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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항검
전라도의 사도
1754〜1801,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전주에서 능지처참
유항검(撕I亘儉. 아우구스티노)은 1754년 전북 와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 부락에서 아버지 유동근(柳東根)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진주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유갑춘(柳甲春)이고 외할아버지는 권기징(權沂徴)으로. 본가와 외가가 모두 당대의 남인 명문 세족이었다.
유항검은 문벌만 좋은 양반이 아니라, 줄잡아 15,000마지기가 넘는 광활한 토지를 소유한 호남의 대부호였다, 그의 토지는 금구, 김제. 만경, 여산 등 10개 고을에 산재해 있었고, 초남리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다 만나는 용지면 들판은 거의가 그의 땅이었다.
그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과 1786년에 죽은 형 익검(益儉)의 농토까지 물려받음으로써 재산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리하여 1801년에 체포된 그의 일꾼만 해도 마름 4명, 소작인 2명, 노(奴)4명, 비부(婢夫)7명, 비(婢) 3명이었으니. 농지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대의 석학들이 깊이 빠진 신학문
유항검은 모든 양반이 그러했듯이 지역 사회에서 확고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높은 지도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과거에 합격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금구에서 실시한 향시에 응시한 적도 있었지만, 곧바로 과거의 뜻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사회 변혁을 꿈꾸며 당시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학자들처럼 새로운 학문을 찾고 있었다.
1784년 가을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 집에서 권철신과 그의 문하생들이 서학을 탐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유항검은 어머니 쪽으로 보면 권철신과 같은 피붙이일 뿐만 아니라 이종사촌인 윤지충을 통하여 이벽, 이승훈, 정약전과 인척간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양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당대의 석학들이 깊이 빠진 신학문이라면 배우고 따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권철신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십자고상과 천주교 서적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때 권철신의 동생 일신은 갓 세례를 받고 선교열에 불타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그가 스스로 자기 집을 찾아온 유항검을 놓칠 리 없었다. 권일신은 유항검에게 천주교 교리와 신자의 본분 등을 가르쳐 주었고, 유항검은 그의 가르침에 감동하여 신비스런 기운마저 느꼈다고 한다. 그는 하느님과 영원한 사후의 세계. 인간과 우주의 창조, 세상의 종말과 심판, 인생의 목적, 사람답게 사는 길을 알게 되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혁할 진리의 길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유항검은 권일신이 가르쳐 준 천주 신앙에 주저 없이 승복하였다. 그리고 그를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유항검은 전라도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었고, 그의 고향 초남리는 호남 지방교회의 1번지가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항검은 복음 전파에 나섰다. 그는 마음 놓고 선교 활동을 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체험한 신앙의 기쁨을 침묵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먼저 자기 가족과 친척, 친지 그리고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노비들. 토지를 관리하고 있는 마름과 소작인들. 문전 식객 등 서로 마음과 뜻이 통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은밀하게 선교하기 시작하였다.
불법적인 성사 집전을 중단하라
한국 교회는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신자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네다섯 곳에서 박해가 일어나 10여 명이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하였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자 수가 날로 늘어나자.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효율적인 선교와 신자들의 신앙을 지도할 대책을 세워야만 하였다.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이를 위해 1786년 봄에 이른바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세웠다. 그리고 이승훈에게 견진성사 집전과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승훈은 권일신, 홍낙민, 최창현, 이존창, 유항검 등 10여 명을 신부로 임명하고 같은 권한을 부여하였다.
유항검은 신자 대표들의 결의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와 미사를 집전하며 성무 활동에 전념하였고, 이종 사촌인 윤지충의 집에 자주 모여 동생 유관검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였다.
그러던 중 1787년 봄, 유항검은 밤낮으로 많은 책들을 섭렵하던 가운데 《성교절요》(聖敎切要)라는 책에서 전율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제직은 인호(印號)를 박아 주는데, 인호가 없는 사람이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무서운 독성 죄가 된다는 것이었다.
