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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흉계를 꾸며서 예수를 죽일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2. 그런데 그들은 "백성이 소동을 일으키면 안 되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막14:1,2)
1 It was now two days before the Festival of Passover and Unleavened Bread.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were looking for a way to arrest Jesus secretly and put him to death.
2 “We must not do it during the festival,” they said, “or the people might riot.”
1.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흉계를 꾸며서 예수를 죽일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1 It was now two days before the Festival of Passover and Unleavened Bread.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were looking for a way to arrest Jesus secretly and put him to death.
*유월절
역사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소설을 읽는 사람은 작가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읽어내야 합니다.
매뉴얼을 읽은 사람들은 기계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 지식이 없으면 핸드폰을 그 많은 기능을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이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이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생의 길을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실은 기계의 사용법을 매뉴얼을 통해 알 듯이 이 역사의 계시를 통해서 사람 사는 법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핸드폰을 제 손에 들고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즉 실패가 보장된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지적하신 적이 있습니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3.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마16:2,3)
저녁노을을 보면서 내일 씨를 뿌릴지 수확을 할지 미리 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시대를 보면서 신앙인들은 제 삶을 대처할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가장 중요한 역사 경험은 바로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 땅에서 바로의 독재 밑에서 신음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애굽이라는 이방땅에서 살게 된 것은 가뭄 때문이었습니다.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400년 전에 그 나라에 간 것입니다.
가뭄에도 불구하고 애굽에는 곡식이 있었는데 더욱이 그들의 형제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요셉 덕에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잘 사나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죽게 생긴 것입니다.
살기 위해 간 곳에서 죽음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나라 바로 왕은 옛적의 요셉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진 것입니다.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다.
9. 그 왕이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수도 많고, 힘도 강하다.
10.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신중히 대처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수가 더욱 불어날 것이고, 또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그들이 우리의 원수들과 합세하여 우리를 치고, 이 땅에서 떠나갈 것이다."(출1:8-10)
독재자 바로는 그런 두려움에 인구정책을 한 것입니다.
16.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출1:16)
잔인한 일입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현명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바로의 정치적 이유로 살해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 비극을 두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소연을 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 하소연은 간절했습니다.
그런 고통이 없을 때는 그들의 호소에 그런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하소연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고 그에게 임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바로를 찾아가서 그의 백성들을 풀어 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전해들은 바로는 순종하기를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적이 반복될수록 바로의 백성들의 위기의식은 커져갔습니다.
다시 이르지만 바로가 하나님을 만만하게 보고 불순종을 한 것이 아닙니다.
7. 바로의 신하들이 바로에게 말하였다. "언제까지 이 사람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함정이 되어야 합니까? 이 사람들을 내보내서, 그들의 주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아직도 이집트가 망한 것을 모르고 계십니까?"(출10:7)
한 번 두 번 기적이 반복될 때마다 바로 역시 하나님을 실감해 가고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 순종을 주저한 것입니다.
‘노예들이 사라지면 누가 빨래해주고 벽돌은 누가 만든다는 말인가!’
물론 그 경우 불편할 수는 있습니다.
경제적 불이익을 당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는 어리석었습니다.
현실 보장을 위해 죽음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는 히브리인들을 풀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 사건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13. 문틀에 피를 발랐으면, 그것은 너희가 살고 있는 집의 표적이니,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그 피를 보고 내가 너희를 치지 않고 넘어갈 터이니, 너희는 재앙을 피하여 살아 남을 것이다.
14. 이 날은 너희가 기념해야 할 날이니, 너희는 이 날을 주 앞에서 지키는 절기로 삼아서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켜야 한다.(출12:13,14)
문설주에 바른 피를 확인하고 재앙이 그 히브리인의 집을 유월해 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에게는 탁월한 윤리 의식이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만 살아남았던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과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 양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경험을 대대로 후손에게 전해서 기념해야 합니다.
다시 역사의 교훈을 되돌아본다면 이것입니다.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과연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 것인가?
그 유월절의 사건은 오직 바로 왕 때에 히브리인들이 출애굽을 하는 중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세대를 걸치면서 기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약속 때문이다.
우리의 선행 때문이 아니다.
양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신앙 안에서 그 일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죽으셔야 했는가?
첫째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읽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주일마다 모여서 주님을 기억하는 것을 알겠는데 “믿쉽니다. 세상보장!” 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제대로 기억한 것이 아닙니다.
그 교훈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영생의 보장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 번의 재앙을 경험하고도 초지일관하여 제 현실의 보장을 억지 부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였고 그들은 모조리 홍해에 빠져죽은 것입니다.
