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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죽음이란 무엇인가
자유는 정녕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이자 선물입니다. 그런데 복되고 은혜로운 자유로 인해 죽음이 왔습니다. 지금도 온 세상에는 죽음이 넘칩니다. 죽음이야말로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최고의 권세요 최후의 권세입니다. 그러면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가리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모든 생명이 죽지만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대면하고, 죽음을 의식하고, 죽음을 물으며 산다는 면에서 인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물론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삽니다. 때로는 죽는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로 사는 일에 전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죽음과 대항하면서 죽음을 향해 살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모든 삶의 행진을 정지시키는 죽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요? 죽음은 생명의 끝일까요? 아니면, 죽음 이후에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삶이 있을까요? 죽음은 존재의 절멸일까요? 아니면, 죽음 이후에도 ‘나’라는 존재가 계속 남아 있을까요? 이것은 생명과 삶을 욕망하는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이고 가장 궁극적인 질문입니다. 그리고 죽음과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묘하게 얽혀 있습니다. 죽음이 없으면 구원 문제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면에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구원을 바라보는 태도와 내용을 결정한다는 면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다는 면에서 죽음은 구원과 묘하게 얽혀 있습니다. 때문에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을 말해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낮선 세계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살고 있지만 생명의 근원 진실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죽음도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만 알 뿐이지 죽음의 근원 진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때가 되면 죽을 뿐이고, 타자의 죽음을 목도할 뿐입니다. 타자의 죽음을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목도할 뿐 자기의 죽음을 경험하지는 못하기에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낮선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까? 대체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1) 죽음은 삶의 끝이다, 죽음 이후의 삶은 없다는 관점
2)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이라는 관점
1)의 관점은 인간을 생물학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유물론적 관점이고, 2)의 관점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것으로 바라보는 이원론적 관점입니다. 이 두 관점은 여러 면에서 정반대입니다.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지요.
우선 1)의 관점을 살펴보겠습니다. 1)의 관점을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예일 대학교에서 17년 동안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강의한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철학자답게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생각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죽음은 단지 삶의 끝일뿐이라는 논리를 펼칩니다. 영생을 꿈꾸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환상에 불과한 것인지를 치밀하게 논증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꿈꾸는 영생을 한 마디로 ‘지루함’의 문제라고 잘라 말합니다(죽음이란 무엇인가. 346쪽). 사람들이 꿈꾸는 온갖 것들-낭만적인 사랑 ‧ 맛있는 음식 ‧ 하프를 켜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 신나는 놀이 ‧ 끝없는 탐구 ‧ 날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기쁨 ‧ 평화 등등-이 영생 속에 다 들어 있다 해도 영생은 결국 너무 길다고 말합니다. 어떤 형태의 삶이라도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 매력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합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삶은 결국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며 결국은 ‘나쁜 것’으로 변하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은 머지않아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은 악몽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고, 영생은 환상적인 인생과는 거리가 먼 끔찍한 삶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끈질기게 주장합니다(340,341,349쪽). 그는 ‘영생은 결코 갈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니’라는 영국의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의 말에 동의하고, ‘노년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고통과 괴로움과 비참함에 종지부를 찍어주는 죽음은 축복’이라는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의 말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면서 ‘영생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고 단언합니다.
좀 길지만 그의 마지막 결론을 인용하겠습니다.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다, 물론 일반적인 기계가 아니라 ‘놀라운’ 기계다. 우리는 사랑하고 꿈꾸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기계다. 계획을 세우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런 기계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기계다. 그리고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죽음은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신비가 아니다. 죽음은 결국 컴퓨터가 고장 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이다. 모든 기계는 언젠가 망가지게 되어 있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아니니 부디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삶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마지막 축복을 누릴 때까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좋은 일이다. 오래 사는 것이 전체적으로 내게 좋은 것인 한 죽음은 나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너무나 일찍 찾아온다. 하지만 영생을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영생은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506쪽).
이것은 셸리 케이건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이 강의가 예일대에서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로 꼽혔다는 것만 봐도 이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흐름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사후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절반이나 됩니다. 앞에서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2005년 한국인의 장례 문화에 대한 갤럽조사’에 의하면 한국사람 중 40.7%는 사후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41.6%는 사후 세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뭐라 말할 수 없다’는 17.7%).
