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양쪽 강변에 완만하고 묵직한 자태로 뻗어나가고 있는 산줄기는 진초록으로 치장한 몸을 압록강에 그림자로 담그고 있었다. 느린 파도의 굽이침처럼 봉우리 봉우리를 이루어나가고 있는 그 긴 산줄기는 동쪽으로 가면서 점점 높아지고 억세지면서 그 모습을 아스라하게 감추고 있었다. 그 산줄기를 따라서 따라서 가면 이르게 되는 곳, 그곳이 백두산이었다. 그러니까 압록강 양쪽으로 뻗어내리고 있는 산줄기는 사방팔방으로 뻗치고 있는 백두산의 서쪽 일부 자태였고, 압록강 철교 부근에서 자취를 감추는 산줄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드리워진 백두산의 머리카락 그 한오라기 끝이었던 것이다.
(14)
나남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식으로 꾸며졌다고 했다. 나남은 그야말로 군대가 중심이고 군이니 주인인 도시였다.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건물이 시가지 중앙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고, 바로 그 옆에 있는 원형공원을 중심으로 해서 일곱 개의 도로가 방사선으로 곧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로들에서 다시 가지를 치며 다른 도로가 뻗어나가기도 했다. 나남은 억센 산줄기 많기로 유명한 함경북고의 산들로 에워싸여 있는 자연요새 같은 분지였다. 그 궁벽한 오지에 어찌 그리 멋들어진 서양식 건물들을 즐비하게 세워 도시를 이루어낸 것인지 양치성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데 나남에서는 조선사람들의 집이라고는 기와집이든 초가집이든 간에 단 한 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온통 서양식 관공서들과 일본식 상점이나 집들로 차 있는 것을 양치성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군산이 개명한 줄 알았는데 군산은 나남에 댈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의문은 한마디의 설명으로 쉽게 풀렸다. 일본군이 처음 나남에 주둔한 것은 노일전쟁이 끝나면서였고, 그때 나남은 조선사람들 30호 정도가 마을을 이루고 산 한촌이었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10년 세월 동안에 순전히 일본사람들 손으로 새 도시가 꾸며졌으니 한옥이 있을 리 없었다.
(27)
나철은 유서 <순명삼조(殉命三條>를 통해 자신이 왜 목숨을 바치는지를 밝히고 있었다. 첫째 배달민족의 번성이 걸린 대교를 위해 죽는 것이며, 둘째 한배님의 은혜를 갚지 못한 죄로 한배님을 위해 죽는 것이며, 셋째 온 천하의 동포 형제자매가 암흑세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대신 죽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대종교가 더욱 번창하고, 그 힘으로 일본을 물리쳐 배달민족이 광명을 되찾기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84)
동회는 향촌 어디에서나 저마다 운영하는 마을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동네마다 당산나무가 있듯 동회가 없는 마을은 없었다. 동회에서는 마을을 위해 서로 힘을 모아야 하는 대소사에서부터 공동의 질서와 규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모임이었다.
동네제사 날짜, 계모음, 두레와 품앗이 순서, 농로나 수로 보수의 부역, 명절놀이 계획, 예절과 풍기, 각종 부고, 남녀 품삯, 구휼 같은 것을 결정해서 서로서로 힘을 합쳐 돕고 마을이 화목하고 평온하게 유지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여러가지 마을일들을 결정하는 기본이 되는 규범이 바로 향약이었다.
(109)
윤철운은 앉음새를 고치며 목례를 차리고는, “제가 동지들을 만나고자 한 뜻을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 연해주는 사태가 급박합니다. 일본군은 반혁명군인 백군을 지원하는 동시에 우리 조선 사람들을 회유하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선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적군을 지원하면서 일본군을 치는 빨치산투쟁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그건 소비에트 혁명을 돕는 길인 동시에 우리 조선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일본군들을 연해주에서 몰아내야만 우리의 독립투쟁지를 회복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혁명을 도와야 혁명이 완수되면 소비에트는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선언에 입각해 우리의 독립을 한층 더 적극적으로 돕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년단을 조직했고, 단원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동지들이 오셨다기에 인사도 드릴 겸 해서 찾아뵌 것입니다.”
