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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교육 허브 전쟁, 한국은 지금
중앙일보ㅣ2014.03.12
먹을 것인가 … 먹힐 것인가
아시아는 지금 전쟁 중입니다. 중·일 등과 얽히고 설킨 역사관(歷史觀) 다툼이나 영토 분쟁 얘기가 아닙니다. 바로 교육 허브 쟁탈전 얘기입니다. 교육 선진국으로 잘 알려진 싱가포르·홍콩은 물론 말레이시아까지 본격적으로 가세한 형국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교육 차별화 논란에 발이 묶여 8년 전의 기초적인 논의 수준에서 별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경쟁국들은 저만치 앞서 가는데, 우리만 이렇게 뒷짐 지고 있어도 되는 걸까요. 아니, 그보다 한국의 교육 수요자들의 요구를 이렇게 모른척해도 되는 건가요.
지난달 20일 영국 유명 사립학교의 분교인 엡솜 컬리지 말레이시아(이하 엡솜) 초청으로 쿠알라룸푸르에 갔다. 이 학교는 오는 9월 개교를 앞두고 한국뿐 아니라 싱가포르·필리핀·인도네시아·태국 등 아시아 8개국 기자 50여 명을 초청했다. 20만2342㎡(6만1208평)의 대규모 캠퍼스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공사 먼지가 풀풀 날려 마스크 없이는 숨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조지 마틴 교장은 사과의 말 대신 “하루라도 빨리 아시아에 우리 학교를 소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안에서가 아니라 아시아 각국 학교와 경쟁하겠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교육 분야에 관해서 싱가포르나 홍콩보다 국내에 훨씬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미 10여 년 전부터 아시아 교육 허브 구상을 만들어 차근차근 현실로 옮기고 있다. 교육시장 개방과 관련 규제 개혁 면에서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이다. 교육 서비스 경쟁에서 뒤처진 한국은 과연 열세를 뒤집을 수 있을까.
#강남 한복판의 한 공립중학교가 올해 배정받은 신입생 수는 원래 180명이 넘었지만 실제 입학생은 160여 명에 불과했다. 20여 명이 서초구 등 미인가 국제학교를 비롯해 다양한 국내 국제학교나 조기유학을 선택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자녀를 미인가 학교로 보낸 한 학부모는 “해외 거주 기간 조건을 충족할 수 없어 외국인학교에 보낼 수는 없고, 그렇다고 ‘기러기’ 가족으로 살기도 싫어 미인가 국제학교에 아이를 보냈다”며 “미인가라 찜찜하긴 하지만 원하는 영어교육을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지금으로선 이것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순전히 외국인학교 입학 자격을 얻기 위해 유학을 다녀오는 경우도 있다. 올 3월부터 아이 둘을 모두 청라달튼외국인학교에 보낸 남모(51)씨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아내와 아이들을 뉴질랜드에 보내고 기러기 생활을 했다. 남씨는 “영어를 배우는 등 유학 본연의 목적도 아주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는 외국인학교 입학 자격요건을 맞추기 위해서였다”며 “정부의 외국인학교 입학조건이 너무 까다롭다”고 말했다. 그는 “수요가 있고 이를 국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데도 왜 아직 이런 규제가 남아있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한국에는 아직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말레이시아는 한국만큼 교육열이 높은 나라다. 명문 국립대 진학을 위해 사교육 3~4개 받는 건 기본이고, 영어교육을 제대로 받기 위해 국제학교(※말레이시아는 국제학교·외국인학교 구분이 없음)를 선호하는 것도 한국과 비슷하다. 말레이시아 역시 한동안 한국과 마찬가지로 외국 시민권자나 해외에서 3년 이상 체류한 사람에게만 국제학교 입학 자격을 줬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는 2006년 자국을 아시아 교육 허브로 만들겠다는 구상의 하나로 이같은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당시 히샤무딘 후세인 교육부 장관은 “말레이시아에 많은 국제학교를 유치해 외국인들이 말레이시아에서 공부하게 만들겠다”며 국제학교에 대한 각종 규제를 철폐했다. 첫 단계로 정원 40%까지 내국인 입학을 허용했고, 2012년엔 아예 내국인 입학 제한을 없앴다. 국내 교육수요를 기반으로 국제학교를 많이 만들어 인프라를 갖춘 후 아시아 각국 학생을 끌어들이겠다는 전략이다. 2006년 32개였던 국제학교는 현재 70여 개로, 10년 사이에 2배 정도 늘었다. 외국에서 오는 초중고 유학생수도 2005년 8000여 명에서 2012년 1만5600명으로 두배 정도 증가 했다. 2012년 국내 외국인학교에 재학 중인 외국인 학생이 8000여 명인 것과 대조되는 수치다. 전략이 제대로 들어맞은 셈이다. 류승완 말레이시아국립대 교수는 “조기 유학 대신 국제학교를 보내는 말레이시아 사람이 많다”며 “늘어난 국제학교는 말레이시아의 유학수지를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유학생을 끌어들이는 역할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난 7~8년 새 말레이시아를 찾는 한국 유학생도 크게 늘었다”고 덧붙였다.
