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5 주님은 악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조절하고 구부리신다. /
사람의 욕망과 감각의 오류를 이용하여 그를 선과 진리로 이끄신다.
먼저 이 주제와 관련된 부분을 저서에서 옮겨본다.
<천비 24
[3] 따라서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을 겪을 때
두 번째로 자각하게 되는 것은,
자신 안에 속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속사람 안에는
주님께만 속한 선과 진리가 거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데 거듭남이 진행되는 동안
겉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행하는 선한 행위나 말하는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겉 사람의 상태를 사용하셔서
그가 마치 그것들이 자기 것인 것처럼 선한 일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도록 이끄신다.
따라서 “궁창 아래의 것들(under the expanse)”에 대한 식별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궁창 위의 것들(above the expanse)”에
대한 식별이 뒤따른다.
또한 이것은 천국의 신비 중 하나인데,
곧 주님께서는 사람 자신의 것(own, proprium),
곧 감각의 오류(illusion)와 욕망을 사용하셔서
그를 선과 진리로 이끄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의 모든 움직임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즉 겉 사람에서
속사람으로, 다시 말해 땅에서 하늘로 나아가는 점진적인 과정이다.
그래서 이제 ‘궁창(expanse)’, 즉 속사람이
‘하늘(heaven)’ 이라 불리는 것이다.>
(주님은 인간의 외적 상태, 곧 감각의 오류와 욕망까지 사용하여
그것을 속사람으로 이끄시는데
이것이 신성한 섭리의 부드러운 구부림이다.)
<천비 50
[2]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는
그가 거듭난 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스려진다.
거듭나기 전에는 악한 영들이 그 사람 곁에 함께하며
그에게 지배권을 행사한다.
그 결과, 천사들이 비록 그와 함께 있긴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그가 전적인 악으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그를 어느 정도 선한 방향으로 돌려세우는 것 정도에 그친다.
실제로 천사들은 그의 거듭나지 않은 욕망들을
이용하여 그를 선으로 되돌리며
그의 감각의 오류들(illusions)을 이용하여
그를 진리로 향하도록 이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자신과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해
영계와 교통하지만 그는 아직
천국과는 같은 방식으로 교통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악한 영들이 그에게 지배권을 가지고 있으며
천사들은 다만 그들의 악을
미리 막는(forestall) 정도로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3]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그때는 천사들이 주도권(dominion)을 갖게 된다.
그들은 그 사람에게 모든 종류의 선과 진리를 불어넣으며
악과 거짓에 대해 혐오와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물론 천사들이 인도하긴 하지만
그들 자신은 단지 종일뿐이다.
사람을 다스리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며
그분께서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사람을 통치하신다.
따라서 이러한 일이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먼저 복수형으로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님 홀로 다스리시고 섭리하시기 때문에
그 다음 구절에서는 단수형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기록된 것이다.
이 사실을 주님께서는 이사야서 44장 24절에서 분명히 밝히신다.
“네 구속자 여호와, 너를 태에서 지으신 이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 여호와가 홀로 하늘을 펴며,
나 스스로 땅을 펼쳤노라.” (Isaiah 44:24)
천사들 자신도 고백하기를
그들 안에는 아무런 능력도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
(주님은 사람의 상태를 강제로 꺾지 않으시고
그의 악과 욕망조차 이용하여 점진적으로 선으로 이끄신다.
주님은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나 그 자신의 것 자체를 파괴하지 않고
그 속으로 선을 주입하여 서서히 변화시키신다.
주님은 세속적 욕망을 즉시 제거하지 않고
점차 변화시켜 사용하신다.)
<천비 6472
사고(thought)의 생명과 의지의 생명,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 두 생명의 유입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가 계시에 의해 나에게 알려졌다.
즉, 주님께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유입하시는데
그 하나는 천국을 통하는 간접적인 방식,
다른 하나는 주님 자신으로부터 직접 유입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유입되는 것은
사람의 마음 중 합리적 차원뿐 아니라 자연적 차원,
즉 내적 차원뿐 아니라 곧 외적 차원에도 이른다.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것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인데
이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이
신성한 진리 안에 신성한 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각자의 상태, 즉 사람의 고유한 성품에 따라 달라진다.
[2] 주님은 자신으로부터 유입되는 것을
사람이 강제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으시고 자유 안에서 인도하신다.
그리고 사람이 허락하는 만큼,
주님은 그를 자유를 통하여 선으로 이끌어 가신다.
따라서 주님은 사람을 그의 기쁨에 따라 인도하시며
또 그의 감각의 오류(illusion)와 그로부터 생겨나는
거짓된 신념들을 통해서도 인도하신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점차적으로
그러한 오류와 거짓으로부터 멀어지게 인도하신다.
