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났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상처를 딛고 다시 삶을 시작하려는 자리에 나도 서고 싶었다. 영화 속의 대사를 빌려 말한다면, 지나간 과거는 되돌릴 수 없지만 미래는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다. 토드 필드 감독의 [리틀 칠드런]은, 이안 감독의 [아이스 스톰] 이후 도덕적으로 붕괴되는 미국 중산층의 황폐한 내면을 그린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가령 [리틀 칠드런]은 [아메리칸 뷰티]가 감각적으로 훑고 지나간 자리의 패인 발자국에 고이는 빗물같은 것이다. 저 낮은 곳에서 초라하게 버려져 있지만 훨씬 더 깊게 우리의 가슴 속을 두드리고, 오랫동안 영혼의 파장을 불러 일으킨다.
톰 페로타의 원작소설을 읽고, 영국의 한 가정이 비극적으로 파멸되어가는 과정을 힘 있게 보여준 [인 더 베드룸](2001년)의 토드 필드 감독이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각본은 원작자인 톰 페로타와 토드 필드 감독이 공동으로 집필했다. 따라서 인물들의 내면적 흔들림이 섬세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극적 내러티브의 굴곡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서사를 흔들림없이 풀어나가면서도 각각의 캐릭터의 감정선을 이렇게 선명하게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연출의 완벽한 작품 이해와 소재 장악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골든글로브나 아카데미의 감독상 각색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에 노미네이트만 되는 이유는, 이 작품의 지적인 깊이를 대중적 시선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 도시 교외의 무료한 한낮.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집 밖으로 나온 주부들은 놀이터에 앉아 잡담을 나눈다. 사라(케이트 윈슬렛 분)는 부유한 집안의 회사 중역인 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고 있다. 주중의 한낮 놀이터는 아이들과 주부들 차지다. 그런데 아이를 무등 태운 완소남이 등장한다. 주부들과 그의 전화번호를 따오는 데 5달러 내기를 하게 되는 사라는 신변잡담이나 하는 동네 아줌마들을 놀래주기 위해 처음 만난 완소남 브래드(패트릭 윌슨 분)와 포옹하고 키스까지 한다. 브래드는 변호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지만 공부보다는 미식 축구와 스케이트 보드 등 운동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리틀 칠드런]은 각각 가정이 있는 사라와 브래드가 서로에게 빠져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불충분하다. 이 작품이 흔한 불륜 로맨스 영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각각 서로의 배우자에게서 받은 상처로 힘들어하던 두 사람은 그들의 남편과 부인이 직장에 가 있는 낮 시간동안 놀이터와 수영장 등에서 만나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다. 토드 필드 감독은 격정적인 전나의 섹스씬까지 보여주면서 그들의 욕망이 점점 대담하게 분출되고 있음을 표현한다. 사랑에 빠지는 남녀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그들도 각각의 배우자나 아이들로부터 방해 받지 않고 완벽하게 서로에게 집중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다. 각각 가정을 버리고 도피할 것인가?
사라와 브래드의 욕망이 영화의 중심축이지만, [리틀 칠드런]은 서사의 다양한 갈래가 기둥을 중심으로 황홀하게 퍼지면서 주제를 풍성하게 하고 있다. 완벽한 미모와 몸매에 다큐멘타리 감독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남편이 사법시험 합격하는 것에 강하게 집착하며 남편이 취미생활을 위해 구입하는 책까지 과다지출이라고 체크하는 브래드의 부인 캐시(제니퍼 코넬리 분), 그런가 하면 물려 받은 유산도 많고 성공적인 직장생활까지 하고 있는 사라의 남편은 인터넷 사이트를 전전하며 성적 환상을 키워가다가 다른 여자의 팬티를 얼굴에 뒤집어 쓰고 자위를 한다. 감독은 사라와 브래드의 일탈이, 단순히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처 받은 내면을 치유하고 소외받은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러나 사라나 브래드 주변에 배치된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없었다면 [리틀 칠드런]은 조금 심심해졌을 것이다. 쇼핑몰에서 장난감 총을 갖고 놀던 아이를 오인하여 사살한 전직경찰관 래리는 브래드의 미식 축구팀 동료로 등장해서 사회로부터 받는 강박증세에 시달린다. 또 아동 성학대 혐의로 수감생활을 한 후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로니는 소집단으로부터 받는 정신적 육체적 학대에 시달린다. [리틀 칠드런]에는 자신의 병적인 욕망을 합리화하고 이기적인 삶을 위해 타인을 억누르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놀랍도록 선명하게 살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숨겨진 혹은 잊고 있었던 어느 순간들을 스크린을 통해 다시 마주친 것같은 섬뜩함에 사로잡힌다.
[리틀 칠드런]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전편에 보이지 않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아 성추행범 로니의 과거나 아니면 사라나 브래드의 곁에 항상 등장하는 어린 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결말에 이르면 그것이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어머니 앞에서 모든 아이들은 불완전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신 앞에서 모두 불완전하다. 꼭 신이 아니라고 해도 늘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오점 투성이의 삶을 사는 우리들은 거대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늘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보하받기 원하는 아이들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