#이미 교육 선진국으로 자리잡은 싱가포르·홍콩은 말레이시아보다 한발 더 앞서나간다. 두곳 모두 글로벌 금융도시라 원래 연령대와 상관없이 국제학교마다 각 나라에서 몰려온 학생들로 늘 넘쳐났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시아 교육시장을 잡기 위해 더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예컨대 싱가포르는 이미 1998년에 ‘산업 21’이라는 이름으로 21세기 교육 전략을 수립했다. 2008년까지 10개 해외 명문대 유치를 목표로 하는 WCUP(World Class University Program) 계획이 대표적이다. 2002년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2015년까지 유학생 15만명을 유치하겠다는 글로벌 스쿨 하우스 전략까지 도입했다. 이처럼 교육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 아시아 각국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해외 유학생을 끌어들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해외 명문학교 유치를 막는 규제나 전체 시장을 키울 수 있는 내국인 교육수요를 억누르는 정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노력은 국내 유학시장까지 흔들어놓았다. 동남아를 찾는 조기 유학생이 크게 는 것이다. 2002년 308명이던 초중고 유학생은 2010년 4178명으로, 8년 사이에 13배 늘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필리핀 유학이 많은 편이지만 다른 나라 유학도 늘었다”고 입을 모은다. 여기엔 1997년 외환위기가 한몫 했다는 분석도 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유학원을 운영하는 김세수 원장은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렸던 외환위기 당시 원화 통화가치가 뚝 떨어지자 미국·영국 등으로 자녀를 유학 보냈던 사람들이 홍콩·싱가포르·말레이시아로 눈을 돌렸다”며 “사회가 안정돼 있는 데다 유학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게 경쟁력으로 통했다”고 설명했다.
#다시 한국. 말레이시아는 자국의 영어교육 수요를 다 흡수해 교육시장 파이를 키운 후 이를 경쟁력 삼아 유학생을 유치하려고 노력 중이고, 싱가포르 등은 잘 갖춰진 교육 인프라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유학생을 끌어들이려고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국내는 이런 각국의 흐름과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유학 수요를 국내로 돌리는 동시에 한국을 동북아 교육 허브로 만들겠다는 정부의 야심찬 구상의 일환으로 2011년부터 제주영어교육도시 안에 국제학교인 NLCS제주(노스런던컬리지잇스쿨제주)와 KIS제주(한국국제학교제주), BHA(브랭섬홀아시아)가 잇따라 설립되기는 했다. 제주뿐 아니라 이보다 한해 앞선 2010년 외국기업 유치 차원에서 문을 연 송도 채드윅 국제학교까지 더해져 유학 수요를 일부 대체하는 효과를 봤다. 2006년 2만9511명으로 정점을 찍었던 조기 유학생은 국제중과 국제학교 설립 등으로 2011년에는 1만6515명으로 줄었다. 두 자녀를 각각 제주에 있는 BHA와 KIS에 보내는 송모(41)씨는 “영어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유학보낼 생각을 하던 차에 제주에 국제학교가 생겨 보냈다”며 “아이 혼자 해외 보딩스쿨(기숙학교)에 보내기도, 그렇다고 기러기를 하기도 마음에 걸렸는데 너무 다행”이라고 말했다. 송씨 뿐 아니라 많은 학부모가 국제학교를 보내려는 가장 큰 이유는 영어 교육이다.
