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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에 나오는 용추(龍湫)
▣ 일 시 : 2023년 04월 16일(일)
▣ 코 스 : 1곡 松瀝洞(송력동)-2곡 옥룡추(玉龍湫)-3곡 학서암(鶴捿岩)-4곡 서암(瑞岩)-5곡은 유선대(游仙坮)-6곡 지주대(砥柱坮)-7곡은 비폭동(飛瀑洞)-8곡 경천벽(擎天壁)-9곡 교룡담(交龍潭)
▣ 인 원 : 2명(지리산아님)
▣ 날 씨 : 흐림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에 용추(龍湫)라는 지명이 나온다. 용추(龍湫)는 용호구곡의 옛이름이다. 용호구곡은 근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전에는 원천(元川). 용호동(龍湖洞), 용추동(龍湫洞)이라고 하였다. 1752년(영조 28)에 발간된 『용성지』의 '산천조(山川條)'에 용추동(龍湫洞)으로 소개하고 있다. 용호동 입구에 창암(蒼巖) 이삼만 (李三晩 , 1770~1847) 이 썼다고 전하는 용호석문(龍湖石門) 석각이 있다. 1879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두류산기」에 "용호동(龍湖洞)으로 들어서니 계곡이 매우 깊고 그윽하며 흰 바위가 있었다. 시내의 너럭바위에는 구멍이 파여서 도랑을 이루었는데, 맑은 물줄기가 쏟아져 나와 아래로 떨어져 맑은 못을 이루었다. 그 위에는 또한 주자(朱子), 송자(宋子) 두 선생의 영정을 모셨던 집의 옛 터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655년 10월 8일 김지백은 원천원(元川院, 현 지리산둘레길 남원 주천 안내 센터)에서 일행들을 만나 용추(龍湫)를 거쳐 파근사에서 묵고, 10월 11일까지 나흘간 화개동천 일원을 유람한다. 유람의 목적은 청학동(불일평전)을 돌아보는 것이다. 나흘간의 유람에서 일행들이 지은 100여 편의 한시를 1권의 시집으로 만들면서 김지백이 기문을 지었다고 한다. 유람 일정은 전라북도 남원 주천면 장안리 원천원(元川院)을 출발하여 용추동(龍湫洞)-파근사(波根寺)→폭포(수락폭포)→구례 화엄사(華嚴寺)→연곡사(燕谷寺)→화개 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신흥동→칠불암(七佛庵)에 들러 옥부대(玉釜臺)를 둘러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동행자는 서국익(徐國益), 이자원(李子遠), 한여근(韓汝謹), 노운경(盧雲卿), 서대숙(徐大叔) 등 6명이다.
원천원에서 용추동(용호구곡)을 거쳐 파근사로 가는 길은 ① 1곡에서 9곡까지 협곡으로 가는 길, ② 6곡에서 7, 8곡을 거치지 않고 코재로 올라 9곡을 둘러보고 내기마을을 경유하는 길, ③ 1곡 松瀝洞(송력동)에서 송림사를 경유하는 길이 있다. 내기마을 사람들이 주천場을 보러 갈 때, 주로 ② 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6곡 지주대(砥柱坮)에서 코재를 경유하는 길은 경사가 조금 급하지만 옛길의 흔적이 뚜렷하다. 용호구곡의 석각은 사전에 준비가 없어서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어느 선관물자(善觀物者)의 "단지 나의 오류나 미숙으로 인해 잘못된 정보가 타인에게 전해지는 걸 결코 원치않는다."라는 말에 공감하며 글을 맺는다. 끝.
注 원천원(元川院) : 관에서 운영하는 숙소로 현재 '지리산둘레길 남원 주천 안내 센터'로 추정한다. 김지백(金之白, 1623~1671) : 자는 자성(子成), 호는 담허재(澹虛齋),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의 문인이며, 오이정(吳以井, 1619~1655),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송준길(宋浚吉, 1606~1672) 등과 교유하였다. 1658년(효종 9)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611년 유몽인과 지리산을 유람한 재간당 김화(金澕, 1571~1645)의 조카이다. 저술로 『담허재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삼만(李三晩, 1770~1847) : 본관은 전주, 자는 윤원(允遠)이며 호는 창암(蒼巖)·강암(强巖)·강재(剛齋) 등이다.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다.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여 전주에서 살았으며 이광사(李匡師)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전라도 도처에서 그가 쓴 편액을 볼 수 있으며, 경남 하동 칠불암의 편액도 그의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 1655년 김지백의 「유두류산기」
○ 10월 8일, 남원부 동쪽 원천원(元川院, 주천면 장안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니, 바로 을미년(1655) 10월 8일 무오일이다. 자원(子遠) 이문재(李文載)와 한여근(韓汝謹) 또한 기약이나 한 듯 함께 왔고, 중도까지 전송한 자로 또 노운경(盧雲卿)이 있다. 이 네 벗은 모두 나와 같은 해에 나란히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서국익에게 서대숙(徐大叔)이라는 아우가 있는데, 또한 서국익과 함께 왔으니, 우리의 행차가 더욱 외롭지 않았다. 이에 용추(龍湫)를 거쳐 대흥사(大興寺, 파근사)에서 묵고, 거세게 흘러내리는 폭포(수락폭포)를 구경하고, 감로사(甘露寺, 천은사)를 지나 화엄사(華嚴寺)에 이르러 웅대한 불당(佛堂)을 구경하였다. 다시 구불구불한 강 언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니 쌍계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번이나 굽이돌아 시내 건너 골짜기를 찾아 저물녘에 연곡사(燕谷寺)에 이르러 묵었다.
