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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
2023년 10월 1일 / 마 15:32-39
나다나엘 호오돈이 쓴 유명한 ‘큰 바위 얼굴’이라는 명작이 있다. 청소년들에게 널리 읽히는 책이다. 내용인즉 동네 뒷산에 있는 큰 바위 얼굴이 인자하게 생겼다. 언젠가는 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자가 동네에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 마을에 한 소년이 마을을 지키며 사는데 어느덧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릴 때 동네를 떠났던 사람이 유명한 시인이 되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자가 나타난다고 해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닮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저 바위 얼굴을 닮았다.’라고 외치는데 보니까 그 마을에서 아침저녁으로 칸 바위 얼굴을 보고 살았던 중년이 된 그 사람이었다.
바위 얼굴도 자꾸 보면서 닮기를 소망하면 닮는데, 하물며 우리가 닮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살아간다면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닮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 이 시간 닮고자 하는 마음은 긍휼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겉으로만 읽지 말고 속으로 ‘예수님을 만나며,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이었는가, 행동과 사건과 말씀 중에 예수님의 그 깊은 마음속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이런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특히 그런 중에 중요한 것은 비유로 말씀하셨다.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히브리식 표현으로 비유로 사건을 말씀하셨다.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고 있는 이야기, 잘 아는 이야기, 모두가 아는 이야기, 그런 사건을 말한다.
사건을 이야기로 말하면서 중요한 것은 픽션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넌픽션을 픽션화한 것이 예수님의 교훈 방법이었다고 신학적으로 정리한다. 넌픽션(nonfiction)을 픽션화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이다. 사건은 어디까지나 확실한 사건으로 이 사건의 속에다가 의미를 넣어서 픽션화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중에 아주 대표적인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이것은 그대로 비유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예루살렘에 왔던 사람이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를 만나 다 털리고 매까지 맞아 길거리에 쓰러져서 죽게 됐는데 이 비참한 모습을 성전에 올라가던 제사장이 보고 비켜 지나갔고, 레위 사람도 지나쳐 갔다. 그런데 저들이 무시하고 멸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지나치지 않고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아 주었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것이 만일에 만들어낸 이야기라면 예수님은 이 일로 인해 비난을 당해도 아니 처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제사장, 레위 사람 다 잘못했다는 것이다. 이네들이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자기의 직무를 위해 지나쳤다는 핑계를 앞세워 자기는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있다. 저들이 살인했는가? 간음했는가? 도적질했는가? 십계명에 걸릴 것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씀하시려는 것은 긍휼을 베풀지 않은 것이 잘못한 것이라는 말이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말이다.
그런고로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죄의 개념은 율법이 정하는 것, 피상적으로 정하는 것과는 다르다’라는 말이다. 제사장이 간음한 것도 아니고 살인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긍휼을 베풀어야 할 상황에 긍휼을 베풀지 않았다는 것이다.
▶ 탕자의 비유가 있다. 동생이 집을 나갔다가 재산을 다 없애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다. 아버지는 너무너무 기뻐서 잔치하며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형이라는 작자가 그런 모습을 보면서 혈기를 피우면서 당당하게 이런 말을 하며 대들었다. '아버지, 내게는 염소 새끼를 한 마리 주어서 내 친구들과 먹고 마시고 놀게 한 일도 없거늘 아 저놈 말이에요, 아버지 재산을 창기와 더불어 다 먹어버린 저 나쁜 놈이 돌아왔는데 왜 이렇게 크게 낭비하며 잔치를 하는 겁니까?'
형이 무엇을 잘못했을까?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 옳다고 다 옳은 게 아니다. 형은 돌아온 동생을 따뜻하게 대해준 아버지의 마음에 못을 박았다.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그런고로 이웃을 사랑⦁긍휼을 베풀지 않은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 죄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에게는 크리스토프라는 동생이 있었다. 그 동생은 투기에 성공해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베토벤이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동생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동생은 이렇게 편지를 회답했다. ‘오로지 형의 책임일 뿐입니다. 가난도 형님의 몫입니다.’ 형은 동생에게 회답을 했다. ‘너의 도움도 필요 없고, 너의 설교도 필요 없다. 끝.’
