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이의 엽서편지
사노라면(3) -쇼난편지 234호(2024년 4월)
|
"주의(主義)가 아니라 인격이며, 교리가 아니라 생명이다. 기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주의는 아무래도 의문으로 속박한다. 우리는 직접 살아계신 그리스도에게 가서 그 생명을 받아 참 자유에 들어가야 한다.(聖書之硏究 80호, 1906년 10월)"
이글은 지난 3월 24일, 우치무라 간조 사후 매년 1회씩 열고 있는 강연회에서 이야기한 ‘주 안에 살며’라는 제목으로 이마이관에서 이야기하며 인용한 글이다. 구로사키(黑崎幸吉) 선생이 설립한 노보리토(登戶) 학료에서 만난 선배가 보여주었던 잡지 ‘방주(方舟)’ 창간호에 적혀있었던 잊을 수 없는 글이다.
또 그 노보리토 학료를 졸업할 때 니시무라 히데오(西村秀夫) 선생이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의 ‘졸업생을 보내다’라는 글을 인용하였다. 그 글 중에 있었던 직장에서의 양심을 명심하고, 신문배달 소년을 위한 정당한 대우를 위해 투쟁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그리스도인으로의 양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지난 일을 돌아보며 통감하는 건, 인생이란 만남이라는 것이다. 매일의 만남을 일시적이거나 순간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인생에서 모든 만남은 연장선 위에 있으며, 서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노보리토 학료에 들어간 것을 기점으로 인생이 변하였다. 그 이전의 청춘으로서의 고민과 싸움이 지금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으로 인도하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한 한 줄의 가는 선으로 연결된 비연속의 연속이라 하겠다. 이를 생각하면 감사가 솟아오른다.
나는 이제 90을 넘은 노인으로서 단순하게 살고 있다 그렇지만 세상은 변함없이 준엄하다. 언제나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세상에 휘둘려 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엉뚱한 길로 걷고 있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무서운 위험이 끊임없이 나를 휘감을 때도 있었다.
그 위험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의 인생관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벌거숭이다. 그래서 참 인생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양심에 반하여 사는 것은 옳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