하지만 “국내의 영어교육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고 교육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한국에서 애 키우는 사람 대부분이 영어 하나는 반드시 제대로 가르치겠다고 한다”며 “교육열 높은 대치동 초등학교에서는 해외 거주 경험이 없는 학생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교육부에서 정식으로 인가한 학교가 아니라 한국교육 시스템의 관리감독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미인가 국제학교에 사람이 몰리는 것만 봐도 이런 욕구를 잘 알 수 있다. 강동구에 있는 한 캐나다계 외국어 교육기관은 2012년 80여 명으로 개교한 후 1년 만에 정원이 220명으로 늘었다. 지난해 강남의 한 미인가 국제학교 교장을 맡았던 정남환 호서대 교수는 “미인가 국제학교는 현재 전국에 100여 개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선진 교육 시스템으로 자녀를 교육하고 싶은 학부모가 그만큼 많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수요와 공급 불균형이 만들어 낸 기형적인 학교라는 거다. 정 교수는 또 “정부가 현실을 외면하는 동안 피해를 보는 건 학부모와 학생”이라며 “외국인학교나 국제학교에 대한 학부모들의 선호도 조사를 정확히 해 도심형 국제학교를 만들거나 미인가 국제학교에 대한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주장이 나오는 건 정부가 외국인학교에 대한 입학 자격을 철저히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외국인학교는 외국인이거나 해외 시민권자가 아니라면 대략 정원의 30%안에서만 해외 체류 경험 3년 이상인 학생만 들어갈 수 있다. 경제자유구역 안에 설립할 수 있는 국제학교인 송도 채드윅은 정원의 40%까지만 해외 체류 경험과 무관하게 순수 내국인의 입학이 허용된다. 그러나 외국인학교든 국제학교든 실제로 이 비율을 맞추는 학교는 드물다. 내국인 비율이 정원보다 더 많다. 내국인 수요는 넘치고, 외국인 수요는 부족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내국인 입학 제한이 아예 없는 제주영어교육도시 안에 있는 국제학교는 대부분 한국인이다. NLCS 9학년 자녀를 둔 신모(42)씨는 “아무리 내국인 입학 제한이 없다지만 한 학년에 외국인이 2~3명밖에 없어서 국제학교라기 보다는 영어몰입수업을 하는 한국학교 같다”고 불만스러워했다. NLCS제주와 BHA 두 곳의 현재 정원 1261명 중 외국인은 112명으로, 10%가 채 안 된다. 그마저도 외국인 교사 자녀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부 정책은 물론 사회 분위기는 이런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해외 국제학교 유치에 대해 교육 차별 논란이나 귀족학교라는 프레임을 들이대 무조건 반감을 나타내는 정서는 여전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지난해 말 정부가 발표한 ‘제4차 투자활성화대책’에 강력히 반발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정책은 국제학교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교조 제주 지부는 “헌법에 명시한 교육기회의 균등을 포기하고 귀족학교만 키우겠다는 논리”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말 민주당 김상희 의원이 대표 발의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은 내국인의 외국인학교 입학자격을 오히려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내국인 자격 요건을 현재 외국 거주기한 3년에서 5년으로 늘리고, 비율을 정원 대비 30%에서 20%로 더 낮추자는 거다. 서울국제학교(SIS) 차성철 부장은 “외국은 물론 제주국제학교나 채드윅도 내국인 비율을 늘려 경쟁력을 키우는 추세인데, 왜 한국은 외국인학교에 점점 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좀 더 많은 학생이 원하는 교육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이 마련돼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박광민 청라달튼외국인학교 교장도 “내국인 입학 제한을 없애면 지금보다 더 많은 학생에게 기회가 돌아간다”며 “학부모 사이에서 학교별 선호도 차이가 더 뚜렷해져 학교가 경쟁력을 키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이렇게 국내 수요만 흡수를 못하는 게 아니다. 아시아 교육 허브를 자처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정남환 호서대 교수는 “국내 수요가 부족해 국제학교 전체 시장이 크지 못하고 있다”며 “우선 전체 시장을 키워서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흡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국인 유학생 유치도 원활하지 않다. 각 국제학교는 외국 학생을 유치해 글로벌한 교육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NLCS제주는 지금까지 10여 차례 해외 설명회를 했고, 지난해부터는 중국 현지 유학원과 연계해 중국 유학생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해 학생 모집 때 중국인 학생 지원자가 40명 넘게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입학한 학생은 4명에 불과했다. 학교 측은 “수업을 따라갈 수 있는 영어 수준에 미달한 게 주요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규제가 없더라도 국내 교육환경 자체가 아시아 교육 허브로 커나가기엔 무리가 아니냐”며 비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싱가포르·홍콩 등 영어가 공용어인 국가보다 아무래도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데다 동남아만큼 교육비용이 싼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로 유학 오는 대학생 수만 봐도 알 수 있다. 실제로 국내를 찾는 외국인 유학생은 교육 허브로 육성하겠다는 정부의 바람과는 반대로 점점 주는 추세다. 국내에 들어오는 유학생 수는 2011년 8만9537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2012년 8만6878명, 2013년 8만5923명으로 매년 감소하고 있다. 교육부 국제교육협력담당관 남궁현 사무관은 “정부가 각 대학의 유학생 관리와 유치 역량을 평가해 비자발급 등에 제한을 둔 게 유학생 수를 줄이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한국이 교육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뭐가 필요할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한국만의 강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권대봉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중국인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홍콩이나 검증된 교육 시스템을 갖춘 미국 대신에 한국을 찾아야 하는 ‘우리만의 강점’을 만들어야 한다”며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있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한중일 공동프로그램이나 IT, 한류 등과 연계한 기업 인턴십 프로그램 마련이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기반서비스산업유치과 김종환 과장은 “앞으로 송도글로벌캠퍼스와 인천경제자유구역에 있는 기업을 연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교육 허브가 중요한 이유는 다른 분야로 부가가치를 창출 할 수 있어서다. 손봉수 JDC처장은 “교육 허브를 구축하면 외국인 유학생은 물론 외국인 투자자도 늘어나 경제성장률은 저절로 올라갈 것”이라며 글로벌 경쟁 시대에 교육 시장 개방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글=안혜리 기자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쿠알라룸푸르·서울=전민희 기자
※자료: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International Institute for Management Development), 한국교육과정평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