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필요할 때(시123:1-4)-2020.3.15
성경에서 가장 광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 중에 하나가 긍휼입니다. 긍휼은 아주 다양하고 폭넓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사랑과 은혜, 용서와 자비, 친절과 관용, 동정과 연민 등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지금 지구촌이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는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를 전염병 경보 단계중 최고 위험 등급인 팬데믹으로 선언했습니다. 팬데믹은 두 개 이상의 대륙에서 발생한 전염병에 내리는 최고 수준의 위험단계입니다. 지구촌에 하나님의 긍휼이 부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치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가정이나 민족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어떤 조건이나 대가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과연 긍휼은 어떤 것일까요? 탈무드에 보면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웃집에 가서 낫을 빌려오라고 시킵니다. 그런데 아들이 그 집에서 거절당합니다. 그런데 며칠 뒤 그 집에서 낫을 빌려달라고 찾아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낫을 빌려주라 합니다. 아들은 화가 났습니다. ‘아버지, 며칠 전에 그들은 우리에게 낫을 빌려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우리가 낫을 빌려주어야 하나요?’
그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아무 말 하지 말고 기쁘게 빌려드려라,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다고 우리도 빌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수다. 또한 비록 당신은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지만 우리는 큰 맘 먹고 빌려 주겠습니다는 식으로 빌려준다면 그것은 증오란다. 그러나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어도 깨끗이 잊어버리고 빌려준다면 이것이 바로 긍휼이란다’. 그렇습니다. 긍휼은 따지고 계산하지 않습니다. 긍휼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이 땅에 이런 긍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긍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1)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선물입니다(마5:7)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느9:31). 하나님의 긍휼은 영원부터 있었습니다(시25:6). 그리고 당신이 지으신 모든 것 위에 긍휼을 베푸십니다(시145:9). 인간은 물론 공중 나는 새와 이름 모를 들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의 긍휼로 삽니다. 무엇보다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먹고 사는 자들입니다. 성도의 구원도 긍휼의 선물입니다. 디도서3:5절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고 말씀합니다.
긍휼의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설계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2장4-5절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긍휼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심도 긍휼이요, 질병을 치유하심도 긍휼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심도 긍휼입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재능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고통과 고난과 진노를 허락하심도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숨 쉬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결코 중단되거나 마르지 않습니다. 왜냐면 주의 긍휼은 크고(느9:31) 무궁하시기 때문입니다(애3:22). 다만 풍성하신 하나님의 긍휼도 아무 의미 없이 내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느니라’(출33:19).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물론 세상에도 세상적인 긍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긍휼은 조건적이고 제한적이며 가시적입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인격을 손상케 합니다. 세상의 긍휼은 영혼을 만져주지 못합니다. 16세기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1세를 암살하려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여왕의 침실에 예리한 칼을 가지고 침입했습니다. 옷장에 숨어 있던 여인은 미리 수색하던 심복들에게 들켜 끌려 나왔습니다. 그녀는 여왕에게 목숨만 살려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분노한 여왕은 내가 너를 용서하면 너는 나에게 무슨 대가를 주겠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여인은 “여왕폐하, 조건을 다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고 말했습니다. 여왕은 그 말에 도전을 받고 여인을 자기 심복으로 삼았습니다. 여인은 여왕을 위해 죽을 때까지 충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긍휼은 어떤 대가나 조건, 이유를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긍휼은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세상의 긍휼을 찾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분이 공급하시는 긍휼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2) 긍휼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골3:12)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모두가 긍휼의 옷을 입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긍휼의 옷을 입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가 긍휼함을 입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9장13절에서 주님이 긍휼을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죄인을 긍휼히 여기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는 우리 주 예수님의 긍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 없을 만큼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가정도 없고 민족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주의 몸 된 교회는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교회위에 하나님의 긍휼이 덮어져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실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인생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것은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긍휼로 옷 입은 사람들입니다.
먼저, 자신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때로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처지를 동정하며 그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내 개인의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고, 무너진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며, 죄와 더불어 싸우고 승리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긍휼에 민감한 자도 없었습니다. 그는 앉으나 서나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시25:16, 30:10, 51:1, 57:1...). 시편 25편 19절을 보십시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는 범사에 하나님의 긍휼만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상태를 알고 겸손 한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민족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건국이후 가장 큰 위기인지 모릅니다. 솔직히 지금 우리는 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국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국가적인 위기가 재난상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때문에 믿는 자들이 먼저 깨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또한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가정이나 교회, 학교나 직장 등입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긍휼로 덮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가정은 평화가 깨집니다. 교회는 부흥하지 못합니다. 학교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사업이나 직장은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속한 공동체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생깁니다. 다시 말해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긍휼을 구하고, 민족의 긍휼을 구하며, 내가 속한 공동체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부어질 때까지 구하고 기다려야 합니다(유1:21).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긍휼의 옷을 입으라고 권합니다(골3:12). 믿는 성도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긍휼로 옷 입지 않으면 세상에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옷을 입어야 긍휼을 말할 수 있습니다. 긍휼을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습니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수 있고,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알 수 있습니다. 긍휼도 입어 본 사람이 긍휼을 말할 수 있고, 베풀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에 빚진 자입니다.
(3) 긍휼은 즐거움으로 베풀어야 합니다(롬12:8)
긍휼을 입은 자는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즐거움으로 베풀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긍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랑받기 원하고 관심받기 원하며 위로받기 원합니다. 긍휼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사랑이나 관심, 위로는 모두 긍휼의 열매들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기도, 생명을 구원하는 전도, 용서와 사랑, 화해와 나눔, 위로와 격려, 구제 등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긍휼을 베풀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나이팅게일에게 준 훈장 속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긍휼을 행하는 길은 하나뿐이 아니다. 말로도 할 수 있고, 돈으로도 할 수 있으며, 눈물로도 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긍휼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몸으로, 맘으로, 입으로, 눈으로 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먼저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긍휼이 없는 자는 무정한 자요, 매정한 자며, 비정한 자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즉,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도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지 아니하신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에게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마태복음18장2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갚을 길이 없어 고통을 당하다가 주인의 불쌍히 여기심을 입고 탕감을 받았습니다. 주인의 긍휼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랬던 그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붙들어 빚을 독촉하다가 갚지 못하자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 사실을 들은 주인이 그에게 경고하기를,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그리고 그를 옥졸들에게 붙여버렸습니다. 자기는 긍휼을 입었으면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은 매우 악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긍휼에 빚진 자입니다. 이제 우리는 긍휼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주님의 눈에는 모든 인간이 긍휼의 대상입니다. 특별히 그중에서도 힘없고 약한 자가 긍휼의 1순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시고 특별한 애정을 쏟으셨습니다. 각색 병자들을 민망히 여기시고 고쳐주셨습니다. 무너져가는 예루살렘의 도성을 바라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긍휼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긍휼의 마음입니다. 멀리 가서 이방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못할지라도 가까운 이웃에게 먼저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긍휼은 베풀 때에 능력이 됩니다. 베풀되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무감으로 해도 안됩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즐거움이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무한하고 영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분이 공급하시는 긍휼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의 책임이요, 사명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