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 신겐 (武田信玄)
1521~1573
「남녀를 묻지 않는다」라는 정도로 도색으로 가득 찬 소년 시절, 아버지·다케다 노부토라는 자신과 너무 닮은 그의 격렬한 천성을 싫어해 동생·노부시게(信繁)를 편애했다. 그러나, 평소 불만이 많던 가신단과 백성들에 의해 추대, 쿠데타를 일으켜 가독을 상속하게 된다.
그 때부터, 아버지대부터의 염원이었던 시나노의 통일에 박차를 가해, 갖은 희생끝 결국 시나노 일국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데에 드디어 성공을 거두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런 그를, 비사문천의 화신·나가오 가게토라, 후의 우에스기 켄신이 앞을 가로 막게 된다. 신겐에게 영지를 빼앗긴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등이 카케도라를 의지해, 군세를 이끌고 카와나카지마에 출진한 것이다. 이것을 신겐도 맞받아 싸워, 후에 「카와나카지마의 전투(川中島の合戰)」라고 불리는 싸움이 5차례나 반복됐다. 특히 4 번째, 1561년의 것은 후에 전설을 만들어낼 정도로 격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는 한편, 뒤로 이마가와·호조와의 삼국 동맹을 체결하는 외교력도 구사했고, 우에노(上野)방면으로도 착실하게 영토를 늘려 나갔다. 그 즈음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에서 어처구니없게 패해 이 세상에 없게 되어 버리자, 그 요시모토를 쓰러뜨린 오다 노부나가와 혼인동맹을 결성. 우둔한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있는 스루가 공략을 결심, 이를 반대하는 이마가와가의 딸을 아내로 삼고 있는 적자·다케다 요시노부(武田義信)와 그 사부·오부 도라마사(飯富虎昌)을 죽이면서까지 공략을 강행,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공동작전으로 스루가 1국과 바다(!)를 얻었다. 그 후 요시아키로부터의 편지를 받은 것을 기회로 서상(西上) 작전을 시작,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의 연합군을 미카다 가하라(三方が原)에서 완파하지만, 신겐 자신의 몸에 병이 악화. 카이로 돌아오는 도중 시나노 코마바(駒場)에서 병사했다.
☞ 다케다 가쓰요리 (武田勝賴)
1546~1582
다케다가의 마지막 당주. 1546년, 신겐에게 모살된 스와 요리시게(諏訪賴重)의 딸이 어머니이다.
스루가 침공작전을 반대하는 요시노부가 유폐·할복 되고 나서 정식 후계자로 책봉이 되었다. 하지만 장군 요시아키(義昭)에게 임관과 '자'를 받으려던 시도가 노부나가에 의해 좌절되자 평생 '시로(四郞)' 가쓰요리라 지내야 했던 이 후계자는 공식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그의 아들 노부까쓰의 후견인일 수 밖에 없었다.
신겐의 사후, 한 때 미노, 미카와 등에 진출해, 신겐 전성기때 이상의 판도를 구축했지만 태생적인 한계와 무리한 출정이 내분을 일으켜 다케다군을 차츰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575년, 나가시노의 싸움에서, 수많은 명장들과 병사를 잃어,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 영지로 돌아가던 중 오다와 내통하던 오야마다 노부시게에게 길이 가로막혀, 혼노지의 변을 앞둔 1582년, 부인, 아들과 함께 할복해 죽었다.
☞ 다케다 노부시게 (武田信繁)
1525~1561
다케다 노부토라의 차남. 문무에 겸전해 다케다가의 진정한 유능한 장수였다.
노부토라가 신겐을 제쳐두고 상속을 넘겨 주려 했으나, 신겐이 다케다가의 당주가 되고 나서는 형 · 신겐의 좋은 보좌역이 되었다. 다케다 가내에서는 물론 우에스기 겐신, 호조 우지야스, 오다 노부나가등도 그를 높이 평가해, 그 평판이 아주 좋았다. 군사면에서는 스와, 기소(木曾)과 그 외의 시나노 공략에 활약. 그러나 우에스기 겐신의 기습을 받아 궁지에 빠진 1561년의 제4차 카와나카지마의 싸움에서, 신겐을 구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해, 난전 중에 전사하고 말았다 . 그 때가 37세밖에 되지 않아 특히 다케다가에게는 손실이 컸다.
그가 아들 노부도요(信豊)에게 남긴 99 조목의 교훈은 신겐 가법의 일부가 되어, 에도시대의 교육 체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흔히 하는 얘기로, 그가 살아 있었으면 신겐 사후의 다케다가는 달라 졌을 것이라고 한다.