(120)
만주땅의 가을은 너무 짧아 9월로 접어들면서 며칠 간 가을빛이 스치는 것 같으면서 나뭇잎들이 와짝 단풍이 들었다. 그 단풍들도 며칠이 못가 낙엽 지며 10월의 문턱에서 얼음이 얼었다. 그리고 설한풍이 몰려오는 11월의 만주땅에 뜻밖의 열풍이 일어났다. 독립지사 39명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것이었다. 그 독립선언서는 만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박은식 신채호 박규식을 대표로 하여 중국 전역을, 이동휘 이범윤 등을 대표로 하여 노령 일대를, 박용만 안창호 이승만을 대표로 하여 미주지역까지 포괄하는 그야말로 범민족적 대표성을 확보한 최초의 대한독립선언서였던 것이다. 1918년 11월 13일 터져오른 함성이었다. 사람들은 그 선언을 무오(戊午)독립선언이라고도 불렀다.
(135)
백관수 : ……오족(吾族)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모든 자유행동을 수(受)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하여 열혈의 투쟁을 불사할 것이다. …… 일본이 만약 오족의 정당한 요구에 응치 않으면 오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겠다. …… 자(玆)에 오족은 일본 또는 세계 각국이 오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부여할 것을 요구하여 만불성(萬不成)하면 오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행동을 취하여 오족의 독립을 기성(期成)할 것을 선언한다.
(203-204)
“예, 그 말언 맞구만요. 허나 독립단체라고 혀서 다 똑겉지가 않다는 것얼 명백허니 알아둬야 헐 것이구만요. 시방 독립운 단체덜언 서로 다른 두 가지 주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는디, 그것이 무엇인고 허니 보황주의허고 공화주의로구만요. 요것이 무신 뜻이냐 허면 우리가 뺏긴 나라럴 되찾자고 독립투쟁얼 허기넌 허는디, 누구럴 위허는 어떤 나라럴 세울 것이야 허는 중대서럴 논허는 것이올시다. 다른 말로 복벽주의라고도 하는 보황주의넌 나라에 주인언 임금이니 독립운동도 임금얼 다시 받들기 위해 해햐 헌다는 것이고, 공화주의넌 그 반대로 나라에 주인언 백성이니 독립운동도 온 백성의 뜻얼 받드는 나라럴 세우기 위해 해야 헌다는 것이오. 우리 군정부에서넌 공화주의럴 내세우는 것이고, 아까 그 대한독립단언 복벽주의럴 내세움스로 여러분덜얼 끌어갈라고 헌 것이구만요. 그러니 쌈이 안 일어날 수가 있겄소?”
(213)
본국에서 3.1 만세가 일어나고 그 불길이 서간도로 옮겨붙자 북간도의 여러 단체들은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그 단체들은 대종교의 중광단, 기독교계의 간민회, 공자를 모시는 공교도, 성리교 단체 등이었다. 그들은 시위가 벌어진 그날 저녁 연길현 국자가에서 통일조직으로 조선독립기성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4월에 접어들어 명칭을 대한국민회로 바꾸면서 조직을 개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간부직을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중광단에서는 그 사태를 묵과하지 않았다. 외래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인 대종교들로서는 기독교인들의 그런 독주를 용납할 수 없었고, 또 그동안 많은 학교를 세우고 무오독립선언을 추진하는 등 북간도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왔던 중광단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광단은 5월에 대한국민회를 탈퇴하여 대한정의단을 결성한 것이다.
(219)
11월의 만주는 한겨울이었다. 북풍은 칼날이었고, 하늘도 땅도 다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엮어내는 소문이나 소식들은 전혀 얼어붙을 줄을 모르고 싱싱하게 살아움직이고 있었다. 서간도의 군정부가 명칭을 바꾸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새로 붙인 이르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라고 했다. 그 까닭인즉 상해임시정부에서 여운형을 파견하여 군정부도 상해임시정부에 통합해 줄 것을 요청했고, 군정부의 총재 이상룡은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정부를 가져서야 되겠느냐고 간부들을 설득하여 <군정부>라는 명칭을 양보한 것이라 했다. 그것은 곧 상해임시정부를 유일 정부로 인정함과 아울러 그 위상을 높여주는 조처였던 것이다.