다만 이것이 사람에게는
자기 스스로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의 잘못된 신념들을 한 번에
깨뜨리거나 무너뜨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사람의 자유가 침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유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없이는 사람이 개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님께서 사람 안으로 천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뿐 아니라 직접적으로도 유입하시며
그것이 사람의 마음의
내적 차원뿐 아니라 외적 차원에도 미친다는 것,
이것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천국의 비밀이다.>
- 주님은 악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대신 조절하고 구부리신다.
천국 교리(Heavenly Doctrines)의 위대한 가르침 중 하나는
주님은 사람의 상태를 강제로 꺾지 않으시고
인간의 자유와 반응의 범위 안에서
부드럽게 돌려놓으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신성한 섭리를 통해 인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즐거움들을 조절하시고 구부리신다.(bend)
주님은 우리의 정욕 속으로 들어가
우리의 감정을 부드럽게 구부리신다.
우리의 감정과 성향을
강제가 아닌 섬세한 방식으로 구부리신다.
주님께서 악한 이들의 내면의 욕망에서 오는 기쁨을 조절하시고
필요한 경우 구부리시는 섭리의 여러 원리는 이러하다.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우리가 쉽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층이 있다.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고
때로는 의롭고 지혜롭다는 평가까지 받고 싶지만
우리 안 깊은 곳,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자리에서는
부정한 욕망에서 오는 기쁨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주님은 바로 이 악한 기쁨마저도 당신의 섭리 속에서
조절하고 구부리시며 방향을 바꾸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빛은 본래 선한 목적으로 들어오지만
사람의 내적 상태가 어둠에 있으면 그 빛은
비틀린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드러난다.
주님은 악을 제거하지 않으신다.
대신 그 악을 조절하고 방향을 바꾸고 구부리신다.
조절, 바꿈, 구부림이라는 표현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악을 바로 제거하면 인간의 자유가 무너지고
자유가 무너지면 사랑과 신앙도 함께 소멸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악을 제거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구부리시며
그 악이 더 큰 악으로 흐르지 않도록 길을 통제하시고
심지어 때로는 다른 악들을 사용해 악을 억제하신다.(DP 251)
사람은 내면의 악한 욕망에서 오는 기쁨이 있어도
그것을 외적으로 좋게 보이게 만들려 한다.
주님은 명예, 체면, 법, 사회적 평가 등 사람의 이러한 외적 구조를
이용해 악을 억제하고, 분리하고, 정화하신다.
이것이 곧 신성한 섭리의 간접적 인도로,
주님께서는 내면의 악이 바깥에 드러내지지 못하도록
억제장치를 두신 것이다.
따라서 악의 내적 기쁨은
외적으로 통제되며 무제한적으로 행동하지 못한다.
물론 명예, 체면, 법, 사회적 평가나 두려움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다른 욕망에 지나지 않으나
주님은 그러한 그의 다른 욕망을 사용하여 더 큰 악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막으신다.
주님의 섭리는 악을 허용하시지만 결코 악을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악을 만들지 않으시고 허용하신다.
그리고 그 허용 안에는 항상 더 큰 선을 위한 목적이 있다.
(DP 275)
사람의 내면에는 선과 악의 기쁨이 섞여 있다.
특히 악인의 경우, 그의 내적 기쁨은
교활함과 간계, 기만과 위선, 속임수와 술책 등
악한 욕망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악한 욕망의 기쁨이
내면 깊은 곳에서 그의 사랑이 되어 있다.
그러나 겉으로는 법과 체면을 따라 선하게 행동한다.
내면의 악의 기쁨이
외면의 선의 기쁨 속으로 내려가 서로 뒤섞이지만
주님은 그 속에서 악을 걸러내고 옮기신다.
즉, 주님은 사람의 구조 전체를 사용하여
내면의 악이 무제한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억제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신성한 섭리의 주목적이다.
이렇게 악한 내면의 기쁨과 선해 보이는 외면의 기쁨이
서로 섞여 있는 상태가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혼합된 상태 안에 주님의 손길이
깊이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그의 이 외면의 기쁨을 사용하여
내면의 악을 제한하고 더 큰 부정과 불의를 막으신다.
그리고 장차 그가 회개할 기회를 얻는다면
외적 선의 틀 속에서 내면의 악을 보게 하는 조건을 만드신다.
즉, 주님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악의 구조를 그대로 사용하여
악을 더 큰 선의 방향으로 구부리시는 것이다.
악은 주님에 의해 조절되지 않으면
모든 질서를 파괴한다.
