들이를 했다. 심는 시간보다 둘러보는 시간이 많음으로 자연스럽게 말을 많이 하게 된다. 군대에 관해서 얘기하고 아버지의 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한 논의 머들이를 마치고 다른 논으로 이동해서 같은 작업을 했다. 아버지는 부산 수용연대 출신이고 나는 그 당시에 관구 사령부에 근무했다. 이름만 다르지 같은 지역의 같은 부대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군의 선배다. 그래서 군대에 관해서 할 말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과 다른 논에서 모내기를 하던 이웃이 큰소리로 아들과 같이 일을 하니 힘이 절로 솟아나겠네! 하며 부러운 듯 응원을 보냈다. 그날이 내 생에 있어서 아버지와 속에 든 얘기를 가장 많이 나눈 날이지 싶다.
세 번째 논의 일을 어지간히 마치자 점심나절이었다. 어머니께서 광주리를 이고 밥을 내오셨다. 어머니는 논 옆의 작은 개울 건너 버드나무 그늘에 점심 광주리를 내려놓고 논으로 들어오셨다. 조금 남은 일을 어머니께서 마무리하시는 동안 우리 부자는 개울물에 종아리를 대충 씻고 밥 광주리를 두고 풀밭에 마주 앉았다. 광주리를 덮은 보자기를 들추어보니 당시에는 귀한 압력솥에 마늘을 잔뜩 넣고 푹 삶은 닭이 먹음직하게 들어있었다. 들고 오신 주전자는 물이 든 게 아니라 막걸리 주전자였다. 군에서 휴가 나온 아들 보양시키려고 오전 내내 어머니께서 준비하신 모양이다.
-네 덕에 내가 호식하는구나. 어여 묵자.
아버지는 삶은 닭을 보며 말씀하셨다. 닭도 닭이지만 밥이 꿀맛이었다. 닭다리부터 하나 뜯고 허겁지겁 밥을 먹자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시던 아버지께선 아버지 밥그릇에 담긴 밥을 푹 퍼서 내 밥그릇으로 담아주시고 말씀하셨다.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것하고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게 가장 보기 좋다고 했는데 틀린 말이 아니구나.
-아! 예.......
아버지의 대접에 막걸리를 따르면서 대답하고 닭고기의 기름기가 묻은 손으로 내 잔도 받아 들이켰다. 아버지께선 자시는 것보다 내가 먹는 모습을 즐기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보란 듯이 밥과 닭, 막걸리를 군인답게 용감무쌍하게 먹었다. 아버지 앞에선 잘 먹어주는 하찮은 일도 효도가 된다는 사실을 그 때 알았다. 결국 그날 아버지의 몫인 남은 닭다리 하나도 내가 뜯었다. 아버지께 드시라고 했지만 기어이 젓가락으로 내 국그릇에 담아주셨다.
들밥을 다정하게 먹고 기분 좋은 취기를 느끼며 그 다음 논의 머들이를 마쳤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게 내 기억에 가장 오래 남고 가장 맛있었던 밥상이었다. 지금도 어쩌다 집에서 아이들이 치킨을 시키면 한 조각 거들면서 그 때 먹었던 닭다리와 맛을 비교한다. 분위기와 맛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버지란 존재는 그런 기억을 오래 만들 수 있도록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버지와의 들밥! 생각만 해도 울컥 가슴이 치밀어 아이들과 치킨 조각을 먹으며 노닥거릴 수가 없었다. 그게 벌써 삼십 년 전의 일이지만 세월이 갈수록 기억에 새록새록 살아난다.
아들 녀석은 아직 모른다. 아버지와 같이 밥 먹는 행위가 얼마나 거룩한지. 언제 시간을 봐서 녀석에게 아버지와의 들밥에 관해서 얘기를 해주어야겠다. 녀석이 얼추 그때의 내 나이가 되어 간다. 덩지만 컸지 철이 들려면 아직도 멀었다. 가난한 집 아이가 일찍 철이 든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지금은 세상이 풍족해서 아이들이 늦게 철이 든다. 녀석이 철이 들어 아버지와 마주하는 밥상이 얼마나 중요하고 거룩한 것인지 스스로 알게 되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늦기 전에 그 지극히 사소한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을 알려주어야겠다.
지금은 먹을 게 넘쳐나는 시대다. 우리 어릴 적에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이야 맛을 따지지만 내 어릴 적만 해도 맛은 뒷전이고 허기를 채우는 데 급급했다. 요즘 아이들에게 그 얘기를 하면 라면 끓여먹으면 되잖아요? 하며 되묻는단다.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가정마다 정부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든 통을 돌렸다. 그 푸른색 플라스틱 통에는 세로로 ‘절미함’이라고 씌어 있었다. 벼의 종자를 개량하여 이른바 ‘통일벼’가 보급되기 직전의 일이다. 통을 가져온 이장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밥을 지으려고 쌀을 퍼서 씻기 전에 한 숟갈을 떠서 담으면 된다고 했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나는 그 얘기를 똑똑히 들으면서 그럼 배가 고파서 어쩌지? 하는 질문을 속으로 던졌다.