생명을 보장하시는 양의 피를 통해 그리스도를 읽어내는 일일 것입니다.
둘째로 이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 1년에 한 번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보여서 반복해서 이 일을 기념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 이 교훈을 적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세 때의 이 유월절의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소명을 읽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소명을 따라서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죽으심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의 예언은 아주 구체적이셨습니다.
그 분의 죽으심 뿐 아니라 그 적대 행위의 주체자들까지 명시하신 것입니다.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 뒤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막8:31)
그들은 장로, 대제사장 또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주님의 예언은 영적으로 탁월하셨던 그 분만의 초역사적 성격의 것이 아니셨습니다.
주님께서 깊은 명상에 잠기셨더니 장로와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망치를 들고 와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는 환상을 보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30세의 주님은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을 충분히 경험하신 것입니다.
추악한 그들을 수없이 접하신 것입니다.
그 경험하신 후에 예수께서 내리신 결론인 것입니다.
‘이들이 나를 죽일 자들이구나.’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그리스도를 죽일 충분한 내용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예언은 역사 경험을 기초로 한 결과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적대 행위의 주체자로 지명을 될 만큼 부정적인 내용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수없이 부딪혔던 것입니다.
*대제사장
지금 성경은 수천 년 전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인가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은 성경은 그 유월절의 사건이 바로와 모세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이 2,000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거창의 우리의 현재를 다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는 주전 14-13세기의 그 사건을 통해서 여러분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 여러분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은 의인으로 앉아서 죄인 된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식으로 말씀을 듣고는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의도를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성경은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을 통해 여러분을 지적하는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치 소풍간 돼지들처럼 제 이름은 다 빼고 대제사장 한 명, 나는 빼고 율법학자 두 명, 우리 교회 교인들은 빼고 장로 세 명,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당시의 율법학자나 대제사장보다 우월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운 행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로운 행실보다 낫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5:20)
함부로 그들은 판단한다면 아주 착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신칭의의 믿음을 따르지만, 그들은 율법주의였다고 정답을 간단히 말하지만, 실은 기독인을 자칭하는 우리 안에 다양한 형태의 율법주의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2.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3.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1-3)
남들을 통해서 나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재앙을 쌓는 사람입니다.
실은 남의 티를 통해서 내 눈 안의 들보를 보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성경이나 설교가 주목하는 대상을 잃은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대제사장이나 율법학자를 통해 여러분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의 등장인물들은 여러분을 주체로 세우기 위한 들러리입니다.
예수님의 적대의 사건에서 첫 번의 등장인물은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대제사장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실을 실감나게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한다고 한두 명을 앉혀두고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한 명이 꺼져가는 등불로 여겨졌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 교회 든든한 개척멤버가 세워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죽을힘을 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성경공부 도중에 “목사님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또 다시 개척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했습니다.
그 때 정말로 화가 치밀었습니다.
당시 나는 개척은 단연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교회가 있는데 또 다시 내가 교회개척을 해야 하는지 나는 미처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솔직한 고백인데 그것은 목사인 내가 생각하기 두려운 주제였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 분의 질문에 동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목사이고 개척은 나에게 현실적 대안이었을 뿐입니다.
당시의 대제사장들은 예수님께 화를 내면서 당신의 권위의 출처를 대라고 따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성전은 하나님 임재의 현실 자체였습니다.
대제사장은 그 성전을 대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권위를 의심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이미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권위에 대한 엄청난 도전을 하셨습니다.
16. 비둘기 파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거둬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요2:16)
예수님은 감히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고발하신 것입니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였다.(요2:19)
성전 뜰에는 비둘기가 퍼떡거리고, 양들이 놀라서 달려가고, 동전이 마당에 엎어져 있고.......
대제사장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무지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철저한 유신론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신앙의 최고의 전문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의심 없는 하나님의 권위를 근거로 그리스도를 죽이려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죽이려 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들의 대제사장으로써의 권위의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의 권력 보장이라는 현실 문제를 인해서 신학을 적용했던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그들 안에 성전의 권력이 우상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충격적이게도 신앙은 그 거룩한 성전이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억 대의 교회가 무너져버리는 그 부정에서 진정한 신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이 사건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의 내용은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부정입니다.
*율법학자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려 등장한 두 번째의 인물은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성경에 박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신앙생활을 했는지를 잘 설명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2.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 보고 있었다.
3.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4.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막3:2-4)
안식일이 되자 그들은 그들의 안식법을 가감 없이 적용했습니다.