악은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
악은 계속 확대되고 더 강한 악을 불러들이고
자기중심적 기쁨에 중독된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가진 다른 욕망들을 사용하여
그 악의 작용을 조절하고 누그러뜨리신다.(tempering)
주님은 더 큰 악을 방지하고 더 선한 선택을 위해,
또 영적 성찰의 계기가 되도록 하기 위해 그 악을 구부리신다.
편파적이고 뇌물을 좋아하는 재판관이라 하더라도
겉으로는 공정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그 외적 욕망을 사용하여
내면의 악이 마음대로 폭주하지 못하게 하신다.
이렇게 주님은 사람의 전체 구조를 사용하여
악을 조절하고 완화시키며
결국 그 악의 기쁨을 점차 약화시키는 길을 준비하시지만
여기 중요한 사실은 주님은 악을 제거하지는 않으시고
다만 악을 구부리셔서 선에 이바지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섭리의 가장 놀라운 부분이다.
- 주님의 조절(modification)과 구부림(bending)은
인간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진다.
주님이 인간을 변화시킬 때는 언제나 그의 자유와 즐거움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그를 서서히 변화시키신다.
이를 위해 주님은
먼저 그에게 부여되는 선을 조절하신다.
<천비 8487
“해가 뜨자 녹았다”는 것은 욕망이 점점 커짐에 따라
진리의 선(영적 선, spiritual good)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해가 뜨는 것’이 욕망의 증가를 의미하는 이유는
‘해’가 선한 의미에서는 천적(天的) 사랑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께서 영계에서 태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는 반대의 의미에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의미하며 그 해에서 나오는
열 또는 ‘뜨거워짐’은 욕망(craving)을 의미한다.
[2] 여기서 묘사된 사건의 본질, 즉 ‘만나’가 상징하는 진리의 선이
욕망의 증가에 따라 점차 사라졌다(해가 뜨자 녹았다)는 의미를
간단히 설명하려 한다.
진리의 선 또는 영적 선은
중생 중인 영적 교회의 구성원에게 실제로 부여된다.
그러나 그 선은 그 사람의 이전 삶을 구성하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모든 즐거움을 쫓아낸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한 진리의 선은 그 사람 안에 오래 머물 수 없으며
이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그의 이전의
두 사랑(자기 사랑과 세상사랑)에 속한 즐거움들을 통해
그것(진리의 선)을 조절하신다.(modify)
만일 그런 조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선은 그 사람에게 아무런 즐거움이 없게 되어
오히려 혐오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중생 중에 있는 자들에게서 처음 나타나는
천적 선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즐거움이 일어나는 만큼
천적 사랑의 선은 사라지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반대의 과정도 마찬가지다.
[3] 이러한 이유로 천국에서는 상태의 변화가 있고
(세상에서는 그것에 상응하는 시간과 계절의 변화가 있다.)
그러한 변화는 거기에 있는 자들을
자연적 즐거움에 동반하는 기쁨으로 되돌려 놓는다.
왜냐하면 이런 상태 변화가 없다면
천적 사랑의 선은 마치 마르고 무가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적 즐거움으로 조절될 때에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마다 만나를 받고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받은 이유이다.
‘메추라기’는 자연적 즐거움,
또는 욕망에 수반되는 즐거움을 의미한다.(천비 8452)
[4]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천국에서 ‘저녁’이 되어 돌아오는 기쁨(delights)은
천적 선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다소 일치하는 종류의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베풂의 기쁨 속에서 약간의 명예를 느끼는 즐거움,
또는 아름다운 집과 옷의 즐거움 등이다.
이런 즐거움들은 천국의 사랑의 선을 파괴하지는 않지만
일시적으로 그것을 가리운다.(eclipse)
그러나 중생이 깊어질수록 이런 자연적 즐거움들은
천국의 선의 하위 수준(lowest level)으로 변하고
더 이상 ‘욕망’이라 불리지 않고 ‘기쁨(delight)’이라 불린다.
천국의 사랑의 선이 이런 즐거움으로 조절되지 않으면
마르고 무가치해진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자손이 메추라기를 받지 못했을 때
만나를 메마르고 하찮은 음식이라고 불렀던 일에서 나타난다.>
(민수기 11:4,6; 21:5; 신명기 8:3 참조)
(주님으로부터 오는 만나, 곧 진리의 선은
사람의 옛 즐거움인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반대이므로
중생중인 사람 안에서 점차 조절된다.
주님은 그것을 강제로 바꾸시지 않고
그 사람의 성향과 자유를 고려하여 부드럽게 구부리시며
선으로 이끄신다.
이것이 ‘해가 뜨자 만나가 녹았다’는 구절의 내적 의미이다.