유항검은 가성직단의 모임에 참석하여 불법적인 성사 집전을 중단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가성직자들은 성사를 집전하는 행위가 불안하기는 하지만, 선교사들의 결정이 올 때까지 미사를 계속 집전하자는 외견이 지배적이었다. 유항검은 가성직단의 우두머리인 이승훈의 권위를 존중하여 그의 결정에 따라 미사를 계속 드리면서도 이승훈의 권한 행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집으로 돌아온 유항검은 이번에는 미사 예식을 한국 실정에 맞게 고쳐 볼 요량으로 미사 전문을 검토하였다. 그러던 중 교황 그레고리오 성인이 미사 전례를 제정한 후 교회는 1천여 년 동안 이를 준수해 왔으며, 감히 어느 개인이 예식서 내용을 첨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성품 성사의 인호가 없는 사람이 성체를 축성하면 독성 죄를 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유항검은 이승훈에게 사제 직무를 중단하도록 다시 한번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무지 때문에 저지른 잘못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부당한 행위임을 명백히 알고도 계속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기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하루빨리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할 밀사를 파견하도록 촉구하였다.
이러한 유항검의 제안에 따라 교회의 지도자들은 1788년 무렵 성사 집전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성사가 중단되자 신자들은 의지할 데를 잃고 매일같이 고통과 불안한 나날을 보내며 밤낮으로 구원받기를 갈망하였다. 이에 이승훈은 서둘러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려 하였으나, 국경의 감시가 삼엄하고 박해가 잇따랐다. 게다가 신자들이 워낙 가난해서 경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밀사 파견에 드는 경비 헌납
1789년 조선 교회의 성직 단은 유항검이 요청 한 대로 권일신의 제자인 윤유일을 밀사로 선발하여 북경에 파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밀사 파견에 드는 경비는 유항검이 헌납하였다. 은화 20냥으로 동지사 일행의 수행 상인 자리를 사서 10월에 북경으로 떠난 윤유일은, 1790년 1월 30일 이승훈, 권일신이 쓴 편지와 유항검이 가성직 제도의 부당함을 지적한 편지를 북당의 로(N.j.Raux,羅廣祥) 신부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그 편지들은 다시 남당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해졌다.
1790년 5월 윤유일이 두 번째로 북경에 파견되었을 때 조선 교회는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유교의 제례 의식에 관해 질문하였다. 당시 조선의 양반들은 조상 제사를 국교처럼 신앙화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구베아 주교는 “사람이 죽은 후에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답변하였다.
유항검, 관검 형제는 윤유일과 절친한 사이였으므로 당연히 이 소식은 곧바로 유항검에게도 전해졌다. 맏형 익검이 1786년에 사망하고 말아 제사 상속권을 물려받게 된 유항검은 이때 사당을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지시를 듣고는 신주들을 조상들의 묘 옆에 묻어 버렸다.
그러던 중 1791년 그의 이종사촌인 윤지충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죄로 처형되자 유항검은 재빨리 피신하였다. 거의 7개월 동안 피신해 있던 유항검은 결국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배교하고 풀려났다. 그렇지 만 유항검의 집에는 아직도 수십 권의 교회 서적이 남아 있었다.
또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회개하겠다던 그의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훗날 포도청의 심문에서 1791년에 자수했을 때는 입술로만 배교하는 척했지 진심으로 배교 하지는 않았다고 실토하였다.
1795년 4월 5일은 부활 대축일이었다. 이날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주문모 신부에 의해 하느님께 미사가 봉헌된 감격적인 날이었다. 이것은 그렇게도 갈망했던 성직자 영입에 따른 결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감격은 전라도에도 이어져, 주문모 신부는 5월에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 사목 방문에 나서 전주 초남리의 유항검 집에서 일주일쯤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서울로 올라온 주문모 신부는 1795년 8월(혹은 7월) 유항검,관검 형제에게 편지를 보내, 전라도 신자들이 주축이 되어 북경 주교에게 조선에 서양의 큰 배를 보내 주기를 청원하도록 하였다. 사제가 없는 교회를 상상할 수 없었던 유항검은 선교사의 신변이 보장되고 선교 활동과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진정서를 쓰게 되었다. 그리고 진정서 끝에는 유항검, 유관검, 유중태, 윤지헌, 최창현, 황사영 등이 연대 서명을 하였다.