이곳 미얀마에 와서 책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그 당시에는 버어마의 쌀 원조를 받아 국민의 주린 배를 채웠다. 육십 년대 후반까지 원조를 받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다. 나도 오십 년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이 나라에 와서 책으로 알았으니....... 지금이야 경제적으로 비교가 안 되지만 산업화되기 이전에는 우리나라가 먹을 것을 걱정하는, 국민이 배를 곯고 있었던 더 빈국이었다는 말이다.
국토의 칠 할이 산인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미얀마는 산이 별로 없고 비옥한 퇴적 평야가 대부분이다. 또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일 년에 삼모작을 할 수가 있다. 그러니 쌀이 넘쳐난다. 이 나라 사람에게 절미함을 얘기하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혼식과 분식 장려를 위해 초등학교시절 도시락 검사까지 했다는 말을 하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는 국수도 밀가루로 만들지 않고 쌀로 만든다. 모힝가라는 쌀국수인데 밀가루 국수처럼 누런색이 아니라 백설기처럼 흰색인데 맛이 그만이다. 쌀이 흔한 나라라 쌀을 이용한 먹을거리들이 개발되어 있다. 아직도 수출품목 맨 앞자리에 농산물이 올라간다. 쌀 뿐만이 아니라 열대과일이 풍부해서 농촌에 살면 집이 없어도 굶어죽거나 얼어 죽을 일은 없다. 그래서 국민성이 이렇게 느긋하고 더딘지 모르겠다.
여기에 와서 본토 발음으로 배운 말 중에서 먼저 배운 말이 ‘나우 짤루 쌩리대’ 다. 풀이하자면 ‘너무 늦어서 짜증이 난다’는 표현이다. 모든 게 늦다. 말을 긍정적으로 바꾸자. 짜증내면 나만 손해니까, 늦은 게 아니라 느긋하다고 하자. 너무 느긋해서 예정과 달리 일이 된통 꼬여 있다. 은행에 가서 기다렸다가 돈을 찾아오는데 하루가 걸린다. 돈을 쓸 일이 있으면 하루 전에 준비를 해야지 약속을 지킬 수가 있다. 현장 하나는 일 년 전에 건축 허가를 넣었는데 종무소식이다. 살인적인 인내력이 필요한 나라다. 그걸 다 열거하면 열 받아 죽는다. 밥 얘기를 했으니 진정하고 밥 얘기로 말을 돌리자.
제일 맛있는 밥이 배가 무척 고플 때 먹는 밥이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니 열거할 필요가 없고. 그 다음이 집에서 식구들과 둘러 앉아 먹는 밥이다. 지금 실정이 그러질 못해서 앞자리에 얹는지 모르지만 반찬이 부실해도 그 분위기의 맛이 그만이다. 특별히 갈치구이라도 있으면 아내가 가시를 발라 내 숟가락에 얹어 주고 나는 가시를 발라 아들 녀석의 밥그릇에 올려주는 분위기. 그런 밥은 정말 오순도순한 분위기 맛이다. 식구나 식솔의 의미가 솔솔 살아나는 밥상이 가장 맛있는 밥상이고 그 다음 맛있는 밥이 친한 친구와 오랜만에 먹는 밥이다.
빨리 들어와서 밥이나 같이 먹자는 권 박사의 카톡을 어제 받았고 지난주에는 이 교수로부터 언제 한 번 밥을 같이 먹자는 메일을 받았다. 옛날에는 술 한 잔하자는 말이 유행이었는데 요즘을 밥을 같이 먹자는 말이 유행인 모양이다. 물론 그 친구들과 밥을 먹으면 반주가 곁들여지게 마련이다. 권 박사는 아침을 먹지 않는다. 그게 버릇이 되었다. 우유 한 잔으로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공무원 생활 이십 년 동안 아침을 먹고 출근한 일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대신 점심은 열두 시에 칼같이 먹는다. 조금만 늦으면 허기져서 못 견디는 타입이다. 권 박사와 점심이 약속되면 나도 시간을 꼭 지킨다. 같이 점심을 먹으면 반주로 소주 두 병이다. 나야 반주가 되지만 권 박사로 보면 해장술이 되는 셈이다.