즉, 욕망이 증가함에 따라 천국의 사랑의 선이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진리의 선이 인간 내면에 처음 주어질 때
그 선은 인간의 옛 애정들(자아 사랑과 세상사랑)과 충돌하기
쉽기 때문에 먼저 조절하심으로써
진리의 선이 인간에게 점차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만드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조절은 진리의 선이 인간의 상태에 맞게
누그러지거나 순응되는 것으로,
그것은 단순히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선이 인간 삶 속에서 잘 조화될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는 만약 진리의 선이 조절되지 않는다면 인간에게는 그들이
혐오스럽고 멀리하는 것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조절되지 않은 완전한 진리가 사람에게 강제로 주어진다면
그것이 인간의 자유나 감정 구조와 충돌하여
거부감이나 저항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있는 감정과 욕망, 심지어 결점까지도
부드럽게 굽혀 선으로 이끄신다.
이것이 조절이라고 불리우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 섭리의 방식이다.
주님은 인간의 자연적 욕망과 정서를 제거하지 않으시고
질서 속에 배열하여 그것들이 선의 도구가 되게 하신다.
그래서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경향은
억압되거나 제거되는 대신,
주님에 의해 점진적으로 정화되고 방향이 바뀐다.(섭리 296)
주님께서 인간의 감각적 오류와 욕망을 사용하여
부드럽게 선으로 인도하시는 예를 들어보겠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가지는 성공과 명예의 욕망은
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중심적일 때만 악이 된다.
주님은 그 욕망을 없애지 않으시고
내 이름을 높이려는 마음을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세상 속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심으로 바꾸신다.
이렇게 자기 영광의 사랑이 이웃 사랑의 수단으로 바뀌는 것이
조절의 작용이다.
마찬가지로 분노 역시 단순히 억제되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정화되어야 할 에너지이다.
주님은 인간의 격렬한 성정을 꺼버리지 않으시고
그것을 정의와 진리를 위한 거룩한 열심으로 변화시키신다.
부당한 일을 보고 분노가 일어날 때
그 분노가 내 상처 때문인지 진리가 훼손되었기 때문인지를
분별하는 순간 주님은 그 열정을 사랑의 질서로 조절하신다.
또한, 물질에 대한 애착과 소유욕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내 것이라는 소유 의식을 맡겨진 것이라는
청지기 의식으로 변화시키신다.
이때 물질적 사랑은 영적 사랑의 수단이 되고
세상 속에서 천국의 질서가 드러난다.
감각적 쾌락 또한 제거의 대상이 아니다.
주님은 감각의 즐거움을 내면으로부터 정화하여
감사와 절제 속에서 영적 기쁨의 그릇이 되게 하신다.
음식과 예술, 아름다움의 즐거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이 선함과 아름다움을 허락하셨다는 인식이 함께할 때
그 즐거움은 거룩하게 변화된다.
그리고 인간의 지적 교만 또한 주님의 조절 아래 있다.
사람은 마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생각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내가 옳다는 자기 확신은
주님의 진리가 옳다는 겸손으로 바뀐다.
결국 주님은 인간의 성향과 감정, 욕망과 지성,
심지어 결함까지도 파괴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선을 스며들게 하신다.
그분은 사람의 자유를 깨뜨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자유를 따라 부드럽게 굽히시며
그가 즐겨하는 바를 통해 인도하신다.(천비 6472)
이것이 곧 섭리 안에서 작용하는 사랑의 기술,
즉 주님께서 자아에 속한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구부림의 신비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삶의 가장 사소한 세부적인 것들까지
흘러들어 오셔서 그것들을 통해 부드럽게 구부리신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사람의 자유로운 결정을 꺾지 않으신다.
만일 그것을 꺾으신다면 인간성은 소멸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악령은 애정을 왜곡하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선으로 부드럽게 구부리신다.
주님은 사람의 자아를 꺾지 않고 구부리셔서 방향을 전환시키신다.)
- 조절(modify)은 구부림(bend)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이거나
구부림을 위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조절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주님은 인간을 부드럽게 구부리시고 선 쪽으로 이끄신다.
이 구부림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며 강제성이 없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구부림은 사람이 허락할 때만 효과를 낸다.
만약 사람이 저항하면 그 구부림은 잘 작동되지 않으며
진리나 선을 거부하게 된다.
진실로 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있어서의 진리와 선은
아무 저항 없이 그들 스스로 주님께 이끌림을 받게 된다.
그들은 마치 부드럽고 유연한 상태로 되어 있어서
구부림을 수용하는 상태이다.
반면 자기중심적 사랑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 이끌림을 허락하지 않고 강하게 저항한다.
이것은 굳고 저항하는 성향을 가진 자에게는
주님의 인도나 구부림이 작동하기 어렵다.
따라서 유연한 자아 구조를 가진 사람에게는
주님이 부드럽게 구부림을 행하실 수 있다.