注 이문재(李文載, 1615~1689) : 자 자원(子遠) 호 석동(石洞) 본관 전주(全州) 김집(金集)의 문인. 서문상(徐文尙, 1630~?)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국익(國益), 호는 송파(松坡), 나산(羅山), 부사(府使) 서정리(徐貞履)의 아들이다. 1655년(효종6) 진사시에 합격, 음보로 세마(洗馬)가 되었다. 1668년(현종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쳐, 1672년 홍문관에 등용된 뒤 정언, 문학을 지냈다. 이듬해 사서, 부수찬, 1677(숙종3) 병조참의에 올랐다. 한때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풍문으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나, 아들 서종태(徐宗泰)의 탄원으로 신원되었다. 시문에 능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유두류산기(遊頭流山記)」 : 김지백의 『담허재집(澹虛齋集)』 권5에 수록되어 있다.
■ 용호구곡(龍湖九曲)
남원시 주천면에 위치한 용호구곡(龍湖九曲)은 남원 팔경 중 제1경이다. 특히 구룡폭포(九龍瀑布)는 만복대(1,438m)에서 발원해 남원시 주천면으로 흘러드는 원천천 중간에 형성된 구룡계곡 최상류에 위치한 폭포로, 원천천 상류에 있어 원천폭포라고도 불리운다. 용호구곡(龍湖九曲)의 협곡은 감입곡류 하천으로 변성암과 화강암 풍화층이 급류에 깎이면서 곳곳에 소(沼)와 단애(斷崖) 그리고 반석(盤石)이 특징적인 지형 경관을 이루었다. 구룡계곡에는 음력 4월 초파일이면 하늘에서 아홉 용이 내려와 폭포를 하나씩 끼고 놀다 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계곡은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에서부터 구룡폭포가 있는 주천면 덕치리까지 약 3.5km에 이르는 심산유곡이다. 웅장하고 수려한 산세와 깍아지른 듯한 기암절벽, 폭포와 소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구룡계곡을 용호구곡(龍湖九曲)이라고 부른다. 용호구곡은 용호서원의 전신인 용호정사(龍湖精舍)의 경영주체인 원동향약계와 기호학파 사림에 의해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 초기 사이에 설정된 것으로 판단된다. 구곡의 석각 또한 용호서원이 건립된 시기로 추정한다. 구곡 문화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에 의해 유행했던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연원한다.
용호구곡의 제1곡은 송력동(松瀝洞), 제2곡은 옥룡추(玉龍湫) 일명 용소(龍沼), 또는 불영추(佛影湫), 제3곡은 학서암(鶴捿岩), 제4곡은 서암(瑞岩), 제5곡은 유선대(游仙坮), 제6곡은 지주대(砥柱坮), 제7곡은 비폭동(飛瀑洞)→바위 글씨에는 비포동(飛㳍洞), 제8곡은 경천벽(擎天壁) 일명 석문추(石門湫), 제9곡은 교룡담(交龍潭)으로 구룡폭포(九龍瀑布)이다. 제3곡 학서암(鶴捿岩)을 제외하고 구곡(九曲)을 알리는 석각이 유존한다. (編)
■ 제1곡(曲) 송력동(松瀝洞)
송력동(松瀝洞)이 제1곡(曲)이다. 주변에 송림이 울창하다. 석녀골 상류에 송림사(松林寺)가 있었다고 전한다. 난사(蘭史) 김사문(金思汶, 1889∼1978)의 「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 1940)」에 '송림사 폐사지에 무너진 탑(敗塔)이 남아있다.'라고 한다. 송력동(松瀝洞) 이름은 송림약천(松林藥泉, 송림약수)에서 유래하였다. 송림약천(松林藥泉)은 여궁석(女宮石)을 가리키는 듯하다. 옥녀봉 아래 여궁석(女宮石)의 강한 음기(陰氣)를 막기 위해 비보 풍수 시설인 돌담이 있다.