유항검은 주 신부의 요구대로 북경에 파견할 밀사로 연산에 살고 있던 황심을 추천하였고, 동생 관검과 조카 유중태와 함께 은화 400냥을 거두어 밀사의 활동비로 기꺼이 헌납하였다.
봉헌의 삶 속에서 선교의 자유를 꿈꾸다.
유항검, 관검 형제는 서양 선박 청래(請來) 운동을 추진하면서 점차 의식이 바뀌어 갔다. 서양 선박을 선교사 영입의 수단에 그치지 않고 서양의 과학 문명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단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서양 문명을 수용하는 것이 진정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면, 이를 받아들여 쇄국 정책을 깨고 신문화를 향유하며, 인재 등용의 제도 등을 개선하여 사회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특히 1798〜1799년 두 해 동안 충청도의 박해로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순교하자, 유관검 같은 인물은 무력으로라도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고자 하였다.
그는 당시 민중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왕국 건설을 천주교의 힘을 빌려서 이루고자 꿈꾸었던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유관검에게서 나왔지만, 형인 유항검이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유항검은 민중과 함께하는 봉헌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상민을 천대하고, 소작인들을 착취하던 여느 양반들과는 달랐다. 민중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민중들이 품고 있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었다. 그는 이미 만금(萬金)의 재산을 가진 부호라는 생각을 버렸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을 하느님께 대한 보은 행위로 여긴 유항검은, 평소 맏아들과 며느리에게 때가 되면 재산의 한몫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그는 자기 재산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께로부터 위탁받은 재산을 하느님이 필요한 곳에 주도록 명해서 전달할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유항검은 사도적 열성과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모범을 보였다.
사회의 법도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양반 신분이라는 생각을 이미 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노비와 비부에 이르기까지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가난한 이웃에게 정을 베푸는 나눔의 생활을 가정의 생활신조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여느 양반들이나 부호와는 달리 노비와 소작인들로부터 인격적인 존경을 받았다.
사학의 괴수, 체포되다.
열한 살의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는 1801년 1월 10일 박해령을 내렸다. 그리고 포도청에서는 전라 감사 김달순에게 호남의 사학 괴수인 유항검을 체포하도록 비밀리에 지시를 내렸다. 이가환, 이승훈에게서 시작된 박해의 불길이 전라도 유항검에게로 옮겨붙으면서 박해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3월에 유항검의 집을 급습한 포졸들은 그가 과연 사학의 괴수인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먼저 신주를 모신 사당부터 조사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신주 독은 비어 있었고. 많아 빠진 상자 속에 넣어진 신주는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리하여 유항검은 체포되었고. 즉시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유항검은 포도청의 1차 신문에서, 신주를 폐기한 것과 자기와 교분이 있던 인물로 권철신, 윤지충, 최필공, 최필제 등을 말하였다. 그러면서 “이몸이 비록 주리형(周牢刑)에 죽을지라도 이 밖에 따로 친한 사람이 있어서 왕래한 곳은 없습니다”라고 하며. 시종일관 산 사람의 이름은 피하고 죽은 사람의 이름만 대었다.
그러나 매 앞에 장사 없다고, 유항검은 포도청의 2차 신문과 3차 신문에서는 형관이 묻는 대로 털어놓았다. 그는 주문모 신부와 자주 편지를 주고 받았고, 주 신부와 이승훈, 권일신, 홍낙민과 함께 서양 선박을 요청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말하였다. 또 주 신부가 요청하여 밀사 파견 경비로 동생 유관검과 조카 유중태와 함께 400냥을 거두어 내놓았으며, 주 신부가 시키는 대로 북경 주교에게 서양 선박을 보내 달라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연대 서명해서 보낸 사실을 실토하였다.