조절은 이 구부림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처음엔 조절을 통해 진리의 선이 바로 충돌 없이
인간 내면에 스며들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구부릴 여지’를 만드는 것이고,
그 다음에 구부림이 실제로 일어난다.
이 변화가 완성될 때 비로소 진리와 사랑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삶 속에 자리 잡는 것이다.
조절과 구부림이라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자유’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인도하실 때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며
겉으로 보기에 인간 스스로 자신을 인도하는 듯 보이게 하시는데
이것이 조절과 구부림의 배경 원리의 역할을 한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자유 안에서 인도하시며,
그 과정이 마치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고 행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신다.
이 인도에는 사람의 자유로운 허락,
즉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동의와 반응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주님은 결코 강제로 이끄시지 않고
사람이 저항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곧 사람이 자유로 허락하는 방식으로 인도하신다.
이것은 주님의 작용이
사람의 자유와 이성의 상태에 따라 조절된다는 뜻이며
사람이 주님께 마음을 얼마나 열고 허락하느냐에 따라
진리와 선이 그에게 작용하는 깊이와 힘도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와 합리성을 존중하시며
인간의 상태를 따라 선과 진리를 완화시키시고(modify and temper)
그것이 파괴되지 않도록 섭리하신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이성과 자유를 통하여 그를 인도하시며
그렇게 하여 마치 자유 안에서 그를 선으로 부드럽게 구부리시고
돌이키시는 것처럼 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끊임없이, 또한 영원토록 계속된다.)
- 정화(purification)의 방식은
악의 제거가 아니라 악의 분리와 옮겨짐이다.
주님은 악조차 구부리셔서 선을 이루신다.
주님은 악한 기쁨까지도 당신의 손 안에서 구부리신다.
(AC 6489)
인간은 누구나 마음 속 깊은 곳에 기쁨을 가지고 사는데
문제는 이 내적 기쁨이 선한 것이면 천국으로 향하게 되지만
악한 것이라면 사람을 무너뜨리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인 내적 자아에서 일어나는 악한 기쁨들은
먼저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는 외적 측면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자기 속의 욕망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고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한다고 느낄 뿐이다.
사람은 외적으로는 선처럼 보이는 행동을 할지라도
내면에서는 전혀 다른 기쁨을 즐기고 있을 수 있다.
바로 이런 외적 구조를 사용하여
주님은 악의 나타남을 붙들어 매신다.
여기 이곳으로부터가 중요한 지점인데
주님은 악을 억누르시는 데서 멈추지 않으신다.
그분은 악한 내적 기쁨과 겉으로 선해 보이는 외적 요소들을
분리하시는 작업을 하신다.
악이 외적인 것과 섞여 있으면 사람은 자기 속을 보지 못하고
그러면 회개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 속에서
악한 내적 기쁨이 서서히 드러나게 하시고
그것이 외적 선처럼 보이는 행동과 구분되게 하심으로
조용히 질서를 운행시키신다.
결국 사람은 자신의 속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영적 분별력의 회복이고
주님께서 악을 조절하시고 구부리시는 지점이다.
주님은 악한 내적 기쁨을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그 기쁨들이 외적 행동과 섞여 있는 혼합 상태를 분리시키신다.
이로써 악은 악대로 밀려나게 되고
외적 행동 중 선처럼 보이는 것,
즉 정의, 질서, 합리성 같은 요소들은 보존하신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남아 있는 가장 작은 선의 흔적이라도
주님께 붙잡히면 그것이 사람을 회복시키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은 세상에서는 완전히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더 이상
내적, 외적인 것을 섞어 위선적으로 살 수 없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자아가 곧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악은 악끼리, 선은 선끼리 모이며
내적 악의 기쁨을 붙들고 있던 사람은
그 기쁨과 친한 영들에게로, 곧 지옥으로 귀속된다.
이것이 정화의 완성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은 악 자체를 제거하시는 분이 아니라
악을 조절하고 구부리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강제로 우리 속의 악을 뽑아내지 않으신다.
그러면 우리의 자유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자유 안에서, 우리의 책임 안에서
악이 악으로 흐르지 못하도록 조절하시고
선처럼 보이는 외적 길을 통해 구부리시고
악을 드러내고 분리하며 마침내 옮기신다.
이 과정 전체가 바로 주님의 섭리이며
주님이 악을 선에 이르게 하시는 방식이다.
주님은 사람 안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끊임없이 분리하신다.
지상에서는 악과 선이 섞여 있지만
악한 기쁨이 마음대로 활동하는 것을 제한하시는
주님의 섭리로 인해 사람은 자신의 악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외적 선한 모습 아래서 조절된다.
이 과정 속에서 악과 선은 점차 분리되고
악한 기쁨은 깊은 곳으로 잠기며 외적 선한 질서는 보존된다.
