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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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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하회마을
이장희 추천 0 조회 55 14.09.10 17: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하회마을                    河廻마을

 

 

 

 

 

 

 

 

 

 

 

 

동쪽을 편안히 한다는 뜻에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지었다는 도시 이름처럼 안동(安東)은 고요한 운치로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낙동강의 물줄기가 산 사이를 휘감으며 흐르는 안동에는 명당(名堂)이 많다. 그러한 명당마다 어김없이 수백년의 세월을 이겨낸 고택(古宅)과 종택(宗宅), 서원(書院)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안동을 대표하는 마을은 하회마을이다.

 

 

 

 

 

                                         하회마을                    河廻마을

 

 

 

 

 

 

 

 

 

 

경상북도 안동의 하회마을(중요 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류씨(豊山柳氏)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동성(同姓)마을이며, 와가(瓦家 ..기와집), 초가(草家)가 오랜 세월 속에서도 잘 보존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큰 유학자인 ' 겸암 류운용(謙菴 柳雲龍) '과 그의 동생이며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 서애 류성룡(西涯 柳成龍) '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마을의 이름을 하회(河廻)라 한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太極形),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행주형(行舟形)으로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을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 있으며, 수령(樹齡)이 600여 년이나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다른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기와집을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집들이 원형을 이루면서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회마을은 현재에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자연부락이다. 대한제국 말까지 350여 戶가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약 150여 호가 살고 있다고 한다. 마을 내에는 총 127가옥이 있으며, 437개 동(棟)으로 이루어져 있다.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유성룡 등 많은 고관들을 배출한 양반고을로, 임진왜란 당시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 전래의 유습이 잘보존되어 있다.

 

 

 ' 허씨(許氏) 터전에, 안씨(安氏) 문전에, 유씨(柳氏) 배반 '이라는 말대로 최초의 마을 형성은 허씨(許氏)들이 이룩하여, 하회탈 제작자도 '허도령'이었다고 하며, 지금도 허씨들이 벌초를 한다고 한다.  배반(杯盤)이란 말은 잔치파 또는 씨앗의 알눈을 뜻하는 배아(胚芽), 배자(胚子)로도 풀이되고 있다. 허씨네가 마을의 문을 열자 안씨네가 터전을 잡고 유씨네가 들어와 열매를 맺었음을 빗댄것이다. 뒤늦게 이주(移住)하여 영화를 누린 것 같은 유씨 문중은 어떻게 성취해냈을까. 여기에는 풍수지리학의 최종 가르침이라 할 수 있는 적덕지가(積德之家 .. 덕을 쌓는 집안), 필유여경(必有餘慶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의 큰뜻이 담겨져 있다.  

 

 

 

 

 

 

 

 

 

                                            풍산류씨 (豊山柳氏)의 입향(入鄕)

 

 

 

 

풍산류씨(豊山柳氏)는 본래 풍산 산리에 살았으므로, 본향(本鄕)이 풍산(豊山)이지만, 제7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가 화산에 여러 차례(가뭄, 홍수 그리고 평상시에)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을 몸소 관찰한 후에 이곳으로 터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입향(入鄕)에 관하여 ' 나눔 '의 전설이 있는데, 이곳에 터를 결정하고 집을 건축하려 하였으나 기둥이 3번이나 넘어져 크게 낭패를 당하던 중 꿈에 신령이 현몽하기를 여기에 터를 얻으려면 3년 동안 활만인(活萬人)을 하라는 계시를 받고, 큰 고개 밖에다가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음식과 노자 및 짚신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참외를 심어 인근에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수많은 수람들에게 활인(活人)을 하고서야 하회마을에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입향(入鄕) 후 '풍산류씨'들은 계속된 후손들의 중앙관계 진출로 점점 성장하였으며, 입암(立癌) 류중영(柳仲瑛), 귀촌(龜村) 류경심(柳暻深), 겸암(謙菴) 류운용(柳雲龍),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등의 조선 중기에 배출한 명신들로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풍산류씨 가문은 조선시대에만 대과 급제 21명, 무과 급제 5명, 생원 진사 합격 73명을 기록하였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 ... 허씨가 터를 닦고 안씨가 살던 곳에 류씨가 잔치판을 벌리다. 하회(河回)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문구이다. 허씨와 안씨가 먼저 거주하였으나 영광을 보지 못하다가 류씨 가문이 정착한 이후 번성하였다는 의미이다. 풍수적 차원에서 그 연유를 따져 올라가면 그 끝에 연꽃이 있다.