注 송림약천(松林藥泉) : 「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 1940)」에 "송림 축대(松林築坮)를 넘어서 수보를 나아가면 한길 높이의 바위 이마에서 청류가 구슬처럼 드리우니 이곳이 소위 송림약천(松林藥泉)이라. 봄과 여름이 바뀔 때에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사람들(화장을 한 여자와 시원한 건을 쓴 남자)이 길을 다투어 운집하니 송력동(松瀝洞)의 이름이 이로부터 유래했다."라고 한다. 속전(俗傳)에 '송림약천에서 목욕을 하면 아들을 낳는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김재홍은 여궁석(女宮石)을 송력동(松瀝洞)으로, 김사문은 송림약천(松林藥泉)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듯하다.
■ 제2곡(曲) 옥룡추(玉龍湫)
옥녀봉 용호정 아래 흰 바위로 둘러싸인 못을 일명 '용소(龍沼)'라고 하며, 옥룡추(玉龍湫), 또는 불영추(佛影湫)라고 한다. '용호석문(龍湖石門)'과 '방장제일동천(方丈第一洞天)' 각자 사이에는 자연 석불이 있는데, 이 석불의 그림자가 소에 비친다고 해서 불영추(佛影湫)라고도 한다. 옥룡추(玉龍湫)는 '용이 사는 옥처럼 푸르고 깊은 소(沼)'를 의미한다. 용호구곡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불이대 (不二坮)의 '용호정사동구(湖精舍洞口)'와 풍호대 (風乎臺)의 용호육우(龍湖六愚) 등 인명 석각은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풍호대 (風乎臺)에 함양군수 남주헌(南周獻)의 인명 석각이 있다.
龍湖六愚
小松 鄭宗黙, 黙齋 盧鏞鉉, 小山 金庸鉉, 又松 柳永郁, 素晦 朴善和, 秋園 朴昌圭
甲子 端陽
■ 용호서원(龍湖書院)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원동향약계(源洞鄕約契)에 소속된 유림의 선비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1867~1939) 등이 주축이 되어 건립된 서원이다. 설립 당시에는 송나라의 유학자인 주자(朱子)의 영정을 봉안하고 주자를 배향하였으나, 이후 한말 우국지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을 비롯하여 남원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덕행을 펼쳤던 영송(嶺松) 김재홍(金在洪), 아들 입헌(立軒) 김종가(金種嘉, 1889~1975)를 배향하였다.
注 송병선(宋秉璿, 1836~1905) :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순국지사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이며 호는 연재(淵齋) 혹은 동방일사(東方一士)이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면수(勉洙)의 맏아들이다. 참의 달수(達洙)와 근수(近洙)의 종질이며, 병순(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달수에게서 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송시열의 9세손으로 조선 말기의 학자이다. 1877년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또 고종을 알현하여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을사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 등 대선비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은 책을 지어 『근사속록(近思續錄)』이라 하였다. 그밖의 저서로도 『연재집(淵齋集)』과 『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무계만집(武溪謾集)』, 『동감강목(東鑑綱目)』 등 53권이 있다. 사후 고종이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제3곡(曲) 학서암(鶴捿岩)
육모정에서 300m 지점에있는 황학산(黃鶴山) 북쪽에 암석층이 있는데 이 암벽 서쪽에 조대(釣臺)가 있다. 이 조대암 밑에 조그마한 소가 바로 3곡(曲)이다. 학이 날아들어 쉬는 풍경이 아름다워 학서암(鶴捿岩)으로 불렸다는 설과 학들이 물고기를 잡아 먹는 바위가 있다고 해서 '학서암(鶴捿岩)'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다. 학서암 각자는 수해로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 제4곡(曲) 서암(瑞岩)
구시소 위쪽 약 50m 지점의 계곡 건너편 바위의 형상이 마치 스님이 무릎을 꿇고앉아 독경하는 형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여 서암(瑞岩)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현재 독경 형상의 바위는 폭우에 휩쓸려 찾을 길이 없으나, 주변에 챙이소와 함께 반석의 아름다움이 뛰어난 풍경을 자랑한다. 조금 진행하면 칠성암터가 있다. 「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 1940)」에 "七星庵으로 名庵함은 七人有志의 共築한바이러라."라는 문구를 볼 때, 일곱 명의 선비들이 학문을 토론하는 시사(詩社)의 공간으로 활용한 듯하다.
注 서암(瑞岩) : 당(唐)나라 때 서암(瑞巖)이란 승려이다. 매일 스스로 자문자답(自問自答)하기를, “주인옹아! 깨어 있느냐?” “깨어 있노라.” 하였다 한다. 《心經 卷1》 이 성성법(惺惺法)은 마음을 어둡지 않게 항상 일깨우는 방법을 말한다. 스님이 독경하는 바위의 형상에 서암(瑞巖)이라는 스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구시소와 챙이소 : 계곡내 바위가 '구시'(구유의 경상도 방언)를 닮아 구시소라고 하고, 곡식의 쭉정이, 티끌 등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데 쓰인 도구인 '챙이'(키의 전라도 방언)를 닮아 챙이소라고 불리기도 한다.