이처럼 사람들은 점차 ‘죽음 이후의 삶은 없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매우 확고합니다. 모든 생명은 본질적으로 순환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태어나서 자라다가 때가 되면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또 죽어야만 다른 생명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산천에 널려 있는 모든 풀과 나무들이 났다가 씨앗을 맺고 죽으면 그 씨앗이 또 다른 생명으로 피어나듯이, 동물들이 태어나서 새끼를 낳고 죽음으로써 새끼들이 살아가듯이, 인간 또한 태어나서 자식을 낳고 죽는 것이 자연스런 생명의 순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소중하고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도 “삶이 좋다면 죽음 역시 좋은 것,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으니까.”라고 했습니다.
예, 일리가 있습니다. 현상적으로만 판단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소중한 것이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다른 생명이 사는 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실의 전부일까요? 죽음이 정말 생명의 절멸일까요? 죽음과 함께 하나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까요?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인간의 생명과 삶은 지나치게 하찮고 허무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구원을 말하는 성경의 이야기가 새빨간 거짓이 되지 않겠습니까? 구원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워지지 않겠습니까? 정말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죽음이란 그저 자연스런 생명의 순환일 뿐이라면 구원이나 영생을 상상하고 꿈꾸는 것이 난센스가 되지 않겠습니까?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 또한 우스워질 것이고요. 죽음 또한 사물화 되는 걸 피하기 어렵겠지요. 죽음의 무게가 사라지고,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이유도 없어질 테고요.
자살 문제도 걸립니다. 죽음을 생명의 자연 현상으로 보게 되면 자살이 왜 비인간적인 죄악인지를 설명할 윤리적 근거가 사라지고, 그렇게 되면 자살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자살을 장려하지야 않겠지만 어쨌든 상황에 따라 자살해도 된다는 논리가 얼마든지 가능해질 것입니다. 실제로 셸리 케이건은 자살에 대해 “우리는 특정한 상황에서 자살을 정당화할 수 있다. … 특정한 상황에서 자살을 합리적인 선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 항상은 아니지만 때로는 도덕적으로 적절한 선택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480, 503쪽). 세상에는 얼마든지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나쁜 삶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처한 상황을 합리적으로 심사숙고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더 낫겠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자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살만이 아닙니다. 살인도 더 쉬워집니다. 사람이 동물을 죽이는데 심각한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것처럼 사람을 죽이는 것도 심각한 죄의식 없이 죽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 마음과 정신의 실재도 막연해집니다. 이들은 모든 의식(마음과 정신)이 뇌에서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꿈꾸고 의욕하는 모든 것이 다 뇌의 작용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주장입니다. 영국의 심리철학자 콜린 맥긴(Colin Mcginn)은 ‘의식이 뇌의 산물’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그것은 결코 풀 수 없는 문제’라고 인정했고, 미국의 심리철학자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 또한 ‘현재의 물질론은 그것이 어떻게 사실일 수 있는지에 대해 어떤 개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이다’라고 결론 내렸습니다(켄 윌버. 통합심리학. 237쪽에서 재인용).
이제부터는 2)의 관점을 살펴보겠습니다. 2)의 관점을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ross) 여사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정신과 의사이면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친구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 또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잠간의 죽음 사이에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인터뷰하면서 죽음이 뭔지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이렇게 평생을 연구하고는 최종적인 결론으로 ‘죽음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죽음의 경험은 출생의 경험과 같다, 즉 죽음은 다른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죽음은 그저 한 집에서 더 아름다운 집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나비가 고치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단지 육체를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사후생. 17-18쪽). 또 죽음은 현재의 삶으로부터 고통과 고뇌가 없는 다른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고, 죽음과 함께 모든 아픔과 부조화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160쪽).
퀴블러 로스 여사처럼 10년 동안 1,300명의 임사체험자들의 사례를 조사하고 분석한 후 [죽음, 그 후]라는 보고서를 쓴 방사성 종양학자 제프리 롱(Jeffrey Long)도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현대과학은 죽음을 존재의 마침표라고 믿도록 강요하지만 그런 믿음이 전 인류에게 자리 잡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말하면서, ‘죽음 이후의 삶은 존재한다’고 단언합니다(죽음, 그 후. 13-14쪽). 이 책에는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놀랍고 기상천외한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저는 본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잘 믿는 편이 아니라서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조심스럽게 읽었는데 솔직히 허무맹랑한 거짓이라고 내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할까봐 거듭거듭 과학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최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을 총동원해 임사체험을 검증하고 분석했다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은 과학자로서의 양식을 신뢰하고 읽었습니다.
