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호당집(韶濩堂集) 김택영(金澤榮)생년1850년(철종 1)몰년1927년자우림(于霖)호창강(滄江),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 운산소호당주인(雲山韶濩堂主人)본관화개(花開)특기사항황현(黃玹), 이건창(李建昌), 중국인(中國人) 장찰(張詧)ㆍ장건(張謇) 형제(兄弟) 등과 교유
韶濩堂詩集定本卷六 詩文集總名曰合刊韶濩堂集○花開金澤榮于霖著 / 丙辰稿 / 和沈耻堂 相福
楚楚人間沈隱侯。百年書史一燈篝。忽逢亂世將何適。滿把深情向我投。王粲樓中春寂寂。秦皇橋外海悠悠。若爲共訪田橫島。落日招魂痛飮休。
1楚楚人間沈隱侯。 1◐●◐○◐●◎ 2百年書史一燈篝。 2◐○◐●●○◎ 3忽逢亂世將何適。 3◐○◐●○○● 4滿把深情向我投。 4◐●◐○◐●◎ 5王粲樓中春寂寂。 5◐●◐○○●● 6秦皇橋外海悠悠。 6◐○◐●●○◎ 7若爲共訪田橫島。 7◐○◐●○○● 8落日招魂痛飮休。 8◐●◐○◐●◎ |
*측기식* 1◐●◐○◐●◎ 2◐○◐●●○◎ 3◐○◐●○○● 4◐●◐○◐●◎ 5◐●◐○○●● 6◐○◐●●○◎ 7◐○◐●○○● 8◐●◐○◐●◎ | *평기식* 1◐○◐●●○◎ 2◐●◐○◐●◎ 3◐●◐○○●● 4◐○◐●●○◎ 5◐○◐●○○● 6◐●◐○◐●◎ 7◐●◐○○●● 8◐○◐●●○◎ |
소호당시집 제6권 / 병진고(丙辰稿) / 심치당 상복 에게 화답하다〔和沈恥堂 相福〕
인간 세상에 아름다운 심은후여 / 楚楚人間沈隱侯
일생토록 서사를 등불 켜고 읽었다오 / 百年書史一燈篝
홀연히 난세 만나 어디로 가려는가 / 忽逢亂世將何適
깊은 정을 온통 다 나에게 쏟는다오 / 滿把深情向我投
왕찬루 안에는 봄날이 적적하고 / 王粲樓中春寂寂
진황교 밖에는 바다가 유유하네 / 秦皇橋外海悠悠
만약 전횡도에 함께 가 보려고 한다면 / 若爲共訪田橫島
지는 해에 혼을 불러 통음은 하지 말게 / 落日招魂痛飮休
[주-C001] 병진고(丙辰稿) : 1916년, 김택영이 67세 되던 해에 지은 작품들이다.[주-D001] 심치당(沈恥堂) : 심상복(沈相福, 1876~1951)을 말한다. 자는 경회(景晦), 호는 치당(恥堂),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심완(沈浣)의 아들이다. 관찰사의 추천으로 벼슬에 천거되었지만, 처한 시대가 한말의 혼란기라 세도(世道)가 나날이 그릇되어가는 현실을 개탄해서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유학의 가치를 천명하고 실천하는데 온힘을 다 쏟았다. 저서로는 《치당집》이 있다.[주-D002] 심은후(沈隱侯) : 남조(南朝) 제(齊)나라 문인 심약(沈約)을 말한다. 그의 시호가 은후(隱侯)이다. 심상복을 심약에게 비겨서 한 말이다.[주-D003] 왕찬루(王粲樓) : 중선루(仲宣樓)의 별칭이다. 중국 호북성(湖北省) 양양성(襄陽城) 동남 모퉁이 성벽에 있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왕찬(王粲, 177~217)이 동탁(董卓)의 난리를 피해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지하고 있을 때,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 고향을 생각하며 진퇴 위구(進退危懼)의 정을 서술한 〈등루부(登樓賦)〉를 지은 적이 있어서 세운 것이다.[주-D004] 진황교(秦皇橋) : 진교(秦橋)의 별칭이다. 중국 산동성(山東省) 위해시(威海市)에 그 유적이 있다. 진 시황(秦始皇)이 동쪽 지방을 순수할 때, 성산(成山)에 와서 바다를 건너 해 돋는 곳을 보려고 만들었다는 석교이다. 진 시황이 돌다리를 놓으려고 할 때 해신(海神)이 나타나서 다리 기둥을 세워 주었다. 진 시황이 이를 고맙게 여겨 만나 보려고 하자, 해신은 자기의 모습이 추하니 그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만나겠다고 하였다. 진 시황은 그렇게 약속을 하고 들어가 해신과 만났는데, 좌우의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발로 몰래 그 모습을 그리자, 해신이 자기와의 약속을 어겼다고 성을 내면서 빨리 나가라고 하였다. 진 시황이 말을 돌려 나오는데, 말 뒷다리가 석교와 함께 무너져 겨우 해안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藝文類聚 卷79 靈異部下 神》[주-D005] 전횡도(田橫島) : 중국 산동성 즉묵현(卽墨縣) 동북쪽 바다 속에 있다. 전횡(田橫)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 종실 전씨(田氏) 일족이다. 진(秦)나라 말기에 형 전담(田儋), 전영(田榮)과 함께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제나라를 일으켰다. 전담과 전영이 죽은 뒤 전영의 아들 전광(田光)을 왕으로 삼고 재상이 되었다가, 유방(劉邦)의 장수 한신(韓信)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전광을 사로잡아 가자,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유방이 제위에 오르자 부하 500여 명을 데리고 바다로 가서 이 섬에서 살았는데, 제위에 오른 유방이 사람을 보내 백방으로 설득하여 불러들이려고 하였다. 전횡은 자신을 설득하러 온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나 낙양을 30리 남겨 두고, 자기가 처음에는 유방과 같이 남면(南面)하여 고(孤)를 칭했는데, 이제 북면(北面)하여 그를 섬긴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면서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섬에 남아 있던 500여 명의 부하들도 함께 자결하여 그 섬을 전횡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史記 卷94 田儋列傳》
ⓒ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정석태 (역)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