☞ 다케다 노부카도 (武田信廉)
1528~1582
다케다 노부토라의 삼남, 신겐과 노부시게의 친동생이다. 쇼오켄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부시게가 제 4차 카와나카지마의 싸움에서 죽자 친족중(親族衆)의 필두가 되었다. 무장으로서는 코우즈케 방면에서 활약. 또 얼굴이 형 · 신겐과 아주 비슷했기 때문에, 카케무샤(影武者)의 역할로 신겐이 진중에서 병사했을 때 진영 내의 대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병든 신겐' 노릇을 함으로써 전군이 평온하게 고후로 가는데 성공했다고도 한다. 또 이를 보고 오다 쪽은 신겐 죽음의 소문을 오히려 모략으로 의심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나가시노 전에서는 이나 군세 4000을 이끌고 오다 진영의 중앙 돌파를 지휘했다. 다케다 멸망 후 오다 군에 생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는 회화에 뛰어나 훌륭한 그림이 지금에도 전하고 있다. 아버지 노부토라, 어머니 오이 부인을 그린 화상은 지금 중요문화재가 되었으며, 형 신겐을 본뜬 부동존 화상과 조각상 등의 명작도 남아 있다.
☞ 다케다 노부토라 (武田信虎)
1494∼1574
14살 때, 아버지 노부쓰나(信緯)의 뒤를 이었고, 이듬해 1508년(에이쇼 4년) 반기를 든 숙부 · 노부요시(信惠)를 토벌하고, 오야마다씨를 굴복시켰으며 이후 계속 전투로 점철된 당주 생활을 보낸다. 이시와(石和)로부터, 쓰쓰지가사키관(??が崎關)으로 본거지를 옮겼던 것도 이 노부토라다.
그는 가이 일국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전국 대명화를 위해 시나노까지 공략하지만, 계속된 전투로 인해 백성에게는 무거운 세금를 부과하고, 간언하는 가신을 참하는 등 아랫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었으며, 장남인 하루노부의 자신을 닮은 격력한 천성을 싫어하고 노부시게를 편애하기 시작했다. 이에 사쿠를 평정하고 돌아오던 길에 신겐 일파에게 길을 가로막혀 스루가의 이마가와에게로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후 노부토라는, 오케하자마 전투 후 이마가와가가 서서히 사양길에 접어들때까지 스루가에 머무르다, 그 즈음 일부러 이마가와 가신에게 타케다에게로의 투항을 권유해, 이마가와가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리고, 신겐에게 스루가 공략의 기회를 알리는 서신을 띄우게 되고, 이후 신겐은 스루가로 침공하였다고 한다.
신겐보다 길게 산 노부토라는, 시나노에서 손자인 가쓰요리와 면담하기도 했지만, 가이로 돌아오는 일 없이 신겐이 죽은 1년 뒤인 1574년 시나노 다카토에서 죽었다.
☞ 다케다 노부까쓰 (武田信勝)
1567~1582
신겐의 스루가 · 도토미를 향한 남진책이 진행되는 와중에 가쓰요리와 오다 노부나가의 양녀가 결혼하여, 2년 후인 1567년(에이로쿠 10년)에 태어난 사람이 노부까쓰다.
신겐은 그 유언 속에서, 다케다 가의 가주는 노부까쓰가 16세가 되면 정식으로 가주를 인계할 것. 그때까지 가쓰요리는 진다이(陳代)로서 이를 후견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그 16세가 되던 1582(덴쇼 10년) 3월 11일, 노부까쓰는 아버지 가쓰요리와 함께 할복하게 된다.
그 해 3월 3일 마침내 슨푸 성에 불을 지른 가쓰요리 일행은 영지로 복귀하려고 했으나 오야마다 노부시게에게 저지당하고 니쓰(日)강 연안의 다노(田野)에 이르렀다. 가쓰요리는 노부까쓰를 향해, 여기서 산을 넘어 무사시(武藏)로 가고 거기서 다시 오슈(奧州)로 가서 다케다 가를 재건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노부까쓰는 '도망치기는 싫습니다. 만일 잡병들 손에 걸린다면 안 그래도 치욕스런 것을 더 치욕스럽게 만들 뿐입니다.'하고 수긍하지 않았다고 한다.
☞ 다케다 요시노부 (武田義信)
1538~1567
다케다 신겐의 장남. 15세때 삼국동맹으로 인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과 혼인했으며, 17세 때 시나노 국의 사쿠에 첫 출진하여 큰 공을 세우고, 1561년 카와나카지마에서도 활약했다. 요시모토의 사후, 스루가 침략을 결심하고 있는 아버지 · 신겐에게 반대, 모반을 계획하다 먼저 적발되었다. 요시노부의 스승인 노장 오부 도라마사 일당은 처형되고, 그는 동광사에 유폐되었다가 2년 후 할복했다. 당년 3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