■ 제5곡(曲) 유선대(游仙坮)
이곳은 반반한 바위에 금이 많이 그어져 있어 선인(仙人)들이 바둑을 두며 즐겼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어 유선대(游仙坮)라 불리며, 주변의 절벽은 선인(仙人)들이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병풍을 쳐놓은 것 같다고 하여 은선병(隱仙屛)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윷판이 새겨져 있다. 바둑판 바위는 1960년 태풍 카르멘(CARMEN)의 수해 때 뒤집어졌다고 한다.(호경리 노국환님, 1944년생)
■ 제6곡(曲) 지주대(砥柱坮)
남원시에서 약 8km 지점에 위치한 육모정에서 시작하여 구룡폭포까지 약 4km를 굽이쳐 흐르는 구룡계곡의 9곡 중 6곡이 지주대(砥柱坮)이다. 6곡 둘레의 기암 절벽이 마치 하늘을 떠바치듯 구름다리 앞에 자그마한 봉우리가 솟아 있어 지주대(砥柱坮)라고 한다. 지주산(砥柱山)는 '황하 가운데 있는 산으로 격류 속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뜻에서 온 이름이다. 지주대(砥柱坮)는 절개를 의미하는데 숨은 뜻이 있는 듯하다. 안내판의 제6곡의 한자 곡(谷)은 오자로 보인다.
注 지주대(砥柱臺) : 지주(砥柱)는 지주(厎柱)라고도 쓰는데 산의 이름임. 하수(河水)의 중류(中流)에 있음. 사람이 홀로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을 중류지주(中流砥柱)라 이름.(고전번역원)
■ 제7곡(曲) 비폭동(飛瀑洞)
이곳은 구룡계곡(九龍溪谷) 9곡(曲) 중 제 7곡인 비폭동(飛瀑洞)이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반월봉(半月峰)이다. 반월봉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이곳 폭포에 떨어지며 아름다운 물보라가 생기는데 그 모양이 마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처럼 보인다고하여 비폭동(飛瀑洞)으로 불리고 있다. 김사문의 「용호구곡 경승안내」와 「용호구곡십영」에는 비폭동(飛瀑洞)이라고 하였고, 석각은 비포동(飛㳍洞)으로 새겼다. 㳍로 새긴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폭(瀑)을 포(㳍)로 빌려 쓰고 폭으로 읽었다. 구룡폭포도 구룡포(九龍㳍)로 새겼다.
■ 제8곡(曲) 경천벽(擎天壁)
비폭동(飛瀑洞)에서 600m쯤 올라가면 거대한 암석층이 계곡을 가로질러 물 가운데 우뚝 서 있고, 바위 가운데가 대문처럼 뚫려 물이 그 곳을 통과한다고 해서 석문추(石門秋)라 하는데, 바로 이곳이 8곡이다. 하늘을 떠받드는 절벽이라는 의미로 경천벽(擎天壁) 석각이 있다. 괴산 화양구곡에도 경천벽(擎天壁)이 있다.
■ 제9곡(曲) 교룡담(交龍潭)
만복대에서 발원한 계류가 여기에 이르러 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바위가 있어 두 갈래 폭포를 이루는데, 그 모습이 마치 두 마리의 용이 어울렸다가 양쪽 못 하나씩을 차지하고 물속에 잠겨 구름이 일면 다시 나타나 꿈틀거리듯 하므로 그곳을 교룡담(交龍潭)이라 한다. 용호9곡의 최고점으로 예로부터 방석동이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하므로 구룡폭포라 불린다.
난사(蘭史) 김사문(金思汶, 1889∼1978)의 「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에는 제1곡 송력동의 이름이 붙여진 유래, 송림사가 폐사가 된 전설, 제2곡 불신당 주변의 석문(石文)을 쓴 작자들, 제4곡 칠성암(七星庵)의 명칭 유래, 제5곡 유선대에 전해지는 산서(山西) 조경남(1570∼1641)의 일화, 제8곡 경천벽(擎天壁)과 제9곡 용화굴(龍化窟)이 그 이름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경관의 모습 등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 김사문의 「龍湖九曲景勝案內): https://lyg4533.tistory.com/16488916
첫댓글 용호구곡은 평지길이라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황령,황령사,파근사,김지백으로 이어지는 인문산행이 점점 흥미를 더합니디
1곡에서 9곡까지 3.5km입니다.
일정이 잡히면 동행하겠습니다.
@도솔산인 네 감사합니다♡
송력동과 찰성암 내용을 보충했습니다.
@도솔산인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