요일 3:16-18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많은 돈을 가지고 잘 지내면서 궁핍한 형제를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에게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18) 자녀들이여, 사랑한다고 혀에 발린 말을 인제 그만두고 진정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사랑을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줍시다.
■ 긍휼이란 / 성경에 보면 ‘긍휼’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많이 사용했다. 구약에서는 126회, 신약에서는 43회 사용했다. ‘불쌍하다’라는 단어는 구약에서는 20회, 신약에서는 24회 사용했다. 다소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와 ‘긍휼히 여기다’라는 의미는 비슷하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까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보고는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불렀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데 여기서 ‘불쌍히’라는 단어가 개역성경에는 ‘긍휼히’로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긍휼함’이란 단어와 ‘불쌍함’이란 단어의 의미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또한 개역성경을 읽다 보면 예수님이 환자를 볼 때 ‘민망히 여기셨다’라고 하면서 ‘민망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불쌍히’라고 번역한다. 영어 성경은 ‘compassion’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영어 성경에 보면 ‘불쌍히’, ‘긍휼히’, ‘민망히’라는 단어를 'compassion'과 ‘mercy’였다.
본문 말씀에서는 ‘불쌍히 여기다’로 되어 있지만, 긍휼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에 대해 찾아본다.
‘긍휼’이란 말은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 성경에서는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와 ‘동정’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의 번역어로 쓰였다. 그런데 ‘라함’이라고 하는 ‘긍휼’이라는 어원이 너무 재미있다. 그 어원은 ‘렉헴’이라고 한다. ‘렉헴’이란 단어는 ‘여인들의 자궁’을 의미한다. 즉 ‘자궁’이 ‘긍휼’이라는 말이다. 그 속에서 생명이 자라고, 얻어먹고, 물속에 떠 있다. 가장 안전한 곳 이것이 긍휼이다. 이것은 사랑이지만 특수한 사랑이다. 이 긍휼은 새가 먹이를 물어와서 토해서 새끼에게 먹이는 그 모습을 ‘렉헴’이라 한다.
그래서 앞에서 보았듯이 긍휼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많이 사용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도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성도는 바로 ‘긍휼이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긍휼이 여긴다는 것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한 것이다.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이 부담 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죽을죄를 지었음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용서해 주는 마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과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길이 없다. 그런데 긍휼함을 받기 때문에 구원도 받고 복도 받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었다는 것, 하나님의 자비와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경우는 애굽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신 은혜를 의미한다. 죄인된 우리 모두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면서까지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로마의 식민지 폭압에서 주권을 잃어버리고 절망하며 살아가는 예루살렘 백성들을 바라보시면서 안타까워 눈물 흘리신 것은 예수님의 긍휼하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 본문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다. 그러나 … .
일명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사건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군중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 ‘불쌍히 여기사’이다. 그들이 이미 예수님과 함께 지낸 지가 3일이 되었다고 하였다. 4천 명이 넘는 이 많은 군중을 무엇을 가지고 먹일 것인가 걱정이다. 이미 먹을 것이 다 떨어졌다. 예수님의 걱정은 이들이 자신들의 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기진하여 쓰러질까 염려됨으로 굶겨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마음이 바로 긍휼의 마음이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의 먹을 것을 광야에서 얻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라는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무리를 향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는 떡 일곱 개와 생선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했더니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은 일곱 광주리나 되었고, 여자와 아이 외에 4천 명이 먹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오직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그분의 긍휼함이 없으셨다면 우리가 감히 어떻게 죄악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다. 예수님의 긍휼의 극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외치는 말씀이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도 십자가에 못을 박게 한 죄인들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는 그 마음이 긍휼한 마음의 극치이다. 이 모습을 본받은 사람이 바로 스데반 집사이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스데반 집사는 사울이 주동하는 세력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는 하늘문이 열린 곳을 향하여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기도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라고 기도하였다.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을 구약성경에서도 보여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곧 예수님을 예표하는 구약의 인물 중 가장 근접한 인물인 요셉이다. 요셉은 배다른 형님들의 질투심에 희생된 사람이다.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상인들에게 팔려 보디발이라는 군대장군 집에 종으로 팔려갔다. 거기서 잘 지내다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응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함을 받아 결국 감옥에 가서 고생했다. 그러다가 결국 흉년이 들어서 요셉의 형님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왔다가 이미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었던 동생 요셉을 만났다. 형님들은 애굽의 총리가 동생인줄 알았을 때는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워했다. 그렇지만 요셉은 형님들에게 보복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다. 가족들에게 배려해서 고센 땅에서 편히 살게 만들어 주었다. 요셉의 이런 행동이 바로 긍휼의 마음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요셉처럼 예수님의 긍휼하신 마음을 닮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함을 입기 위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긍휼함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사람들로부터는 긍휼함을 받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긍휼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일찍이 공자 선생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종교의 시작이다.’ 