 

하회(河回)는 남, 서, 북쪽의 삼면(三面)이 물로 둘러싸이고, 중심부분이 봉곳하다. 이러한 지세(地勢)를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한다. 연꽃이 물 위에 떠있는 모습이다. 주위의 산들은 꽃잎이 되고 중앙의 솟은 부분이 꽃술이 된다. 지금의 하회마을이 연화부수(蓮花浮水)의 중심이 되는 꽃술이 된다는 얘기이다. 반면 허씨와 안씨의 거주지이었던 곳은 하회마을 동쪽인 화산(花山) 기슭이었다. 그래서 그 위력이 하회에 미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하회는 배가 나아가는 형국이다. 그래서 행주형(行舟形)이 되기도 한다. 행주형 지형에서는 함부로 우물을 파지 않는다. 배에 구멍이 뚫려 가라앉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옛 하회마을 사람들은 식수(食水)도 강물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또 배가 무거워진다고 하여 돌담도 가급적 피하였다. 그래서 흙담이다.

 

하회(河回)의 산과 물은 'S'자로 맞물려 돌아간다. 영락없이 태극(太極)을 닮았다. 이에 하회의 별칭이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이 되는 근거이다. 태극(太極)은 하늘과 땅이 분리되기 이전의 원시(原始)상태이요, 우주만물의 근원이되는 실체가 된다. 류씨(柳씨) 가문의 터는이 태극(太極)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

 

하회의 고택(古宅)들은 특별한 좌향(坐向)이 없다. 집집마다 제각각이다. 이상할 것도 없다. 주택 배치의 기본인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전저후고(前低後高)를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회는 중앙이 도톰한 삿갓의 형상이다. 그 중심점이 삼신당(參神堂)이다. 이곳이 하회에서 가장 기(氣)가 가장 많이 응집된 곳이다. 이곳에서 각 지맥(地脈)을 따라 기(氣)가 흘러간다. 하회마을의 기(氣) 공급처인 셈이다. 하회의 모든 집들은 이 삼신당에서 퍼져 나온 지맥을 따라 건립되었다. 높은 삼신당을 등으로 하여 둘러싸는 형태이기 때문에 낮은 강물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자연스레 배산임수와 전저후고(前低後高)를 만족시킨다. 이것이 집집마다 좌향(坐向)이 다른 연유이다. 예컨데 양진당(養眞堂)은 남향이고, 충효당(忠孝堂)은 서향, 북촌댁은 동향이다.  

 

 

 

 

 

                                           하회마을, 풍수지리적 지형

 

 

 

 

 

하회(河回)의 북쪽 벼랑이 부용대(芙蓉帶)이다. 이 부용대에 오르면 물 속에 핀 연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가 있다. 부용(芙蓉)은 연꽃이다. 그러고 보면 부용대는 연꽃을 보는 언덕이 되는 셈이다. 주산(主山)은 화산(花山)이요, 부용대 아래의 낙동강은 화천(花川)이다. 그만큼 하회는 연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짓다가 허물어지고, 또 지으면 또 허물어지고 ... 지나가는 길손들에 짚신에 먹을 것에 재워주기를 삼년(三年), 그런 연후에 얻었다고 전해지는 길지(吉地)가 바로 하회(하回)마을이다. 적선(積善)의 미학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다.