이것이 바로 정화(purification)의 방식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악한 기쁨은 외적 질서 속에서
걸러지고 정화되며 옮겨진다.(DP 279)
주님은 인간의 악을 제거하기보다
그 악을 정해진 울타리 속에 가두고
과잉되지 않도록 하고 반드시 드러나지 않도록
사람이 회개의 기회가 올 때까지 그 악을 관리하고 조절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악을 보시되
그 악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다루지 않으신다.
주님은 악한 자의 악마저도 섭리로 길을 돌리신다.
이러한 과정이 우리 영혼의 정화를 준비하시는
주님의 역사 방식인 만큼
우리는 죄 사함을 통해 내면의 악이 사라졌다고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한다.
악을 죄로 여기고 버리는 과정만이
주님의 빛 아래 서는 길이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선언한다.
사람이 악을 피하는(삼가는) 만큼 그는 주님 안으로 들어간다.
(Life 21)
악의 기쁨은 외적 기쁨 속에서
걸러지고 정화되며 나중에 옮겨진다.
정화의 과정은
단순히 선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섞인 것의 분리 과정이다.
주님은 겉으로 선해 보이는 행동의 틀과
내면 깊이 있는 악의 기쁨, 이 두 층을 분리해내신다.
그리고 사후에는 외적 껍질이 제거되고
그 사람 내면의 사랑과 기쁨만 남게 된다.
즉, 악인은 외적으로 선해 보였던 행동이나 말은 사라지고
내면에서 즐기던 악의 기쁨만 남아 지옥의 공동체로 들어간다.
이는 주님이 악한 자조차도 최대한 보호하시면서
영적 질서를 최소한의 손실로 유지해주신 결과이다.
우리는 악을 스스로 버릴 힘이 없다.
악은 즐거움을 동반하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는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의 빛이 들어오면 그것을 악이라고 볼 수는 있다.
자신의 악을 볼 때 정죄로 가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왜 나는 이런 악이 있나?’
‘나는 완전히 타락한 사람인가?’
이런 정죄의 길은 지옥이 주는 길이다.
지옥의 영들은 자신 안의 악을 볼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절망으로 빠진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악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정죄케 하려 함이 아니라 버릴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우리는 악이 너무 많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으나
주님은 그 악조차 사용하셔서 구원의 길을 만들고 계신다.
주님은 우리가 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으신다.
악을 피하는 만큼 우리는 주님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의지만 돌리면
주님은 우리의 내적 구조 전체를 재정비하시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렬시키시며
혼합된 것을 분리하시고 선의 흐름이 지나갈 길을 여신다.
그렇게 주님은 오늘도
우리 마음속에서 조절하시고 구부리시고 분리하시고
정화하시기 위해 조용히 일하고 계신다.
그러니 악을 보거든 절망하지 말라.
그것은 주님이 일하고 계신 증거이다.
악을 피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순간
주님은 그 악을 손에 쥐고 선으로 구부리기 시작하신다.
우리는 그러한 주님의 섭리를 믿고 따라야 한다.
주님의 섭리는 정화(purification), 분리(separation),
옮김(removal)의 과정을 이루시는 가운데
인간의 자유를 해치지 않도록,
또 그의 자연적 즐거움들이 훼손되지 않도록
인간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무수한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다.
악한 내면의 기쁨이 외적 사고(outer thought)와 섞일 때
주님은 그들을 분리시키신다.
내면의 악한 욕망과 바깥 행동의 층이 섞여 있다가
분별(discerning)이 일어나는 것을 영적 세계에서는 볼 수 있다.
겉으로는 공정해 보이기 위해
법적 논리, 정의의 언어, 형식적 공정함 등을 사용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내면의 기쁨(악)과
외적 동기(공정해 보이고 싶은 욕망)가 뒤섞인 상태일 수 있다.
이때 주님은 이 둘이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되지 않도록
양심의 미약한 작용이나 영적 빛의 미세한 비춤을 통해
이 둘의 분리 작업을 하신다.
주님은 사람 안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끊임없이 분리하시며
그의 실체를 보존하신다.
외적 사고에서 선처럼 보이는 부분을 보존하고
교활함, 술책, 속임수 등 악의 기쁨에 붙어있는 것들은
아래로 떨어지게 하신다.
이 세상에서는 그들이 섞여 있지만
죽음 이후에는 주님이 내적 기쁨의 진짜 성품만을 분리하여
그 사람의 영이 어떠한지를 드러내신다.
완전한 정화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속과 겉의 완전 분리를 통해 일어난다.