그렇다.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생명체를 불쌍히 여겨 건져내어 주는 마음이 없다면, 난관에 부닥친 사람을 내가 당한 것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겠는가? 측은히 여기는 마음에서 신앙이 비롯된다면 특히 긍휼히 여기는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성도들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성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은 누가복음 18장에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를 비웃는 바리새인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래서 야고보서 2:13에 보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라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 없는 심판을 받는다면 여기 구원받을 자가 있을까? 우리가 긍휼한 삶을 살지 않으면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은 구원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18:35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리고 마태복음 9:13에도 보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라고 하시며 긍휼을 배우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단순한 예배의식 행위 자체만을 좋아하시지 않고 오히려 말씀에 순종하여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적이라 할지라도 곤경한 처지에 놓였으면 도움을 주는 삶을 원하신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 중에 달란트 비유가 있다. 이 비유는 용서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하신 말씀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일만 달란트 빚 진자를 탕감해 주었는데, 1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는 집에 돌아가서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불러서 그 돈을 갚아지라고 했다. 그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는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잠깐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막무가내로 빚을 갚지 않으면 옥에 가두어 버린다고 윽박질렀다. 이 사실을 사람들이 보고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1만 달란트 탕감해 주었던 사람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했을 때 듣고 있던 부자가 그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말한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기에는 이론이 필요하지 않다. 무슨 보상이 필요하지 않다. 이미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긍휼을 받아 용서받고 죄사함을 받아 아들이라 칭함을 받은 자로서 산다면,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무조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주님의 긍휼하심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사시기 때문이요,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무궁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시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다. 그리고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하늘에서 날마다 만나를 내려 먹이시며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셔서 광야생활을 인도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 불평하며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는 등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은망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끝까지 붙드시며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 느헤미야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억하며 이렇게 고백하였다. 느헤미야 9:17-31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교만하여 불순종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사 곤고를 당하게 하시거나 대적들에게 붙이셨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면 그 때마다 긍휼을 발하시어 구원하시고 평강을 얻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긍휼이 크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고 버리지도 아니하셨다. 여러 해 동안 용서하시고 영원히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
이런 하나님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달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말씀들을 외면하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도록 하자.
결론으로 긍휼하심을 입은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들
우리를 어렵게 하고 비난하고 핍박한 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마 5:39-48 /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네 한쪽 뺨을 때리는 사람이 있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대라. 40)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 41) 비록 가고 싶지 않더라도 누가 너더러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0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43) 또 모세의 율법에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이 있다. 4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46)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슨 미덕이 되겠느냐? 세리들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47) 만일 너희가 너희 이웃들과만 가까이 지낸다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느냐? 이방인들도 그렇게는 하고 있다. 48) 그러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
약 2:13-17 /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적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돈 때문에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 롯의 아내처럼 될까 염려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도취하여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지옥의 길로 멸망의 길로 가는 자들을 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내게 천국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믿는다는 이름은 있지만, 영혼이 헐벗고 굶주린 자를 긍휼히 여겨야 한다. 나를 대적한 사람이라도 그들이 도움을 받아야 할 형편에 처해있다면 그들을 돕는 것이 긍휼한 마음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 자체가 우리 인간에 대한 긍휼하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야 하며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긍휼의 마음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긍휼함을 나타내는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잠언 25:21-22 /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 그리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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