임사체험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육체가 죽는 순간 영혼이 육체에서 이탈하여 자기 몸 위에 떠오릅니다. 의학적으로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뇌와 심장의 박동이 멎었고, 심장박동이 멈추면 뇌로 혈액 공급이 안 되고, 뇌로 혈액 공급이 안 되는 상황에서 10-20초만 지나도 뇌파도가 평평해지고, 뇌파도가 평평해진다는 것은 모든 감각과 의식이 없다고 봐야 하는데도 임사체험을 한 자들은 예외 없이 살았을 때보다도 감각과 의식이 더 또렷했습니다. 죽은 자기 시신을 두고 벌어지는 상황을 다 보고 느끼고 의식합니다. 자기를 살리려고 애쓰는 의사들의 모습도 생생하게 보고, 슬퍼하는 가족들의 감정까지도 생생하게 느낍니다. 물론 본인은 조금도 슬퍼하거나 아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깊은 평안을 느낍니다. 그리고는 터널이나 동굴 같은 곳을 통과하게 되는데 터널을 지나면 찬란한 빛을 만나게 되고, 그 순간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사랑에 휩싸입니다. 그러다가 자의나 타의에 의해서 다시 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매우 특이한 사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태어날 때 어머니의 자궁에 심한 출혈이 있어서 시각 장애자가 된 여자 이야기입니다. 이 여자는 태어나서 한 번도 사물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임사체험 중에 처음으로 사물을 보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시 육체로 돌아왔을 때는 본래처럼 볼 수 없었지만 임사체험 중에는 물체는 물론이고 색깔까지도 정확하게 보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임사체험을 하고 나서 고질적인 질병에서 치유되기도 하고, 그 전에는 없던 영적인 능력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삶을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봤습니다. 그 전의 삶이 불행했든 행복했든 관계없이 임사체험을 하고 나서는 삶을 한없이 아름답고 사랑으로 충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가 경험한 것이나 성인이 경험한 것이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동양 사람이 경험한 것이나 서양 사람이 경험한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종교와 문화의 차이도 거의 없었습니다. 전 세계인의 경험이 대부분 동일했습니다.
저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나 제프리 롱이 전하는 사례들을 읽으면서 임사체험을 경험한 자들의 증언이 새빨간 거짓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심리적 쇼크에 의한 것이거나 뇌의 환각이 일으킨 현상에 불과하다고 폄하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귀기울일만한 상당한 진실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습니다.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몸과 마음의 상호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집니다. 몸과 마음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이미 확인된 사실입니다. 마음이 우울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상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임사체험자들은 몸이 없어도 정신과 마음의 지각은 여전하다고 말합니다. 아니, 오히려 더 각성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과 몸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이고, 마음을 허공에 매달아놓는 것이 됩니다.
2) 죽음이 없어집니다. 이들은 몸과 영혼 중에 진정한 실재는 영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몸만 죽지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있으나 없는 것이 됩니다. 아니, 단지 죽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죽음은 구원이 됩니다. 죽음은 환영하고 기뻐해야 하는 일이 됩니다.
3) 하나님의 구원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용서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집니다. 개별 인간의 죽음이 곧 구원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용서가 필요치 않게 됩니다.
지금까지 죽음을 바라보는 두 관점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다, 죽음 이후의 삶은 없다’는 관점과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이다’는 관점을 살펴봤습니다. 두 관점 모두 나름의 일리가 있습니다.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의 일단이 있습니다. 특히 1)의 관점은 요즘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죽음을 자연스런 생명의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두 관점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관점은 공히 죽음의 본질을 외면하게 하고 왜곡시킬 뿐 아니라 죽음 속에 담겨 있는 구원론적 지평을 허물어뜨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완전히 희화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으로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던 말씀(창2:17), 즉 죽음의 근원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암시하는 최초의 그 말씀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성경이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독특합니다.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하면서 죽음을 죄와 연계해 말합니다. 죽음은 죄의 삯이다(롬6:23).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5:12).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1:15).
성경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체결된 계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과실을 맘껏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계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창2:16-17).
그러면 생명과 죽음에 대한 최초의 메시지, 가장 근원적인 진실을 말하고 있는 에덴동산 이야기를 살펴볼까요? 에덴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창2:9).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가 있었다는 것은 생명이 세계의 중심이요 삶의 중심이라는 메시지, 아담이 갖고 있는 생명은 근원 생명이 아니고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가 근원 생명이라는 메시지, 그러니 모든 생명은 생명나무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좀 독특합니다. 이 나무는 단지 나무로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나무에는 ‘이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창2:17)는 하나님의 금령이 붙어 있습니다. 이 금령이 말하는 것은 이겁니다. ‘아담아, 저 생명나무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았지? 네가 지금 갖고 있는 생명은 근원 생명이 아니란다. 저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야 하는 생명이야. 그런데 말이다, 저 생명나무 열매는 아무렇게나 먹는 게 아니란다. 저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려면 내가 말한 금령을 지켜야 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금령을 지켜야 돼. 다시 말하면 나와 함께 해야 돼. 만일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너는 반드시 죽어. 그것이 네가 갖고 있는 생명의 한계야.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않으면 반드시 죽는 생명, 나를 떠나면 반드시 죽는 생명이야. 아니, 나를 떠나는 것 자체가 곧 죽음이란다.’