죽음 이후에는 외적 껍질이 벗겨지고
순수한 내적 애정(욕망)만 남는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정화는 결국 사후 분리를 위한 준비 과정이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의 악을
당장 뽑으시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가 가진 다른 욕망,
즉 체면, 명예, 사회적 두려움 등을 이용하여
악이 억제되거나 약화되도록 하신다.
이로써 악의 내적 기쁨은
외적 구조의 질서 속에서 걸러지고 분리되어
결국 사후에는 완전히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주님의 섭리는 우리 안에서 악과 선을 분리하는,
보이지 않는 정화 과정을 끊임없이 수행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선하게 보이려는 외적 이유만으로 머물지 말고
내적 기쁨의 뿌리 자체가 주님께 돌아서도록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후에는 외적인 것이 완전히 옮겨지며
사랑이 그 사람을 이끈다.
<천비 5980
천사들은 사람과 함께하는 악령과 악마들이
무엇을 의도하고 시도하는지 주의 깊게 끊임없이 지켜본다.
그리고 그 사람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그의 자유를 강제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에 따라)
그들은 악을 선으로, 또는 선에 가까운 것으로,
또는 그 방향으로 이끄는 것으로 돌려놓는다.>
(bend 구부린다, 휘어지게 한다)
<천비 5992
주님께 쓰임 받아 사람을 인도하고 보호하는 천사들은
그 사람의 머리 가까이에 있다.
그들의 역할은 인애와 신앙을 전하고
그 사람의 기쁨이 향하는 방향을 살피며
그 기쁨을 선한 쪽으로 바꾸어 이끌고 가는 것이다.
이는 가능한 한 그 사람의 자유 안에서 그렇게 행해진다.
천사들은 어떤 폭력적인 방식으로도 사람의 악한 욕망과
잘못된 생각을 억누르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다.
그들은 반드시 부드럽게 행동해야 한다.
그들의 또 다른 기능은 지옥에서 오는 악령들을 통제하는 것으로,
이는 무수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나 여기서는 다음 사항만 언급하겠다.
악령들이 악과 거짓을 주입할 때 천사들은 진리와 선을 심어주는데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악령들이 주입한 것들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옥의 영들은 끊임없이 공격해 오며 천사들은 보호를 제공한다.
이것이 바로 질서의 올바른 상태이다.
[2] 무엇보다 천사들은 사람의 애정(욕망)을 조절하는데
이는 애정(욕망)이 사람의 생명과 자유를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천사들은 사람이 새로운 악으로 빠져들 때 발생하는,
이전에는 열려 있지 않았으나 이제 열린 지옥들로부터
사람에게 미치는 모든 영향을 감지한다.
그리고 사람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천사들은
이러한 지옥들을 차단하고 그곳에서 나오려는 영들을 제거한다.
또한 악영향을 미치는 낯선 새로운 유입들을 분산시킨다.
[3] 특히 천사들은 사람이 지닌 선함과 진리를 불러내어
악령들이 일으킨 악이나 거짓과 대립하게 한다.
그 결과 사람은 중간에 위치하여 악이나 선을 의식하지 못하며
중간에 있기에 어느 쪽으로든 자유롭게 향할 수 있다.
주님으로부터 온 천사들은 이와 같은 방법들을 사용하여
순간마다, 찰나마다 사람을 인도하고 보호한다.
왜냐하면 만일 천사들이 단 한순간이라도 그 손길을 늦춘다면
사람은 즉시 악 속으로 빠져들어
그 후에는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천사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love)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악을 제거하고
그를 하늘로 인도하는 것보다
천사들에게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은 없다.
이것이 곧 그들의 기쁨이다. (누가복음 15:7 참조)
그러나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람을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보살피시며
사람의 존재의 시작부터 생의 마지막 순간,
그리고 그 이후 영원까지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거의 아무도 믿지 않는다.>
- 악을 선으로 구부릴 수 있는 힘은
영화되신 주님의 신성한 인성(Divine Human)으로부터 나온다.
이는 그 신성한 인성으로 인해
신성이 인간의 자연성 안에 들어오실 수 있도록
조절이 가능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인간의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상하지 않게 보존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그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게 되셨다.
이를 나타내는 것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자들이 놋뱀을 통해 구원받는 사건이다.
놋뱀은 주님이 인간의 감각적 본성을 취하시되,
그것을 신성한 질서 아래 두신 것을 상징한다.
즉, 감각적 인간성이 더 이상 해롭지 않고 그분 안에서
구원의 통로로 변화된 상태를 가리킨다.
주님의 신성한 인성을 통해
신성이 인간의 자연성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은
주님의 성육신의 이유가 되고 또 주님이 인간 안에서
악을 선으로 구부리시는 방식을 설명할 때 중심이 되는 사상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인성을 취하신 것은
신성이 더 이상 타락한 인간에게 직접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감각적이고 외적 사랑에 몰두하게 되었기에
신성은 더 낮은 차원(자연적 수준)으로 내려오실 필요가 있었다.