 

 

 

 

 

 

 

이곳 하회마을의 지형을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낙동강 줄기가 이 마을을 싸고 돌면서 'S'자형을 이루고 있는 형국을 말한다. 강 건너 남족에는 영양군 일월산(日月山)의 지맥인 남산(南山)이 있고, 마을 뒤편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花山)이 마을 중심부까지 완만하게 뻗어 충효당(忠孝堂)의 뒤뜰에서 멈추고 있다. 강의 북쪽으로는 부용대(芙蓉臺)가 병풍 같이 둘러 앉아, 산천지형 또한 ' 태극형 연화부수 (太極形 蓮花浮水) '형국을 이루고 있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誌)에서 '  바닷가에 사는 것은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은 시냇가에 사는 것(溪居. 계거)만 못하다. 대체로 시냇가의 삶은 반드시 큰고개에서 멀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평시이건, 난시(亂時)이건 오래 살 수 있다. 그러한 계거처(溪居처)로는 영남의 도산(陶山)과 하회(河廻)가 으뜸이다.

 

 

 

또 하회는 삼남(三南)의  4대 길지(吉地)의 하나로 양동, 닭실, 천전과 함께 복거지(卜居地)로 가장 으뜸이며 풍수지리설에 연화부수(蓮花浮水)라는 명당터라고 하였다. 또 향언(鄕言)에 의하면 ' 하회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 '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허씨(許氏)가 터를 잡았고, 안씨(安氏)들이 살다가, 류씨(柳氏)가 문호를 열고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곳 '풍산류씨'들은 고려 말 전서 류종혜 (典書 柳從惠)의 적선지보(積善之報)로 여기에 이사와서 명당형국을 잘 비보(裨補)하였으므로 복거지(卜居地)가 되었다고 한다.  

 

 

 

 

                                  산태극수태극                     山太極水太極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과 북애(北崖)를 이루고, 영양군 일월산(日月山)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南山)과 부용대(芙蓉臺)를 이루어 서로 만나는 곳을 낙동강이 'S'자형으로 감싸 돌아가므로, 하회마을을 ' 산태극, 물태극 (山太極,水太極 .. 산과 물이 태극 모양)) ' 또는 ' 연화부수형 (蓮花浮水形 .. 물위에 떠있는 연꽃 모양) '이라고 부르고 있다.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하회마을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형상이 태극(太極) 모양이다. 화천(花川)이 부용대를 지나 마을을 한바퀴 돌아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둥근 원형을 이루고, 산과 들이 서로 경쟁하는 모습이 '산태극 수태극 (山太極 水太極)'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을이 물 위에 떠있다고 하여 ' 연화부수형 (蓮花浮水形 .. 물 위에 떠있는 연꽃) '이나 ' 행주형 (行舟形 .. 떠나가는 배) '이라고 하기도 한다. 연꽃과 배를 떠올리게 되는것은 모두 화천(花川)과 연관이 되어 보이고 있다. 하회마을 사람들은 ' 옛날 다리미 '모양이라고 한다. 부용대에서 하회마을을 내려다 보면 마을 입구가 다리미 손잡이로, 마을 전체 모습은 숯을 넣는 다리미 몸통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풍수리에 따른 마을의 주산(主山)을 화산(花山)이라고 부르고,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화천(花川)이라고 함은 연화(蓮花)에서 비롯한 이름이라고 한다. 화천의 흐름에 따라 남북 방향의 큰길이 나 있는데, 이를 경계로 하여 위쪽이 북천(北村), 아래쪽이 남촌(南村)이다. 북촌의 양진당(養眞堂)과 북촌댁(北村宅), 남촌의 충효당과 남촌댁(南村宅)은 역사와 규모면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고 잇는 전형적인 양반 가옥이다. 이 큰 길을 중심으로 마을의 중심부에는 류씨(柳氏)들이, 변두리에는 각성(各姓)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이 생활방식에 따라 두 개의 다른 문화가 병존한다. 