예, 이것이 생명과 죽음의 근원 진실입니다. 아담의 생명은 근원 생명이 아니라는 것, 근원 생명은 아담 밖에 있다는 것, 생명나무로 표상된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 그 근원 생명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만 누릴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의 생명과 삶이 아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 있는 것이라는 것, 생명과 삶은 객관적인 무엇이 아니고 관계적인 무엇이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좌우한다는 것이 생명과 죽음의 근원 진실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최초의 계약에서 죽음이 언급된 맥락이 무엇이었습니까? 다 아시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맥락에서 죽음이 언급됐습니다. 먹지 말라 한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으니까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을 때 의미하는 죽음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담이 당시에 향유하고 있는 생체활동이 끝난다(육체적 죽음)는 뜻이었을까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절멸한다는 뜻이었을까요? 만일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이 단지 생체활동의 멈춤, 생명의 절멸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을 때 바로 죽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았습니다. 선악과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과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서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로 숨었고, 선악과를 먹게 된 책임을 하와와 뱀에게 떠넘기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가인과 아벨 등 자식까지도 낳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죽음이 생체활동의 멈춤이거나 생명의 절멸이 아니라는 걸 반증합니다.
물론 이렇게 반박할 수는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이 꼭 즉각 죽는다는 뜻이 아니라 늙어서 죽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고 말이죠. 예, 백 번을 양보해서 이 반박을 받아들인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이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켜 ‘죽은 자’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응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8:22). 여기서 앞의 ‘죽은 자들’는 죽은 시신을 가리키지만, 뒤의 ‘죽은 자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도 했는데(요5:25) 여기서도 ‘죽은 자’는 죽은 시신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그(예수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버젓이 살아 있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해 ‘죽었던 너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켜 ‘죽은 자’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죽음이 생명의 절멸(육체적인 죽음)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죽음이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는 뜻이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낼 필요도 없고, 예수님이 세상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을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가만히 놔둬도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죽을 것이고,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를 떠날 것이고,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영혼은 자기 세계로 돌아가 영원히 살 텐데 예수님이 죽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요. 부활도 그렇습니다. 육체로의 부활은 영혼을 다시금 육체의 감옥에 가두는 것밖에 안 되는데 부활시킬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고, 세상 죄를 지게 하셨고,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쓸데없는 일은 하신 걸까요? 아닙니다. 꼭 필요해서 하신 겁니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죽음이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죽음이란 게 과연 무엇일까요? 두 말할 것 없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몸과 정신의 에너지만으로 사는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행위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행위 자체,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 자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 자체가 이미 죽음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이 살아있는 자들을 향해 ‘죽은 자들’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채 사는 자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사는 자들은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5-18). 무슨 말입니까? ‘아담아, 내가 너에게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했지? 그때 말한 죽음이 바로 이런 거란다. 모든 관계가 뒤엉키고 대립하고 반목하고 소외되는 것이지. 너는 앞으로 이런 죽음을 살게 된단다.’는 말입니다.
예,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근원이자 본질입니다. 단지 존재의 소멸이 아니에요. 본래 하나였던 하늘과 땅이 본래의 하나 됨을 잃고 분열(분리)되는 것이 곧 죽임이고, 존재와 존재 사이의 분리 ‧ 단절 ‧ 떠남 ‧ 소외가 곧 죽음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죄를 윤리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율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관계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곧 죄라고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외면하는 것이 죄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몇 가지 말씀도 봅시다.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7:10)는 말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는 말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6)는 말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는 말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는 말씀도 육신의 사망을 뜻하는 단락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망이 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근원 진실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면 생명의 세계가 열린다고 말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닫히면 죽음의 세계가 열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죽음을 관계론적 차원에서, 죄의 삯이라는 차원에서 보지 않고 존재론적 차원에서 봅니다. 존재가 소멸하는 것, 생체활동이 멈추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공부를 할 때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죽음이 왔다고 말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죽음이라고 말하지만 돌아서면 자기도 모르게 생체활동이 멈추는 것,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은연중.