즉, 주님의 성육신은 신성을 인간의 감각적 수준까지 내려오기 위해
조절(modified)되신 사건이었다.
그 결과 신성한 인성은 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을
상하지 않게 하시며 그들을 구원의 도구로 바꾸신다.
이것이 주님은 인간의 감각과 자연적 본성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질서 속에 두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자연적 충동이나 감각적 본성은
죄가 아니라 조절되고 굽혀질 때 선을 위한 수단이 된다.
이것이 바로 악을 선으로 구부리는 힘의 실제 작용이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인간 본성 안의 모든 유혹과 악을 이기심으로써,
그 안에서 신성과 인간성이 완전한 하나를 이루셨다.
그리고 그 결과 신성의 힘이
인간의 자연적 상태에 직접 닿을 수 있게 되었다.
지옥을 제압하고 악을 구부릴 수 있는 이 능력은
그분의 신성한 인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놋뱀 사건은 신성한 인성을 통한 구원의 상징이고
이것이 요한복음 3:14-15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는
말씀으로 표징되었다.
요셉의 사건도 마찬가지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나니”(창세기 50:20)
이것은 악을 선으로 구부리시는 주님의 섭리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구약의 예이다.
이 사건은 곧 주님의 신성한 인성 안에서 완전히 실현된
‘악을 선으로 돌리심’의 표본이다.
요셉의 형들은 질투와 미움으로 요셉을 해치려 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사용하여
이집트에서 생명을 보존하는 섭리의 도구로 바꾸셨다.
주님은 인간의 악의 자유를 강제로 막지 않으시지만
그 자유가 보존된 상태에서 악을 선으로 구부리심으로써,
악이 결국 선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이끄신다.
요셉의 사건은 바로 그 신성한 섭리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인성 안에 있는
모든 악의 세력과 싸우시며 그것을 굽히셨다.
주님은 단순히 악을 제거하신 것이 아니라
악의 방향을 바꾸어 선의 질서에 부속시키셨다.
요셉이 형제들의 악을 선으로 돌렸듯이
주님은 악을 선으로 부드럽게 굽혀 돌리심으로써,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질서 안에 유지하신다.
이것이 곧 악을 선으로 구부릴 수 있는 힘은 영화되신
주님의 신성한 인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의 실체다.
요셉의 사건은 인간의 악한 행위(형제들의 시기와 배신) 속에서도
주님께서 그 사건의 유기적 흐름을 꺾지 않으시고
그 안의 생명 흐름을 선으로 굽혀
새로운 질서로 재조정(reset)하신 예로
이것이 바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섭리의 작용이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던져진 후의 고백,
즉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하셨나이다.”
이 고백은 인간 역사 속에서 드러난 섭리의 본질을 압축한 말이다.
그는 부당한 고난 속에서 인간적으로는 부서지고 꺼져갔지만
그 안에서 주님은 조용히 새로운 질서를 빚고 계셨다.
그분은 요셉 안의 그릇들을 굽혀 다시 형성하시며
고난 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통로를 여셨다.
그 결과 요셉은 자신을 해하려던 사람들을 구원하는 자가 되었다.
이것이 곧 주님이 악을 굽혀 선으로 바꾸시는 방식이다.
주님의 신성한 섭리는
악을 굽히시고(bend), 선으로 돌이키신다.(turn)
이것은 단순히 결과의 변환 정도가 아니라
인간 안의 유기적 질서의 회복이라는 더 깊은 차원의 신비이다.
인간 안의 영적 기관들인 합리적, 자연적 그릇들이
아무리 왜곡되어도 그 형태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그릇들은 가장 섬세한 유기적 실체들 안에서 형성되며
그 형태와 상태의 변화에 대한 지각(perception)에 의해 존재한다.
(주님의 섭리에서 ‘굽히고 돌리신다, bends and turns’는 표현은
조절과 전환의 작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악을 강제로 제거하지 않고
그 방향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원리를 나타낸다.
그것은 악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작용이 선의 목적을 이루도록 사용하신다는 뜻이고
주님은 이 과정을 통해 천국과 세상 모두를 질서 속에 유지하신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미움과 질투, 절망과 탐욕의 충동들을 억누르지 않고
그것들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시며
그것을 선의 질서로 구부려 사용하신다.
그래서 “악이 나를 해하려 해도 주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신다.”
라는 고백은 신앙인의 일상 속에서 계속 살아 있는 요셉의 고백이며
주님의 신성한 인성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증거이다.
이처럼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더러운 욕망과 거짓을
자유 안에서 선과 진리로 구부리신다.(천비 25)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