(249)
“자아, 들어보시오. 신채호 선생은 성균관 학사가 되실 정도로 철저한 유학자셨오. 헌데 열강의 세력들이 우리나라에 뻗치면서 국운이 쇠퇴해가자 그분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소.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유학으로 안된다는 걸 깨달으신 것이오. 그래 구분은 애국계몽운동에 가담하면서 신문에 논설을 쓰는 논객으로 변모한 것이오. 그리고 을사조약으로 일본에 나라를 뺏길 것이 확실해지자 백성들을 일깨우고 힘을 주기 위해 을지문덕이며 이충무공의 전기를 짓기도 했오. 그러다가 왜놈들의 마수를 피해 독립운동을 펼치려고 만주로 망명했소. 만주에서 그분은 대종교도가 되셨소. 대종됴는 조국의 독립 실현을 목표로 삼는 단군신앙이었기 때문이오. 그리고 상해임정의 설립을 놓고 보황주의냐 공화주의냐로 국체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을 때 공화주의를 가장 열렬하게 주장한 사람이 누군지 알지요? 바로 신채호 선생이시오. 보황주의자들은 수만 많았지 논쟁에서 신채호 선생을 이길 수 없으니까 어찌했소? 젊은이들을 시켜 감금까지 시켜가며 국체를 보황주의로 결정하려고 했소. 그러나 신채호 선생은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소. 신채호 선생 같은 분이 아니었더라면 임정은 국체를 공화주의로 내세우기가 어려웠을 것이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채호 선생은 나라의 독립을 절대적인 목표로 세워놓고 일거일동을 그 수단으로 총동원하시는 거요. 이동휘 선생도 신채호 선생과 마찬가지라 생각하오.”
(250)
“그러니까 그 문제도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게 없소. 아까 말한 것과 똑같이 이해하면 되는 거요. 상해임정이야말로 최대 목표가 뭐겠소? 대한민국의 독립 아니겠소? 그 목표를 성취시키기 위해서 상해임정은 국체를 공화주의로 내세운 속에 복벽주의자 공화주의자 공산주의자 들이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오. 그 연합은 아주 중요한 문제고, 소중한 결실인 것이오. 그런데 그렇게 주의 주장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정부를 이룬 것은, 내가 알기로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소. 임정 요인들은 독립을 달성시켜야 하는 우리의 특수 상황을 이해해서 서로가 양보하고 인내해 가며 세계에서 유일한 성격의 정부를 탄생시킨 것이오.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내자니 오랜 논쟁을 거친 것은 당연한 일이오. 그런데 총독부의 왜놈들은 그 건설적인 논쟁을 조선놈들의 고질적인 파당싸움이니, 지방색을 드러낸 파벌싸움이니 했다는 것이오. 그건 임정이 설립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던 왜놈들이 고의적이고 악질적으로 임정을 모함하고 헐뜯으려고 지껄여대는 소리요. 그리고 왜놈들한테는 군국주의 하나밖에 없으니까 못하는 야만인들이오. 다시 말해 임정의 연합은 독립운동 방책의 시범이고 모범을 보인 것이라는 점을 여러분들은 잘 이해해야 할 것이오. 다들 그렇게 이해가 됩니까?”
(286)
그 노랫소리는 금방 독립군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많은 목소리들이 그 노랫소리에 합해졌다.
기다리던 독립전쟁 돌아왔다네
노랫소리는 모든 독립군들의 마음을 끌어잡으며 뒤흔들고 있었다. 노래는 마침내 합창이 되었다.
이때를 기다리고 십년 동안데
갈았던 날랜 칼을 시험할 날이
나아가세 대한민국 독립군사야
자유독립 광복함이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 깃발 날리는 곳에
적의 군대 낙엽같이 쓰러지리라
탄환이 빗발같이 퍼붓더라도
창과 칼이 네 앞을 가로막아도
대한의 용장한 독립군사야
나아가고 나아가고 다시 나아가라
최후의 네 핏방울 떨어지는 날
최후의 네 살점이 떨어지는 날
네 그리던 조상나라 다시 살리라
네 그리던 자유꽃이 다시 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