 

 

 

 

 

                                             화천                   花川

 

 

 

 

 

 

 

 

 

 

 

 

낙동강의 상류인 화천(花川)은 폭 200~300m로, 동(東)에서 서(西)로 흘러와서 다시 동(東)으로 역류하다가 서(西)쪽으로 구비쳐 흘러가게 된다. 화천이 마을을 돌아 나간다고 하여 ' 물돌이 마을 '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화천의 이러한 모습을 일러 ' 동유수, 서유수 (東流水, 西流水) '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풍수지리에 태극형, 연화부수형, 다리미형이라고 불리게 된 것도 화천과 연관이 깊다. 또한 배(舟)나 다리미 모양을 하고 있는 하회마을에 우물을 파면 배가 침몰한다거나, 불이 꺼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온다.  

 

 

 

 

 

 

 

 

 

 

 

 

칠선대(七仙臺)는 하회마을 남쪽, 남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너럭바위이다. 이곳에 서면 하회마을의 전경을 잘 살필 수 있다고 한다. 화천의 구비치는 모습을 잘 볼 수 잇는 곳이기도 하다. 칠선대에서 하회마을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지금은 들로 변해버린 '허씨'와 '안씨'의 옛 터전을 볼 수 있고,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뒤늦게 하회마을에 들어와 자리잡은 '류씨'들이 강가에 터전을 잡은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하회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큰고개를 거치는 육로와 뱃길을 이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옛날 이웃마을을 가기 위해서 화천의 얕은 곳을 건너다니거나, 나무로 다리를 놓아 건너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화천은 하회마을 사람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농사를 짓기 위한 물을 공급 받는 곳이기도 하고, 뱃길을 통해 하회마을과 다른 마을을 이어주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화산                      花山

 

 

 

하회마을의 동쪽에는 일월산 줄기인 화산(花山)이 자리하고 있다. 화산은 태백산맥의 지맥이며, 해발 271m이다. 화산의 줄기는 마을 안까지 뻗어 있다. 화산 자락에 서낭당이 있는데, 이곳에서 보면 북쪽으로 부용대와 서쪽으로 원지산, 남쪽으로 남산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산 아래로는 논과 들이 들어오고, 그 너머에 집들이 보인다. 마을을 휘감아 돌아가는 화천을 보면 절로 '물돌이 마을'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의 하회마을이 형성되기 전, 화산 아래에는 '김해허씨 (金海許氏)'와 '광주안씨 (廣州安氏)'가 자리잡고 있었다. 허씨들이 터를 잡기 위해 선택한 화산 남쪽은 전통적인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山을 뒤로 하고, 江을 앞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광주안씨'들은 허씨들의 터전을 피해 화산 북쪽에 자리하게 된다. 

 

 

제일 늦게 하회마을에 자리잡게 된 '풍산류씨'들은 화산(花山) 기슭을 피해 화산 북쪽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러하다 보니 허씨와 안씨들이 떠난 자리가 논과 밭이 되어, 산 - 들 - 마을 - 강의 순서로 마을이 형성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풍수지리상 좋은 입지조건의 땅이 되기 위해서는 영험한 산에서 출발하여 그 기운이 수백 킬로를 달려 온 산줄기와 연결되어야 하고, 그 산에서 출발한 물줄기와 닿아야 한다. 이 산과 산맥의 물줄기가 서로 통일된 하나의 체계를 이룰 때 명당(名堂)으로 불린다고 한다.

 

 

하회마을의 산과 물, 마을 그리고 들판은 모두 하나의 체계로 경관을 이루고,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의 상징적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이 경관은 마을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이기도 하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회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화산을 삶의 터전이었고, 조상들의 묘로 연결되며, 서낭당을 지어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비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풍수에서 경관은 산의 기운을 어떻게 이어받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주로 주산(主山)을 등지고 앞에 펼쳐진 넓은 뜰과 농사를 짓기 위한 물의 공급 등 풍수사상은 인간들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과도 직결된다고 하겠다. 하회마을을 둘러싼 山들은 바람을 막아주는 등 마을을 지켜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회마을 사람들은 주어진 자연조건에 때로는 순응(順應)하고 때로는 극복(克服)하면서, 하회마을만의 독특한 문화를 지켜나가게 된 것이다.        