그 기계적 적용에 몰두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손이 마르든지 중풍으로 몸이 흔들리든지 사람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에게는 손이 오그라든 이 사람에게 그의 인자를 베푸시는 것이 중요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법의 근원적 동기가 중요하신 것입니다.
1.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크신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3. 모든 주 가운데 가장 크신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4. 홀로 큰 기적을 일으키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5. 지혜로 하늘을 만드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6. 물 위에 땅을 펴 놓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7. 큰 빛들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8. 낮을 다스릴 해를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9. 밤을 다스릴 달과 별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0. 이집트의 맏아들을 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1. 이스라엘을 그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2. 이스라엘을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이끌어 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3. 홍해를 두 동강으로 가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4.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5. 바로와 그의 군대를 흔들어서 홍해에 집어 넣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6.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7. 큰 왕들을 치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8. 힘있는 왕들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19. 아모리 왕 시혼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0. 바산 왕 옥을 죽이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1. 그들의 땅을 유산으로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2. 그들의 땅을 자기의 종 이스라엘에게 유산으로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3. 우리가 낮아졌을 때에, 우리를 기억하여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4.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건져 주신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5.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주시는 분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26.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시136편)
한 발자국 마다 한 번의 호흡마다 전제되어야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사랑 즉 그 인자하심입니다.
주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
목적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
동사도 하나님의 인자하심.......
우리의 그 모든 종교 행위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전제를 잃은 종교 행위들은 바울의 지적대로 괭가리의 소음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전문가들의 무자비한 율법의 적용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죽음
그들은 예수님과 타협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 버릴 궁리를 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 그것입니다.
남을 죽이고 자신이 사는 것입니다.
핵으로 탱크로 비행기로 남을 죽일 무기로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죽음에 대해 우리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반대의 고민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죽음을 어떻게 수용할 것이냐를 가지고 고민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죽이겠다는 것이고 주님은 당신께서 죽임을 당하시겠다는 것입니다.
34. 그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
35. 그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서,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14:34-36)
그 분의 괴로움이란 자신의 죽으심을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꾸만 당신이 살려고만 하는 자신이 괴로우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남을 죽이는 것이 그들의 생존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수용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죄인들은 180도로 다른 죽음에 대한 동기를 가지고 같은 목표 십자가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곳은 인간의 죄악의 성취이며 예수님의 구원의 장소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이 아니라 성취의 방식이 그것입니다.
실은 당시의 악한 사람들이나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은 일치했던 것입니다.
다만 죽음이라는 그 방식에서 완전히 반대의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의 그럴듯한 명분에 속으면 안 됩니다.
그 마귀의 방식에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옳은 명분을 내세우지만 목적을 위한 전혀 다른 방식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의 방식을 택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겟세마네에서도 이 죽음을 받아들이시는 일을 두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죽으심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
첫째.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영생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요구하시는 의 때문에 주님은 그 분의 죽으심으로 사람들의 죄를 속하시는 속죄물이 되신 것입니다.
7. 아무리 갑부라 하여도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속량하지 못하는 법, 하나님께 속전을 지불하고 생명을 속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8. 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아무리 벌어도 마련할 수 없는 것,
9. 무덤에도 들어가지 않고 영원히 살지 않고서야 어찌 속전을 마련할 수 있으랴?(시49:7-9)
양과 염소를 통해 그 죄를 속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완전하신 주님만이 그 속죄물로써 충분하신 것입니다.
대속을 위한 죄 없으신 분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둘째. 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삶의 전형을 잃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 삶의 모델이 되신 것입니다.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막8:34,35)
즉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길을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셨던 대로 따라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꼭 따라야할 전형을 보이신 것입니다.
셋째. 죽음이란 복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다루는 주제는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영생을 표현하는 언어가 생명을 내어놓는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윤리의 유리조각을 모은다한들 생명의 다이아의 값에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영생을 사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생명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절대화된 우상은 죽음입니다.
어떤 사람도 이 죽음을 피해간 적이 없습니다.
이 우상의 세력을 타파를 위해서 주님은 그 죽음을 수용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절대화 될 수 없음을 주님은 죽음을 수용하심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다섯째. 우리의 살 길은 유일한데 그것은 믿음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뢰를 그 분의 죽음의 수용을 통해서 보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하나님께 믿음의 고백을 하신 것입니다.
46. 예수께서는 큰소리로 부르짖으시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셨다.(눅23:46)
즉 주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시면서 하나님께 절대 신뢰를 고백하셨던 것입니다.
여섯째.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인간 존재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법 없이 살 수 있다며 선한 척하는 사람만큼 가관이 없습니다.