왜 그럴까요? 사람의 뇌가 논리적인 지식이나 믿음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잘 받아들이고, 눈에 보이는 것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예수님이나 바울은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죽은 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자로 보입니다. 우리 눈에는 분명 살아있는 자로 보이기 때문에 예수 믿지 않는 직장 동료나 가족들을 바라보면서 ‘죽은 자’라는 생각을 안 합니다. ‘산 자’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아무리 ‘죽은 자’라고 말해도 우리의 뇌는 ‘산 사람’이라고 이해합니다. 이것이 뇌의 정직함이고 한계입니다. 우리의 뇌는 성경과는 멀고 눈에 보이는 현실과는 가깝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창조질서의 일부분이라고, 생명의 자연스런 순환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다 우리의 뇌 때문입니다. 일단은 누구나 다 죽으니까, 의롭게 산 예수도 죽임을 당했고, 구원받았다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같이 죽고, 위대한 삶을 산 간디도 죽고, 인문 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도 죽으니까,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 다 죽으니까, 이것이 눈에 보이는 현실이니까, ‘아~ 죽음은 창조질서의 일부분이구나! 죽음은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생명의 자연스런 순환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죽음의 껍데기만 보는 것이지 죽음의 속살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육체적인 죽음은 죽음의 전부가 아니거든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육체적인 생체활동의 멈춤보다 훨씬 깊고 근원적이거든요. 칼 바르트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죄가 우리에게 초래한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은 우리가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사실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위험한 것입니다. 죽음이란 마치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처럼 우리의 일생을 뒤덮는, 우리의 모든 움직임을 따라다니는 거대한 부정입니다. 곧 죽음이란 다음과 같은 판결입니다. ‘그대 인간이여, 그대의 생명 혹은 그대가 그대의 생명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그대의 생명은 권리를 상실했고, 바로 그래서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생명은 거부와 버림을 받은 생명이다. 하나님에게, 그대의 이웃에게 그리고 그대 자신에게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생명이다.’ 죽음이란 우리에게 선언된 바로 이와 같은 부정입니다.”(칼 바르트의 신학 묵상. 247쪽).
옳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분리, 존재와 존재 사이의 분리 ‧ 단절 ‧ 떠남 ‧ 소외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죄가 곧 죽음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 죽음이고, 죄의 결과가 죽음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해서 사는 것, 너를 이기기 위해 사는 것, 미움과 원망 가득한 마음으로 사는 것, 남을 해치는 것, 사기 치는 것, 끼리끼리 당을 짓는 것, 비방하고 욕하는 것, 왕따 시키는 것, 해로운 음식을 파는 것, 교만한 것, 자랑하는 것, 남을 없이 여기는 것,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 전쟁하는 것, 수군수군하는 것이 다 죽음이고 죽음을 사는 것입니다. 설령 가족을 먹여 살린다 해도, 돈을 잘 벌어들인다 해도, 사회적인 성공을 한다 해도, 첨단 지식에 밝다 해도 죄 속에서 사는 한 모든 삶은 오직 죽음을 사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죽음은 명사가 아닌 동사입니다. 정지해 있는 명사가 아니라 꿈틀거리는 동사입니다. 죽음은 객관적 실체가 아닙니다. 존재의 소멸이 아닙니다. 생체활동의 멈춤이 아닙니다. 삶의 해체가 아닙니다. 죽음은 삶의 양상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을 억압하고 생명을 거스르는 모든 삶의 양식, 죽음을 부르고 죽음을 낳는 모든 삶의 양태, 하늘은 없이 땅에만 속하여 사는 모든 삶의 양태가 곧 죽음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이 죽음을 살아왔고 지금도 죽음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이 왕 노릇한다고 말했습니다(롬5:14). 옳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막강한 힘이자 권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의 질서를 부패시키는 무서운 독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괴롭히고 더럽히는 것도 바로 이 죽음이란 독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자연의 순리라고요? 죽음이 곧 구원이라고요?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은 죄의 삯입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생명을 거스르는 삶의 체계입니다. 그런데요 놀랍게도 죽음이 죄의 삯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거스르는 삶의 체계이기 때문에, 죽음이 명사가 아닌 동사이기 때문에, 죽음이 존재론적이지 않고 관계론적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답니다. 죽음이 구원의 길이 될 수 있답니다.
첫댓글 성균관대 동양학자 이기동교수가 인문학강의 중에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학니다.
우리는 어르신들이 명을 다했을 때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돌아가셨다는 뜻은 원래 태어난 근원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에게로 갔다는 뜻이랍니다.
동양사상에서도 하늘사상이 오래전부터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구원이란 문제에 있어서도 1세기 예수 당시 팔레스틴지역의 팍스로마나지배체제하의 민중의 삶과 연결해서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