형조로 이송된 유항검에게 형관은 동생 관검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고 하며 이들을 역모(逆謀)로 몰아갔다. 유항검은 더 이상 숨기고 말 것도 없지만 포도청에서 진술한 내용을 반복하였다. 유항검의 선교사 영입과 대박 청래의 계획이 포도청과 형조에서 밝혀지자 유생과 벼슬아치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 ‘대박 청래 일장 판결’(大舶請來一場判決)이라는 여덟 글자의 흉언(凶言)은 천지 고금에도 듣지 못했고 있지도 않았던 대 변괴이다, 흉악하고 패려 하다,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다, 모골이 송연하다. 천고에 없던 변란이다. 황건적, 백련교의 변란이다”라는 등 온갖 험한 악담이 쏟아졌다.
유항검은 성격이 온순하고 침착하면서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집권자들의 의지가 자신을 대역 부도 죄로 몰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 (義)가 더 중요하므로 모든 것을 하느님 손에 맡기고 목숨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다시 의금부로 옮겨진 그는 형관들이 원하는 대로 형조에서 묻던 말을 반복하여 진술하였다.
의금부는 유항검의 자백대로 판결문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9월 12일 유항검을 비롯하여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김유산 등 죄인 다섯 명을 전라감영으로 보내어 즉시 처형하도록 함으로써, 9월 17일(양 10월 24일) 유항검은 마흔일곱의 나이로 유관검, 윤지헌과 함께 능지처참되었다.
죄수들은 목이 잘리고 사지는 수레에 묶여 사방에서 잡아 당겨져 여섯 토막이 났다.
사형 집행 장소는 윤지충, 권상연이 처형되었던 풍남문 밖으로, 지금의 전동성당 터이다. 이곳은 중진영(中鎭營)과 가까운 곳으로. 전시 효과를 거두기에는 가장 좋은 장소였다. 유항검 등 다섯 죄수의 시체는 며칠 동안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방치해 두었다. 그리고 잘려진 유항검의 목은 풍남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누각에 매달았는데, 이는 천주교를 믿으면 이렇게 처참히 죽고 만다는 경각심을 울리는 종이 되었다.
유항검은 순교자인가
"유항검은 순교자인가" 하는 의문이 남아 있다. 그 까닭은 1874년 파리에서 간행된 이후 한국 교회사의 정사(正史)로 인정받고 있는 샤를르 달레의《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유항검을 배교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가 당해야 했던 심문의 상세한 점은 알 수 없으나, 불행히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마음 약하게도 배교한 것 같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다블뤼 주교는 그의《조선 순교사 비망기》에 달레와는 다르게 기록하였다. "전라도 선교에 열심히 하였던 유항검은 배교했다고 추측되는데. 이 사실은 대다수의 사람에 의해 부정되므로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유항검은 포도청의 1차 심문에서 “1791년 신해 박해로 윤지충이 처형된 후, 7개월 동안 피신해 있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뉘우치는 말을하고 석방되었으나, 진실로 천주교를 떠났던 것은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후 여러 차례 신문을 받았으나 그는 어디에서도 ‘하느님을 배반한다'거나 ‘천주교를 믿은 것을 뉘우친다는 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순교한 후 전주지방 신자들은 유항검을 ‘치명 성인’이라고 불렀다. 1909년 전주 본당 보두네(EX.Baudounet,尹沙勿) 신부와 신자들이 유항검의 죄를 신원(伸寃)하고 적몰된 재산을 찾고자 하였을때. 뮈텔 주교에게 협조를 의뢰하는 공문에 “치명 성인 유항검 신원한 후 적몰한 전토(田土)환추사(還推事)에 대한 사실"이 라고 썼다. 전주지방 신자들은 이미 유항검을 치명 성인이라고 부르며 공경하였던 것이다.
신자들은 배교자와 순교자를 엄격하게 따지는 전통이 있었다. 만약 전주지방 신자들이 유항검을 배교자로 생각하였다면, 그의 유해를 현재 전주 치명자산에 있는 유항검의 가족 7인의 묘 안에 합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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