 

 

 

 

 

                                                        하회마을의 문화 유산

 

 

 

 

 

 

이곳 하회마을에는 많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우선 국보 제132호 지정된 류성룡의 '징비록'과 하회탈 및 병산탈이 국보 제121호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서애 류성룡 종가(宗家)의 문적 11종 22점이 보물 제160호, 기타 서애 류성용 유물 3종 27점이 보물 제460호지정되어 있다. 양진당(養眞堂)이 보물 제306호, 충효당(忠孝堂)이 보물 제414호지정되어 있다. 

 

 

  

 

 

 

 

 

 

기타 중요민속자료로는 화경당(和敬堂), 원지정사, 빈연정사, 작천고택, 옥연정사, 겸암정사, 남촌, 주일재, 하동교택이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하회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었으며, 하회별신굿놀이가 중요문화재 제69호이다.  

 

  

 

 

 

 

                                    하회 16경                      河廻 16景

 

 

 

 

 

하회마을에는 ' 하회 16경 (河廻 16景) '이 있다. 서애 류성룡의 손자인 졸재 류원지(졸재 류원지)의 문집에는 하회마을 16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소개한 글이 있다.

 

 

 

1景이 ' 입암청창(立巖淸漲) '이다. 입암은 서애 류성룡의 부친인 '류중여'의 아호이자, 그의 형인 겸암 류운용(謙巖 柳雲龍)을 칭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두 형제의 우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용대 기슭 겸암정사 앞, 물 속에 나란히 잠겨 있는 두 바위이다. 실제로 보는 아름다움보다는 입암(立巖)이 갖고 있는 의미가 더욱 아름답다고 할 것이다.

 

 

2景은 ' 마암노도(馬巖怒濤) '이다. 말처럼 생긴 바위에 성난 강물이 지나가는 모습이다. 부용대 앞 말바위, 갈모바위에 부딪히는 낙동강 물결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3景은 ' 화수용월(花峀湧月) '이다. 화산(花山)에 솟아오르는 달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4景은 마늘봉에 구름이 걸려있는 모습으로 하회마을 남쪽의 강 건너편에 마늘처럼 뾰족한 봉우리를 말한다. 산이 좋아 늘 구름이나 안개가 서려있어 신령스러운 곳이다. 

 

 

5景은 눈 내린 만송정 솔숲의 고즈넉한 모습을 말하는데 ' 송림제설(松林齊雪) '이며, 6景은 마을 북쪽 반나무 골짜기로 피어 오르는 밥 짓는 연기를 연상하게 하는 ' 율원취연(栗園炊煙) '이다. 7景은 ' 수봉상풍(秀峰霜楓) '으로 첫 서리 내린 남산의 단풍을 말하고, 8景은 ' 도잔행인(道棧行人) '으로 상봉정 비탈길을 지나가는 나그네의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말한다.

 

 

 

남쪽 나루의 무지개 섶다리를 ' 남포홍교(南浦虹橋) ', 원지봉에 내리는 비를 ' 원봉영우(遠峰靈雨) ', 물가 반석 위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을 ' 반기수조(盤磯垂釣) '의 모습으로 표현하여 8景의 뒤를 이어 기록해 두고 있다. 12景은 ' 적벽호가(赤壁浩歌) '로 부용대에서 부르는 노래 소리요, 13景은 ' 강촌어화(江村漁火) '로 강촌의 고기잡이 불빛을 이르고 있다. 낙동강 나루에 매어있는 나룻배의 모습을 ' 도두횡주(渡頭橫舟) '라고 하여 14景에 붙이고, 겸암정사 서쪽 얕은 수리미산에 내리는 노을을 표현한 ' 수림낙하(水林落霞) '와 낙동강 백사장 모래톱에 내려 앉은 기러기의 모습을 ' 평사낙안(平沙落雁) '으로 묘사하여 15경 그리고 16경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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