주님은 죽으심을 통해서 인간 죄의 치명성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34.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한 뒤에, 아기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도록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을 받는 표징으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35.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꿰뚫을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품은 생각들을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눅2:34,35)
주님은 당신의 죽으심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품은 잔인한 생각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땅 끝까지 선교한다는 선교의 양적인 개념을 집착하지만 기복주의의 내용성을 땅 끝까지 전한다면 그것은 선교의 완전한 실패를 이르는 것입니다.
선교의 질적인 내용성이 결정적인 것입니다.
2. 그런데 그들은 "백성이 소동을 일으키면 안 되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2 “We must not do it during the festival,” they said, “or the people might riot.”
*정치와 종교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면서 가장 먼저 정치적 고려를 한 것입니다.
소동이 날까 고려한 것입니다.
실은 그들이 한 것은 정치 행위였습니다.
다만 가장 효과적으로 종교를 동원했을 따름입니다.
어떤 교회는 세일즈맨을 불러다가 전도를 시키고 그 댓가를 지불해 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경제 경영행위입니다.
다만 그 담임목사님은 종교를 경제행위에 이용한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강한 정치적 동기로 예수님께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분명하게 선을 그으신 것입니다.
15.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6:15)
하지만 악당들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그를 정치적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15. 그들은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우리의 왕은 가이사뿐입니다."(요19:15)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이사와 동일시 한 적이 없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그 짓거리를 했습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을 왕이라고 주장하심으로 가이사를 부인했다는 정치 사건을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야 그것이 선이 되었든지 악이 되었든지 말 그대로 정치적인 성취만 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그들의 정치 행위에서 일일이 선과 악을 따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군사 독재 시절 바로 그 경험을 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을 봅시다.
박정희의 살벌한 독재와 부딪히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 때에 목사님은 그 독재 정권을 향해서 무고한 사람 죽이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정치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사님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협박하였습니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 될 수 없습니다.
종교가 정치와 분리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책임에 눈을 감고 있는 가증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그처럼 고민하고 있는 것은 신앙적 동기가 아닙니다.
정치적인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이런 정치적 고려를 하면서 예수님을 죽일 날을 잡은 것입니다.
*유다
그런데 그들이 그 날에는 하지 말자던 그 날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갑자기 유다가 대제사장 앞에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그 일을 자청했으니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가 손쉽게 예수님을 잡는 일을 돕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다가 이런 일을 하기까지 그 원인을 더 따지자면 또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천한 여인이 삼백 데나리온이 나가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행위는 엄청난 낭비였습니다.
그것은 아주 비이성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지적한 사람을 유다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4.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장차 예수를 넘겨 줄 가룟 사람 유다가 말하였다.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요12:4,5)
유다는 이 천박한 여인의 당치않은 일로 흥분해서 곧바로 대제사장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넘겨주는 일에 자신이 앞 설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민중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가장 고려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민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재로 예수님을 통해서 나병도 낫고, 눈도 뜨고, 벌떡 일어나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게 되고.......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그 중에서도 충동적인 사람들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무리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추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모이는 유월절에 그 예수님을 건드린다면 민요가 일어나고 말 것이라고 염려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을병을 두고는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은 사실입니다.
삼 일을 굶으면서 그의 말씀을 경청하기도 했습니다.
또 병이 나을 때에는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서 제 생명이 오락가락하게 되는 경우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중에는 돌변해서 유다처럼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능력을 가지고 로마는 못 쳐부수나!
세리들을 끌고 다니는 것은 또 무슨 일이냐!’
아니면 대부분은 조용히 자신의 몸을 사리고 있었습니다.
그 열성적이던 무리들이 그렇게 쉽게 예수님의 죽으심을 모른 척할 줄이야!
베드로조차 맹세를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있습니다.
종교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얼마나 정치적 술수에 능한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수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뒤로는 로마인들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민중들은 그들이 당하게 될 잔인한 결과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사람의 계획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똑똑한 고려로 인해서 하나님의 시간표에 차질이 생기나 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 사람의 계획은 허사가 된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유월절의 그 날에 바로 그 속죄의 양이 되셔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드시고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31. 유대 사람들은 그 날이 유월절 준비일이므로,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그냥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그 시체들의 다리를 꺾어서 치워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안식일은 중요한 날이었기 때문이다.(요19:30,31)
그 강력한 지도자들의 결정이고 보니 그들의 뜻대로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날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주전 14-13세기에 미리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유월절의 그 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 날 바로 그 죽음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를 구속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은 뛰어야 벼룩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유월절의 속죄의 양이 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