어찌했거나, 그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어 본 지가 두 달이 넘었다. 아련히 그립다. 그 친구들과는 저녁 무렵이면 거의 매일 만난다. 자주 가는 생고기 집에서 반주로 먼저 한잔 하고 뒤에 육회덮밥을 먹는데 그 맛이 아주 그만이다. 같은 음식점에서 먹지만 접대성이 있는 밥은 맛이 별로다. 나는 업무상 가끔 현장의 소장이나 대리들과 밥을 같이 먹는데 그 때 먹는 밥은 상대의 눈치를 살펴야 하기에 밥 먹는 게 아니라 업무의 연장이라는 생각이 앞서며 의무적으로 얘기를 들으며 먹어주어야 하기에 무척이나 불편하다. 그 보다 더 불편한 밥상이 있다. 그건 바로 고독을 말거나 고독을 비벼서 먹는 나 홀로 밥상이다. 혼자서 밥을 먹다보면 항상 먹기 위해 사는 것이냐, 살기위해 먹는 것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먹기 위해 사는 것도 지저분하고 살기 위해 먹는 것도 처량하다는 생각에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한국에 있을 적에 어쩌다가 아내가 외출하면서 점심밥상을 차려놓고 나가면 절대로 혼자 먹지 않는다. 타이어 대리점을 하는 군대 동기 가게에 가서 그 친구 아내가 정성을 다해 내오는 점심을 같이 먹는다, 그 친구는 절대로 점심을 매식하지 않는 버릇이 있으며 그 친구 부인은 언제나 타이어 가게 손님들을 생각해서 여분의 밥을 넉넉하게 싸온다. 거기에 숟가락을 들고 개평을 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친구나 거래처의 만만한 인간에게 연락하여 점심 약속을 하거나 정 안되면 중기들이 일을 하는 현장에 나가서 인부들과 같이 먹는다. 그렇게 길을 들이니 아내는 산행을 가던지 외출을 하면 아예 밥상을 차려놓지 않고 ‘점심은 알아서 해결하시우’ 인사치레로 던지는 한 마디뿐이다. 어쩌다 얼굴을 보지 않고 나가면 점심은 당신 꼴리는 대로 해결하라는 문자 메시지를 남기는 게 고작이다.
그러선 여기선 다르다.
지금 주방에선 두 명을 처녀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인 봉제공장의 간부 식당에서 십 년 넘게 일했다는 서른두 살짜리 요리사 퓨퓨는 한국음식 솜씨가 그만이다. 김치부터 시작해서 청국장까지 입에 맞도록 완벽하게 소화하는 요리사다. 그녀는 독신을 고집하고 있어 비교적 일찍 결혼하는 이 나라에서 서른둘이면 할머니 처녀의 범주에 든다. 식성이 까다로운 이 부장이 그녀의 요리솜씨를 알고 웃돈을 주고 우리 숙소 요리사로 초빙했다. 아마도 어제 코리아 마트에서 사다 둔 한국 소주가 냉장고에 있을 것이다. 안줏거리가 되나 주방을 기웃거려보니 오늘 저녁 메뉴는 감자탕인 모양이다.
혼자 먹기가 아까워 컨설팅 에이전트를 하는 이웃에 사는 전 사장에게 저녁에 우리 숙소에서 소주나 한잔 하자고 전화를 넣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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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랄! 한국에서 손님이 들어와 저녁을 한국식당에서 같이 먹는단다. 퓨퓨가 요리하는 음식을 먹어보면 미얀마에 있는 한국식당의 음식 값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이 부장이나 나나 어쩌다 한국에서 친구나 손님이 오면 한국 식당으로 데려가지 않고 끼니는 숙소에서 해결하고 호텔로 보낸다. 모두들 한국의 음식 맛이라며 매일 이렇게 푸짐하게 진수성찬으로 먹느냐고 묻는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사실이니까.
감자탕 익는 냄새가 열어놓은 주방문을 통해 후각을 자극한다. 한국의 식당에서 하는 감자탕은 재료로 들어가는 등뼈가 캐나다나 호주산이 대부분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여기는 미얀마다. 그런 곳의 식재료가 들어오지 않는다. 여기 사람들은 그런 재료를 이용하여 만드는 음식이 없기에 고기를 사면 등뼈를 덤으로 가져가라고 한다. 퓨퓨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가 막히게 얻어 와서 식재료로 이용한다. 굉장히 얼큰하고 맛있는 감자탕이 될 것이다.
라면은 혼자서 먹어도 고독이란 놈이 달라붙질 않는다. 그러나 푸짐한 밥상을 홀로 받는 건 다르다. 오늘 저녁도 굉장히 고독한 밥상이 될 것이다. 감자탕에 외로움과 타국에서 오는 고약한 고독을 말아서 소주 안주로 먹게 것이다. 혼자서 밥을 먹으면 꼭 소주를 마신다. 홀로 밥을 먹는 게 아니라 혼자서 술을 마신다는 기분으로 끼니를 때우기 위함이다. 그러나 술이 있어도 처량하도록 밀려드는 고독은 어쩔 수 없다. 오늘 저녁도 고독한 밥상이 될 것이다. 고독한 밥상은 불편하다. 아, 불편할 밥상이여! 괜한 소릴 중얼거리며 쓴 입맛을 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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